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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학에스프리 원문보기 글쓴이: 박세희
(허형만 시인과의 대담)
인간성 옹호와 깊은 생명감에 젖은 시인
대담 : 양해열(시인)
장소 : 전남 순천시 <순천시립도서관 3층 ‘시인 허형만 시 창작실’>
일시 : 2012년 10월 9일 오후 2시
한국 시단에서 ‘서정의 적자(嫡子)’로 각인된 허형만 시인을 전남 순천시 소재 순천시립도서관 ‘허형만 시 창작실’에서 만났다. 지난 10월 9일 오후 2시쯤이었다.
마침 한글날이라 대담의 의미가 더할 것 같아 만나러 가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편안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휘파람도 불며 순천 시내를 가로지르는 동천을 따라 걸으며 코끝에 와 닿는 가을을 만끽했다. 돌고 도는 이 바쁜 세상, 잠시 ‘서정’적인 인간이 되어 걸어보기로 했다. 인간적인 그와의 만남이니 말이다.
준공한지 얼마 되지 않은 현대식 건물 3층에 위치한 창작실에 들어섰을 때 시인은 동쪽으로 난 창문 밖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鶴처럼. 순천에서 가장 높은 산인 봉화산 자락이 청명한 가을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풍경은 그야말로 眞景山水 한 폭이었다. 산이 강이 바람이 가을이 구름이 창문 액자에 배접되어 걸렸는데 시인은 그걸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더군다나 그 산 너머에는 시인이 태어난 고향집이 있는데...... 오늘따라 시인의 눈매가 더욱 그윽하게 다가왔다. 만나는 사람마다 항상 따뜻하게 대하는 시인과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손수 따라주는 작설차를 마시며 대담을 시작했다.
허형만 시인은 필자인 나에게는 순천고등학교 대 선배님이자 나를 시단으로 이끌어준 선생님이기도 하다. 어렵고도 조심스럽지만 천성적으로 타고난 시인의 배려 덕분에 지난 10여 년 동안 편하게 뵙고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었다. 시단에서 ‘따뜻한 시인’, 하면 누구나 허형만 시인을 떠올리지 않을까? (그러나 교수직에서 퇴임한 지금까지도 ‘교수님’이라 부르는 호칭은 못 바꾸고 있다.) 오늘 대담은 독자에 대한 예우 상 상호 높임말로 옮기고자 한다.
양해열 : 교수님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강의하시러 순천에 오시는데, 제가 사업상 바빠서 자주 뵙질 못했습니다. 한 달도 넘은 것 같습니다. 여름보다 약간은 수척해 보이시는데 혹시 가을을 타시는 건 아닙니까?(웃음)
허형만 : (웃음) 그렇게 보인다니 농담 한 마디 하겠습니다. 나는 요즘 정신적인 다이어트에 더 열중하고 있습니다. 수확의 계절이지만 걷어 들이는 것보다는 덜어 내는 것 또 그것을 다시 나눠주는 것, 이런 수양을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물론, 시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만. 양 시인도 수척해 보이는데 혹시 그런 건 아닌지요?
양해열 : 예. 그렇게 말씀하시니 먼저 근황을 여쭤보겠습니다. 30여 년간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셨고 지난 2월에 정념 퇴임하셨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요?
허형만 : 나름대로 무리 없이 교단생활을 잘 마무리했으니 몸과 마음을 찬찬한 그늘에 내려놓고 당분간 쉬면서 여행도 하고 독서도 하고 시 창작도 하려고 했는데 그게 뜻대로 되진 않습니다. 굳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제가 좀 일복이 많아요. 하지만 태만 속에 ‘시’ 없고 바쁜 와중에 ‘시’가 있다는 말을 교훈으로 삼고 있지요. 바쁘게 살아온 생활패턴을 바꾸지 않고 지낼 수 있다는 것도 ‘시인’에게 있어서는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지요. ‘시’만 해도 그렇습니다. 물론 ‘시인’이 ‘시’를 쓰고, ‘시’를 쓰니까 ‘시인’이겠지만, 그 ‘시’가 평상시 ‘시인’의 사고와 행동 곧 실생활과 이질성을 보인다면 ‘시’도 ‘시인’도 진짜가 아닌 세칭 ‘짝퉁’이겠지요. 작품성과 형식을 떠나서라도 시는 곧 시인의 말이니, 지금까지 내가 일관성 있게 해 온 말처럼 모든 일에 최선을 다 할뿐만 아니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시인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사회적 책임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단도 하나의 사회이니까요. 그래서 요즘은 창작에 방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저에게 맡겨진 시 창작 강의, 세미나 그리고 각종 행사 등에 조용히 참여하고 있습니다. 물론 타의적 필요에 의한 일들이 많지만, 조금 전에 말했다시피 ‘타고난 일복’이라 여기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시단에서 활동을 하다 보니 내 입장보다는 상대방의 처지를 먼저 생각하는 습관이 몸에 밴 것 같습니다.
양해열 : 예, 그러시군요. 저도 항상 남을 먼저 배려하는 모습에 많은 감동을 받곤 합니다. 특히 개성 강한 사람들의 집합소(웃음.......)인 한국 시단에서 인간관계가 가장 원만한 시인으로 정평이 나 있으니 더더욱 그렇지요. 저도 농담 한 마디 하겠습니다만 혹시 다른 시인들하고 다투거나 싸워보신 적은 있으신지요? 논쟁이 아닌, 그러니까 ‘피지컬’을 의미합니다만......
허형만 : 나도 인간인데 왜 불쾌하고 화날 때가 없겠습니까. 잘못이 분명한데도 상대방이 그걸 인정하지 않고 우겨대는 바람에 황당한 경우도 몇 번 있었고 또 오해를 해서 언쟁을 벌인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거나 상대방을 폄하하는 발언을 해 본 적은 없습니다. ‘피지컬’은 더더욱 그렇고......(웃음) 참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입니다. 사람은 특히 시인은 그래야 한다고 스승님들께 가르침을 받았지요. 물론 시인이기 전에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하겠지만......
양해열 : 예, 그런 한결 같은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오늘날 가장 인간적인 서정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게도 큰 교훈이 될 수 있도록 마음속에 잘 새겨놓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엔 방향을 조금 바꿔서 ‘고향과 시인’이라는 측면에서 몇 말씀 듣고자 합니다. 지금 대담을 나누고 있는 이 장소는 순천시립도서관 3층에 자리한 ‘허형만 시 창작실’입니다. 조금 전엔 1층에 자리한 ‘시인 허형만 관’도 둘러보았습니다만 정말 많은 도서를 기증하셨더군요. 그 배경부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허형만 : 아시다시피 저는 고등학교 국어교사 10년, 대학 강단에서 30년간 국어국문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1973년에 등단했으니까 올해로 시인 노릇도 만 40년 한 셈입니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입니다. 그동안 교수로서 시인으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공인 국어국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시를 써왔습니다. 성과에 대해선 말을 아끼겠습니다만 정말이지 열과 성을 다했습니다. 게으르지 않는 선생이 되려고 노력했으며 좋은 시인은 아니더라도 나쁜 시인 소리는 듣지 말자는 마음가짐으로 항상 낮은 자세를 견지하며 우주 만물의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살아온 날들에 대한 후회마저도 남지 않더군요. 하지만 고향 ‘순천’을 생각하면 왠지 한 쪽 가슴이 시려 왔습니다. 누군들 고향에 대한 향수가 없겠습니까만 저의 경우는 단순한 그리움이 아닙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떠난 지가 근 50여년이 됩니다. 대학시절 군대생활은 그렇다 치더라도 고향을 지척에 두고 같은 전라남도 내인 목포대학교에서 교수생활을 했고 광주광역시에서 주거했으니 고향에 대한 불충이랄까 미안함이랄까 예의 없음이랄까 표현이 좀 그렇습니다만 하여튼 마음이 편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퇴임과 동시에 50여 년간 수집한 도서 1만 3천여 권을 순천시에 기증하기로 마음먹었던 거죠. 물론 목포나 광주는 나에게 있어 제2의 고향입니다만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부모님의 땅이자 내가 낳고 자란 곳이 우선 아니겠습니까?(웃음......)
잠시 말을 멈춘 시인은 작설차 한 잔을 우려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도 시인의 그윽한 눈매를 훔쳐보며 동양화 한 폭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고향...... 시인에게 있어 고향은 무슨 의미인가, 그 이전에 고향에겐 시인이 무슨 의미일까...... 차 한 잔을 마신 시인이 다시 고개를 돌린다.
말이 끊겼는데 다시 이어가도록 하죠. 그래서 지난 6월에 순천시와 도서 기증 협약을 했고 기왕이면 ‘재능 기부’까지 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1층엔 ‘허형만 관’을 개관하여 기증 도서를 비치하였고 순천 지역 시인지망생들을 위해 화요일과 수요일, 주 2일 간 시창작지도와 독서와 글쓰기 강의를 떠맡게 되었지요. 매주 경기도 성남 집에서 4시간 여 고속버스를 타고 와야 할 뿐만 아니라 모텔에서의 숙박, 식사 문제 등 불편하고 힘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내 고향이기 때문에 시인으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순천시의 요구대로 성실히 응하고 있습니다.
양해열 : 예, 혹시 목포나 광주에서 배신자라고 쳐들어오는 건 아니겠지요?(웃음......)
허형만 : 그렇게 하라지 뭐, 이젠 무서울 게 없는 나이여!(웃음......)
허형만 시인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워즈워드, 라이너 마리아 릴케, 타고르 그리고 영랑, 미당 등의 작품을 닥치는 대로 읽었으며 국어 선생님이셨던 문병란 시인께 시를 배웠고, 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시에는 편운, 다형 선생님께 시를 배웠다. 남도라는 태생적 환경의 영향으로 소리, 특히 민요와 판소리 가락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정형시 공부도 많이 했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는 율격과 함께 언어를 압축하는 힘이 느껴진다. 예의 바르고 부지런한 시인은 인간과 사물 사이에서 항상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등단 이후 40년간 다수의 평론집과 신작 시집 13권, 중국어 번역시집 1권, 금년 초 활판시선집 『그늘』을 비롯한 시선집 3권을 출간했다. 시인의 작품세계는 ‘우주와 사랑’이 아닐까? 아니, ‘삶과 열정’이 아닐까? 혹은 ‘긍정과 남도의 정서’는? 지금부터 그의 작품세계로 들어가 보겠다.
양해열 : 진솔한 말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고향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해주실 걸로 믿습니다. 이어서 작품세계로 방향을 돌려, 초기 시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기저에 흐르는 시 정신과 시적 흐름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초기의 시는 내용과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순수서정의 전통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김현승, 조병화 두 분 선생님들의 영향이 컸겠지요. 그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의 성향이 두드러지는 게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시대적 상황이 시인과 시를 그렇게 끌고 갔으리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는 사랑과 생명, 인간성 옹호 등 시인만의 독특한 서정의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직접 말씀해 주시면 앞으로의 허형만 시인연구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허형만 : 사실 시인이 자기 입으로 자신의 시적 경향과 변모 양상을 말하기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 모순도 분명 있습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간략하게나마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가 생각하는 좋은 시라는 개념부터 말하겠습니다. 누구나 좋은 시를 쓰고 싶어 합니다만 이는 완벽한 독자의 몫입니다. 세상에 나쁜 시는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좋은 시는 분명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다만, 제자들에게도 귀가 닿도록 강조해 왔고 양 시인도 여러 번 들었겠습니다만, 시인이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끝 붓끝으로 쓰는 것이 시가 아닐뿐더러 참된 사람이 쓴 시가 아니면 좋은 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훗날 역사가 그럴 것이고 내가 쓴 시가 나를 평가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일관되게 우주와 그중 일부인 우리 사는 세상에 겸손하고 사람들에게 공손한 시인이 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젠틀맨, 따뜻한 사람 등의 과분한 별명도 얻었습니다만 공치사만은 아니고, 저는 적어도 마음만은 그렇게 가져왔고 행동에 옮기려고 노력해 왔다고 믿습니다. 그런 이유로 내 시의 심층부에 ‘사랑’이 배어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은 마음 속 깊이 천착하고 있는 내 시의 정신입니다. 흔한 주제인 것 같으나 영원한 주제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내 시의 흐름의 갈래를 규정하자면, 초기인 1973년 등단 이후부터 1978년까지의 시는 토착적인 정서를 지닌 순수서정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2기인 1979년 제2시집 「풀잎이 하나님에게」부터 제9시집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1995)」까지는 ‘진솔한 삶의 역사와 향토적 서정’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무렵은 모두가 겪었다시피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한 리얼리즘 성향의 작품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시인으로서 비민주와 독재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란 ‘펜’과 ‘저항 시’밖에 없었으니 더더욱 그렇지요. 이후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민주주의가 성숙되기 시작하면서 내 시도 조금씩 변해서 인간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면모를 보이게 됩니다. 제3기로 분류하는바 『비 잠시 그친 뒤(1999』, 『영혼의 눈(2002)』, 『첫차(2005)』, 『눈 먼 사랑(2008)』, 『그늘이라는 말(2010)』 등입니다. 특히 제1, 2기 무렵인 1973∼1995년과 제3기인 1995년 이후 현재까지의 시는 형삭과 내용면에서도 많은 변화를 보입니다. 즉 등단 이후 제2기까지는 급변하는 시대의 질곡을 형상화한 것이 많고 그 이후의 작품들은 내면의 깊이와 고요를 획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양해열 : 그렇다면 제1기는 전통서정시가 주류를 이루고 제2기는 현실인식을 근거로 한 리얼리즘의 힘이 주된 코드로 작용하는 차별성을 보인다고 규정할 수도 있겠네요?
허형만 : 네, 초기 시는 대체적으로 우리 전통성에 천착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고전의 숨결과 그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있었던 시절이지요. 나만의 시어 선택이나 남도 가락의 조율 등에서 두드러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후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지식인인 시인들은 무력감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현실인식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시를 쓸 수밖에 없었지요. 더군다나 제 경우엔, 5월 항쟁 등 아픔의 주된 무대가 광주였으니 더더욱 절실했지요. 기억에 남는 것은 1981년 실천문학사의 무크지 『이 땅에 살기 위하여』와 자유실천문인협회와 함께 1984년 창작과 비평사의 17인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참여했는데 당시 신문에 실린 글이 통째로 삭제 당하기도 했지요. 또 동인지 <원탁시>에 실린 「흔들리는 차 속에서」라는 작품이 문제가 되어 동인지 회수령이 내려지고 안기부 출두명령이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1981년 9월엔 ‘반체제 시인’으로 밀고당해 임명 1주일 만에 대학에서 쫓겨났다가 이듬해 다시 목포대학교에 복직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알게 모르게 많은 고초를 겪은 그 시절이 있어서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이라고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추억하곤 합니다.
양해열 : 네, 역사의 질곡 앞에서 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시로서 저항하는 방법 외엔 없었겠지요. 시인으로서 역사 앞에 할 말은 다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시인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생각해보며 이쯤에서 시 창작과 관련된 앞으로의 계획을 여쭙고 싶습니다. 사적인 것을 포함한 질문입니다.
허형만 : 네, 나는 평상시 “시인은 죽고 시가 살아야 한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이 말은 쓰인 작품이 중요하지 시를 쓴 시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유명 시인의 시라면 무조건 좋다는 식의 수용은 경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시를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시 한 편 쓸 때마다 홍역을 치르듯 아니 목숨을 걸듯 최선을 다해 쓰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시인이 할 일입니다. 나는 앞으로도 이런 마음 자세로 창작에 전념할 것입니다. 또한 오래전부터 모국어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시인의 책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감흥이 있고 맛깔스런 언어들을 찾아내고 시 속에 녹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겠지요. 나는 시가 너무 어려워지는 것을 경계합니다. 새로운 시는 낯설고, 낯선 시는 소통이 불가하다는 공식이 일부 부류에서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주로 젊은 시인들에게서 그런 경향이 보이는데, 시를 유행하는 액세서리쯤으로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통이 되는 시라고해서 새롭지 않은 시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서정시의 나아갈 길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더욱 인간성을 옹호하고 깊은 생명감에 젖은 시를 위한 길이 서정시가 나아갈 길임을 믿습니다. 이 정도로 답변이 된 것으로 간주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이제 퇴임도 했으니 앞으로는 양 시인과도 자주 만나 막걸리도 한 잔 하면서 젊어지는 방법을 찾아봐야겠어요.(웃음......)
양해열 : 오랜 시간 동안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시기 바랍니다.
햇볕이 아주 좋은 10월 한글날에 만난 허형만 시인은 ‘영원한 청년’이었다. 짧지만 깊은 비의를 가진 그의 시편들은 어쩜 시인을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수확의 계절, 잘 여문 낱알처럼 말수가 부쩍 적어진 시인은 또 그렇게 자신만의 알찬 시세계를 모국어의 텃밭을 굳게 지켜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