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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공훈록
유공자정보
관리번호/34391
성명/전석윤
한자/全錫允
이명/全錫鐸,金錫鐸
성별/남
생년월일/1894-11-05
사망년월일/1966-11-10
본적/경상남도 합천 双冊 泗陽 414
주소/慶南 陜川 双冊 泗陽 414
공적정보
운동계열/3.1운동
수록정보/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포상년도/2005
훈격/건국포장
공훈록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의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작성한 이른바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 날인하였다.
3·1운동 직후 김창숙은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유교가 이번 독립운동에도 참여치 않았으니 세상에서 오유(汚儒) 부유(腐儒)라고 매도할 때에 우리는 어찌 그 치욕을 견디겠는가?”라고 한탄하고 유림을 중심으로 한 국제 활동을 추진하였다.
제1차 유림단 운동 또는 파리장서 운동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동참하지 못했던 유림 137명이 서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민족대연합전선을 완성하였다. 또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림계에도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면우집(아세아문화사, 1894) 제4권 762∼763면
벽옹일대기(心山記念事業會, 1969) 98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137면, 제8권 935면
3·1운동 50주년기념논집(동아일보사, 1969) 296면
儒林의 獨立運動(崔寅찬, 2003) 236∼237면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934) 247∼252면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1968) 제4권 255∼257면
韓國儒林獨立運動 巴里長書略史(巴里長書碑建立委員會, 1973) 6면
제2장
파리장서(長書)
제1절 유림의 태도와 파리장서
1. 파리장서(長書)운동의 동기
민족대표33인의 이름으로 독립을 만방에 선언하고 온 민족이 거족적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면서 총궐기한 것은 유구한 역사 민족 혈관에서 약동하는 자연 발생운동 이라 뉘라서 감히 이 정의의 대열을 막을 수 있었으랴? 오직 강도적 일본의 강권주의 침략주의자들 만이 이 운동을 탄압하라고 상투적인 만행을 자행할 따름이었다.
이 운동을 지도한 33인의 대표의 구성 인물은 천도교·기독교·불교등 3대 종교단체의 소속으로 되어 있었으나 유독 유림단의 이름만이 빠져 있다는 것은 많은 의문을 남겨 놓았다.
이조(李朝) 5백년의 터전을 마련한 정치 사상적 뒷바라지는 물론 일상 생활에 까지 깊숙히까지 침투한 유교와 유림단이 제외되고 지금까지 이단시(異端視)해 오던 다른 종교단체만이 이 나라의 구국충정에 타오른 인상을 주게 되었다는 사실은 유림의 입장으로 부끄럽고 원통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유림계에도 우국지사며 한말의 명성을 떨친 큰서비 면우 곽종석이며 또는 시대를 앞서 내다 보고 선진적 식견을 가진 우국지사 심산 김창숙 같은 분이 있었으나 그 반면에는 아직도 18세기적 민족주의 사상과 봉건적 쾌쾌묵은 사상이 머리속에 도사리고 있는 일부 인사가 남아 있어서 지난날 우리 역사를 그릇친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못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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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의병항쟁 시기 특히 전기 의병항쟁 시기에도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에 대하는 대항의식은 같으면서 동학운동을 이단시 사갈시하고 타매하던 사고 방식을 아직도 씻어버리지 못한 일부 인사가 있어서 손병희 등 동학혁명에 관여하였던 인물은 상놈이라 하고 시대 착오적 사고방식을 불식치 못한 인물이 유림중에 기생하고 있어 의식적으로 이 운동에 관여할 것을 회피하고 있었지나 않았을가?
3·1운동이란 이 민족적 회천의 대업을 추진하고 있는 손병희 등 선각자들이 명실이 상부한 거족적운동으로 전개시키기 위해서는 과거에 반민족적 과오를 범한 자라도 모두 포섭한다는 큰 아량을 가지고 이완용(李完用) 같은 인물까지 민족대표 중에 한 사람으로 넣으려고 포섭한 사실까지 있었는데 억하심정으로 유림을 민족대표 중에 넣으려는 교섭을 아니하였을리가 없었다.
혹은 33인중 불교대표 한용운(韓龍雲)의 말을 인용하여
“3·1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 있어서 주최측에서는 곽종석을 유림대표로 내정하고 한용운으로 하여금 곽종석(郭鍾錫)을 거창으로 방문한 즉 곽종석은 직석에서 선언문에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그러나 연락의 지연으로 마침내 서명에 불참되었다 하고 또 한용운의 법정조서에는 곽종석을 거창으로 찾아 갖다가 24일에 상경하여 본즉 일본 정부에 제출할 서류 이외에는 이미 인쇄가 완료되었다.”
고 운운한 기록이 있으나 이런것은 모두 변명에 불과하여 유림으로서는 3·1운동 주최측에 가담해서 적극적으로 앞장서지 못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김창숙(金昌淑)이 3·1운동 당시 성태영(成泰英)·김정호(金丁鎬) 두 동지에게 언명한바
“오늘날 우리들이 왜적의 노예가 된 것도 유림의 부패한 까닭이요, 또 오늘 선포한 거족적이며 역사적인 독립선언서에 유림대표가 참가치 못한 것도 우리 유림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수치요, 충격적인 만큼 지금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대외활동으로서 전국 유림을 총망라하여 독립청원서를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우리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는 것이오. 대내활동에 있어서는 손병희와 손을 잡고 유기적으로 국내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당면급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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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설파하였다.
심산·면우 같은 거성이 있어서 유림계의 면목을 어는 정도 세웠다고도 할수 있으나 거시적으로 볼 때에 파리장서운동이 3·1운동에서 소외된 수치감 열등감에 대한 자위(自慰)는 될는지 몰라도 3·1운동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크게 평가할 만한 운동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 이 파리장서운동이 일으켜진 동기는 어디에 있었는가? 유림측의 설명에 의하면 (1) 경술국치 (2) 고종이 독살된 것 (3) 민족자결운동 자유민주주의사상의 팽배 등이 파리장서운동을 일으킨 원인이라 한다. 또 유림으로서 충격적 사실이 있었던 것이니 그것은 일제가 유림이란 명의를 도용하여 일본 정부에 소위 ‘독립불원서’ 즉 독립을 원치 않는다는 서면을 제출하였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사실상의 종식은 1918년 11월경이었는데 그 당시 일제는 전후 평화회의가 열리게 되면 한국문제가 등장될 것이라는 점을 미리 내다 보고 그 대비책으로 이완용을 정당대표로 김윤식(金允埴)을 유림대표로한 독립불원서를 조작하여 일본 정부에 제출케 한 사실이 있었다.
이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은 서울 유림들은 일제이 이러한 간계를 분쇄하기 위하여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해야겠다는 움직임이 여기 저기서 싹트고 있었다.
이 무렵 면우 곽종석의 문인 윤충하(尹忠夏)는 서울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보고 1919년 2월 19일 거창으로 곽종석을 찾아갔다.
곽종석은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때에는 서울로 와서 상소로써 과감한 항쟁을 할 뿐 아니라 은퇴생활을 하면서도 항시 해외의 망명지사들과 은밀한 연락을 갖고 한국의 독립은 오직 국제정의에 호소해야 된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곽종석을 찾은 윤충하는 파리평화회의에 대한 내용과 전망 그리고 독립불원서 문제로 인한 서울 유림들의 동태를 자세히 보고하면서 이즈음에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국제여론에 호소하는 것이 우리가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과 또 곽종석이 이 운동에 대표가 되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다.
그리고 실행 방법은 고종의 인산이 3월 1일로 공포되었으니 그때를 이용하면 전국 유림들의 서명운동도 용이하다는 사실도 아울러 논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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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석은 즉석에서 쾌락하면서 몸이 자유롭지 못하여 자기를 대표할 청년을 서울에 파견하여 상의하게 하겠다고 윤충하를 돌려 보냈다. 그날 저녁에 서울에 있다는 김창규(金昌圭)가 찾아와서 곽종석의 면회를 청하였는데 윤충하와 꼭 같은 의견이었다. 곽종석은 자기의 조카 곽윤(郭奫)으로 하여금 자기의 의견을 전달하도록 하고 격려하여 돌려 보냈다.
그뒤 곽윤과 김황(金榥)을 서울에 보내서 다방면으로 정세를 알아 보고 윤충하와 상의하여 추진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장서운동의 출발동기는 (가) 민족자결주의의 신조류 (나) 일제의 사주를 받은 유림대표의 ‘독립불원서’에 대한 반박의 표시 (다) 고종황제 급서에 대한 국민의 충격 등인데 그 과정이 3·1운동과 다른 점은 3·1운동은 국민봉기로써 대내 투쟁을 제1차적인 목적으로 하는 반면 장서운동은 유림의 총의를 비밀리에 망라하고 그것으로 국제무대에서 공개적으로 투쟁하려는데 그 차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유림측이 설명하는 논리이고 실제로는 3·1운동에 소외되었던 반발의식의 작용도 없지 않았다.
2. 파리장서 운동의 착수
처음 이 운동을 일으켰을 때는 장서란 말은 없었다. 유림간에 서로 연락하는 용어(用語)는 ‘독립청원서’였다.
그뒤 이 거사가 발각되어 일제측에서 취조할 때 본 사건의 이름을 ‘유림단사건’이라 붙었고 해방후에는 ‘파리장서’라고 호칭하였으니 즉 파리에 보낸 긴 편지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러진 것이다. 이 운동은 이미 서술된 바 윤충하·곽윤·김황 등이 곽종석의 지시에 따라 활동이 시작되었고 또 그와는 별도로 성대영·김창숙과의 서면 연락에서 3·1운동을 기점으로 파리장서 계획을 세우고 활동을 준비하던 중 김황·곽윤 등을 만나 합류하게 됨으로써 본 운동의 완성을 보게 되었던 것인데 김창숙과 성태영과의 관계 동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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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9일 성주(星州)에 있는 김창숙에게 서울로부터 성태영의 편지가 전해왔다. 그 내용은 고종황제 국장일을 기하여 대사건이 책동되고 있으니 빨리 상경하라는 것이었다. 편지를 받아 본 김창숙은 모친의 병환으로 즉시 상경하지 못하고 25일에야 서울에 올라와서 즉시 성태영을 만나니 각 종교대표들은 3월 1일 국장일을 기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유림대표 김창숙을 독립선언서에 연서할 것을 고대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선언서의 인쇄가 완료되어 서명의 기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쉽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3월 1일은 닥쳐 왔다. 김창숙은 성태영·김정호(金丁鎬)와 함께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을 듣고 군종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오랫동안 쌓이고 쌓였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렇게도 우렁차던 만세소리는 눈물과 울음으로 변하고 말았다.
김창숙은 성대영·김정호와 밤을 새워가며 실천방법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즉 독립청원서의 기초, 대표의 추대, 모금의 방법, 전국 유림의 동원 등 치밀한 계획이 마련되었다.
김창숙도 곽종석의 문인인 만큼 곽윤을 통하여 서울에 온 김황·윤충하 등과 만나 합류하기로 결론짓고 일을 추진하였다.
3. 서명활동과 장서의 문안
이때부터 각자는 손이 닿는대로 동지 규합에 전력한 결과 3월 4일에는 유림계의 유망한 인사들이 다수 포섭되었다. 이날 성태영 집에서 그동안 동조자들이 자리를 같이하면서 지방 유림들에 대한 동원 대책을 논의한 결과 다음과 같이 지역별로 분담하기로 하고 3월 15일경에 다시 서울에서 모임을 갖도록 약속하였다.
이중업(李中業)은 강원도와 충청북도를, 길정호는 충청남도를, 성태영은 경기도와 황해도를, 유준근(柳濬根)은 전라남북도를, 윤중수(尹中洙)는 함경남북도를, 김창숙은 경상남북도를, 유진태는 평안남북도를, 각각 담당케 하고 즉시 행동을 개시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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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한편 김창숙은 곽윤과 김황을 찾아가 곽종석에게 독립청원서의 문안 작성을 요청하는 일과 그 동안의 경과 보고가 시급하니 그대들이 거창으로 내려가면 자신도 성주를 다녀서 곧 뒤쫓아 가겠다고 약속하고 곽윤과 김황은 거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때는 3·1운동 직후로서 전국 각 지방에서는 만세소리가 그칠 날이 없고 곳곳에서 학살·투옥·도피 등 수라장이 되는 한편 일본 헌병들은 개미떼처럼 쏟아져 나와 경계가 삼엄하였다.
김창숙은 3월 8일 서울을 떠나 성주 본가에 이르니 그 모친의 병환은 여전하였다. 그 다음날 곽종석을 찾아갔다.
곽종석은 반갑게 맞으면서 “이제 전국 유림을 일으켜 우리의 대의를 세계 만방에 천명케 되었으니 곧 이몸이 죽을 곳을 얻은(死得其所) 것이라 하고 독립청원서 문안을 효당 장석영(張錫英)에게 이미 작성을 부탁하였으니 거기에 가서 찾으라”하였다.
김창숙은 그 길로 장석영을 찾아가지 않고 김천을 거쳐 영주(榮州)에 도착하여 이교인(李敎仁)·김교림(金敎林) 등을 만났다. 김창숙의 돌연한 여정의 변경은 자기가 담당한 유림들의 서명도 중하지만 자금 조달이 시급한 문제였다. 이 거사 관계로 해외에 갖고 간 자금의 대부분이 이 지역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김창숙은 해저(海底)·유곡(酉谷) 등지를 역방하고 안동방면의 용무는 봉화유림들에게 부탁한 뒤 장석영을 만나기 위하여 다시 성주로 향하였다. 장석영은 영남에서 손꼽히는 큰 선비였다. 문안을 요구했다. 장석영은 “문안 원문은 이미 곽종석에게 참고로 보냈다.”하면서 사본 1통을 내어준다. 김창숙은 그 문안을 읽어 보니 약간 미흡한 점이 없지 않으나 앞으로 곽종석과 상의할 것을 생각하고 다시 거창으로 향하였다.
김창숙을 만난 곽종석은 “일전에 장석영으로부터 보내온 문안을 보고 그대가 다시 찾아올 것을 생각하며 내가 별도로 집필한 것이 있다.” 하면서 그 초고를 내어 준다. 이를 받아 보니 그 내용이 심히 해괄간명(該括蕑明)하였다. 이러한 경로를 거쳐 작성된 것이 현재의 파리장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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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석은 사랑하는 제자에게 막중한 국사를 맡겨 왜적의 삼엄한 경계에서 기약도 없이 만리이역으로 떠나 보내는 작별의 순간인지라 만일을 염려하여 심중 주도하였다. 김창숙으로 하여금 독립청원서를 외우게 하고 곽윤을 불러서 청원서를 별도로 붓으로 쓰게 하여 그것으로써 신총(新總)을 만들어 미투리한 겨례를 준비하도록 분부하고 또 부탁하기를 “중국에 가서 우리나라 혁명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겠지만 중국 정부와도 손을 잡아야 하는데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중국학계의 석학이며 참의원의원인 이문치(李文治)를 만나 보라. 그분은 중화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손일선(孫逸仙)을 움직여 줄 것이다. 이문치는 몇해 전에 나를 찾아와서 나와 기거를 같이 하면서 여러달 동안 정치·사회·문학 등 흉금을 털어 놓고 사귄 친구이다”하였다. 김창숙은 그후 이문치를 통하여 중국 정부로부터 많은 협조를 받은 바 있었다.
그는 또 끝으로 “이번 거사는 모험을 각오한 일대 장거인 만큼 단신보다는 그대의 협조자가 필요하니 이현덕(李鉉德)을 동반하는 것이 그대의 의향에 어떠한가?” 김창숙은 쾌히 승락하는 한편 이현덕(李鉉德)과 불일간 서울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그날밤 10시경에 청년한 사람이 황급히 들어 와서 『일본 헌병들이 김창숙을 찾고 있으니 속히 피하라”한다.
김창숙은 즉시 그 사람의 안내로 이웃 집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그 이튿날 아침 일짜기 서울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서울까지 오는 도중에서일본 헌병의 수사망에 쫓겨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서울에 도착하니 김정호는 김창숙을 기다리다 못해 성주로 찾아 내려 갔다는 것이다.
김창숙은 그 다음날(15일) 각 지방으로부터 돌아온 윤중수(尹中洙)·성태영·유준근·이중업(李中業)·유진태 등과 함께 성태영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각 지방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면서 앞으로 추진할 대책을 협의한 바 있었다.
날이 갈수록 일본 헌병의 경계가 심각하여 일보도 전진할 수 없다는 것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공통된 체험론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시일을 천연한다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가 위험을 기다리는 결과가 되는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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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활동은 여기서 중지하고 파리행 출발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데 의견이 일치되었다.
4. 유림의 통합
김창숙은 유진태의 소개로 이득년(李得年)의 집에서 우연히 임경호(林敬鎬)를 만나게 되었는데 임경호는 지산 김복한(志山 金福漢)의 문인이다. 김복한은 을미사변 후 의병을 일으킨 바도 있었고 이완용 등 매국적을 규탄하는 글을 상소하였다가 옥고를 겪은 바 있는 기호(畿湖) 유림의 영수였다.
영남유림들의 경우와 같은 동기 및 목적에서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欀鎭)·최중식(崔中軾) 등 17명의 연서로 된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여 그 발송을 임경호에게 부탁하였고 임경호는 같은 문인인 황일성(黃佾性)·이영규(李永珪)·전용학(田溶學) 등과 함께 발송을 예의 준비 중에 있었다.
유진태는 김창숙에게 임경호를 소개하면서 “서로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같은 취지와 같은 목적으로 된 독립청원서를 휴대한 양 대표가 우연히 자리를 같이하게 된 것은 기연이라” 강조하였다.
두 대표는 서로 손을 잡고 공동행동에 합의한 후 유선 양측 문면부터 검토하기 시작 하였다. 기호의 문면도 그 내용은 대체로 영남본과 비슷한 것이었지만 영남본이 보다 간명하여 영남본을 채택하기로 결정하고 서명자의 명단은 양쪽의 구별이 없이 혼합하여 열기하기로 하였는데 서명자는 모두 137인이었다. 그리고 파리에 파견할 대표지명에 있어서는 임경호의 자발적인 제의로써 김창숙이 혼자 맡기로 하였다.
이로써 3백여 년간 서로 반목하던 파벌과 당파색을 초월하여 국가의 독립이란 대의 앞에서 전국유림의 대동단결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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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장도에 오르는 실정과 수난
1. 떠나는 과정과 장서 발송
다른 준비는 거진 되었으나 조속한 출발을 위하여 구체적인 준비는 쉬운일이 아니었다. 파견대표로는 김창숙을 수석으로 하고 이덕현(李德鉉)을 차석으로 정하였으나 활동무대가 중국인 만큼 중국어에 능통하면서도 독립정신이 투철한 자의 통역이 필요 하였다. 물색한 결과 박돈서(朴敦緖)를 동반하기로 결정하였다. 중국에 가면 우리나라 혁명지도자로 현재 상해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동녕·이동휘·이회영·이시영·조성환·김규식·신채호·박은식·조완구 등 인사들에게 먼저 김창숙에 대한 소개장을 발송하도록 유진태·이득년·조중헌(趙重憲)·이정수(李貞秀)·윤중수(尹中洙)등이 그 책임을 맡기로 하였다.
그다음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문헌과 그동안 모금한 다액의 현찰을 자신이 휴대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이것을 비밀리에 중국대사관에 연락하여 서울에 있는 중국인 명의로 봉천까지 철도편으로 택송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도라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모으고 그동안 각방면으로 물색한 결과 중국대사관의 직원인 장관군(張冠軍)의 주선으로 서울에 있는 중국상인 동순태(東順泰) 본점을 통하여 봉천에 있는 그의 분점에 택송하기로 결정하고 장관군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하물(荷物)과 함께 보내겠다는 약속을 얻었다. 이로써 일체의 여장은 장관군을 통하여 택송하였다.
약속한대로 이덕현이 끝내 나타나지 않아서 김창숙은 박돈서(朴敦緖)만을 대동하고 먼저 출발하기로 하고 시일은 3월 23일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3월 23일 봉천행 기차에 올라 다음날 안동현에 도착하여 옛 친우 박광(朴洸)을 만나 국내외의 긴밀한 연락을 부탁하고 다시 차창에 의지하여 봉천에 도착, 중국인에게 부탁한 하물을 무사히 찾아 가지고 봉천 서탑(西塔)에 들려 이호연(李浩然)을 만나 내외의 근황을 듣고 3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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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행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침내 이동녕·조성환·이시영·신규식·조완구·신채호·손진형(孫普衡)등을 만나 활동 상황과 국제정세를 자세히 듣고 국내실정을 말한 뒤에 파리로 갈 계획을 의논하였다.
신규식·신채호·이동녕 등 여러 동지들과 의견 교환한 결과 파리행은 여건이 미비하다는(여비 15만원이 필요하고 프랑스어 통역도 필요) 동지들의 권고를 받아 들여, 이미 파리에 주재하고 있는 김규식에게 우송하여 독립청원서를 직접평화회의에 제출키로 결정하고 청원서 원문을 영·독·불·중 등 4개국어로 번역하여 수천부를 인쇄하였다. 김규식에게 부탁한 외에 세계 각기관 언론계 그리고 국내 각지 향교에는 원문 그대로 직접 우송하였다. 이로써 국내의 각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국내는 물론이어니와 국제적으로도 한국 유림단의 거사가 대대적으로 발표되었다.
2. 수난(受難)
파리장서 문제로 인하여 전국 유림의 검거된 경위를 보면 최초의 검거는 4월 2일 경북 성주 장날에 일어났던 만세로 인하여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장석영·송준필(宋浚弼)·성대식(成大湜)이 구속되었다.
여기서 장서 문제의 발각으로 4월 18일 곽종석이 구속되어 21일 대구감옥에 수감되였고 5월 15일 공판에서 곽종석·장석영은 2년 송준필은 1년반·성대식(成大湜)은 1년으로 각각 언도되었다. 이 자리에서 재판관은 피고들에게 “공소할 의사가 없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곽종석은 다음과 같이 공소를 거부하였다.
“나는 우리나라 법에 의한 범죄자가 아니고 너희들에게 포로가 되었으니 나는 공소할 곳이 없다. 한갓 일신상의 사정으로써 구구히 원수에게 용서를 바라고 싶지는 않다. 만일 호소할 곳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이 있을 뿐이다.”
이상은 모두 상해에서 우편이 배달되기 전에 있었던 사실들이며 또 그뒤 많은 유림들이 검거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으나 일제가 이른바 유화정책에 의하여 곽종석을 제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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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인사들은 모두 집행유예 정도로 석방되었다.
그뒤 6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상해에서 발송한 장서가 우편으로 각 향교에 배달되기 시작하였다. 지방에서는 배달되는 즉시 왜경에게 압수되는 한편 전국 유림에 대한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인사들은 어느 지방에서나 명망이 높은 인사이었던 것이므로 그 영향은 켰다. 특히 검거인원이 많았던 성주(星州)와 봉화 등지에서는 외부로부터 많은 기마 헌병대가 출동하고 있었다.
기호 방면도 같은 실정이었다. 이렇게 하여 영호남(嶺湖南)에서 검거된 인사들을 모두 대구 감옥에 수감하였다.
8월초 대구지방법원에서 첫공판이 열렸다.
당시 일제는 3·1운동에서 느낀 한민족의 억센 투지와 자유주의 사상으로 팽배한 세계 조류에 못이겨 종래의 무단정책에서 소위 문화정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곽종석은 2년간의 실형을 언도받았으나 병보석중에 그해 10월 17일 74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김복한은 6월초 검거 당시는 중병으로써 구속을 면하게 되였으나 일제는 그의 건강 회복을 기다려 그후 사건이 일단락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8월 9일에 기어히 구속하여 홍성경찰서를 거쳐 공주감옥에 이송하여 12월 12일까지 옥고를 치르게 되였다.
일반 서명인사들은 미결 3개월간의 옥고를 겪은 뒤 23년간 집행유예로 석방되었고 서명 이외의 관계 인사들 중에서도 다수가 여러차례 취조를 받은 바 있다. 이상은 세칭 제1차 유림단 사건이라고 한다. 그뒤 김창숙은 계속 상해에 머무르면서 한국 유림을 대표하여 구국운동에 가진 심혈을 기우려 오다가 1925년에는 비밀리에 국내에 들어와서 8개월 동안이나 각지를 순방하면서 제2차 유림단 거사를 일으켰고 1926년에는 유림의 모금으로써 나석주·이화익(승춘)을 국내에 파견하여 동양척식회사 투탄 거사를 일으키는 등 독립운동에 허다한 빛나는 역사를 장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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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명자 의외의 인물들
파리장서운동을 시작할 때의 계획은 서명한 인사들이 모두 체포 투옥된다 하더라도 국내 활동과 국외 연락을 계속하기 위하여 함께 활동하던 인사들 중에서도 각인의 역량과 환경 등을 고려하여 서명에 넣지 않고 제2진으로 대비하여 두었던 것이므로 이사건의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던 김창숙도 137인에 들지 않았고 또 활동의 중심지였던 서울 유림들도 전원 제2진으로 짜여졌으니 즉 2중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 뒤 1925년에 있었던 제2차 유림단 사건도 이러한 기성조직을 토대로하여 일어났던 것이니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명 단
김창숙·성태영·유진태·임경호·이중업(李中業)·곽윤·김황(金洸)·윤충하(尹忠夏)·윤중수(尹中洙)·조중헌(趙重憲)·이득년·김창택(金昌擇)·이교인(敎仁)·이필호(李弼鎬)·배석하(裵錫夏)·안종묵(安鍾黙)·이윤(李潤)·최해윤(崔(李海澗)·황일성(黃佾性)·이영규(李永珪)·전용학(田溶學)·김정호(金丁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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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파리장서와 서명자 명단
1. 파리장서
한국유림대표 곽종석·김복한 등 137인은 삼가 파리평화회의 제대위 각하에게 봉서하노라 하늘 및 땅 위 모든 만물이 함께 생성발육하고 있으니 이는 큰 광명의 비침과 큰 대화(大化)의 행함으로써 그 진리를 잘 알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의 혼단(混端)이 일어남으로써 강약의 세가 나뉘고 겸병(兼幷)의 권력이 움직임으로써 대소의 형세가 달라져 마침내 남의 생명을 해쳐가며 그 위력을 자행하고 남의 나라를 도절하여 제것으로 만드니 아-천하에는 어찌 이런 일들이 그다지도 많은고? 이것은 하늘이 위대한 여러분을 보내시어 하늘의 뜻을 받들어 큰 영광을 비치고 크게 대화를 행하여 온 천하를 한결같이 대동의 세계로 돌아가게 하고 만물로 하여금 각기 그 자유를 누리게 함으로써 만국을 통일시하고 나해를 평등화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의 1이라도 지구상에서 이러한 소식을 듣고 실제의 혜택을 얻지 못하거나 또는 원통한 충정을 품고도 공의에 호소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면 이 어찌 모든 여러분 사명이 오직 여기에만 다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피를 끓으며 모든 억울한 실정을 호소하는 것도 또한 참을 수 없는 박절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이니 모든 여러분은 자세히 살피시라.
오! 한국도 천하 만방의 하나로서 지역이 3천리요 인민이 2천만이오 또한 4천년 여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반도 문명국임은 온 세계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국운이 불행하여 강인(强隣)의 외제(外制)로서 모든 조약이 강제로 체결 되었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국토를 빼앗고 왕위를 폐하여 우리한국을 이 세계 열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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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외하였으니 일본의 이 같은 행위를 대략 열거코자 한다.
병자년(서기 1876년) 우리나라 대신과의 강화조약이나 을미년(서기 1895년) 청국대신과의 마관 조약에서 한결같이 “한국의 자주독립에 대한 조약을 영구히 준수하다”하였고 또 계묘년(서기 1903년) 러시아에 선전 할때에도 “한국의 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것을 분명히 세계에 성명하였으니 이는 세계가 주지하는 사실이다.
그러고도 미구한 시일에 그들로 부터 온갖사기와 조작이 연출되어 내정의 협박과 외교의 기만으로 독립이 보호로 변하고 보호가 합병으로 변하게 한 다음 극소수의 친일분자를 사주하여 “이것이 곧 한국민의 소원이라” 가장하고 세계의 공의를 도면(圖免)하려 하니 이것은 곧 한국만을 그들이 무시하였을 뿐 아니라 기실은 만방도 그들의 심중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만국대표 여러분! 일본의 우리한국에 대한 이러한 행위가 과연 세계 공의에 위배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또한 일본이 세계 만방에 그 신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한국 인민이 비록 적수공권으로 스스로 분기치 못할 것도 알고 있었으나 자나 깨나 이 나라 이 백성은 조국독립을 잊지 못하고 서로 개탄 비분하여 “언제나 하늘이 우리를 돌보시어 좋은 운수가 돌 아 올것인가?”하고 모든 수치와 고난을 참으면서 기다린 지 이미 10년이 되었다.
마침 여러분이 세계평화회의를 파리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인민은 모두가 용약 분격하여 “이제 만국이 참으로 평화하게 된다면 우리한국도 만국의 하나이니 어찌 우리에게만이 평화가 없겠는가?”하고 또 폴란드 등 모든 나라가 이미 독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다같이 만세를 부르며 “평화회의에서 폴란드의 독립이 결정되었다니 폴란드는 그 누구이며 한국의 공의가 마땅이 이와같을 것이오. 하늘의 대운이 좋게 돌아올 것이오. 모든 여러분의 사명이 완수될 것이오. 다같이 나라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니 우리가 비록 죽어서 구렁에 딩군다 하더라도 백골인들 어찌 그 은혜를 잊으리오”하였다.
이로써 서로가 기쁨을 금치 못하며 오직 좋은 소식이 있기만을 기다렸더니 하늘도 무심하여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우리 임금이 승하(昇遐)하시니 온 천지는 눈물바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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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슬픔과 원통함을 호소할 곳이 없었다.
3월 1일 국장일을 당하여 각교(各敎) 각사(各社) 개인 남녀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우리 임금의 영혼을 위로하였다.
이때에 일본 군경으로부터 아무리 심한 매질과 탄압과 총칼이 목전에 닥치어도 맨 손으로 앞을 다투어 서로 죽음을 돌보지 않았으니 이는 대중의 원한과 억울한 충정(衷 情)이 오랫만에 쏟아진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여러분 [제대위(諸大位)]으로부터 이러한 기회와 용기를 우리에게 주었다는 것도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후 계속 시일만을 끌고 아무런 획기적 구처가 보이지 않으므로 우리는 또 다시 회의와 공구가 엇갈리어 우리나라 실정이 제대로 전달되기 어려운 것과 또 일본인들의 간계와 조작이 여러분의 이목을 현혹케 한 것이 없는가 하여 다시 그 사실을 변명코자 한다.
대체로 하늘이 만물을 나을 때에는 반드시 그 물체의 하나 하나에게 활동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비록 작은 인개(鱗介)와 곤충일지라도 모두 그 자유활동의 능력을 갖고 있으니 사람으로서 사람된 것과 나라로서 나라된 것이 또한 각자의 치리(治理) 능력을 갖고 있는 까닭이다. 우리한국이 비록 작다 하나 3천리 강토와 2천만 인민과 4천년 여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니 우리나라에서도 족히 우리나라 일을 담당할 사람의 적지 아니 하거늘 어찌 남의 나라의 대치(代治)를 바라리요.
옛말에 천리에는 풀기가 다르고 백리에는 민속이 같지 않다하였다. 비록 일본이 말하기를 “한국이 스스로 독립할 능력이 없기에 일본의 통치로써 한국의 풍속을 변경하려 한다” 하나 풍속이라는 것은 쉽사리 변경되는 것이 아니며 대치(代治)라는 것은 마침내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뿐이니 그를 실행치 못할 것이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일본은 공회에서 말하기를 “한인은 오래전부터 일본에 붙기를 원한다”하나 대체 한민으로서 한민의 주체성을 가지게 된 것은 오직 일정한 지역과 풍속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또한 우리의 고유한 사상과 문화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밖으로 일시적 곤욕과 위협에 굴할지언정 그 정신적 한민이라는 것은 비록 천만년을 지날지라도 면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 그 민족의 본연성을 무시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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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겠는가. 그 민족의 본연성을 무시할 수 없음을 알면서일본은 온 세계가 부정하는 그들의 권리를 이용하여 도리혀 온 세계의 공통된 공의를 얻었고자 하니 이것은 일본으로서도 잘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산야 폐인으로서 국제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다만 이 나라 신자(臣子)로서 부모의 교훈에 의하여 유문(儒門) 에 종사하여 왔더니 이제 대계 유신의 날을 당하여 이 나라의 유무(有無)가 이번 회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나라가 없이 살기보다는 차라리 나라 있고 죽는 것을 바라며 한구석에서 소리 없이 자고(自枯) 되기보다는 차라리 여러분 앞에서 떳떳이 그 억울한 충정을 폭로하여 모든 사태의 귀추를 기다리는 것만 같으랴?
생각컨대 해륙의 길은 너무 멀고 국제간 사찰은 지나치게 심하여 만일 몸소 갈 수도 없고 아우성을 처도 들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조석으로 어떨지 모를 생명이 중도에서 쓰러지고 만다면 이 세상 이 슬픔은 영원히 호소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무리 현명한 여러분일지라도 어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우리한국의 억울한 실정을 어찌 알아 줄 수 있으리오. 이제 한 장의 서신을 여러 동지들을 뜻을 모으고 또 10년 동안 갖은 고통의 실정을 기록하여 천애(天涯) 만리 밖에 호소코자 하니 너무나 처절 박절하여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다.
여러분은 깊이 생각하시고 공의의 권위를 더욱 높이어 큰 광명과 같이 비치지 않는 곳이 없고 큰 운화(運化)와 같이 순행치 않음이 없도록 하시면 이는 우리의 없어진 나라를 회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인류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오. 여러분의 사명도 완수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는 차라리 자진하며 죽을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2천만 생명만이 홀로 천지의 화육에 관계치 않으며 조창(條暢)의 화기권에서 제외될 수 있겠는가? 제대위(諸大位)는 생각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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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리장서에 서명한 명단
곽종석(郭鍾錫)·김복한(金福漢)·고석진(高石鑛)·유필영(柳必永)·이만규(李晩煃)·장석영(張錫英)·노상직(盧相稷)·유호근(柳浩根)·안병찬(安炳瓚)·김동진(金東鎭)·권상문(權相文)·김건영(金建永)·김창우(金昌宇)·신직선(申稷善)·김상무(金商武)·김순영(金順永)·이종기(李鍾夔)·권상익(權相翊)·고제만(高濟萬)·서건수(徐健洙)·곽수빈(郭守斌)·유연박(柳淵博)·하겸진(河謙鎭)·최학길(崔鶴吉)·이경균(李璟均)·이석균(李鉐均)·조현계(趙顯桂)·하봉수(河鳳壽)·이수안(李壽安)·하재화(河載華)·하용제(河龍濟)·박규호(朴圭浩)·우하교(禹河敎)·김재명(金在明)·변양석(卞穰錫)·고례진(高禮鎭)·이승래(李承來)·윤인하(尹寅河)·김봉제(金鳳濟)·박종권(朴鍾權)·윤철수(尹哲洙)·김택진(金譯鎭)·권상두(權相斗)·정태진(丁泰鎭)·정재기(鄭在夔))·임한주(林翰周)·배종순(裵鍾淳)·유진옥(柳震玉)·허평(許坪)·박상윤(朴尙允)·김지정(金智貞)·이인광(李寅光)·이학규(李學奎)·안종달(安鍾達)·손상현(孫上鉉)·이이익(李以翊)·유준근(柳濬根)·송홍래(宋鴻來)·송준필(宋浚弼)·성대식(成大湜)·이기향(李基馨)·이덕후(李德厚)·안효진(安孝珍)·강신혁(姜信赫)·전양진(田穰鎭)·이정후(李定厚)·노도용(盧燾容)·김태린(金泰麟)·김정기(金定基)·송철수(宋喆洙)·문용(文鑛)·송호완(宋鎬完)·송호곤(宋鎬坤)·권명섭(權命燮)·이돈호(李墩浩)·박정선(朴正善)·황택성(黃宅性)·이상희(李相羲)·최중식(崔仲軾)·김양모(金瀁模)·권병섭(權昺燮)·권상원(權相元)·고순진(高舜鎭)·김택주(金澤往)·정규영(鄭奎榮)·송호기(宋鎬基)·이길성(李吉性)·송철수(宋晳秀)·박익희(朴翼熙)·송재낙(宋在洛)·권상도(權相道)·김병식(金秉植)·이능학(李能學)·이현창(李鉉昌)·이수인(李洙仁)·박준(朴埈)·이봉희(李鳳熙)·박은용(朴殷容)·정근(鄭根)·백관형(白觀亨)·전석구(全錫九)·송주헌(宋柱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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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윤(全錫允)·김영식(金榮植)·김양수(金陽洙)·김상진(金相震)·장영구(張永九)·이내수(李來修)·조재학(曺在學)·김영찬(金永贊)·정재호(鄧在浩)·김덕진(金德鎭)·손진창(孫晋昌)·손병규(孫秉奎)·김병식(金炳軾)·이태식(李泰植)·이만성(李萬成)·이계원(李啓源)·이계준(李季埈)·우성동(禹成東)·김학진(金學鎭)·우찬기(禹纘基)·이병회(李柄回)·윤량식(尹亮植)·김용호(金容鎬)·이복래(李福來)·곽걸(郭杰)·우삼하(禹三夏)·우경동(禹涇東)·박순호(朴純鎬)·우승기(禹升基)·조석하(曺錫河)·김동수(金東壽)·박재근(朴在根)·이진춘(李鎭春)·이인규(李麟奎)·이기정(李基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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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석윤, 전석구 두 분 모두 합천출신으로 완산전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