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가는 그림 / 정중화
동내 어귀 수살배기 장승, 웃는지 우는지 모를 기막힌 표정,
밑동 굵은 느티나무 휘감은 붉고 흰 천들이 바람에 날리는
저물 무렵 휑한 들녘이 캔버스에 가득 찬다
낱알이 사라진 빈 논엔 붉은 깃발 노을처럼 서있고 어둠은
균열 간 유화그림처럼 조각조각 기억들을 들춰내고 있다
이별임을 알았을 때 침묵해야 했던 여자,
잊힌 것들에게 조차 냉정하지 못한 어수룩함이 두텁게 채색된 채
돌아올 리 없는 세월을 기다리고 있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무서리 내릴 즈음 사람들은 수살배기
삼거리에서 재齋를 올렸고 어머닌 정성을 다해 빌라하셨다
타올라 사그라지던 소지燒紙,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긴 어둠 같은 외로움,
저녁은 운명처럼 슬펐다 가야할 길로 가버린 노을을 엉거주춤 기다리다
토담 위를 지나는 상현달의 하얀 얼굴이 시려 슬펐고 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던 유년의 마당에서 무릎이 깨져 울었다
덕지덕지 앉은 딱지가 떼어지고 일그러진 새 살이 돋기만을 기다리던 시절의,
그림 속에서 늙어가는 여자, 듬직한 체구의 남자를 옆에 그려주고 싶은 여백,
여자마저 이미 떠나고 없다 넋 놓고 바라보던 들녘엔 격자무늬 사각 파이프가
푸른 색 담장을 하고 아파트 몇 천 세대 쯤 세워질 터 아득했던
옛날의 그림들은 낡아 버려지고 추억만이 차가운 인조석 의자의 견딜 수 없는
지루함으로 쓸쓸하게 경로당 문 앞을 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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