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을 허물다 /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장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 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 마른 귀지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누루가
이틀 저녁은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갔다
겨울에는 토기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 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 다니는 하루 수백 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성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를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 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 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2012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
<2013년 오늘의 좋은 시>
시인의 고향은 충남 청양의 시골 어디이다. 이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아직도 그곳에는 시인의 옛집이 남아있는 듯하다. "고향에 돌아와" "기울어진
담장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고 하는 표현이 그것을 말해준다.
하여튼 그렇게 하여 "담장 없는 집이 되었"으니 "눈이 시원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이 표현은 사실에 기반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이는 그의 정신적 행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들 표현에는 마음에 담장이나 대문이 없는
삶을 택했다는 뜻도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무엇보다 먼저 호연지기가
생긴다. 이런 이유에서 그가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둥치 째 들어왔다"고 노래하는 것이리라.
이하의 표현도 마찬가지인데, 정작 주목이 되는 것은 이들 표현이 만드는 웅혼한
기상이다. 특히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와 같은
구절은 시인의 호연지기를 느끼게 하고도 남는다. 급기야 그는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를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 볼 참이다/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와 같은 과장된 표현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웅혼하고 장엄한 기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이 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래도 그것이 한반도 이남 서쪽의 지리에만 갇혀 있는 것은 한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해설 : 이은봉시인, 광주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공광규 시인 문학연보
1960년 4월 3일(음력 3월8일) 오전 4시 서울 돈암동 출생. 충남 청양에서 성장.
동국대 국문과 및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문학박사)
1986년 월간 《동서문학》 등단
1987년 시집 『대학일기』(실천문학사) 출간.
1989년 시집 『마른 잎 다시 살아나』(한겨레) 출간.
1989년 제1회 신라문학대상 수상.
1993년 아동전기 『성철스님은 내 친구』(재능출판) 출간
1996년 시집 『지독한 불륜』(실천문학사) 출간
2004년 아동전기 『마은동자』(화남) 출간.
2004년 시집 『소주병』(실천문학사) 출간.
2005년 논문집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푸른사상) 출간.
2005년 아동전기 『윤동주』(대교) 출간.
2005년~2011년 계간 《불교문예》 편집부주간, 편집주간
2006년 시론집 『시 쓰기의 읽기와 방법』(푸른사상) 출간
2008년 시집 『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 출간
2009년 시 창작교재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화남) 출간
2009년 제4회 윤동주상 문학대상 수상
2010년 제23회 동국문학상 수상.
2010년 제1회 김만중문학상 수상.
2011년 제16회 현대불교문학상 수상
2012년 제1회 고양행주문학상 수상
2013년 ‘2013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 선정.
2013년 그림책 『구름은 마법사』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