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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정오 - 서우 전병훈과 만나는 철학 그리고 문명의 시간
전병훈, 망각된 조선의 디아스포라 철학자
우리 철학사에 전병훈(全秉薰, 1857~1927)은 낯선 이름이다. 캉유웨이, 옌푸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칭송했으며, 단재 신채호가 “한번 세계를 통일해 만세토록 불변하는 대총통이었다.”라고 극찬하기도 했던 철학자 전병훈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는 어떻게 망각되어 왔는가.
전병훈은 동아시아 근대의 여명기에 한국과 중국을 무대로 활동했던 국제적인 철학자였다. 호는 ‘온 누리의 새벽빛’을 뜻하는 서우(曙宇)이다. 그는 1857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1907년 50세에 중국으로 망명한 뒤 71세가 되던 1927년 중국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도교의 내단학뿐만 아니라 유교와 불교, 서양철학까지 망라하는 철학의 융합을 시도한 그는 정신철학통편(1920) 등을 편찬하며 ‘정신철학’이라 부른 자신의 철학을 체계화했다. 북경에서 ‘정신철학사’라는 학관을 세워 많은 중국인 제자들을 이끌던 중국 지성계의 정신적 지도자이기도 했다.
전병훈의 책은 구미 29개 나라의 150개 대학과 미국, 프랑스, 스위스의 세 총통에게 배포되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인 제자들이 명⋅청대의 저명한 학자들과 함께, 전병훈을 28성철(聖哲)의 한 사람으로 추존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혹자가 칭송하기를, “조선이 개벽한 이후 4천여 년 동안 이처럼 중국인의 극단적인 찬양을 받은 이가 없었다.”고 했다. 쇠망한 나라의 일개 망명객이 자존심 강한 중국 지성계에서 이런 호응을 얻은 것은 사실 경이로운 일이었다. 당시 국제적인 지식지형도에서 조선은 변방 중의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런 나라의 지식인이 동서고금의 철학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고, 자신의 독창적인 철학체계를 건립했다. 더구나 중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당대의 지식인들을 추종자로 이끌었다는 자체가 이례적이다. 그런데 그처럼 높게 평가됐던 인물과 철학이, 20세기의 격동 속에서 또한 그토록 빨리 망각됐다는 것이 어쩌면 더욱 놀라운 일이다.
“21세기 이후에야 학계에서 비로소 전병훈을 다시 조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가계와 저술에 관해 기초적인 자료의 발굴과 고증도 근자에 이뤄졌다. 그런데 한국 더 나아가 동아시아 현대사상사에서 전병훈의 중요성에 비춰 볼 때, 사실 이것은 아주 기이한 무관심이자 뒤늦은 재조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언컨대, 전병훈은 서양철학의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전통사상을 개혁해 재구성하고자 했으며, 동서고금의 철학사상을 회통시켜 하나의 세계철학으로 발전시키려는 원대한 포부를 품은 세계철학자였고, 내단학의 견지에서 독자적 사상체계를 제시한 도교사상가였다.” (1084쪽)
우주의 그늘에서 문명진화의 화살을 쏘다
“전병훈이 다시 우주의 그늘에 섰다. 그의 호 서우(曙宇)처럼, 진화하는 인류 정신의 빛을 담아 ‘우주의 새벽을 여는’ 화살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을 지나 백 년을 날아온 살촉이 지금 우리, 바로 당신 눈앞에서 하늘의 장막을 가른다.” (51쪽)
전병훈은 서양철학을 가장 먼저 접한 한국인의 한 사람이었다. 20세기 초 동서양 문물을 비교하고 양자의 결합 혹은 어느 한 편의 우위를 주장하는 격렬하고도 다채로운 논의가 펼쳐졌다. 서우가 특별했던 이유는, 도교 내단학의 견지에서 동서고금의 철학사상을 두로 회통해서 조직화된 독창적 철학체계를 건립했다는 데 있다. 한국 근대 지성사는 물론 동시대 중국과 일본에서도, 한 몸에 그처럼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는 전통과 근대를 넘나들고, 동서양을 통섭하고, 도교와 유교를 망라하고, 조선과 중화를 아우르고, 민족과 인류를 함께 고민하고, 학문과 교육을 병행하며, 이론과 수련을 겸비했던 철학자이자 도인이며 교육자였다. 또한 근대 이후를 준비한 미래사상가이기도 했다. 전병훈은 근대 동아시아 사상사는 물론 한국철학사 전체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국제적이고도 독창적인 철가사상가였다.
“‘새벽빛’을 자처했던 서우의 활시위는 이미 오래전에 그의 활을 떠났다. 그의 예견처럼 ‘정신철학’이 인류문명의 미래를 밝힐지의 여부는 아직 알지 못한다. 하지만 “물질을 숭상”하는 낡은 사고방식이 아무리 극성을 부릴지라도, 미래가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정신의 자각은 언제나 재생하는 불멸의 열쇠다.” (1218쪽)
“우리는 여기서 동서고금을 통관해 하나의 철학체계를 이루기를 꿈꿨던 한 철학적 모험가의 원융한 기풍과 만나게 된다. 그는 한국지성사에서 특출하게 뛰어났던 ‘지적 재창조’ 유형의 사상가였다. … 우리는 한동안 한국철학사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화쟁(和諍)과 통관(統貫)의 철학적 모험이, 근대세계에서 동서양 철학의 ‘조제(調劑)’로 부활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1089~1090)
우주의 정오, 불확실성 혹은 전환의 시대
저자 김성환(군산대 철학과)은 1992년 중국 북경대학 대학원에 처음 입학한 한국 유학생의 일원이었다. 1993년 늦가을 북경대학도서관 귀중본 자료실에서 1920년에 발간된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 초간본을 발견한다. 처음, 이 책의 존재를 믿기 어려웠다. 중국 근대사상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명사들의 찬탄이 책의 앞머리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심지어 옌푸는 전병훈을 스승으로 칭송하며 제자를 자청했다. 동아시아 근대의 한 지평에 숨어 있는 이런 장면을 믿을 수 없었다. 솔직히, 과대망상증에 빠진 어떤 “사기꾼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그만큼 경이롭고, 또 상상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놀라움은 더해갔다. 책의 서문을 펼치자 바로 「단군 천부경 주해」가 눈에 들어왔다. 책이 발간된 1920년 이전에 천부경이 이미 세상에 알려졌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전병훈은 책 본문에서 조선의 단군과 중국의 황제를 동등한 성현으로 높였다. 단군으로부터 계승된 한국의 선맥(仙脈)을 거열하고, 중국에 비견하는 독자적이고 훌륭한 학문전통이 한국에 있음을 강조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이런 견해를 당시 중국의 장상급 고위관료나 저명한 지식인들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단군과 황제를 동방 겸성(兼聖)의 시조로 함께 추존했다. 단군과 황제의 로맨틱한 동거였고, 동아시아에서 서로 다른 민족주의가 공존했던 시대의 황홀한 풍경이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굉장한 것은 전병훈의 철학체계 그 자체였다.
전병훈은 우주의 시간대가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는 ‘우주의 정오(午會正中)’에 접어들었으며, 인류가 새로운 차원의 문명에 진입하는 변곡점이 가까워지고 있다고 통찰했다. ‘우주의 정오’는 우주의 시간에 다시 인간의 역사를 중첩하고 부각한다. 다시 말해, 우주적 자연법의 섭리를 따라 인류문명이 극도로 융성할 장래의 어떤 시간대를 겨냥한다. 그 때 인간의 정신⋅심리⋅도덕⋅정치가 두루 각성하는 변곡점을 지나 높은 단계로 진화한다.
“서우의 길은 마침내 ‘오회정중(午會正中)’으로 뻗어 있다. 본문에서는 이를 대개 ‘우주의 정오’로 순치했다. 한데 글의 문맥을 떠나 ‘우주의 정오’라고 하면, 얼핏 어떤 신비적 천문학이나 자연과학적 시간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서우가 말하는 ‘오회정중’은 비록 우주적 시간대로 계산하지만 도리어 문명의 시간으로 더욱 중요하다. 즉 그것은 모월모일모시 같은 물리적 시간의 형식을 넘어 머잖아 도래할 문명의 일대 전환기로 한층 의미가 심장하다. 책의 표제인 ‘우주의 정오’는 곧 그런 문맥이다. 또한 부제 ‘서우 전병훈과 만나는 철학 그리고 문명의 시간’은 이 책이 단순한 전병훈 연구서를 넘어, 도래할 시대의 철학에 관해 필자가 서우와 나눈 해석학적 대화의 기록임을 부기(附記)한 것이다.” (6~7쪽)
정신철학통편은 도교 내단학을 토대로, 동서양 철학의 통합을 시도했다. 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유교와 불교 전통을 재해석한 경우는 꽤 있었다. 그러나 도교 내단학의 견지에서 새로운 철학체계를 확립한 경우는 전병훈이 거의 독보적이다. 구한말의 조선인으로, 전병훈처럼 도교에 정통한 사상가가 출현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었다. 더구나 그에 대한 중국 지식계의 호응이 경이로웠다. ‘우주의 새벽빛’을 뜻하는 그의 호 서우(曙宇)만큼이나, 전병훈은 20세기 초 동아시아 근대의 여명기를 극적이고도 찬란하게 빛내고 있었다.
“서우의 철학은 이제야 막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정신철학’의 연대기는 자신의 전개과정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그 문명진화의 흐름 안에서, 서우는 과연 어떤 철학자일까? 그것을 얘기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 서우가 앙망하던 ‘오회정중’의 한여름이 무르익은 어느 날 황혼녘에, 정신의 영명(靈明)을 회복한 선량한 후손들이 비로소 그의 철학에 합당한 문명사적 헌사를 헌정할 것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야 날아오른다.’ 아침햇살이 눈부신 부엉이는 아직 지혜의 여신 어깨에서 졸고 있다.” (1085쪽)
오는 2020년, 전병훈이 북경에서 정신철학통편을 편찬한 지 백 년이 된다. 그동안 도서관 낡은 서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후학의 호명을 기다리던 서우를 이제야 불러낸다. 그리고 이 책은 근대 한국의 잊혔던 위대한 사상가 서우 전병훈의 ‘정신철학’을 세상에 오롯이 드러낸다.
이 책은 20여 년의 집요한 연구와 답사 끝에, 유려하고 웅숭깊은 필체로 직조한 철학자 김성환의 역작이다. 그리고 전병훈의 철학적 모험과 정신을 추적하고 조우하여 대화를 나눈 치열한 사유의 기록이다. 이제 우리는 전병훈이 응시한 ‘우주의 정오’를 맞이한다.
[출처] 우주의 정오 - 서우 전병훈과 만나는 철학 그리고 문명의 시간|작성자 sonamoopub1
https://blog.naver.com/sonamoopub1/220778361355
◎ 나주전씨 시조 전경(全卿)의 고려사 기록 ①
충혜왕 후3년(1342) 임오년
• 6월
초하루 경자일. 왕이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역적 조적(曹頔)이 반란을 일으켜 과인이 상국의 수도로 가게 되었을 때 온 나라가 근심에 싸여 뒤숭숭했으며 간신의 잔당들은 허튼 말을 날조해 끊임없이 환란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시종하는 신하들이 끝까지 절의를 지켜 과인을 옆에서 보좌했으니 그 큰 공로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이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석(尹碩), 정승(政丞) 채하중(蔡河中),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김석견(金石堅), 정승(政丞) 이능간(李凌幹), 이문(理問) 홍빈(洪彬),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영돈(金永旽), 서하군(西河君) 임자송(任子松), 찬성사(贊成事) 김인연(金仁沇), 언양군(彦陽君) 김륜(金倫), 김해군(金海君) 이제현(李齊賢),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 첨의평리(僉議評理) 한종유(韓宗愈), 삼사우사(三司右使) 김영후(金永煦), 삼사좌사(三司左使) 이몽가(李蒙哥),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이운(李雲), 개성윤(開城尹) 윤신계(尹莘係), 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엄(李儼), 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윤환(尹桓)·박청(朴靑), 전 밀직부사(密直副使) 강윤충(康允忠)·안천길(安千吉)·노영서(盧英瑞), 원외랑(員外郞) 한의신(韓義臣), 군부판서(軍簿判書) 배전(裴佺)·최유(崔濡), 지신사(知申事) 황석기(黃石奇),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손수경(孫守卿),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윤원우(尹元佑), 대호군(大護軍) 김첨수(金添壽)·김선장(金善莊), 호군(護軍) 남궁신(南宮信)·임성(林成) 등을 일등공신으로 임명해 공신각에 초상을 걸게 한다. 또한 그 부모와 처는 세 단계를 뛰어 넘어 작위를 주며 아들 하나에게 7품 관작을 줄 것이며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사위에게 대신 8품 관작을 주고 아울러 토지 1백 결과 노비 열 명을 지급할 것이다.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학성군(鶴城君) 박인수(朴仁壽), 전 군부판서(軍簿判書) 안자유(安子由), 상호군(上護軍) 김경(金鏡)·전윤장(全允臧), 전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손원(孫遠), 대호군(大護軍) 이광원(李光元)·김장(金莊), 호군(護軍) 진교화(陳敎化)·승신(承信)·이헌(李軒)·손습(孫襲), 중랑장(中郞將) 왕석(王碩)·이충(李沖)·이원용(李元用)·이광계(李光桂),
낭장(郞將) 전경(全卿)·홍매노(洪買奴) 등을 이등공신으로 임명한다.
그 부모와 처는 세 단계를 뛰어넘어 작위를 주며 아들 하나에게 8품의 관작을 주고 아들이 없으면 대신 사위에게 9품 관작을 주고, 토지 70결과 노비 다섯 명을 지급할 것이다.”
갑인일. 왕이 신효사(神孝寺)에 행차했다. 등촉배(燈燭輩)들이 향도(香徒)를 결성해 이 절에서 축수재(祝壽齋)를 열었는데 왕이 이 자리를 주관한 것이다.
◎ 전경(全卿)의 고려사 기록 ②
승보시[ 升補試 ]
승보시(升補試)는 생원시(生員試)를 말한다.
의종 원년(1106).
승보시를 처음으로 설치하고 시(詩)·부(賦)와 경의(經義)로 시험을 치러 임유공(任裕公) 등 55명을 선발하였다.
충정왕 2년(1350) 5월.
성균좨주(成均祭酒) 전경(全卿)이 이구(李玖) 등을 선발했다.
공민왕 2년(1353) 6월.
좨주(祭酒) 이정(李挺)이 양이시(楊以時) 등 50명을 선발했다.
10년 10월.
대사성(大司成) 허전(許佺)이 8명을 선발했다.
11년 11월.
대사성 김안리(金安利)가 정천익(鄭天益) 등 5명을 선발했다.
17년 8월.
전백영(全伯英) 등 37명을 선발했다.
23년 4월. 이취(李就) 등 1백 명을 선발하였다.
◎ 나성전씨(羅城全氏) 과거급제자[ 나주전씨 ]
구분 | 시험종별 | 과순위 | 성 명 | 년도 | 관 직 | 본관(파) |
1 | 숙종07년 식년시 | 丙科 20위 | 전성준(全聖準) | 1681 신유 | 성균관 사예 (成均館 司藝) 정4품 | 나주(羅州)① |
2 | 숙종19년 개성정시 | 丙科 01위 | 전여초(全汝初) | 1693 계유 | 교수 (敎授) | 나주(羅州)② |
3 | 숙종31년 식년시 | 丙科 21위 | 전성신(全聖臣) | 1705 을유 | 금교 찰방 (金郊 察訪) 종6품 | 나주(羅州)③ |
4 | 경종01년 식년시 | 丙科 11위 | 전성택(全聖澤) | 1721 신축 | 성균관 사예 (成均館 司藝) 정4품 | 나주(羅州)④ |
5 | 영조16년 개성별시 | 甲科 01위 | 전명조(全命肇) | 1740 경신 | 사헌부 장령 (司憲府 掌令) 정4품 | 나주(羅州)⑤ |
6 | 고종16년 식년시 | 丙科 28위 | 전석구(全錫九) | 1879 기묘 | 사헌부 지평 (司憲府 持平) 정5품 | 나주(羅州)⑥ |
◎ 3형제 과거급제자
전성준 (全聖準) | 나주 (羅州) | 전기정(全氣正) | |
전성신 (全聖臣) | 나주 (羅州) | 부:전기영(全氣英) 생부:전기정(全氣正) | 숙종(肅宗) 31년(1705) 을유(乙酉) 식년시 문과 병과(丙科) 21위 |
전성택 (全聖澤) | 나주 (羅州) | 전기정(全氣正) | 경종(景宗) 1년(1721) 신축(辛丑) 식년시 문과 병과(丙科) 11위 |
◎ 부자 과거급제자
전성준 (全聖準) | 나주 (羅州) | 전기정(全氣正) | |
전명조 (全命肇) | 나주 (羅州) | 전성준(全聖準) | 영조(英祖) 16년(1740) 경신(庚申) 개성별시 문과 갑과(甲科) 1위 장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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