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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비폭력 투쟁. 信天함석헌
통사람(全人) 예수
예수는 통사람(全人)이지, 조각 사람이나 어느 모의 사람이 아니다. 생명이지, 무슨 사상이나 어떤 운동이 아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란 말은 그런 뜻에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에 대하는 태도도 통사람적이어야지. 산숨으로 하는 것이어야지, 어느 모에서나 무슨 주의에서 하는 봄이나, 들음이나, 만짐이나, 끌어댐, 맞춰봄, 본뜸, 내세움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이 믿는다는 것, 아닐까? 믿을 때 그는 우리가 몸, 마음, 혼을 다해 충성으로 섬겨야하고, 그를 증거하는 것을 우리 일생의 사명으로 삼아야 하는 ‘생명-참-길’의 님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비폭력 투쟁이라는 말은 마지못해 하는 말이다. 그는 비폭력주의자도 아니요, 투쟁을 한 쌈군도 아니다. 그렇게 부르기에는 너무도 통채로이신 이요, 삼 숨이신 이다. 그는 그저 그뿐이므로, 그저 ‘그이’라고 부를 일이지, 어떤 이름이 가 붙을 수 없는 이이다. 그런데, 그럼 그 거룩한 두루뭉수리(混沌)에다가 구멍을 뚫자고 손가락을 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마지 못해라니 그 마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무슨 의심인가? 싸울 것인가 싸우지 말 것인가 하는 의심, 또 싸우는데 폭력을 쓰는 것이 옳으냐, 쓰지 않는 것이 옳으냐 하는 의심이다.
환하다면 첨부터 환한 것이다. 물결 없는 바다가 어디 있을까? 물결이 있는 이상 그것과 싸우지 않을 고기가 어디 있으며. 고기 배운 것이 배인 이상 물결과 싸우지 않는 배가 어디 있을까? 바람 안부는 허공이 어디 있을까? 바람이 있는 이상 그것을 타지 않을 새가 어디 있으며, 새 배운 것이 비행기인 이상 바람 타지 않는 비행기가 어디 있을까? 맨 첨부터 숨이 있었고, 숨의 진동이 바람이고, 바람 있으니 물결 있고, 물결 속에 사는 것이 싸움 아닌가? 숨은 본래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니, 폭력이란 것이 있을 수 없지 않은가? 환하다면 맨 첨부터 환한 것이다.
환한데 의심 왜 일어났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각 없는 동물 식물에 의심이란 것 없다. 의심하면 했지. 싸우기는 왜 할까? 너, 나 때문이다. 아담이 혼자일 때 싸움 없었다. 혼자던 것이 왜 너 나로 갈라졌을까? 왜 혼자 있는 것을 좋지 않다고 했을까? 싶어서다. 고파서다. 무엇이 하고 싶어서, 어떤 것이 하고파서다. 알고 싶고, 사랑하고파서, 한 나가 너 나로 갈라졌다.
앎은 물건에 대한 사랑이요, 사랑은 나에 대한 앎인데, 그러고파서 한번 갈라지고 보니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앎에는 모름이 따라왔고 사랑에는 미움이 따라왔다. 해 아래 있는 것이니 그림자가 없을 수 없지. 언제나 어딘지가 모를 것, 잘못된 것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첨으로 주먹을 휘둘러 동생을 죽였다.
예수란, 본래 잘하잔 노릇이 잘못된 이것을, 이 근본적 잘못을 고치기 위해서 나타나신 이였다. 그런데 그 잘못된 것을 고치는데 물질과 정신의 오고감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싸우자는 것은 아니었다. 또 싸움이라 해도 좋다. 적어도 너는 죽고 내가 살아야 한다는 싸움, 너를 모르는 놈으로 만들고 나만을 옳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싸움은 아니었다. 전체를 건지자는 것이 그의 싸움의 목적이었다. 그 일 하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했으니 싸움이람 싸움이지만, 그것은 싸움 아닌 싸움이다. 인류 역사상에서 그것과 같은 종류의 싸움을 하나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을 어찌 폭력으로 했을 리가 있겠는가? 다른 어떤 위대한 인물도 그의 마음 속 깊은 동기를 알기 위해 내 심리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지만, 이 사람, 이 통으로 산 생명의 사람, 하늘 숨의 사람은 내 심리를 미루어보는 방법으로는 못 가닿는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감정, 이성만으로는 이해 못하는 인격이다. 사람인 이상 그도 감정 있고 이성 있었을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보다도 더 맑은 감정이요 뚫린 이성이었겠지만, 그것만이 그는 아니다. 그렇기에 그 자신이 바로 “새로 나지 않고는, 영과 물로 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지 않았나.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분명히 구별해 말하지 않았던가?
나보다 먼저 온 자는 강도
현대는 학문이 발달한 시대이므로 무지가 많이 없어진 대신, 소박한 무지보다 더 무서운 지식적 무지가 사람들, 특히 정신적인 일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많이 있을 수 있다. 높은 영적 체험은, 될 때는 이성의 경지를 초월한데 가지 않고는 안되지만, 그것을 인간 사이에 나눠주기 위해서는 말과 글로 써놓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웬만치 이성이 발달 한 사람은 읽으면 다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이해냐 하면 아니다. 이런 것은 정신세계에서는 초보적인 주의사항인데도 지금은 그것도 지키지 않는 일이 많다. 말하자면 남이 일생을 걸려서 가시덤불, 불꽃 속이라 형용해도 모자라는 정신적 시련 끝에 제 가졌던 인간적 지식 노력을 다 내버리고 나서 비로소 얻은 체험을, 몇 시간 몇 날 동안 읽어보고는 다 이해한 것처럼 옮긴다. 그것은 사실은 영적 체험의 소매상인데, 그나마 그것이 그대로 있느냐 하면 아니다. 물질적인 것은 내가 만든 것 아니라도 그것을 팔아도 변질이 되지 않지만, 영적 체험은 그 본인의 입에서 일단 나오면 벌써 식어서 굳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다시 생명적이 되려면 나 자신의 혼의 용광로에 들어가서 녹아가지고 내 것으로 다시 체험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보다 먼저 온 것들은 다 절도요 강도라”는 지독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모르긴 모르지만 서점에 홍수처럼 넘치는 종교서류에 이 잘못에 빠지지 않은 것이 몇 개나 될까? 성경 그대로를 읽어주어도 절대로 그것이 하나님 말씀은 아닌데, 그것을 하나님 말씀이라 하니 잘못이 거기서부터 나오고, 또 그것만이라도 좋겠는데, 심지어 나아가서는 자기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경을 끌어댄다. 그런데 말하는 그 자신 예수의 표준으로 영으로 새로 난 사람이냐 하면 아니다. 백중에 아흔 아홉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혼란이 일어날 것인가?
물론 시대는 달라지는 것이고, 시대가 달라지면 종교의 경전도 고쳐 해석하여야 한다. 하지만 해석을 하기 전에 나 자신이 먼저 달라졌어야 한다. 그 달라짐은 시대적으로 달라지는 달라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한번 고쳐났느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영의 사람이 눈이 뜨이지 않고는 시대 변천을 당해도 뚫어볼 줄을 모른다. 제 나름대로 내가 물어본다 할지 몰라도 그것은 사탄의 무리도 하는 말이다. 그 어느 것이 옳으냐는 열매를 보아야 한다. 열매가 무엇이냐? 한말로 선(善)인데, 그럼 선은 뭐냐? 현대 학자는 곧 선도 고정된 것 아니다 할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잘못이 생긴다. 물론 변한다. 그러나 그 변하는 것은 겉에 속한 것, 날마다 하는 생활에 속한 것이고, 그 밑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 변하지 않는 것이 뭐냐? 보수적으로 죽은 종교를 믿는 사람은 곧 대답하기를 하나님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다. 절대계에 있는 하나님이요 우리가 그를 만나려면 그가 현실 속에 내려오셔야 한다. 현실계의 어디에 하나님이 계시냐? ‘전체’다. 부족에서 계급으로, 계급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세계로. 그 수에서는 달라졌지만 언제나 그 전체가 나만도 아닌 너만도 아닌, 또 누구만도 아닌, 대다수만도 아닌, 전체인 성격에서는 변함이 없다. 거기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 동서고금 할 것 없이 어떤 종교에서도 그 위대했던 예언자, 성자란 사람들은 다 자신의 사람인 동시에 전체에 살려는 사람들이었다. 그 의미에서 그들은 선(善)했고 옳았다.
이러한 영만이 옳은 영인데, 그렇지 못하고 제가 스스로 새로 났고 뚫어본다 하면 그것은 협잡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다. 일러 말씀이 있기를 하나님은 하나 되게 하시는 이지 분열하는 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폭력이 뭐냐? 나만 옳다는 것, 나만 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근본에서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나도 그쪽이 잘못하는 것임을 모르는 것 아니나, 영의 눈으로 볼 때 그 저쪽도 남일 수 없다. 그를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참 나이기 위해 그럴 수 없다. 형제를 보고 바보다 할 때 그에게 잘못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이다. 본서동근생(本是同根生)인데 상전하태급(相煎何太急)이라고, 본래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인데, 왜 이리도 뜨겁게 서로 지지느냐? 예수가 가르쳐주신 첫째 교훈은 사람이 다 형제라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할 때에 벌써 모든 것은 환해진 것이다. 모든 것이 그것이었다. 몰랐기 때문에 원수로 알았고 죽였다. 잘하고 잘못한 것이 형제의 관계를 변경 시킬 수는 없다. 왜냐? 잘못은 내 마음으로 택하여서 한 것이고 형제 관계는 창조 당시부터 본래 한 영에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유기물이다. 서로 한데 들어 하나로 있는 생강이다. 지극히 작은 어느 부분을 잘라도 전체는 상했다. 이 점이 어려운 점이다. 생각하는 인간에 있어서 감정은 이 작은 나에 붙어 있는 것이므로 특별히 힘써 그 나의 갇힌 생각을 깨치지 않고는 우리 이성은 그 좁은 감정의 지배를 받기 쉽다. 그리하여 옳은 것을 위하여서는 잘못된 놈은 죽여도 좋다는, 제법 옳은 것 같으면서 크게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된다. 여러 가지 까다로운 신학적 설명을 할 것 없이 예수는 이 창조의 첫날부터 인간의 영혼을 가두고 있는 무서운 이 잘못된 감정, 이 제 위신을 잃은 이성을 해방시켜 온전히 하나님께, 다른 말로 해서, 전체에 봉사하는 것이 멸망을 면하고 살아나는 길임을 가르쳐주기 위해, 특히 지배자들, 잘 사는 것들에게 그것을 깨우쳐주기 위해 오셨던 이다.
예수는 간단명료하신 이였지, 복잡하여 넓은 지식 세세한 설명을 하지 않으면 모를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만 아니라 위대한 스승들은 간단명료했다. 세상이 복잡해진 것은 문명 때문인데, 문명의 목적이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할 것을 아니하고도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꾀부림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에 잘못이 들어 있다. 사람마다 제 할 것을 하는 것을 의무로 알고, 정직히 그것을 했다면, 그래서 마땅히 할 것을 피할 생각을 아니했더라면, 인간 사회가 이렇게 까다로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공중 나는 새 보라, 들에 피는 백합 보라 하시지 않았는가? 그것 지키지 않고 사치 향락을 위한 대규모의 공장조직의 기업을 하면서 평화는 어렵다. 절대 안될 것이다. 인간이 만일 사는 목적이 영의 사람에 이르는데 있는 줄을 알아서 그것을 잊지 않았던들, 이런 복잡한, 행복을 약속함으로 인류 전체를 지옥으로 끌어넣는 이런 문명병에 빠지게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근본에서 보면 환한 것이다. 겸손하게 그런 생활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기계 만들기 시작했고, 장자의 말대로 기계 있으면 기심(機心) 깜찍한 마음 있고, 그 깜찍한 마음이 가슴에 한번 들면 진리 있을 자리 없다. 이러니 저러니 여러말 할 것 없이 비폭력 실행 못하겠다는 것은 지배계급의 뒤에 세워 논 그 어마어마한 무기와 군대를 보기 때문 아닌가? 만일 그런 것 없고 인간 대 인간으로 싸운다면 문제 아주 간단 할 것이다. 누가 먼저 사람 죽이기 좋다 하겠나? 예수에게 대들던 바리새 사람들조차 누구나 자신 있는 사람 먼저 돌 던지라 하니 다 도망가지 않았나? 그것이 인간이다. 예수께서 만일 칼이라도 뽑아들고 호령 했다면, 그까지 갈 것 없이 욕지거리라도 하면서 했다면, 어찌 물러갔을까? 가만히 수그리고 무한히 불쌍히 여기는 얼굴에 조용한 목소리로 했으니 도망갔을 것 아닌가? 양심 하나만 깨면 무기가 문제없다. 왜냐? 양심은 하나기 때문이다. 네 양심 내 양심 따로 없다. 아버지 아들에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다른 인종간, 말이 통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 마음은 폭력 생각을 하면 사라져 버린다.
예수는 해방자라는 말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말은 주의하여 쓰지 않으면 도리어 큰 잘못을 일으킨다. 보라 세상에 해방자를 자칭 하는 혁명가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들이 정말 혁명가냐? 레닌, 스탈린이 그렇게까지 해방 선전을 아니 했던들 세계가 오늘같이 이렇게 어지러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좌우익을 물론하고 모든 혁명가는 다 협잡꾼이었다. 하도 학대에 시달려서 행여 그가 바라던 해방자인가 했다면 동정할 만도 하지만, 크리스천도 그렇단 말이냐? 거기 속는단 말이냐? 그것도 뚫어보지 못한단 말인가? 그것을 못 뚫어본다면 눈이 아직 어두운 것이다. 그럼 예수한테 무엇을 배웠나? 가짜 혁명가 가짜 해방자 알아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의무다. 눈에 있는 들보와 티의 비유는 왜 하신 줄 아나? 너희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높지 못하면 하늘나라 못 들어간다 하시는 말은 뭘로 들었던가?
생명-참-길의 님
해방이라니 그저 좋다는 것은 먹으라니 다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에 독을 넣은 음식이 얼마나 많은가? 독 든 사상은 더 많다. 글쎄 무엇이 부러워서 예수를 혁명가의 한 사람으로 보자는가? 그렇게 부러워 뵈나? 그렇다면 예수의 혁명은 아직 못 경험해본 것이 사실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는다. 묵은 술 마신 사람은 그것이 좋다한다 한 말씀 무얼로 들었을까? 우리 예수의 가르침보다 더 높은 가르침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겉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거야말로 사람을 더럽힌다 했을 때 우리는 마음에 조금도 진동이 아니 일어났던가? 그럼 우리는 해방 바라는 마음 아니요 자유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글쎄 어쩌면 우리 주 ‘생명-참-길’의 님을 레닌, 스탈린, 판초빌라의 계열에 세우고 싶단 말이냐? 혁명, 해방, 승리에 미쳤는가? 미치지 않는 것이 해방이다. 종교조차도 미친 건 참 종교 아니다. 이성이 초롱초롱 살아나야 해. 그러나 이성은 스스로 자기를 깨울 능력이 없다. 하늘에서 온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빛에 접해야 한다. 이것이 파라독스다.
물어보자, 자아에서 해방 못된 내가 누구를 해방시킨단 말인가? 역사 있은 이래 오늘까지 되풀이 되풀이한 이 악순환, 너는 그럼 인간은 그런 것 아니냐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말이 끊어진다. 네 눈 속에 큰 들보를 먼저 뽑아내면 형제의 눈 속의 티를 뽑을 수 있다 했다. 티는 무엇이고 들보는 무엇인가? 나의 자아주장이야 말로 전 세계와 그 역사를 못 보게 하는 대들보 같은 악이고, 강도 살인 하는 온갖 무서운 죄란 것은 도리어 내 속에서 들보가 빠지기만 하면 문제도 아니 되는 작은 것이란 말 아닌가? 그대는 현실주의를 자랑하려나? 나는 영원한 실패자란 말을 들으면서도 예수의 발밑에 서서 이상주의자가 되련다. 이상주의가 뭔가?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요 다 영이다 하는 거지!
여직공들조차도, 변변히 먹지도 못하면서도, 우리는 봉급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권을 위해 싸운다 하지 않나? 그럼 내가 우선 내 인권은 지켜야 할 것 아닌가? 참으로 인권을 아는 사람은 내 인권을 지키기 위해 남의 인권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싸움에서는 사람 죽이는 전쟁에서보다 더 엄격한 훈련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감정으로 닫는 물건이므로 본래의 목적이 정당하면서도 어떤 해를 입을 때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잊고 폭력적인 행동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훈련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전도하실 때는 제자를 골라 뽑아 자세히 일러주고 친히 데리고 다니면서 훈련시켰다. 그저 하신 줄 알면 크게 오해다. 공자의 말에 “가르치지도 않고 싸움 시키는 것은 씨을 버리는 일이다” 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싸움은 보통 사회혁명과 같은 계열의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당장의 목표는 같을 수 있다. 악제도를 고치자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생관 역사관이 보통 다른 사람들과 같을 수 없다. 만일 다를 것 없다 생각하게 든 맘대로 일반이 하는 투쟁의 대열에 서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필 예수의 이름을 빌 필요 없다. 필요 없을 정도가 아니라, 차마 그럴 수가 없다. 자기 진리에 충성하여, 자기 뜻대로 할 수 없어, 혼 속에 내리는 그 절대자의 명령대로 하기 위해, 빌라도 앞에서 말 한 마디도 아니하고 십자가 위에 고스란히 죽는 그, 미안해서 어찌 그 이름을 도둑질 할 수가 있을까? 욕지거리를 맘대로 하고 주먹질도 참지 못하는 이 내가. 그러니 내 말은 이것이다. 영이고 정신이고 없다면 모른다. 있다고 확신하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길이야말로 참 길이라 믿어서 그 이름 밑에 싸우려거든 우선 그의 뜻을 깊이 이해하도록 하자. 그리고 그것을 지킬 것을 서로 약속하고 나서자 그 말이다.
그는 민족과 나라가 아주 형편없이 어지러워진 때에 났다. 그는 결코 오늘 보수주의 신자들이 믿는 것처럼 이 세상은 꿈같은 곳이고 죽은 후에 무슨 환상같이 영혼이 가서 행복하게 사는 그런 따위 하늘나라 있어서, 그리로 사람들을 데려가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다. 주기도에서 보는 대로 이 세상 나라 내놓고 또 무슨 하늘나라가 따로 있는 것 아니었다. 정치 주권은 벌써 망한 지 오랬고.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로 있어서 그 밑에 있는 유대인의 괴뢰정권이나 종교의 지배자들이나 다 썩어 있어서 그는 한마디로 그 백성을 목자 잃은 양이라 했다. 유대 역사의 등뼈가 되는 정신은 ‘메시아’ 라는 말로 표시되는 하나님과의 약속인데, 그들은 그 시대 시대에 있어서 그 메시아의 실현을 기다리다 못해 실망하고 지쳤다.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예언자란 오늘날 말로 한다면 자유사상가라고 할 것인데, 그들이 언제나 그 시대의 메시아의 산파역을 하곤 했는데, 이때에 오면 그 예언자란 것조차 끊어진지 사백 년이 넘는다고 하니 그 참혹함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뜻대로
그런 때에 나서 그가 하려 하신 것은 결코 전에 모든 위대한 지도자들이 했던 것 같은 정치적 혁명이 아니었다. 근래에 학자 중에는 그를 하나의 정치혁명가로 보려 하기도 한다지만, 그것은 현대적인 학문적 연구의 잘못으로 나오는 것이고 결코 예수를 바로 알았다 할 수 없다. 그들의 주장은 성경을 역사적으로 분석해보는 데서 나온 것이지만 역사만이 결코 참은 아니다. 결과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결코 정치적이라는 한 부류 속에 집어넣을 인물이 아니다. 참 의미에서는 나는 성경 안에 갇힌 예수도 믿고 싶지 않다. 또 성경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계시라 한다면, 하나님의 계시는 결코 성경에 갇힌 것 아니다. 성경을 역사적으로 분석 비판하여서 예수의 사실을 다 밝힐 수도 없을 것이고, 또 밝힌다 해도 예수는 그것으로 다가 아니다. 예수라는 인격은 지금도 자라고 있다. 예수가 인류를 건지기도 했지만, 또 역사 건지는 생명이기 때문에, 역사는 또 예수의 인격을 키우고 있다. 이 세계에는 하나의 인격이 있다. 그것은 영원한 미완성이다. 역사적인 예수는 그것의 그때의 나타남뿐이다. 그러므로 죽었다고 했고, 죽은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한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그러한 영원한 한 사람을 믿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하나의 정치혁명가로 본다는 것은 망발이다. 학자의 소린 될지 모르나 그는 예수 모르는 사람이다. 그 인격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라는 한 말에 단적으로 표시된다. 그러므로 폭력을 썼느냐 안 썼느냐 하는 차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무엇보다 그가 나타내준 진리를 증거하는 것이 사명이다. 나는 내 말을 할 밖에 없지만, 내가 이 나라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민주주의가 구경의 목적이어서도, 이 나라가 구경의 목적이어서도 아니요, 예수의 보여주시고 앞으로도 보여주실 것이 진리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을 위하는 것이, 이 나라를 내놓고는 할 수 없고, 또 이 나라를 위하는 것이 이 시점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을 내놓고 할 수 없기 때문에 한다는 것을 밝히 말한다. 민주주의와 나라를 비할 때 나라가 보다 더 큰 개념이요, 나라와 진리를 비할 때 진리가 보다 더 큰 개념이다. 진리를 위해 나라를 부정하면 나라가 살아나지만, 나라를 위해 진리를 부정해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어진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과 권세 있는 자 앞에서 사람의 아들을 아노라 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나님 앞에서 그를 아노라 하지만, 만일 사람들 앞에서 사람의 아들을 부인하면 자기도 그를 부인하겠다 한 것은 그가 어떤 권위를 가지신 것을 밝혀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를 이용하려 했던 자는, 그 이용하는 목적이 아무리 큰 것이라도, 그래, 온 우주라 하더라도, 그는 그 돌 위에 떨어져 가루가 되고 말 것이다.
예수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등불이다” 하셨다. 소금은 뭐고 등불은 뭔가? 나는 이것을 우리가 지켜야 할 생활 원리를 밝히신 것이라 믿는다. 소금은 참이요, 등불은 사랑이다. 여러 가지 이치가 있지만 요약하면 이 둘에 그친다. 우리 투쟁의 원리도 이 둘에서 벗어나서는 아니 된다. 소금에 관하여는,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어찌 다시 짜게 할 수 있을까. 쓸데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의 밟힘이 될 거다 했고, 또 다른 데서는 너희도 소금을 치고 서로 화목하라 했다. 또 등불에 관해서는 누가 불을 켜서 말 아래 두겠느냐? 높이 대위에 올려놓아 모든 사람을 비추도록 하지 않겠느냐 하셨다. 이것은 다 자명의 진리로 누구나 설명을 요치 않고 다 아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거짓으로 수단을 쓰고 비밀리에 계획을 꾸며 폭력으로 투쟁을 해 바른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 마치 짠 맛은 빼고 생선의 썩기를 방지하고 맛을 내며, 등불을 발밑에 두고 방안이 밝고 서로서로 알아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씨알의소리 1978년 10월 77호
저작집30; 16- 15
전집20; 3- 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