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앞날][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
백두산 천지
[ 과거와 현재는 미래를 위해서 존재한다 ]
[ 영원히 살 것처럼 계획하고, 하루 살다 죽을 것처럼 실천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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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일부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서기 751년 이전에 만들어진 세계 최고(古)의 목판 인쇄물이죠.
그런데 그보다 더 오래된 <필사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1998년에 발표되었습니다.
목판본이 아니라 필사본이지만
연대는 더 오래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고 조병순 성암고서박물관장이 경주 남산 창림사 석탑 출토의
그 <필사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 글 아래 부분에 있습니다.)
그 뒤 22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번에 한정호 동국대 교수가 다시 그 것을 일부 공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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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0.
한겨레신문
한 교수는 또 추사 김정희가 1824년 경주 남산 기슭의 창림사 석탑을 해체할 당시 탑 안에서 나온 사리기에서
신라 불경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탑의 조성 내력을 적은 ‘무구정탑 원기 동판을 발견하고 불경과 동판의 글씨를 베낀 모사본을 남겼던 것과 관련해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원본이 전 성암고서박물관 컬렉션에 있다는 주장도 내놓았다.
추사가 필사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전 성암박물관 소장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불상과 석탑의 도상을 비단에 그린 앞부분의 변상도와 경전의 본문 내용을 종이에 옮겨 쓴 필사본으로 구성되는데,
분석결과 추사의 불경 모사본과 글씨가 사실상 똑같은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추사가 모사본에 붙인 목격담에서 황색 비단에 변상도가 그려졌다고 언급한 부분과 성암본 구성이 일치하고,
성암본의 글자가 정제된 사경체 글씨로 쓰여 원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전 성암고서박물관 소장 불경과 변상도는 생전 관장이던 성암 조병순(1922~2013)이 1998년 임창순 등 서지학계 전문가와 일부 언론에 한 차례 공개했으나, 그 뒤로는 내보인 적이 없다.
사진 도판 한정호 교수 제공
성암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추사가 필사한 본과 글자가 사실상 똑같다.
옛 성암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변상도.
황색 비단을 화폭 삼아 금니로 설법하는 석가여래를 좌우 8대 보살이 받드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유일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변상도다.
측면에 전형적인 신라풍의 3층탑이 그려진 것도 눈길을 끈다.
비단에 그려진 변상도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창림사탑 발원기록인 <무구정탑원기>의 전면 세부를 찍은 모습이다.
1824년 추사 김정희가 모사한 뒤 행방이 묘연했다가 지난 1968년 경기도 용주사 말사인 경기도 이천 영원사 대웅전 해체 수리 때 기단에서 발견됐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변상도 우측에 그려진 석탑을 확대한 사진.
전형적인 신라 3층탑 양식이어서 변상도 자체가 신라의 독창적 창안이었음을 일러준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73556.html#csidx6147eab9b4357928dbfb66d7ee22a8c
https://news.v.daum.net/v/2020121005060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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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3층탑 그림 보면 처마 끝에 작은 <종>들이 달려 있죠.
(간혹 저에게 "왜 진보언론 인용하냐" 또는 "왜 보수언론 인용하냐"며 항의하시는 분이 계신데
고대사글이 정치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없으므로
쓸만한 기사는 진보, 보수 전혀 가리지 않고 씁니다.)
아래는 이 <필사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대해서 1998년에 보도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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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니경] "광복뒤 발굴한 최고의 고문서"
1998.06.15
조선일보
사진설명 :
조병순 성암고서박물관장이 7m9cm에 달하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두루마리를 펼쳐보이고 있다.
조 관장은 "석가탑 다라니경이 중국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중국 학계의 억지주장을 뒤엎을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직지심체요절), 세계 최고(古)의 목판 인쇄물(석가탑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이어
한-중-일 최고(古)의 필사본 불경과 변상도.
성암고서박물관이 13일 사경(필사본 경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공개함으로써
우리는 인쇄와 불교문화에 관한 한 단연 세계 최고였음이 또 한차례 확인됐다.
원로 한학자 임창순 전 문화재위원장으로부터 "광복 후 발굴된 최고 가치의 고문서 문화재 중 하나"라는 평을 들은 이 자료는
일본 소학관 출판사가 기획한 '세계미술대전집'에 수록됨으로써 세계인의 주목을 끌게 됐다.
학자들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제작 연대를 8세기 초로 보는 것은
지질, 글씨체 등과 함께 고문서의 중요한 편년 기준이 되는 '측천무후 글자'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당나라 황후 측천무후(624?∼705)가 자의적으로 만들어 사용하다가 그가 죽은 후 사용이 금지된 한자 글자(17종으
로추산)를 말하는 것.
그가 죽은 705년 이후의 문서에서는 이 글자체가 많을수록 더 오래된 것이 된다.
석가탑 다라니경(751년)에 나오는 측천무후 글자는 4종, 10자인 데 반해
이번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는 6종, 15자나 확인됐다.
이에 따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적어도 석가탑 다라니경보다 앞선 8세기 초 유물임이 입증되는 것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또 사경이란 점에서도 지금까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호암미술관 소장 '무구정광대방광불화엄경'(국보 196호·서기 755년)보다 50년가까이 앞선 것으로 평가된다.
임창순씨는 "글씨로 보아 석가탑 다라니경보다 앞선 8세기 전반 유물임이 틀림없다"며
"아주 잘 쓴 당대 정상급 글씨"라고 말했다.
박상국 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실장은 "이제 석가탑 다라니경이 중국에서 제작돼 한반도로 건너왔을 것이라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됐다"고
이번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발견에 또다른 의의를 부여했다.
최근 중국 학계에서는 석가탑 다라니경이 702년 중국 낙양에서 제조돼 한반도에 전래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일본 학자들도 덩달아 이같은 주장을 해왔으나,
필사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발견으로 석가탑 다라니경이 한국 불경의 주체적 발전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탄생된 것임이 입증됐다는 것이다.
7m가 넘는 사경 맨 오른쪽에 붙은 변상도는 1천2백년 세월이 흘렀어도
선명한 선을 잃지 않고 있다.
비단 위에 금가루(금니)로 석가모니의 설법장면과 비천상 등이 사실적으로 그려진 이 변상도는
벽화나 암각화가 아닌 종이-비단에 그린 그림으로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인 동시에,
한-중-일 동양 3국에서 가장 오래된 변상도인 셈이다.
변상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 그림에 등장하는 3층석탑이다.
소장자 조씨는 "이 석탑은 옥개석 사방 끝을 살짝 들어올린 전형적인 백제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며
"탑의 모든 부분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지금은 알 수 없는 백제탑의 완형을 보여주는 희귀한 자료"라고 말했다.
탑그림의 옥개석 사방 끝에 종의 일종인 풍탁이 달려있는 것도 처음 알려진 사실이지만,
더욱 비상한 관심을 끄는 것은 풍탁 안의 추(탁설)가 최근 부여 능산리에서 금동용봉향로와 함께 발굴된 유물 형태와 같다는 점.
이 점으로 봐서도 그림의 탑은 백제탑을 표현한 것이 틀림없다고 조씨는 말했다.
소학관 세계미술대전집 '무구정광대다라니경' 해설을 집필한 후지모토 일본 도야마대학 교수도 "현존 최고로 추정되는 석가탑 다라니경보다 측천무후 글자가 더 많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8세기 전반의 문헌으로 보인
다"며
"불경의 글씨는 엄격하고 단정하며 변상도는 회화적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8/06/15/19980615703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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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한국 전통종이는 세계 최고의 종이로 유명하고
1천년 넘는 세월을 견딘 한지도 많습니다.
위에 나온 <목판본 다라니경>, <필사본 다라니경>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래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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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 (新羅白紙墨書 大方廣佛華嚴經)
국보 제196호
통일신라 754년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ViewList.do?s_kdcd=00&s_ctcd=00&&gbn=2®ion=2&pageNo=1_1_2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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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것도 1천2백년 넘는 세월이 지났는데도
종이가 대략 건재하죠.
(글자도 건재하고요.)
이 <필사본 다라니경>이 서기 700년대 전반기에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종이가 그대로 건재했을 수도 있고
후대에 새종이를 뒤에 덧붙였을 수도 있을 것이나
추사 김정희公의 기록을 보아도 그렇고
원로 한학자 임창순 전 문화재위원장의 평가도 그렇고
그 내용이 사실이라 추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유물이 왜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는가.
그 이유는 위 기사에 나옵니다.
"중국 학계에서는 석가탑 다라니경이 702년 중국 낙양에서 제조돼 한반도에 전래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일본 학자들도 덩달아 이같은 주장을 해왔으나,
필사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발견으로 석가탑 다라니경이 한국 불경의 주체적 발전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탄생된 것임이 입증됐다는 것이다."
중국 학계 뿐만 아니라
일본 학계가 <석가탑 다라니경>이 중국에서 온 것이라 우기는 일이 있으며
아직도 식민사학과 일본 사학계의 입김이 많이 작용하여
한국 대학 사학계가 이러한 중요한 유물을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이 <필사본 다라니경>은 <목판본 다라니경>보다 더 앞선 것이므로
이 <필사본 다라니경>을 연구, 인정하게 되면
<목판본 다라니경>이 중국에서 온 것이라는 억지 주장이 설 자리가 없게된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식민사학과 일본 사학계의 입김에 너무 발목잡혀있는
한국 대학 사학계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아래는 한국의 11세기 종이들 중 일부입니다.
1천년 정도 된 것들이죠.
1천년이나 세월이 흘렀는데도 대략 멀쩡하므로
한지가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초조본 대반야바라밀다경 (初雕本 大般若波羅蜜多經) / 목판본
국보 제241호
고려 현종 (재위 1011∼1031) 연간
초조본 신찬일체경원품차록 (初雕本 新纘一切經源品次錄) / 목판본
국보 제245호
고려 11세기
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 / 목판본
국보 제202호
고려 1098년
초조본 대보적경 (初雕本 大寶積經)
국보 제246호
고려 11세기
초조본 현양성교론 (初雕本 顯揚聖敎論) / 목판본
국보 제243호
고려 11세기
아래는 7백년 정도 된 검은색 종이입니다.
감지은니 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紺紙銀泥 大方廣佛華嚴經 貞元本)
국보 제215호
고려 13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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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대한민국 국립공원 사진공모전 수상작 중에서
설악산
태백산
월출산
덕유산
감사합니다.
[ 영원(永遠)에 합당(合當)한 삶을 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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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한국혼(韓國魂)
[홍익인간]의 정신은 [사해동포주의]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민족, 다른나라 사람이라고 해서 공연히 배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다이나믹 코리아, 게이트웨이 투 더 월드
[밝은 앞날][꿈은 이루어진다][꿈은 미래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