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의 교회 작품은 불과 몇 가지 곡을 제외하고는 일반에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수량에 있어서는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20곡을 헤아리는 미사를 위시한 작품의 대부분은 모차르트의 비인 이주 이전, 출생지인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작곡된 것들이다. 이것은 그가 잘츠부르크 대사교에 봉사하는 교회음악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것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1768년부터 1777년까지 그가 쓴 10여곡의 미사곡을 통해서 이런 측면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만하임 파리 여행을 끝내고 잘츠부르크에 귀착한 그의 손에서 태어난 C장조 K. 317의 통칭 <대관식 미사>는 이러한 모차르트의 미사곡중에서 특히 잘 알려진 곡이다.
이 작품이 <대관식 미사>로 불리게 된데는 현재 다음의 통설이 믿어져 왔다. 잘츠부르크 북쪽 교외 언덕에 건립된 마리아 프라인 순례교회의 주제단에 장식된 성모 마리아 대관상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이 결코 크지 않은 성모자상은 전에 기적적으로 화재를 면해서 이 아담한 교회로 옮겨져 1744년에 잘츠부르크 사람들에 의해 대관된 것이었으나 1751년 성령 강림의 대 축일 후의 제 5일요일 (6월 4일)에 로마 교홍 베네딕투스 14세에 의해서 그 대관 의식이 다시금 거행되어 이후 매년 그날에 미사가 봉헌되는 관례로 되어 있었다.
모차르트는 1779년의 이 봉헌일(6월 27일)을 위해서 이 미사곡을 작곡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이 통칭으로 불리어 지게 된 것이라고 여겨 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통설은 현재 부정되고 있는데 이 근거로 몇가지 이유가 있다. 모차르트는 이 곡을 1779년 3월 23일에 완성하고 있다. 그의 작곡 관례로 보아 6월 하순에나 연주될 곡을 3개월이나 미리 써 두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곡의 규모는 종래의 작품과 달리 상당히 큰 것이고 또 당당하고 힘차다. 악기 편성도 크고 비올라를 빼고 있는 점은 종래와 같지만 현 4부 외에 오보, 혼, 트럼펫 각2에 트롬본 3, 팀파니에 오르간 등, 이처럼 다양하여 마리아 프라인 순레교회의 작은 내부 공간에는 맞지 않는 점이 그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이 미사곡은 같은 1779년 4월 4일부터 5일에 걸친 부활절 식전을 목표로 씌어졌고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 연주되었을 것이라고 정정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왜 <대관식 미사>로 불리게 되었는가? 모차르트는 다음 1780년에도 C장조의 <미사 솔렘니스> K. 337을 쓰고 있는데, 어떤 곡도 10년 정도 후의 1790년에 유럽 각지에서 거행된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의 기념미사에 쓰여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 곡이 비인에서 먼저 <대관식 미사>라고 불리어 졌으리라 생각된다.
인간으로서 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모차르트의 성숙에 커다란 뜻을 갖는 만하임 파리 여행을 끝내고 부터의 작품인 만큼 <대관식 미사>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의 작품과는 달리 규모가 크고 또 힘찬 것이 되었지만 그래도 악기 편성 등에서는 잘츠부르크의 전통적인 틀에 꽤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런 점에서 특히 현저한 특징은 당시의 잘츠부르크의 교회 음악에 비올라의 파트를 빼고 있었던 것으로 이 곡도 여행전의 모차르트가 보통으로 하고 있던 그러한 특징적인 편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리고 특히 이 작품의 <아뉴스 데이>의 소프라노 독창의 선율이 <피가로의 결혼>의 백작부인의 아리아(제 3막 19번)의 첫머리와 비슷한 것이나 곡 중 극히 기악적인 패시지가 자주 보이는 것 등으로 해서 이 작품이 세속적이며 기악적이고 한 걸음 나아가서 비 교회적이며 비 종교적이라고 하는 생각을 일반적으로 갖게 되었으나 이러한 양식은 당시 세속, 교회의 구별이 없이 취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이 곡이 특히 비 교회적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 잘못일 것이다. 모차르트의 종교음악 창작 활동은 비인 이주를 기회로 해서 교회 음악가로서의 직무포기에 따라서 개인적 주관적인 신앙 체험의 표명이라는 형태를 취하여 작품 수도 두드러지게 줄어들 뿐 만 아니라 새로 접촉한 바로크 음악이 갖는 폴리포니 양식의 영향도 있어서 송두리째 양식을 일변하지만 특히 호모포닉한 성격을 갖는 <대관식 미사>는 1년 후에 잘츠부르크에서 작곡된 같은 C장조의 <미사 솔렘니스> K. 337과 더불어 순수하게 직업적인 교회 음악가로서의 그의 손에서 태어난 10여곡의 미사곡과 비인 시대의 두 개의 미완성 작품(c단조 K427(417a) , d단조 K. 626 <레퀴엠>) 사이에 낀 극히 중요한 작품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