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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江南) 6천리(千里), 그리고 사막(沙漠) 3천리(千里)
○〈강남(江南)과 강북(江北)!〉 대한민국(大韓民國), 우리 사회(社會)의 불편(不便)한 진실(眞實)을 표현(表現)하고 있는 단어(單語)다. 기껏해야 40년 된 강남(江南) 땅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부(富)를 상징(象徵)한다는 것이 ‘코-메-디’라 할 수 있다.
강남(江南)이란 “강(江)의 남(南)”쪽이란 뜻이고, 오늘날의 강남(江南)이란 바로 한강(漢江) 이남(以南)의 땅이다. 강(江)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부동산(不動産)투기(投機) 열풍(熱風)이 광풍(狂風)으로 몰아쳐, 오늘날의 부(富)를 이룬 사람들이 아주 많다. 이런 것들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부(富)를 상징(象徵)한다는 건, 한국(韓國)의 “민낯”이라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언제부터 한강(漢江)이남(以南)을 ‘강남(江南)’이라고 했을까? 오늘의 강남(江南)지방이란 말은, 반세기(半世紀) 채 되지 않은 것일 게다. 그렇다면 고려왕조(高麗王朝)와 조선왕조(朝鮮王朝)때의 “강남(江南)”지방은 도대체 어디를 말했던 것일까?
◆ 東國李相國集(이규보李奎報)【1168년(의종 22)∼1241년(고종 28)】제6권 / 고율시 古律詩 92수. / 사평진(沙平津)에서 자면서
〈遊女冶容多效妓 : 노는계집 몸치장하니 거의 기생인 듯 / 居民祝髮半爲僧 : 사는 백성들 머리 깎으니 반은 중이구나 / 江喧始識潮聲漲 : 강이 들레니 비로소 조수 소린 줄 알겠고 / 地熱那堪瘴氣蒸 : 땅이 더우니 장기를 어찌 견디랴〉라고 하였는데,
반(半)은 승(僧)이다. 백성(百姓)들 대부분(大部分)이 ‘박박머리’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긴데, 이건 또 웬 일일까? 오늘 주제(主題)는 아니니 생략(省略)하자.
〈사평진(沙平津)〉, 이곳은 바로 강남(江南)의 대표적(代表的)인 곳으로, 바로 “반포나루터” 부근이라고도 하고, “한남대교(漢南大橋) 남단(南端)”이라고도 하면서, 친절(親切)한 설명(說明)도 곁들인다. 강북(江北) 땅에서 겨우 2,000m 강(江)을 건넜더니, 자연환경(自然環境)이 180도 달라져, 무덥고 물이 많고, 습한 아열대성(亞熱帶性) 기후(氣候)로 인해, 장독(瘴毒)까지도 맹위(猛威)를 떨치는 곳이라고 한다.
〈장기(瘴氣)〉가 강남(江南) 부동산(不動産) 투자 1순위 쯤 되는 것을 비유(比喩)하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이게 대한민국(大韓民國) 학계(學界)의 현실(現實)이다.
〈장기(瘴氣)〉란, 습(濕)하고 더운 지방에서 생기는 독기(毒氣)이며, 장강(長江)이남(以南) 땅의 무덥고, 습도(濕度)가 많은 곳에서 생긴 “풍토병(風土病)”이라고 한다.
◆ 사평진(沙平津)은, 장강(長江=揚子江)이남(以南)에 있는 나루터(津)라는 이야기고, 〈당시(當時)의 “이규보(李奎報)”가 장강(長江)을 건너오니, 날씨는 덥고 습(濕)하니, 이곳의 풍토병(風土病)인 장독(瘴毒)을 어찌 견디겠는가?〉하는 이야기다.
바로 이곳이 강남(江南) 땅이다.
「반도(半島) 땅엔 부동산(不動産) 투기(投機) 광풍(狂風)이 몰아쳤던 강남(江南) 땅은 있되, 장독(瘴毒)과 동정귤(洞庭橘)이 있는 아열대(亞熱帶) 조선(朝鮮)의 땅, 강남(江南) 6 천리(千里) 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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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한 한국사(韓國史)는,〈관동(關東)·관서(關西)·관북(關北)·영남(嶺南)·영동(嶺東)·영서(嶺西)·호남(湖南)·호서(湖西)·호좌(湖左)〉등으로 반도(半島) 땅을 적당히 나누어 부른다.
호남(湖南)은 있는데, 호북(湖北)은 없다.
영남(嶺南)은 있는데, 영북(嶺北)은 없다.
관북(關北)은 정확(正確)하게 어디를 기준(基準)했는가? 두리 뭉실 말한다.
그렇다면 말이다. 〈강남(江南)지방은 도대체 어디를 말하는 것이냐?〉하는 거다. 설마하니 한강(漢江)이남(以南)의 강남(江南)지방 몇 개 ‘구(區)’가 ‘6천리(千里) 길’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그러나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살았던 우리들의 선인(先人)들은 「강남(江南) 땅이 6천리(千里)」라고 하였다.
고려사(高麗史)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및 대소(大小) 관료(官僚), 학자(學者)들의 문집(文集)속에서도 수없이 등장(登場)하는 것이 〈강남(江南)〉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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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江南) 6 천리(千里)
(1)〈강남(江南) 6천리(千里)를 죄다 돌아다녀도 : 行 盡 江 南 六 千 里〉
어우집(於于集)【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1559~1623)】제1권 / 시(詩) 북수록(北繡錄) / 북관 유소사 팔영〔北關有所思八詠〕【북수록(北繡錄) : 유몽인(柳夢寅)이 함경도(咸鏡道) 순무어사(巡撫御史)에 제수되었을 때 지은 시이다.】
《분칠 지워지고 홍안 사라져 어디로 가는가. : 粉殘紅謝向何之 / 눈앞의 아름다움은 그저 잠시 뿐이라오 : 目下姸姸只暫時 / 삼 년 만에 한번 봄꿈에서 깨어나니 : 三載一番春夢覺 / 나무 희미한 산 빛이 멀리서 미간에 비치네. : 木微山色遠浮眉 / 중략(中略) / 아름다운 자태 옛날에도 없었으니 : 盈盈脩態古無之 / 아리따운 맵시 한 때만 풍미한 것 아니라네. : 不獨嬌姿擅一時 / 강남 육천 리를 죄다 돌아다녀도 : 行 盡 江 南 六 千 里 / 수많은 미인들 아무도 안중에 없네. : 眼中空了萬蛾眉》하였고,
◆ 위의 구절(句節) 이야기는 : 한국사(韓國史) 해설(解說)에서 말하기를, 〈중국(中國)의 ‘장강(長江)=양자강(揚子江)’ 남(南)쪽의 강남(江南)지방 6천리(千里)를 차용(借用), 은유법(隱喩法)으로 묘사(描寫)한 것이다.〉라고 말할 것임에 틀림없다. 또 아래를 보면서 “강남(江南)”지방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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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우집(於于集) 제1권 / 시(詩) 기전암행록(畿甸暗行錄) / 남양을 지나는 도중에(南陽途中)【기전암행록 : 1603년 봄, 경기도 암행어사로 재직 중 지은 시를 엮은 것】
《강남에서 떠도느라 돌아갈 계획 어긋나 : 桃 梗 江 南 歸 計 差 / 두견새는 피 토하며 울고 나무에는 꽃이 피네 : 杜鵑啼血樹生花 / 농부는 진흙탕에서 기다란 보습을 휘두르고 : 農夫黃濘長鑱滑 / 누에치는 여인은 흰 팔뚝 드러내고 뽕잎을 따네 : 桑女靑條皓腕斜 / 중략(中略)》하였다.
◆ 유몽인(柳夢寅 : 1559~1623)이 기전(畿甸) 곧 경기(京畿) 암행어사(暗行御史)로 곳곳을 순행(巡行)하면서 지은 시(詩)라고 전해진다. 저자(著者)가 ‘기전암행록(畿甸暗行錄)’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기전(畿甸)”이란 “중국(中國) 곧 신주(神州)”를 말하는 것이다.
〈기전(畿甸)〉이란 옛 부터 말하기를, ‘기내(畿內)’와 같은 말로, ‘서울(京)’을 중심(中心)으로 사방 500 리 내(內)의 땅을 뜻하는 바, 천자(天子)가 직접(直接) 통치(統治)했던 땅을 말한다. 곧 유몽인(柳夢寅 : 1559~1623)은, 대략(大略) 동서(東西) 일천(一千)리, 남북(南北) 일천(一千)리 땅인 경기도(京畿道)의 암행어사(暗行御史)로 순행(巡行)했다는 거다. 이때 지은 시(詩) 중의 하나가 바로 위에 소개(紹介)한 것이다.
제후국(諸侯國) 반도(半島) 조선왕조(朝鮮王朝)는, “기전(畿甸) 또는 기내(畿內)”라는 말을 사용(使用)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기전(畿甸), 기내(畿內)등은 천자국(天子國)에서 천자(天子)의 권위(權威)를 상징(象徵)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當時)의 유몽인(柳夢寅 : 1559~1623)이 몸을 담고 있었던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영토(領土) 내에, 〈강남지방(江南地方)〉이 있었다는 얘기다. 정말 조선(朝鮮) 땅에 “강남지방(江南地方)”이 있었어? 아래 글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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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錦 江 詞 三 章【이헌경(李獻慶) : A. D 1719 – 1791】:《中略.亡國落花墟.泗泚河.扶餘王所都.在錦江下流.妖艶錦江女.喜嫁江南商. (中略) : 망국의 낙화 유지(遺趾), 사비하는 부여왕의 소도(所都)였고, 금강(錦江)의 하류(下流)에 있는데, 아름답고 고운 금강(錦江)의 여인(女人)들은, 강남(江南)의 상인(商人)들에게 팔려가고》하였다.
위 글을 보면, 〈부여(夫餘)는 백제(百濟)의 왕성(王城)이었고, 금강(錦江)가의 낙화암(落花巖)에서, 꽃같이 젊고 어여쁜 궁녀(宮女)들, 도성(都城)의 아름답고 고운 여인(女人)들이, 포학(暴虐)했던 당군(唐軍)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 천 길 절벽(絶壁) 아래로 낙화유수(落花流水)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회자(膾炙)된 이야기가, “이곳의 물은 마시되, 물고기는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때의 도성(都城)에는 “15만 호(戶)가 넘게 살고 있었다.” 고 하니, 도성(都城)의 젊은 여인(女人)들은, 〈망국(亡國)으로 인한 처절(凄切)함은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瞬間)이었을 것이다. 부모형제(父母兄弟)를 위하여 내가 희생(犧牲)하리라.〉하는 마음으로 돈 많은 “강남(江南) 상인(商人)”들에게 팔려갔다는 이야기다. 뿌리째 흔들리는 외적(外敵)의 침입(侵入)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것이니, 특히 여인(女人)들은 첫 번째 노략질 대상(對象)이었으니, 어찌 성하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안타깝고, 처절(凄切)한 현장(現場)이 “반도(半島) 충청도(忠淸道) 부여(扶餘) 땅이었을까?”〉반도(半島) 땅에 “강남(江南)” 땅이 없으니, 이 또한 반도(半島) 땅에서 벌어질 수 없었던 역사(歷史) 이야기다. 반도(半島) 땅에 “장강(長江)”이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가 아닐까! 못 믿겠다고? 그렇다면 또 아래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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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속잡록 1【續雜錄 一. 조경남(趙慶男 : 1569 -1641】신해 년 / 명(明) 만력(萬曆) 39년, 광해군(光海君) 4년(1611년) :《중략(中略). 兄鞱亦被罪謫南海臨行有句云,臣罪如山死亦甘聖恩寬大謫江南臨岐別有無窮恨慈母今年八十三,一時悲之. : 중략(中略). 그의 형인 권도(權鞱)도 역시 죄를 입고 남해(南海)로 귀양 갔다. 떠날 적에 시 한 수를 짓기를, 「신의 죄는 산과 같아서 죽어도 또한 달갑건만, 성은이 크고 너그러워 남해【원문(原文)은 강남(江南)이다.】로 귀양 가네. 갈림길을 당해 무궁한 한은 다른 데 있나니, 자애로우신 우리 어머니 나이 여든 셋이네.」하니, 한때 사람들이 가슴 아프게 여기었다.》하였는데,
위의 글의 난중잡록(亂中雜錄)을 저술한 조경남(趙慶男)이 지은 것이다. 그런데 한자(漢字) 원문(原文)에는〈江南〉이라고 하였는데, 번역(飜譯)에는 〈남해(南海)〉라고 하였다. ‘강남(江南)과 남해(南海)’가 같은 곳인가? ‘남쪽 바다(海)’란 뜻과 ‘강(江)의 남쪽’이란 뜻이 같을 수가 있겠는가!
〈백제(百濟)가 망할 무렵인 7세기(世紀) 때도, 이후의 신라(新羅) 때도, 고려(高麗) 때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이헌경(李獻慶)이 살았던 18세기(世紀)에도, 조선(朝鮮) 땅에는 6천리(千里)에 이르는 “강남지방(江南地方)”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史實)이다. 덧붙여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속의 ‘강남(江南)’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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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도 “강남지방(江南地方)”에 대해, 많은 기록(記錄)들이 있다. 하나의 예(例)를 들어 보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기미 10년(1019), 송 천희 3년ㆍ거란 개태 8년 :《徙江南州縣丁戶,以實象山,伊川,遂安,新恩,峽溪,牛峯等縣. : 강남(江南)의 주(州)현(縣) 정호(丁戶)를, 상산(象山)·이천(伊川)·수안(遂安)·신은(新恩)·협계(峽溪)·우봉현(牛峯縣)등에 옮겨채웠다.》고 하였다.
〈고려(高麗)의 남(南)쪽 지방에 큰 강(江)이 있으며, 이 강(江)을 기준(基準)하여 그 남(南)쪽을 강남지방(江南地方)이라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도사학(半島史學)=식민사학(植民史學)”에서 말하는 반도조선(半島朝鮮)의 강남(江南) 땅은 어디냐?
반포대교(盤浦大橋) 남단(南端) 나루터냐? 한남대교(漢南大橋)남단(南端) 나루터냐? 아니면 낙동강(洛東江) 남(南)쪽, 아니면 금강(錦江) 남(南)쪽, 아니면 임진강 남(南)쪽…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가 “강남(江南)” 땅인가?
○ 이곳「강남지방(江南地方)」은, 풍토병(風土病)으로 “장독”【瘴毒 : 瘴氣 ; 풍토병 ; 습하고 더운 땅에서 생기는 독기】이 있는 지방(地方)이다.
위의 글 (1)+(2)+(3)+(4)+(5)에서 말하는 “강남지방(江南地方)”이, 중국(中國)의 강남(江南) 땅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고려사(高麗史)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지에서 말하는 “강남(江南)”은 또 어디일까?
백제(百濟)의 강남(江南) 땅과
고려(高麗)의 강남(江南) 땅과
조선(朝鮮)의 강남(江南) 땅이 서로 다른 곳에 있었는가?
쓰러져 가는 몽고(蒙古)를 위해 힘써보았자 별 볼일 없다는 것을 간파(看破)한 함흥(咸興) 호족(豪族) 이성계(李成桂)는, 일어서는 늙은 거인(巨人) 고려(高麗)에 귀화(歸化)하여, 눈치껏 적당히 힘을 쓰며, 기회(機會)를 엿보다가 요동정벌(遼東征伐)의 어명(御命)을 받고 군대(軍隊)를 손에 넣자마자, 회군(回軍)하여 고려(高麗)조정(朝廷)에 반기(叛起)를 들고, 쿠데타를 일으켜 역성(易姓)혁명(革命)을 성공(成功)시켰다.
곧 〈백제(百濟)의 강남(江南) 땅, 고려(高麗)의 강남(江南) 땅, 조선(朝鮮)의 강남(江南) 땅은, 그곳이 반도(半島)이든 또는 대륙(大陸)이든 같은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장독(瘴毒)”이 있는 아열대기후(亞熱帶氣候)인 “강남지방(江南地方)”은 유일(唯一)한 곳이 “장강(長江)이남(以南)” 땅이다. 이곳은 또 호남(湖南)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이곳이 바로 〈강남(江南) 6천리(千里) 땅이다.〉
고려(高麗) 신하(臣下)였던 이제현(李齊賢)의 ‘강남(江南)’ 땅을 보자.
(6) 東文選 9 / 五言律詩. 李齊賢 :《延祐己未予從於忠宣王降香江南之寶陀窟王召古杭吳壽山令寫陋容而北村湯先生爲之贊北歸爲人借觀因失其所在其後三年二年余奉國表如京師復得之驚老壯之異貌感離合之有時題四十字爲識 : 연우(延祐) 기미년(己未年 충숙왕 6년)에, 내가 강남(江南) 보타굴(寶陀窟)로 향(香)을 내리려 가시는 충선왕(忠宣王)을 모시고 갔더니, 왕께서 옛 항주(杭州)의 오수산(吳壽山)을 불러내 보잘것없는 얼굴을 그리게 하고, 북촌(北村) 탕선생(湯先生)이 찬(贊)을 썼었다. 북으로 돌아오자 남이 빌어간 후로 그 소재(所在)를 잃었더니, 그 뒤 32년에 내가 본국의 표(表)를 받들고 경사(京師)에 가 다시 찾았다. 보니, 노년ㆍ장년의 얼굴 다름이 놀랍고 헤어지거나 만나는 데도 때가 있음을 느꼈기로 40자(字)로 적어본다.》고 하였다.
고려(高麗) 신하(臣下) ‘이제현(李齊賢)’이 말하는 “강남(江南)” 땅이나, (1)∼(5)에서 말하는 “강남(江南)” 땅이나 똑같은 곳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건 또 어떨까?
(7) 東文選 4 五言古詩 /《江南女.(崔致遠) : 江 南 蕩 風 俗. : 강남(江南)땅은 풍속이 음탕하기에 / 養 女 嬌 且 憐. : 딸을 길러 아리땁고 예뻐라. / 冶 性 恥 針 線. : 놀아나는 성품은 바느질을 싫어하고 / 粧 成 調 管 絃. : 단장 마치고 관현을 희롱하네. / 중략(中略)》하였다.
여기에서의 “강남(江南)” 땅은, 반도(半島)인가, 장강(長江)이남 땅인가? 〈강남(江南)〉이란 불리는 곳은, 오늘날의 “중국(中國) 장강(長江)이남 땅”을 말했던 것이다.
○ 위에서 예(例)를 든 여러 기록(記錄)의 “강남(江南)” 땅은, 똑같은 곳의 “강남(江南)”을 말하는 것이다.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은 이를 반도(半島) 땅에 옮기려 하지만, 도대체 ‘강(江)의 남(南)’쪽이라고 할 만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찾을 수 없다보니 적당히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대륙지도(大陸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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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沙漠) 3천리(千里)
(8)〈광활한 사막은 삼천리에 펼쳐졌고 : 茫 茫 沙 磧 三 千 里〉
어우집(於于集) 제1권 / 시(詩) 서수록(西繡錄) / 벽단으로 가는 도중에(碧團途中)【 서수록(西繡錄) : 유몽인이 평안도 순변어사(巡邊御史)에 제수되었을 때 지은 시이다.】
《立馬關山第一峯 : 관산의 제일 봉우리에 말을 세우니 / 平臨胡地接黃龍 : 아래로 오랑캐 땅에 접하여 황룡까지 이어졌네 / 茫茫沙磧三千里 : 광활한 사막은 삼천리에 펼쳐졌고 / 嵲嵲岡巒百二重 : 높고 높은 산맥은 백이관이라네 / 朔北陰風隨大旆 : 삭북의 살벌한 바람에 큰 깃발 나부끼는데 / 終南歸思送寒烽 : 남산으로 돌아가고픈 마음 찬 봉화에 보내네 / 何時尺劍澄靑海 : 어느 때에 큰 칼로 청해를 평정하고 / 高枕戎荒萬戶封 : 오랑캐 땅 만호후 되어 베개 높이 베려나》하였다.
(9) 동명집(東溟集) 6권 / 칠언율시(七言律詩)106수 / 마천령 위에서 짓다(磨天嶺上作)
《不向磨天嶺上看 : 마천령의 고개 위에 올라 보지 않고서는 / 誰知行路上天難 : 하늘 오르는 것보다 힘든 줄을 뉘 알리오. / 地形自作三韓險 : 지형 절로 삼한 땅의 험한 곳이 되었으며 / 海氣能令六月寒 : 바다 기운 유월에도 추워 덜덜 떨게 하네. / 雪裏千峯連朔漠 : 눈 속 솟은 천 봉우리 사막 땅에 연하였고 / 雲邊一道走長安 : 구름 가의 외로운 길 장안 향해 내달리네. / 美人回首音塵闕 : 고개 돌려 바라봐도 미인 소식 아니 오매 / 欲寄芳華恐歲闌 : 고운 꽃을 보내려도 해 넘길까 걱정 되네》하였다.
위의 글 (8)+(9)을 보자. 이전(以前)에 혹자(或者)가 말하기를, 시(詩) 내용(內容)을 가지고 조선사(朝鮮史)를 말하는 것은, 적절(適切)하지 않다고 하였다. 물론(勿論) 그 말도 일리(一理)있는 말이긴 하지만, 시(詩)는 저자(著者)가 어디에서, 어떤 형편(形便)에 있는가와 밀접(密接)한 관계(關係)가 있다.
특히 〈‘여행(旅行)기록(記錄)’이나, ‘관리(官吏)로 임지(任地)에서, 그곳의 지형지세(地形地勢)와 형편(形便)등을 말하는 구절(句節)’은, 일반 역사서(歷史書)에 대부분 기록(記錄)되지 않은 지명(地名)과 그 지명(地名)이 있는 곳의 지형지세(地形地勢), 기후(氣候), 종족(種族)과 부족(部族), 습속(習俗)등등까지도 알 수 있기 때문에 더없이 소중(所重)한 것들이다.〉
➊〈茫 茫 沙 磧 三 千 里 : 광활한 사막은 3천리에 펼쳐져 있고〉
➋〈雪 裏 千 峯 連 朔 漠 : 눈 속 솟은 천 봉우리 사막 땅에 연하였네.〉하였다.
한반도(韓半島)의 남방(南方)이든 북방(北方)이든,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이북(以北)의 되놈(胡) 땅이든,
흑룡강(黑龍江) 북쪽 “러시아(Russia)” 땅의 툰드라(tundra)지대이건 간에, 사막지대(沙漠地帶)는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이게 핵심(核心)이다.
당시(當時) 조정(朝廷)의 관리(官吏)로 평안도 순변어사(巡邊御史)였던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나 북막(北幕)의 평사(評事)였던〈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 1597~1673〉등이 말하는 「사막(沙漠) 3천리(千里) 또는 사막(沙漠)과 연(連)하였다」는 말은, 그 분들이 후손들을 위해 조크(joke)한 것이 아니다.
황제(皇帝)의 명(命)으로 ‘순안어사(巡按御史) 및 평사(評事)’로써 임지(任地)에서, 그곳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시(詩)라는 매개체(媒介體)를 이용(利用)하여 기록(記錄)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이건 조크(joke)가 아닌 팩트(fact)다.
〈사막(沙漠)이 3천리(千里)에 이어져 있는 곳, 사막(沙漠)과 연(連)이어져 있는 땅은, 오늘날의 중국(中國)의 서북(西北)쪽 지형지세(地形地勢)일 뿐이다.〉 바로 이러한 땅에서, 조선왕조(朝鮮王朝) 및 그 선대(先代) 수천(數千)년 역사(歷史)가 이루어진 곳이다.
「6천리 강남(江南) 땅, 수천(數千)리 중원(中原) 땅, 그리고 3천리 사막(沙漠) 땅, 또 막북(漠北) 수천(數千)리 땅, 이 모두가 조선(朝鮮)의 영토(領土)였다.」는 얘기다.
이건 사관(史觀)이 다르다거나, 반도사관(半島史觀) 또는 식민사관(植民史觀)이라 거나를 따지지 않는다. 자연환경(自然環境)과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사관(史觀)을 뛰어넘는 조물주(造物主)와 관련(關聯)이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좀 더 솔직(率直)해 져야 하지 않을까?
2018년 05월 17일〈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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