나성군 전경(全卿) 단비명 [派祖 羅城君 全公 諱 卿 之壇碑銘]
공(公)의 휘(諱)는 경(卿)이시고 호는 국파(菊坡)이시며 정선인(旌善人)이다. 도시조의 휘(諱)는 섭(聶)이시며 백제건국(百濟建國) 당시(當時) 온조왕(溫祚王)을 보좌(補佐)하시어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군(封君)되시었다.
8세이신 중시조(中始祖)의 휘(諱)는 선(愃)이시고 신라 성덕왕대에 정선군(旌善君)을 수봉(受封)하시므로 정선(旌善)을 관향(貫鄕)으로 하시었다.
16세조의 휘(諱)는 이갑(以甲) 의갑(義甲) 두 형제와 종제(從弟) 락(樂)이시며 이갑(以甲)은 고려태사(高麗太師) 벽상공신(壁上功臣) 충렬공(忠烈公)이시며 제(弟) 의갑(義甲)은 시중개국공신(侍中開國功臣) 충강공(忠康公)이시다. 락(樂)은 좌복야개국공신 충달공(忠達公)이시다.
공(公)의 고(考)는 휘(諱) 학수(學洙)라 하시며 개성부소윤(開城府少尹)을 지내시고 공(公)은 아드님 한 분을 두시니 휘(諱)는 보초(補初)이시며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오르시다.
공(公)께서는 학문(學問)에 통달(通達)하시고 무예(武藝)에도 능하셨으니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하신 천재(天才)이시다.
충숙왕조에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시어 벼슬길에 올라 무관직(武官職)에 재임(在任) 시인 충숙왕 복위 8년에 조적 일파(一派)가 역모(逆謀)를 시도(試圖)하였으나, 공(公)께서는 충혜왕을 옹립(擁立)하시고 반란(叛亂)을 진압(鎭壓)하는데 해평군(海平君) 윤석(尹碩)등과 함께 크게 공(功)을 세우시니 충혜왕 복위 3년에 2등 공신(功臣)으로 책봉(冊封)되시었다.
그 후 충정왕조에 공(公)께서는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로 재임 시 고시관(考試官)으로 과거(科擧)를 관장(管掌)하시고 이구(李玖) 등 선발(選拔)하였다는 고려사 권지 28 선거 2에 기록되어 있다.
공(公)께서는 국가 중요 관직(國家重要官職)을 두루 지내시고 그 후 벼슬이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로 오르셨으며 공(公)께서는 노령(老齡)으로 치사(致仕)하시게 되니 왕께서는 식읍지(食邑地)를 나주(羅州)로 정하시고 나성군(羅城君)으로 봉군(封君)하시니 그로부터 후손(後孫)들이 나주(羅州)로 위관(爲貫)하였다.
나성군(羅城君) 후손(後孫)들은 대대로 명신거유(名臣巨儒)가 배출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창성(昌盛)하게 된 것은 실로 공(公)의 적음유경(積蔭有慶)에서 유래(由來)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공(公)의 묘소(墓所)는 평안도 평원군 석다산 남록 간좌(平安道 平原郡 石多山 南麓 艮坐)에 안치(安置)했다고 전승(傳承)되고 있으나 남북이 분단되어 찾을 길이 없으니 후손된 도리(道理)로서 어찌 개탄(慨嘆)치 않으리오.
후손들의 거주분포는 개성(開城)을 중심으로 북한 각지 및 기호지방(畿湖地方)에 산재(散在)하고 있으니 남북이 분단된 지 어언 40개성상(星霜)이 지나도록 봉사(奉祀) 불능(不能)함을 너무나 한(恨)스럽게 여겨왔습니다.
남한에서 생(生)을 향유(享有)하고 있는 후손(後孫)들의 중의(衆意)에 따라 단소(壇所)를 설단(設壇)키로 결의(決議)함에 성력(誠力)을 다하여 기금(基金)을 거출(據出)하였습니다.
후손(後孫) 21세손 옥근(玉根)이 기증(寄贈)한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신팔리 수원 산 남록 손향(京畿道 抱川郡 內村面 新八里 水源 山 南麓 巽向)에 상지(相地)하여 축단(築壇)하고 단소(壇所)를 건립(建立)하였습니다.
그 사적(史蹟)을 기록(記錄)하고 이에 세향(歲享)을 거행(擧行)하며 충효전가(忠孝傳家)의 미풍양속(美風良俗)을 계승(繼承)하여 상봉조선(上奉祖先) 하육후생(下育後生)의 정신으로 타의 귀감(龜鑑)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공(公)께서 남기신 빛나는 업적(業績)을 회고(回顧)하여 천추만대(千秋萬代)에 기리 보존하고 후손(後孫)에게 전승(傳承)코자 정성(精誠)을 다하여 단비(壇碑)를 세우나이다.
환성군 2001년 (歡城君 2001년)
서기 1984년 06월 일
성균관 전학 강정희 찬(成均館 典學 姜正熙 撰)
기암 양두환 서(奇巖 梁斗煥 書)
나성군파 후손 일동 근수(羅城君派 後孫 一同 謹竪)
◎ 전경(全卿)의 고려사 기록 ①
충혜왕 후3년(1342) 임오년
• 6월
초하루 경자일. 왕이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역적 조적(曹頔)이 반란을 일으켜 과인이 상국의 수도로 가게 되었을 때 온 나라가 근심에 싸여 뒤숭숭했으며 간신의 잔당들은 허튼 말을 날조해 끊임없이 환란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시종하는 신하들이 끝까지 절의를 지켜 과인을 옆에서 보좌했으니 그 큰 공로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이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석(尹碩), 정승(政丞) 채하중(蔡河中),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김석견(金石堅), 정승(政丞) 이능간(李凌幹), 이문(理問) 홍빈(洪彬),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영돈(金永旽), 서하군(西河君) 임자송(任子松), 찬성사(贊成事) 김인연(金仁沇), 언양군(彦陽君) 김륜(金倫), 김해군(金海君) 이제현(李齊賢),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 첨의평리(僉議評理) 한종유(韓宗愈), 삼사우사(三司右使) 김영후(金永煦), 삼사좌사(三司左使) 이몽가(李蒙哥),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운(李雲), 개성윤(開城尹) 윤신계(尹莘係), 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엄(李儼), 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윤환(尹桓)·박청(朴靑),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강윤충(康允忠)·안천길(安千吉)·노영서(盧英瑞), 원외랑(員外郞) 한의신(韓義臣), 군부판서(軍簿判書) 배전(裴佺)·최유(崔濡), 지신사(知申事) 황석기(黃石奇),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손수경(孫守卿),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윤원우(尹元佑), 대호군(大護軍) 김첨수(金添壽)·김선장(金善莊), 호군(護軍) 남궁신(南宮信)·임성(林成) 등을 일등공신으로 임명해 공신각에 초상을 걸게 한다. 또한 그 부모와 처는 세 단계를 뛰어 넘어 작위를 주며 아들 하나에게 7품 관작을 줄 것이며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사위에게 대신 8품 관작을 주고 아울러 토지 1백 결과 노비 열 명을 지급할 것이다.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학성군(鶴城君) 박인수(朴仁壽), 전 군부판서(軍簿判書) 안자유(安子由), 상호군(上護軍) 김경(金鏡)·전윤장(全允臧), 전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손원(孫遠), 대호군(大護軍) 이광원(李光元)·김장(金莊), 호군(護軍) 진교화(陳敎化)·승신(承信)·이헌(李軒)·손습(孫襲), 중랑장(中郞將) 왕석(王碩)·이충(李沖)·이원용(李元用)·이광계(李光桂),
낭장(郞將) 전경(全卿)·홍매노(洪買奴) 등을 이등공신으로 임명한다.
그 부모와 처는 세 단계를 뛰어넘어 작위를 주며 아들 하나에게 8품의 관작을 주고 아들이 없으면 대신 사위에게 9품 관작을 주고, 토지 70결과 노비 다섯 명을 지급할 것이다.”
갑인일. 왕이 신효사(神孝寺)에 행차했다. 등촉배(燈燭輩)들이 향도(香徒)를 결성해 이 절에서 축수재(祝壽齋)를 열었는데 왕이 이 자리를 주관한 것이다.
◎ 전경(全卿)의 고려사 기록 ②
승보시[ 升補試 ]
승보시(升補試)는 생원시(生員試)를 말한다.
의종 원년(1106).
승보시를 처음으로 설치하고 시(詩)·부(賦)와 경의(經義)로 시험을 치러 임유공(任裕公) 등 55명을 선발하였다.
충정왕 2년(1350) 5월.
성균좨주(成均祭酒) 전경(全卿)이 이구(李玖) 등을 선발했다.
공민왕 2년(1353) 6월.
좨주(祭酒) 이정(李挺)이 양이시(楊以時) 등 50명을 선발했다.
10년 10월.
대사성(大司成) 허전(許佺)이 8명을 선발했다.
11년 11월.
대사성 김안리(金安利)가 정천익(鄭天益) 등 5명을 선발했다.
17년 8월.
전백영(全伯英) 등 37명을 선발했다.
23년 4월. 이취(李就) 등 1백 명을 선발하였다.
◎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
① 조선시대 성균관(成均館)에서 교회(敎誨)하는 일을 맡아보던 종삼품(從三品) 관직으로 1401년(태종 1)에 사성(司成: 從三品)으로 고쳤다.
② 조선시대 성균관의 정삼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으로 정원은 1원이다. 위로 지사(知事: 正二品)가 1원으로 대제학(大提學)이 정례대로 겸직하며, 동지사(同知事: 從二品) 2원, 대사성(大司成: 正三品) 1원이 있고, 아래로 사성(司成: 從三品) 1원, 사예(司藝: 正四品) 2원, 사업(司業: 正四品) 1원, 직강(直講: 正五品) 4원, 전적(典籍: 正六品) 13원, 박사(博士: 正七品), 학정(學正: 正八品), 학록(學錄: 正九品), 학유(學諭: 從九品) 각 3원이 있다. 대사성 이하 성균관에 소속된 관원을 총칭하여 관직(館職)이라고 하였다.
1658년(효종 9)에 설치하였으며,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뛰어난 사람으로 제수(除授)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네이버 지식백과] 성균관좨주 [成均館祭酒]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
고려 후기 도첨의사사(都僉議司事)의 종2품 관직.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지도첨의(知都僉議)라고도 함. 정원은 1인.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구성원으로 국가의 기무(機務)를 의결하였음. 충렬왕 원년(1275) 고려 전기의 중서문하성을 첨의부로 개편하면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바꾸었다가 충렬왕 19년(1293) 첨의부를 도첨의사사로 개칭하고 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로 바꾸었음. 충선왕이 즉위하여 관제를 개편하면서 폐지하였으나 충렬왕이 복위하면서 지도첨의사로 복구하였음. 공민왕 5년(1356)에 반원개혁의 일환으로 관제를 고치면서 다시 설치하였으나, 동왕 11년(1362)에 중서문하성을 도첨의부로 고치고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로 바꾸었으며, 동왕 18년(1369)에는 문하부로 개편하고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고쳐 고려 말까지 이르렀음.
[네이버 지식백과] 지도첨의사 [知都僉議事]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윤석[尹碩]
활동사항
충숙왕이 즉위하자 호군에 제수되고 왕의 폐행(嬖幸 : 총애를 받은 신하)이 되었으며, 여러 번 관직을 옮겨 마침내 대언에 올랐다.
본래 시기심이 많고 아첨을 잘한 그는 상왕(충선왕)의 미움을 사서 김해부(金海府)로 쫓겨났다. 그 뒤 조적(曺頔)일파에 붙어 국가에 해를 끼쳤다. 1320년(충숙왕 7) 총부전서(摠部典書)로서 천추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 밀직부사로 임명되었다.
1321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면서 왕이 원나라에 갈 때 유청신(柳淸臣) 등과 시종하였다. 상왕의 옛 신하인 권한공(權漢功) 등을 치죄하기도 하였다. 1324년 평리(評理)에 오르고, 1326년 원나라가 고려를 없애고 성(省)으로 만들려는 책동을 저지한 공로로 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이듬해 왕의 선위(禪位) 기도를 제지한 뒤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다시 1등 공신에 올랐다. 1328년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 한편 왕이 병이 들어 정사(政事)에 전념할 수 없게 되자 대언 봉천우(奉天祐) 등과 전주권(銓注權 : 인사권)을 관장하다가 폐인(嬖人)들과 틈이 생겨 하옥되기도 하였다.
1331년(충혜왕 1) 중찬(中贊)으로 개배(改拜)되고 벽상삼한십자공신(壁上三韓十字功臣) 호를 받았다. 1332년(충숙왕 복위 1) 전왕(충혜왕)의 총신으로 몰려 투옥되었다가 원나라의 명으로 석방되었다. 1340년(충혜왕 복위 1) 좌정승으로 승직되고, 1342년조적의 난을 진압한 뒤 다시 1등 공신이 되었다.
충목왕 초에 원나라의 폐신 고용보(高龍普)에게 부탁해 진국상장군고려도원수(鎭國上將軍高麗都元帥)를 받았다. 하지만 어사대의 탄핵으로 해평에 유배되어 죽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석 [尹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나주전씨(羅州全氏)
[본 관 명] 나주(羅州)
[성 씨 명] 전씨(全氏)
[본관소재지] 전라남도(全羅南道) 나주시(羅州市)
[본관이칭] 나성전씨(羅城全氏)
[시 조 명] 전경(全卿)
◎ 나성전씨(羅城全氏) 과거급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