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8 의 의법출생분이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만삼천대천세계의 금과은등의 보화를 가지고 어떤사람이
널리 남을위하여 보시했다고 한다면
그 복덕이 많은데 , 복덕이 많은 것은 복덕이 아니기 때문에
복덕이 많다라고 여래께서 진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처님 멸후 용수존자는 일국의 왕자 출신으로 젊어서 아주
방탕한 짖을 많이 했읍니다.
같은 또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신분과 지위, 부모의 백을 믿고
어울러 다녔는데, 비숫한 층 의 출신들과 고렇게 고렇게 어울리는
것 아니겟읍니까,
요즈음 환경으로 말 한다면 요정이나 룸살롱 아니면 동네마을을
넘어 주변 이웃지방까지 돌아다니면 여성 을 희롱하고 그룹섹스
하면서 방탕하게 보냈는데, 간이 더 커지다 보니 한 국가의
왕의 궁녀를 탐 하기로 하고 친구들과 왕국의 성벽을 타고 넘어가서
궁녀를 겁탈하고 탐하려 하다가 왕 한테 걸려 들은 것입니다.
왕의여자를 겁탈하려 했다면 이를 안 왕이 가만히 놔두겠읍니까
용수대사 친구들은 잡혀서 다 참형을 당하고 용수는 구사일생으로
도망가서 목숨을 건지게 된 것입니다,
도망자 신세로 벨 고생을 다하고 있다가 요즈음 말로 공소시효가
끝이나는 것처럼 그 왕이 사망하자 조금 안심을 하게 되고
자기 집안에서 사면운동을 해 주었겠지요.
보나 안보나 스토리가 척 하면 삼천리로 빠지는 것입니다.
나중에 용수는 불교경전을 읽고 수행하면서 공부하다가
도 를 텄는데 이 의법출생분을 읽고 돈오 한 것 입니다.
용수대사 의 중론 과 관심론을 읽어보면 그 줄거리를 보건데
그분이 어떠한 계기로 이러한 훌륭한 불세출의 책을 편찬했는지에
대하여 대강 윤곽은 잡히기 때문에 유추하여 추리 해 본 의견인데
맞을 것입니다.
용수대사는 기독교 성자 라 할 수 있는 사도 바울에 비견하는
불교의 사도바울 정도의 위대한 선각자가 되어 회자되고 있읍니다.
바라문교의 흰두니즘 층의 어느누구도 용수대사의 중론에 대하여
구실로 잡을 수 없었고 용수와 토론에서 단 한번도 승리 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용수의 변재는 세계유일의 토론 제일인자가 된 것이고
당시 인도 불교대학인 나라난 대학에 교수로서 유명하기도 했읍니다.
하지만 살해 되었읍니다. 아주 비참하게 죽임을 당 했지요.
과거의 방탕한 생활과 사람을 놀이상대로 여긴 그 업장에 대하여
반드시 반연되어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은 반연되어 같음이 다시 와야 하는 업장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천겁이 넘게 석가모니도 태어나서 죽고 죽임을 당하고 팔도 잘리고
여성과 간음하여 무수히 집안도 망하고 그러한 시련을 계속 당하면서
업장을 다 소멸한다음 보살성인이 되어 또 다시 수없이 윤회 하다가
공덕으로 뭉처지는 상태에서 성불하시고 만세에 부처님이 된 것입니다.
행위한 업에 대한 인과는 반드시 같음으로 온다 입니다.
아무리 도를 트고 돈오하고 불세출의 깨친자로 세상에 진리를
전파한 자 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 행위만큼 반연되어 그 작용한 것에 대한 행위의
감응점의 반응을 피할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말 합니다.
이런 도리를 안 용수는 죽임을 당할때 그냥 저항없이 순순히 받아들이고
죽은 것입니다.
이 용수를 죽인 자 들은 또 반연 할 것입니다.
이것이 불법입니다.
하지만 불법은 불법이 아니므로 용수는 행한만큼 동시에 반연하여 받는 이치가
확립되어진것과 같기때문에 불법의 도로 이를 사면받거나 그 죄를 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인과응보의 불법의 도를 이미 갖추었으니
달리 불법이 적용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이를 말 한다고 하면
용수는 방탕한 행위를 하고 그 댓가를 동시에받았으므로
그 죄가 클 것입니다, 죄가 크다 함은 그 죄가 죄가 아닌 까닭에
죄가 되는데
죄를 죄라 하지 않기 때문에 죄가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고 말 하는 것과
같읍니다. 방탕한 행위와 동시에 그에 상응한 인과응보를 가지고 다니기때문에
이미 죄를 받은 것임과 같으니 달리 또 죄라고 이름할만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일국의 왕이 권력과 정치를 이용하여 죄 없는 백성을
탄압하고 막 사람을 죽이거나 억울한 이를 생산하게되면 그 죄는
어주 크게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크게 죄를 지은 것을 동시에 받을 수
밖에는 없는 법이 굴러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고, 이러한 까닭은
크게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미 동시에 받는 것이 정해 진 것입니다.
이를 동시에 오고감이 같은 여래 이긴 매한가지 이므로 달리 또 죄를
따불로 줄 일도 없고, 또 다시 죄값을 반연하여 맥여 놨는데
다른 이 들이 저 왕이 죄를 크게 지었다 라고 할 이유도 없으니
큰 죄를 지은 것이라 할 수 없는 까닭에 큰 죄를 받는다 이렇게 설명 할 수가
있읍니다.
이를 12 인연법이라 하고 , 용수대사는 반연의 도리의법칙을 명확하게
스스로 캐치고 아함초기경전을 달통하여 만세에 변하지 않는 책을 저서한
것입니다.
이를 의번 출생분이라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얼굴이 좀 잘 나게 생기면 좀 덜생긴 사람을 대할때
얼굴잘생긴 값을 하는 경우가 있읍니다.
다음에 반연하게 되면 아주 얼굴이 못생긴 자로 다시나와서 응보를 받아야
합니다.
왜인가 하며는 얼굴이 잘 났다라고 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미 반연의 이치가 자기잘난것으로 여긴 같음이 동시에 반연 되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거나 죽어 다시 태어나면 이미 못생긴 입장으로
굴러가기 때문에 얼굴이 잘난것은 잘난것이 아닌까닭입니다.
남을 기망하고 남을 비판하는 것에 강하고 자기 이기적인 생각을 지니고
남이 죽던 살던 상대를 수단화하는 업보는 동시에 인과법에 의한 불법의
이치로 반연 되어지게 되었으므로 달리 그 행위는 이름이 행위이지
행위라고 할 까닭이 없기에 인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항상 같음이 오고가며 반연하고 반연하며 굴러가는 것을 윤회라 하고
12 인연의 법칙에의하여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가 주고 자기가 받는다
라는 명확성을 볼때 돈오한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금 잘 나도
조금 돈이 많아도
남보다가 유리한 환경에 태어나서 잘 산다 하여도
다행이 복이 많다 라고 주변에 대하여 같음으로 감사해야 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이것을 지위로 권세로 유리함의 이기화로 합목적을 삼다가는
패가 망신 하는 반연은 반드시 받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잘나고 조금돈이 많고 유리한 환경에 태너아서 잘산다 하는 것들은
허망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헛것입니다.
반연받는 것이기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더욱더 보시하고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항상 낮은곳에 임하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누구한테 복을 받읍니까? 복을 주어도 절대 사양합니다.
복을 받으면 받는 만큼 상계되어지고 아니면 공덕이 없으면
복을 받은 만큼 부채가 쌓여 반연되어 그 복을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도는 자꾸 법당에가서 부처님 전에 공양 하는 것입니다.
공양의 의미는 이것을 말 합니다.
그렇다고 없는 돈엥 자기능력보다 더 많은 돈을 보시한다거나 하게
되면 이미 욕심이고 더 나쁜 결과를 반연해서 받아야 합니다.
가족에데 아는이에게 피해를발생시키는 전제하여 자기 복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갚아야 하는 것이지요.
한푼의 정성으로 콩나물 반찬 하나 조금 줄이고 진중하게 사찰에 가서
부처님전에 공양하는 마음이 바로 업장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도와주어도 내가 너가 불쌍히 여겨 도와준다 이렇게
마음먹는다면 이미 상계되어 공덕은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러한 입장이 바뀌어 지는 현상을 반드시 만나야 할 것입니다.
법은 이렇게 엄정하다 할 수 있읍니다.
이러한 법의이치를 중생들이 모르므로 부처님이 애처러이 여기고
측은지심으로 대자비를 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같은 부처인 불성을
소지함이 같으니 달리 개인적으로 구제 해 줄 수 도 없으므로
그 법을 가르치려고 화현하여 부처님 이 되신것입니다.
모든 일어나는 현상 은 이러한 법에 의하여 발생하고 일어난다 하는
것을 금강경 제 8 의 의법출생분이라 이름합니다.
금강경 제 9 하나의 상도 아님 (一相無相紛)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나는 수다원 과위를 얻었노라 하겠는가"
수보리가 사뢰었읍니다
"아닙니다.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성인의 류 에 들다 라고
이름하지만 실은 어디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물이나 소리나 향기 그리고 감촉이나 그 외에 무엇에도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수다원일 뿐입니다"
견해
수다원과는 성인류에 들어서는 4 가지 수다원 사다남 아나함 아라한 의
첫번째 경지인데 수다원과에 들며는 추후 일곱생 이하까지 윤회하다가
영원히 해탈하는 열반락을 즐기는 지위가 됩니다.
그런데 수다원과에 든 자가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노라 라고 할 수 없기에
수다원과에 든 것입니다.
수다원과에 이미들었는데 또 다시 생각을 내어 나는 수다원과에 들었다고
하게 되면 남에게 만삼천대천세계의 금은보화로 남을 위하여 널리 보시하고서는
나는 복덕이 많다 라고 생각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블 욕심이 됩니다.
이미 복을 받아지녔는데 또 복을 많이 받는다는 상을 지녀 생각을 내기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시 반연하는 결과를 또 초리한다는 것을 말 합니다.
만삼천대천세계 칠보를 전부 남에게 보시하는 마음의 깜냥은 절대로 그렇게
상을 내지도 않을 뿐 더러 그것으로 족하지 달리 내가 복을 지었다고
생각을 내서는 아니되는 자리가 복덕이 많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읍니다.
이러한 생각을 내면 남은 나의 복덕을 알아달라는 것과 매 한가지고
그것을 누리려는 마음이 욕심을 부르게 되어있기에 그러합니다.
요즈음 흔한 말로 누가 누구를 용서 해 준다라는 의미의말을 많이 합니다.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누가 누구에게 용서를 받는다 말입니까?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용서란 해당 사건의 피해자로서 피의자신분의 입장을 이해하고
용인하여 서로 없는 것으로 하는 것을 용서 라 합니다.
이미 인과는 다 해결되는 O 의 법칙 결과치를 마친 것이기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용서가 아닌까닭에 용서가 되는 것을 의미하듯이
이미 수다원과에 들어서면 성인류에 들어가있는데 다시 상을 내어서
당시의 색성향미촉법의 감정에 이끌려 나는 수다원과에 들었노라
하고 남에게 말 하게 되면 그 복을 다 까먹는 것입니다. 욕심이서는것이지요.
수다원과에 든 자는 그렇제 절대로 말 할 수 없는 자리가
수다원과에 드는 자리가 된다는 것을 경계 하시는 말씀이십니다.
수다원과에 들며는 아이쿠 계율의 하나를 또 어겼네.
아아쿠 나는 화를 냈네. 하고 버떡 알아차림이 계속 진행 되어야 합니다.,
내가 남한테 피해는 주지 않았는지,
내가 준 배려에 내가 자만하지는 않는지, 항상 모두가 같음으로 행하는
도리를 놓지 않는 태도를 지향하고 항상 알아치림이 진행되어야 수다원과에 든다고 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수다원과 가 아닌까닭에 수다원에 들어 성인류의 흐름에
올라선것입니다.
결국 12 인연법의무명에 벗어나기 위한것이 성인류에 드는것이므로
부처님의 본분사인 생노병사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성인류에 드는것이고
행위의 인연에 대하여 반연행위를 다시받는 것을 배척하는 것이
일단 수다원과에 드는 경지를 말 하는 것입니다.
업장소멸이 어느정도 되어있다는 뜻입니다.
자꾸 보시하는 공덕이 없장소멸이 되는 것입니다.
선행하고 보시하고 적선도 하고 자기보다 불리한 사람들에 대하여
측은하게 마음들고 하여 같음으로 이를 보시하는 것이 되면
수다원과에 든다는 것을 말 합니다.
기독교에서도 늘 예배당에 가서 십일조를 하지 않읍니까.
다 업장소멸이고 원죄를 희석시키는 자세이며 공덕입니다.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 다 그렇게 되게 되어있읍니다.
마음의 광명성이 찾아와서 청정해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헌금한다는 생각은 달리 내지 않는 것입니다.
마땅하게 자기에게 인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에 가서 헌금했다는 것은 그만큼 적선과 선행을
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여기는 것은 헌금이 헌금이 아닌 까닭이
헌금이기 때문입니다.
뭐! 벨로 어려운 것이 없읍니다.
다음에 계속 소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