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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강산을 그리다-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특별전(1)
2019년 8월 11일(일), 맑음,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우리 강산을 그리다-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특별전을 열
었다기에 복더위임에도 찾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한여름 피서지로 아주 제격이다. 많은 사
람들이 찾았다. 입장할 때 2곳에서 휴대물품을 검색하는데 줄선 사람이 200m나 된다.
명색이 산꾼임을 자처하는 나로서는 우리 강산을 보는 화가의 시선은 어떠한지 궁금하지 않
을 수 없었다. 2시간 남짓이 퍽 즐거웠다. “360여 점이 넘는 실경산수화를 선보이는 이번 특
별전은 마치 그림 속 곳곳을 유람하면서 빼어난 경치와 장소를 보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킵
니다. 화가들이 저마다의 시선으로 산수를 바라보고 창의성을 발휘하여 화폭에 옮기는 과정
을 따라가는 일은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장 배기동의 도록(圖錄) 인
사말이다. 그러했다.
나는 160여 점만을 몇 회에 나누어 올린다. 전시실 내부가 어둡고 작품전시 또한 벽면, 평면,
사면 등으로 되어 있고, 당연히 카메라의 발광과 삼각대의 사용을 금지하고 관람객이 무척
많아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았다. 그림의 설명은 도록의 내용을 간추리고 일부는 관련 옛글을
찾아서 옮겼다.
1, 2. 경포대(鏡浦臺) ․ 총석정도(叢石亭圖)
작가 미상, 조선 16세기 중반, 비단에 엷은 색(絹本淡彩), 각 101.0×54.5cm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증을 받아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하는 작품이다. 총석정
도 상부에 발문이 있어 이 작품이 제작된 내력을 알 수 있다. 아직 신원을 밝히지 못한 상산
일로(商山逸老)가 쓴 글에 따르면, 1557년 봄에 홍연(洪淵)과 함께 금강산(풍악산)과 관동
지역을 유람하고 유산록을 작성하였으며 시간이 흐른 뒤 그중 몇몇 명승지를 그려 병풍을
만들었다고 한다.
함께 유람한 홍연은 자가 덕원(德遠)으로 1551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84년까지 생존
했던 인물이다.
<경포대도>를 보면 아래쪽에 위치한 ‘죽도(竹島)’, ‘강문교(江門橋)’로 시작하여 경포호를
넘어 위쪽에 위치한 경포대와 오대산 일대를 올려보는 구도이다. 왼쪽 중간 즈음의 언덕에는
상산일로와 홍연인 듯한 여행자 두 명이 담소를 나누고 시동 한 명은 시립하였는데 이 모습
은 계회도에 흔히 등장하는 모임 장면을 연상시킨다.
<총석정도>는 그 구도가 더욱 파격적이다. 돌기둥들은 중심축을 두고 첩첩이 도열하여 삼
각형을 이룬다. 각 기둥의 아랫부분은 희게 하고 윗부분은 어둡게 하여 고원(高遠)의 상승감
이 고조되었다. 공간감에 대한 의식도 강하여 ‘사선정(四仙亭)’과 ‘몰자비(沒字碑)’가 위치한
왼쪽 언덕의 고갯길은 오른쪽으로 향하여 내려오고, 근경의 낮은 돌기둥 뒤로 바닷물이 지나
가고 다시 높은 돌기둥 사이로는 수파(水波)가 보이는 등 경물 간의 거리감과 깊이감을 표현
하였다.
이 두 점을 그린 화가의 기량이 높고 제시와 발문의 서체도 유려하여 이 시기 서화를 대표할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이며 한국 실경산수화의 이해의 폭과 수준을 높인 점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이수미)
<총석정>에 쓴 발문의 내용이다.
나는 정사년(1557) 봄에 홍(洪)군 덕원(德遠)과 관동 지방을 유람하기로 약속을 하고는 금
강산과 대관령 동쪽의 뛰어난 풍광을 두루 다 관람할 수 있었다. 그곳의 높고도 빼어난 봉우
리와 깊고도 그윽한 골짜기며 천태만상의 구름과 산 기운, 아득히 넘실대는 호수와 바다를
모두 다 『유산록』 속에 들여놓았다. 때때로 펼쳐보곤 하였지만, 속세의 인연이 이내 몸에
얽혀 있고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다 보니, 자연의 진짜 참모습은 한 것 꿈결에서나 떠올려볼
뿐이었다.
매번 옛사람들이 산수 속에 구름처럼 누워서 세상일에 간여하지 않았던 것을 볼 적마다 그
고매하고 탁월함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였다. 드디어는 몇몇 명승지를 그림으로 그려
병풍을 짓고, 이참에 옛날 유람할 적에 지은 칠언절구를 뽑아서 그림의 뒤에 썼다. 다시는 갈
수 없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풀리지 않은 그리움을 자위할 따름이다. 상산일로가 글을
짓다.
(余丁巳春 與洪君德遠 約爲關東之遊 遍觀楓岳嶺東勝區 其峯巒之峻秀 溪壑之深邃 雲嵐之變
態 湖海之汪洋 皆入於遊山錄 時或披覽 第以塵緣在躬 祿食東華 泉石眞面目 徒勞夢想而已 每
見古人 雲臥溪山 不接世事者 其高卓乎不可及矣 遂繪畫若干名勝地爲屛風 因抄出昔年遊觀時
賦詩七絶 書其後 以慰余不得更往 而拘攣未解之懷耳 商山逸老志)
3. 석정처사유거도(石亭處士幽居圖)
전충효(全忠孝, 17세기 후반 활동), 조선 17세기 후반, 비단에 엷은 색(絹本淡彩), 128.4×81.3cm
전남 화순 지역에 있는 석정 김한명(石亭 金漢鳴, 1651~1718)의 은거지를 그린 그림이다.
화면 중앙에 위치한 김한명의 유거지는 보암산(寶巖山)을 뒤로 하고 Y자 형의 물줄기와 구
릉으로 둘러싸여져 전형적인 길지의 요소인 배산임수를 갖추고 있다.
화면의 상단 우편에는 무등산과 광주읍성, 금성산(錦城山) 등을 표현하여 넓은 지역에 대한
많은 정보를 선택적으로 제공했으며, 그 가운데 말을 탄 인물을 크게 묘사하였다. 그림 상단
왼편에 찍힌 두 과(顆)의 인장 중에 주문방인(朱文方印) ‘묵호(墨毫)’가 있어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전충효가 그림의 제작자임을 알 수 있다. 전충효는 직업화가로 주문자의 요구에 응하
여 다양한 그림을 제작하였다.(오다연)
4. 북관수창록(北關酬唱錄), 금강봉(金剛峰)
한시각(韓時覺, 1621~1691 이후), 조선 1664년, 비단에 색(絹本彩色), 30.0×23.4cm
1664년(현종 5)에 함경도에서 시행된 무관 별시 감독관으로 파견되었던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 1629~1689)이 시험 전후에 함경도 관리들과 주변을 돌아보고, 칠보산을 유람 후
엮은 시화첩에 있는 금강봉이다. 호가 설탄(雪灘)인 한시각은 도화서 화원으로 교수직을 지
냈다. 함경도 명승을 그린 산수화로 실경산수화의 가장 이른 예로 주목된다.(이혜경)
5.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 장안사(長安寺)
정선(鄭敾, 1676~1759), 조선 1711년, 비단에 엷은 색(絹本淡彩), 35.9×36.6cm,
보물 제1875호
정선의 금강산 그림 중에서 가장 이른 나이인 36세 때 그려진 그림이다. 정선의 절친한 벗인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 1671~1751)이 1710년 금강산 초입인 금화현의 현감으로 부임하
게 되자 정선은 1711년 늦가을 김창집 형제와 이웃인 백석 신태동(白石 辛泰東, 1659~
1729)과 금강산을 유람하게 되었다. 그때 본 금강산의 절경을 그린 것이다.
김창흡의 산행 기록에 의하면 정선은 흡곡 시중대에서 여행을 시작하여 고성을 경유하여 내
금강으로 유람하였음이 확인된다. 정선의 그림은 당시 그가 현장을 사생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기억에 의존하여 나름의 해석을 통해 변형하고 과장함으로써 그만의 독창적인 화풍
을 완성하였다.(문동수)
6.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 보덕굴(普德窟)
36.2×26.2cm, 보물 제1875호
7.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 금강내산총도(金剛內山總圖)
36.0×37.5cm, 보물 제1875호
8. 부안유람도권(扶安遊覽圖卷), 우금암(禹金巖)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조선1770~1771년, 횡권, 종이에 먹(紙本水墨), 25.4×267.3cm
강세황은 차남인 완(1739~1775)이 전라도 부안현감으로 재직하던 시기에 변산 일대를 유
람하며 인상적인 경물을 두루마기(횡권) 위에 간략하게 그렸다. 현재 횡권은 우금암으로부
터 시작하여 문현(文縣), 실상사, 용추, 극락암 순서로 그려졌고, 그림 중간에 기행문이 적혀
있다.
우금암은 개암사 뒤쪽에 위치하는 바위로 우금굴이라고도 불린다. 강세황은 봉우리 위의 세
개의 바위를 특징적으로 그리고 비단처럼 나있는 돌의 무늬를 갈필의 수직준으로 표현했다.
우금암 안에 위치한 작은 암자인 옥천암(玉泉菴)은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되었다.(오다연)
9. 부안유람도권(扶安遊覽圖卷), 우금암(禹金巖)
그림 중간에 적혀 있는 기행문의 일부이다.
“실상사 뒤쪽으로 가파른 봉우리를 올랐다. 봉우리의 기세는 절벽을 세워놓은 듯하고 바위
길은 실과 같아서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등성이를 5리 정도 올라 정상에 이르렀다. 남쪽으
로 바다 입구를 바라보니 돛단배가 왔다 갔다 하고 작은 섬 하나가 있는데 흥덕 땅이라고 하
였다. 북쪽으로 꺾어 산허리를 따라가니 남은 눈이 그대로 쌓여 있는데 깊이가 정강이까지
빠질 정도였다.
비탈진 길은 너무나 위태롭고 아래로 천 길이나 되는 절벽을 내려다보니 한번 발을 헛디디어
넘어지면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듯하였다. 가마를 멘 승려가 큰 소리를 내며 달리는데 가
마의 장대가 소나무 가지에 부딪치기도 하고 스님의 발이 깊은 눈에 빠지기도 하였다. 얼음
은 미끄럽고 돌은 날카로워 기울어 넘어지려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가마를 멘 승려에게 여
러 차례 주의시켰지만 천천히 걸을 수 없었다.”
(促肩輿循寺後上峻峯。峯勢壁立。石路如線。不可着足。登頓五里餘至絶頂。南望海口。風
帆來往。有一點小島。云是興德地。北折而循山腰行。餘雪尙積。深可沒脛。側徑危甚。下臨
千丈懸崖。若一蹉跌。性命難保。輿僧大呼疾走。輿竿或觸於松樹。僧足或陷於深雪。氷滑石
峭。傾側欲顚者數。屢戒輿僧而不能緩步。)
10. 부안유람도권(扶安遊覽圖卷), 왼쪽부터 용추(龍湫), 실상사(實相寺), 문현(門縣)
그림 중간에 적혀 있는 기행문의 일부이다.
“월명암에 이르니 지세가 가장 높은 곳이었다. 온 산을 굽어보니 파도가 겹쳐 오고 구름이 진
을 친 것 같았다. 산 너머로 바다 풍경은 아득한데 마침 구름까지 끼어 일일이 어디가 어디인
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지나온 길을 따라서 돌아와 실상사 오른편에 이르러 용추로 방향을
바꾸었다. 바위 길의 위태로움은 월명암 가는 길보다 더하여 가마를 탈 수가 없었다.
지팡이를 짚고 엉금엉금 기어 몇 고개를 넘으니 폭포가 양 절벽 사이에서 쏟아져 내렸는데
높이가 수십 장이나 되었다. 눈을 뿜어내고 구슬을 튀기듯 기세가 매우 웅장하고 바람 기운
도 따라 불어와 그 소리가 숲과 골짜기를 울렸다. 폭포를 따라 올라가 끙끙대며 쉬지 않고 다
시 산 정상에 올라 바다의 입구를 굽어보았다.”
(到月明菴。地勢最高。俯視全山。如浪疊雲屯。山外海色微茫。時値雲陰。不能歷歷指點。
卽循故路而還至實相寺之右。轉向龍湫。石路之危。比月明菴路尤甚。不可以輿。扶杖匍匐踰
數嶺。飛瀑瀉於兩崖間。高幾數十丈。噴雪跳珠。勢極奇壯。風氣相豗。聲震林壑。循瀑而
上。登登不已。又上山頂。俯視海門。)
11. 부안유람도권(扶安遊覽圖卷), 왼쪽은 극락암(極樂庵), 오른쪽은 용추
12. 풍악장유첩(楓嶽壯遊帖), 백산(柏山)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조선 1788년경, 14면 첩, 종이에 엷은 색(紙本淡彩), 각 32.1×47.9cm
1788년 9월 김홍도의 스승이었던 강세황은 장남 인(1729~1791)이 부사로 임직하고 있던
회양(淮陽) 관아를 방문하였다. 그는 정조의 어명으로 봉명사경을 수행하던 김홍도, 김응환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9월 5일~13일) 회양 일대 백산(柏山), 학소대(鶴巢臺), 의관령(義館
嶺) 등을 유람하였다.
이 서화첩은 당시 강세황이 금강산 유람과 관련된 글과 그림을 묶은 시서화 합벽첩으로 모두
7장의 글씨와 7장의 그림이 묶여 있다. <백산>, <회양관아>, <학소대>, <의관령>은 김
홍도를 기다리며 회양에 머무를 때 그린 것인데, 강세황만의 습윤한 묵법과 평담한 필법이
있는 그대로의 실경 속에 담담하게 펼쳐지고 있다. 반면 후반부의 삼척 죽서루, 간성 청간정,
간성 가학정은 강세황이 당시 실견하지 못했던 관동의 명승이다. 김홍도가 그에게 보여주었
던 묵필초본을 보고 옮긴 것이 분명하다.(김울림)
13. 풍악장유첩(楓嶽壯遊帖), 회양관아(淮陽官衙)
14. 풍악장유첩(楓嶽壯遊帖), 학소대(鶴巢臺)
15. 풍악장유첩(楓嶽壯遊帖), 의관령(義館嶺)
16. 풍악장유첩(楓嶽壯遊帖), 죽서루(竹西樓)
17. 풍악장유첩(楓嶽壯遊帖), 가학정(駕鶴亭)
18. 풍악장유첩(楓嶽壯遊帖), 청간정(淸澗亭)
19.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호해정(湖海亭)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 조선 1788년 이후, 32면 첩, 종이에 먹(紙本水墨),
각 30.5×43.0cm
정조의 어명으로 1788년 9월을 전후하여 약 50일간 관동과 금강산을 여행했던 김홍도, 김응
환(金應煥, 1742~1789)의 봉명사경과 관련된 초본첩이다. 유탄(柳炭)의 도움 없이 묵필만
으로 제작된 초본들은 매우 빠른 속도에도 불구하고 현장의 구체적인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생동감 있게 전하고 있다. 이 초본첩은 이후 제작되었던 어람본 및 분상본의 원형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김울림)
20.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삼척 능파대(凌波臺)
21.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울진 망양정(望洋亭)
22.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문암(門巖)
23.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평해 월송정(越松亭)
24.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양양 낙산사(洛山寺)
25.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계조굴(繼祖窟)
계조굴 뒤는 울산바위이다.
26.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고성 현종암(懸鍾巖)
27.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영랑호(永郎湖)
28.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해산정(海山亭)
간이 최립(簡易 崔岦, 1539~1612)은 해산정(海山亭)을 두고 다음과 같이 읊었다.
조물이 한산한 이곳 깎아 버리려 하였다면 妙攬如將冗處刪
바다와 산 사이에 이 정자 누가 세웠으리 玆亭誰着海山間
사선의 이름과 행적 남겨져 있지 않으니 四仙未有留名迹
하늘 위로 훨훨 날아 왔다 갔다 했으렷다 應負憑虛易往還
29.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해금강전면(海金剛前面)
30.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치폭(馳瀑)
옛날에 진율(眞律)이라는 승려가 발연(鉢淵)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가 잡념이 생기면 흐
르는 폭포에 달려가서 마음을 안정시키곤 했기 때문에 이곳을 ‘치폭(馳瀑)’이라 불렀다 한다.
31.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만물초(萬物草)
32.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피금정(披襟亭)
피금정은 명승이었다. 죽석관 서영보(竹石館 徐榮輔, 1759~1816)의 「평강에서 금성까지
길에서 본 광경을 적은 기문(自平康之金城道路歷覽記)」의 일부이다.
“엄애리(罨厓里)와 동령동(東泠洞)에는 모두 맑은 물이 굽이굽이 흐르고 기암절벽이 에워싸
고 있으며, 아름답고 진귀한 나무가 빽빽하게 뒤덮고 있는데, 그 잎은 울긋불긋하고 푸릇푸
릇한 색이 어우러져 있다. 이 모습을 화공에게 그리게 한다면 모두 소폭의 가을 풍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동령동을 다 지나가면 들이 나오는데, 금성현 관할의 남대천(南大川), 서대천
(西大川)이 멀리 보이고 길게 뻗친 수풀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서교(西橋)를 건너서 꺾어
돌아 조금 가면 피금정(披襟亭)에 이르는데, 만여 그루의 교목이 서 있고 앞으로 대천을 굽
어보고 있다.
내가 경술(1790, 정조14), 신해(1791) 연간에 세 차례 관북(關北)을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마다 이 피금정에 올랐고, 지금 다시 오게 되었다. 이 정자는 큰길 옆에 있어서 남북으로 오
가는 사람들이 날마다 올라가 조망하니, 굳이 내가 기문 쓰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적빈원을 비롯한 여러 승경은 외진 곳에 위치하여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별로 찾아오지 않는
다. 내가 그 승경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애석하게 여겨 특별히 기록한다.
병인년(1806, 순조6) 9월 2일.”
피금정은 강원도 금성현(金城縣) 남대천(南大川) 가에 있던 정자이다.
번암 체제공(樊巖 蔡濟恭, 1720~1799)이 읊은 「피금정(披襟亭)」이다
도화원(桃花源)은 바라봐도 다함이 없고 花源望不窮
녹색 초목 먼 물가에 생겨나도다 空翠生遙渚
떨기나무 속에서 물새가 우니 灌木水禽啼
소리는 들리지만 보이진 않네 聞聲不知處
33.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통천(通川) 옹천(甕遷)
34.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총석정(叢石亭)
35.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삼불암(三佛巖)
36. 해동명산도첩(海東名山圖帖), 백화암 부도(白華菴 浮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