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산, 잎 지고
정민 / 한양대 교수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
상국 풍류도 이같이 적막쿠려
슬프다 한 잔 술 되올리기 어려워라
지난날 그 노래 오늘 아침 이름일세
空山木落雨蕭蕭 相國風流此寂廖
惆悵一盃難更進 昔年歌曲卽今朝
-권필(權韠, 1569-1612), 〈과정송강묘유감(過鄭松江墓有感)〉
조선 중기 시인 권필이 스승처럼 따르던 송강 정철의 산소에 들러 지은 시다. 황량한 숲에 분분히 잎이 진다. 비마저 부슬부슬 내리니 처창한 감회를 어쩔 수 없다. 서글서글하던 눈빛과 질탕한 풍류도 이제는 흙 속에 말없이 누워 있다.
“선생님! 술 한 잔 올립니다. 제 절 받으십시오. 누워 계신 그곳은 지낼 만 하신가요? 예전 지으신 노래 〈장진주사(將進酒詞)〉에서, 죽은 뒤 무덤 위에 잔나비 휘파람 불제면 누가 술 한 잔 하자 하겠느냐시며, ‘한잔 먹새 그려. 또 한잔 먹새 그려. 잔나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새그려’하시던 그 노래가 딱 오늘 아침 정경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려. 선생님! 제 술 한 잔 더 받으시지요.” 잔을 따르려다 말고 그는 복받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한다.
천성 강골 시인이었던 권필은 서인 영수로 역시 강골이었던 송강 정철을 평생 앙모하며 사숙했다. 뒤에 정철이 세자 책봉 문제로 책략에 말려 멀리 강계 땅에 귀양가게 되자, 권필은 벗 이안눌과 함께 정철의 집으로 찾아가 의분을 토로했다. 송강은 “이번 길에 천상 두 적선(謫仙)을 만나 보았으니 이 먼 길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하며 기뻐했다.
어지러운 현실에 절망한 권필은 결국 벼슬길을 깨끗이 포기하고 만다. 그 이유를《연려실기술》은 이렇게 적고 있다. “스스로 강직하여 능히 세상과 구차하게 합할 수 없음을 알고, 더욱이 정철이 죽은 뒤에 죄를 입기에 이름을 아프게 여겨 마침내 다시는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다.” 어쨌거나 권필의 삶 속에 정철은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다. 그런 그가 마음으로 섬기던 스승의 무덤 앞에 섰을 때 느낀 사무치는 감회가 저 시 한 수에 담겨 있다. 뒤에 권필은 임금을 풍자하는 시를 썼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입어 혹독한 형벌 끝에 죽고 말았다.
석사논문을 권필의 한시로 준비하고 있을 때 일이다. 첫 구절을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로 번역을 해서 스승께 보여 드렸다. 논문 여기저기를 펼치시던 스승 눈길이 하필 딱 이 구절에 와서 멎었다.
“넌 사내자식이 왜 이렇게 말이 많으냐?” 다짜고짜 말씀하셨다. “네?” 선생님 손가락이 원문 빌 공(空)자를 짚으셨다. “이게 무슨 자야?” 나는 당황했다. “이게 무슨 자냐구?” “빌 공 잡니다.” “거기에 ‘텅’이 어디 있어?” 그러더니 ‘텅 빈 산’에서 ‘텅’ 자를 지우셨다. “‘나뭇잎’이나 ‘잎’이나. 그놈 참 말 많네. ‘떨어지고’의 ‘떨어’도 떨어내!” 다시 쉴 틈도 없이 “부슬부슬했으면 됐지 ‘내리는데’가 왜 필요해? 부슬부슬 올라가는 비도 있다더냐?” 하시며 마지막 펀치를 날리셨다.
이렇게 해서 “텅 빈 산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22자가 “빈 산 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 11자로 딱 반이 줄어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찔했다. 나는 KO 패를 당한 채 아무 소리도 못하고 선생님의 연구실을 나왔다.
권필의 이 시는 스승 송강과 애틋한 사연도 사연이지만, 개인적으로 글쓰기에 얽힌 이 추억 때문에 잊을래야 있을 수 없다. 그 뒤 글을 쓸 때마다 더 뺄 것은 없나, 군더더기는 없나를 살피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박사논문을 쓸 때는 초고를 쓴 뒤 이런 식으로 쥐어짰더니 1,400매 원고가 1,200매로 줄었다. 말은 줄었는데, 생각은 더 많아지는 신기한 체험이었다. 글쓰기 묘리(妙理)를 이 일에서 나는 크게 깨쳤다.**
첫댓글 “넌 사내자식이 왜 이렇게 말이 많으냐?” 다짜고짜 말씀하셨다. “네?” 선생님 손가락이 원문 빌 공(空)자를 짚으셨다. “이게 무슨 자야?” 나는 당황했다. “이게 무슨 자냐구?” “빌 공 잡니다.” “거기에 ‘텅’이 어디 있어?” 그러더니 ‘텅 빈 산’에서 ‘텅’ 자를 지우셨다. “‘나뭇잎’이나 ‘잎’이나. 그놈 참 말 많네. ‘떨어지고’의 ‘떨어’도 떨어내!” 다시 쉴 틈도 없이 “부슬부슬했으면 됐지 ‘내리는데’가 왜 필요해? 부슬부슬 올라가는 비도 있다더냐?” 하시며 마지막 펀치를 날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