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 있어서 19세기 후반기는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로서, 일대 사회변동기였다. 동양적 질서 속에 안주해 있던 전통사회가 봉건적 양반지배체제의 해체와 제국주의적 외세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상황에 처하면서, 민족적 모순의 극복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특히 양평지역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지리적여건으로 중앙의 소식을 가장 빨리 접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의병의 봉기는 양평지역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1894년(고종31) 여름 안승우가 그의 향리인 지평에서 모병활동을 전개한 것이 양평지역 을미의병의 효시다. 일제가 무력을 앞세워 경복궁에 불법 난입한 이른바 '갑오변란'에 대한 반발로 전개한 이 모병활동은 결국 중단되고 말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는 개항 이후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운동 중 최초로 기록될 만하였다. 그뒤 양평지역에서의 의병운동은 같은 해 9월, 경상도 안동에서 거병하여 올라온 서상철(徐相轍) 의병부대에 의한 경기도 이천 단월지역 전투와 광주 곤지암지역 전투로 이어져 한국 근대 의병운동사에서 항일의병의 기점을 마련하였다.
양평지역의 화서학파 유림들은 1895년 10월의 을미사변과 11월의 단발령 공포에 대한 반발로, 1896년 초에는 안승우와 이춘영이 지평에서 거병을 결의하여, 이필희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지평의진(紙平義陳)을 결성하였다. 양평지역의 지평의진은 1896년 1월 17일 충북 제천에 입성하여 28일에는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제천의진(提川義陳)을 결성, 4월까지 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계기로 의병이 다시 일어난 1907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에 나타나는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경기지역의 항일의병사상은 그 전파 속도와 심도가 가장 깊고 빨랐다. 1907년 8월 1일부터 12월 말까지의 화공작전에 의해 불탄 가호수는 타 지역에 비하여 경기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양평의 경우 용문산 일대 사찰과 양평읍 시가지가 불타버려 용문사(龍門寺)의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되었고 옥천면에서 옮긴 옛 양근군 소재지 관아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게 되었다. 일본군의 진압 방법이 강경하고 악랄한 만큼 피해가 컸다. 특히 1907년 군대해산 직후 항쟁의 양상은 연합전선으로 발전하여 좀더 조직적으로 항쟁을 시도해 나갔다. 한편 마전ㆍ지평ㆍ가평ㆍ포천ㆍ광주ㆍ이천ㆍ여주 등지의 주민들은 의병들의 활동에 매우 우호적이고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의병활동 당시 우리 나라에 와서 의병들의 활약상을 그린 영국인 맥켄지(F.A.Mckenzie)가 양근지방에서 만난 의병장에게 보초를 왜 세우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을때 그 의병장이 멕켄지에세 "보초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한국인들이 다 우리의 보초 입니다."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1907년부터 1908년에 걸쳐 양평에서도 의병에 참여한 사람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1907년 군대해산기에 권중식은 양근에서 기의하여 수년 동안 항전하였고, 용문면 출신 김상기는 단양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1907년 이강년과 함께 거의하여 충북 일대와 강원도ㆍ경상북도 삼도에 걸쳐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7년 7월에는 한갑이 지평에서 거의하여 홍천,인제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같은 해 7월 20일 경에 유덕상ㆍ김성선ㆍ전성환ㆍ윤성칠ㆍ호근영등은 의병장 조인환의 부하로 서종면 문호리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8월 4일에는 양평출신 조인환이 정미7조약과 군대해산 등 내정간섭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제를 몰아내고자 의병을 모집하여 양평을 습격하고 관아, 세무서, 우편소, 일본인 가옥 등을 파괴ㆍ방화하였다. 이무렵 양평의 권득수는 양주ㆍ양평ㆍ이천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가산을 정리하고 병마를 구입하여 용문산을 근거지로 항전하였다. 권득수 부대는 서종면 문호리에서 강을 건너다 일본 헌병대와 접전하여 헌병 2명을 사살하고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여 다시 용문사너에 주둔하였으나, 권득수는 밀고자에 의하여 9월 1일 피살되었다. 이외에도 양평의 민기회, 지평 마천에사는 이연년, 옥천면의 김춘수, 지평 출신 정영운, 지평 양곡의 이성서와 이창준 부자(父子)등이 의병활동에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