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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채봉에서 공룡능선 쪽 조망
오색역을 출발하여 소솔령(所率嶺)을 건너니, 설악의 어지러운 봉우리가 무려 수십여 개였
다. 산봉우리는 모두 머리가 희고 시냇가의 바위와 나무 또한 흰색이니, 세상에서 소금강산
이라 부르는 것이 빈말이 아니다. 운산이 말하기를 “매년 8월이면 여러 산에는 아직 서리가
내리지 않아도 이 산에는 먼저 눈이 내리기 때문에 설악이라 하오.” 하였다. 고개 위의 바위
사이에 팔분체(八分體)로 쓴 절구 한 수가 있었다.
生先檀帝戊辰歲 단군이 나라 세운 무진년보다 먼저 나서
眼及箕王號馬韓 기왕이 마한이라 일컬음을 직접 보았네
留與永郞遊水府 영랑과 함께 머물며 바다에 노닐다가
又牽春酒滯人間 또 춘주에 이끌려서 인간에 체류하네
ⓒ 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7
――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1454~1492),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서
주1) 소솔령(所率嶺)은 지금의 한계령을 말한다.
주2) 위 절구는 여경 홍유손(餘慶, 洪裕孫, 1431~1529)이 남추강(南秋江)이 영동(嶺東)으
로 놀러온단 말을 듣고 미리 이 글을 지어 놓고 기다렸다 한다.
▶ 산행일시 : 2020년 7월 4일(토), 맑음
▶ 산행인원 : 15명
▶ 산행시간 : 8시간 2분
▶ 산행거리 : 도상 14.0km(수담 님 오룩스 맵)
▶ 교 통 편 : 두메 님 25인승 버스
▶ 구간별 시간
06 : 30 - 동서울터미널 출발
07 : 55 - 서울양양고속도로 홍천휴게소
09 : 04 - 설악동, 피골 산책길
09 : 22 - 산책길 종점
09 : 50 - 무덤
10 : 42 - 능선
11 : 07 - 864.1m봉
11 : 20 ~ 11 : 42 - ┣자 갈림길 안부, 점심
12 : 35 - 1,211m봉
13 : 14 ~ 13 : 44 - 화채봉(華彩峰, 1,328.3m), 긴 휴식
14 : 23 - △1,216.7m봉
15 : 06 - 1,042.1m봉
15 : 37 - 863.8m봉
16 : 13 - 619.8m봉
16 : 44 - 321.3m봉
17 : 07 - 설악동 설악초교 부근, 산행종료
17 : 26 ~ 20 : 00 - 속초, 목욕, 저녁
23 : 00 - 동서울 강변역, 해산
1-1. 산행지도(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 1/25,000)
1-2. 산행지도(영진지도, 1/50,000)
▶ 864.1m봉
설악동 가는 길. 이른 아침 서울양양고속도로 남양주톨게이트를 통과할 때부터 차량이 밀린
다. 도로공사중이거나 교통사고라도 났는 줄로 알았는데 대거 몰려나온 피서(?) 차량이다.
홍천휴게소가 ‘코로나 19’ 이전수준으로 대만원이다. 홍천휴게소에 들러 커피(이번에는 비
싼 아메리카노 커피다)로 졸음 쫓고 차창 밖 경치 구경한다.
그런데 걸핏하면 터널을 지난다. 어쩌면 터널 연장거리가 노천 고속도로거리보다 더 긴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사해보았다. 우리는 이런 사소한 것에 무척 신경이 쓰인다. 서
울양양고속도로에서 양양방향 터널 수가 63개다. 그 연장거리가 나온 게 없다. 내가 개개 터
널의 거리를 모아 액셀 작업하였다. 66.327km다. 고속도로거리는 150.2km이니 터널 연장
거리가 무려 44.1%를 차지한다.
인제양양터널을 지나는 중이었다. 터널 안 전광판에 출구까지 11km라고 한다. 설마 몇 개의
터널을 연속해서 지나니 그러겠지 하고 여겼다. 아니다. 전광판은 수시로 출구까지의 거리를
표시한다. 우리나라 고속도로의 최장 터널이다(이다음은 동해고속도로 양북1터널로
7,543km이다). 정확히는 10.965km다. 이 터널은 공사할 때 터널 양끝에서 뚫는 것뿐 아니
라 터널 중간에 건설장비를 넣어 동시에 양방향에서 뚫었다고 한다.
방태산 중턱 지하 200m에서 건설장비가 오갈 수 있는 보조 터널을 먼저 뚫었다고 한다. 이
보조터널은 나중에 환기시설과 긴급대피통로의 기능을 한다. 워낙 긴 터널이기 때문에 운전
자의 과속이나 졸음운전을 방지하기 위하여 S자 모양으로 네 번 휘어지게 설계했다고 한다.
또한 강원도 내륙에서 동해 쪽으로 1.95도씩 서서히 내려가도록 설계하여 인제 쪽 터널 시작
과 양양 쪽 터널 끝부분의 고도 차이가 약 200m가 난다고 한다.
* * *
화채봉 산행 들머리인 설악동 C지구 여관촌. 예전에 한때 이곳은 방을 구하지 못할 정도로
호황이었다. 지금은 빈 건물만 즐비하여 황량하다. 안내판에 ‘피골산책로’를 표시하고 있으
니 우선은 당당하게 입장한다. 누가 보더라도 산책로라는데 중무장한 우리의 형색이 그리 어
울리지는 않다. 피골 계류의 낭랑한 물소리를 들으며 잘 난 숲속 길을 간다.
산책로는 17분쯤 걸어 종점이다. 금줄을 넘고 발걸음을 더욱 빨리 한다. 금줄 너머도 길이 잘
났다. 지도 읽어 5분 정도 진행하여 지계곡을 징검다리로 건너고 오른쪽 가파른 생사면을 올
려친다. 시원하던 피골 계류 와폭의 낙수소리가 멀어지니 더워지기 시작한다. 한 피치 올랐
을까? 가파른 오르막이 잠깐 멈칫한 틈을 타서 휴식한다. 입산주 탁주 나눈다. 탁주가 덜 녹
았다. 씹어 먹는다.
여전히 하늘 가린 숲속이다. 앞 사람이 만드는 발자국계단을 오른다. 그러고도 땅에 코 박고
오른다. 무덤을 만난다. 무덤 위로는 인적이 뜸한 순한 길인데 잡목이 여간 성가시지 않다.
번번이 잡목 숲에서 허우적거리다 흐릿한 길에 든다. 옅던 능선이 점점 살이 붙어 통통해지
고 냅다 치고 올라 864.1m봉이다. 인원 점검할 겸 휴식한다.
사면 쓸어 나뭇가지 사이로 어렵게 건너편 산릉을 들여다본다. 달마봉과 울산바위가 가깝다.
잡목 헤치며 864.1m봉을 내린 안부가 널찍하여 휴식하기 좋다. 노송 그늘 진 바람골이기도
하다. ┣자 갈림길 오른쪽은 토왕성폭포를 도는 ‘별을 따는 소년들’ 혹은 ‘은벽길’ 능선으로
이어지리라. 색 바랜 표지기 한 장이 안내한다. 이만한 명당도 또 없겠다 싶어 아예 때 이르
지만 점심밥을 먹자고 한다.
이제 화채봉까지 줄곧 긴 오르막이다. 길이 잘 났다. 꽤 오랜만에 오지산행에 나온 제임스 님
이 산이 무척 고팠다. 그간 아프리카에서 돼지목장 사업을 하다 돼지열병으로 실패하고 귀국
하여서는 작년 겨울에 오른쪽 발목의 아킬레스건을 다쳐서 6개월 정도 치료를 받았다고 한
다. 얼굴이 많이 검게 탔다. 수대로 제임스 님의 뒤를 쫓느라 땀 뺀다.
2. 홍천휴게소에서 공작산 전망
3. 울산바위, 왼쪽 뒤는 상봉, 그 오른쪽은 신선봉
4. 오른쪽 상단의 건물은 권금성 케이블카 정류장
5. 울산바위
6. 멀리 가운데 안부는 저항령
7. 노적봉
8. 달마봉
9. 공룡능선 주변
10. 칠성봉
11. 공룡능선, 맨 왼쪽은 신선대
▶ 화채봉(華彩峰, 1,328.3m)
등로 살짝 벗어나 넓적한 돌이 놓여 있는 곳곳의 쉼터를 그냥 지나친다. 자연 님이 아까부터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걸로 보아 힘든 모양이다. 이런 깊은 산속에서는 연호 대신에 일행들의
음성을 듣는 것은 방향은 물론 서로의 떨어진 거리를 가늠할 수 있어서 좋다. 그런 점에서 대
간거사 총대장님의 ‘추억의 소야곡’도 가점을 주어야 한다.
사면을 누벼보자 해도 온통 철쭉 숲이라 풀포기가 보기 드문 푸른 사막이어서 삼간다. 좀 더
오르면 조망이 트일까 숨 가쁘게 발걸음을 재촉한다. 선두는 1,211m봉 바로 아래 풀밭에 모
여 있다. 한참 거친 숨을 고른다. 1,211m봉. 암봉 암반이다. 일대 경점이다. 운무가 몰려왔다
몰려가기를 반복한다. 공룡능선과 천불동계곡의 주변이 육안으로는 비경이고 기경인데 카메
라의 눈에는 맹경이다.
1,211m봉에서 화채봉까지 0.5km쯤 된다. 바윗길이다. 그래서 걸음걸음이 경점이다. 운무가
걷히면 멈춰서 다시보기를 반복한다. 통천문을 지난다. 바위굴을 뚫고 오른다. 머리 받칠라
조심스럽고 축축한 바위가 미끄러워 지나기 까다롭다. 선두 일행은 좀 더 수월한 왼쪽 사면
으로 돌아갔으나 산정무한 님과 나는 외길이라 알고 일로직등 한다.
짧은 밧줄 잡고 슬랩 오르고 굵은 너덜 지나고 잡목 숲 헤쳐 머리 내미니 화채봉 정상이다.
딴 세상이 펼쳐진다. 화채봉(華彩峰)이라는 이름은 봄과 여름에 여러 가지 야생화가 (화채)
능선을 중심으로 다채롭게 핀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하는데 너무 작위적인 이름으로 보인
다. 여러 가지 야생화는커녕 고작 금마타리 몇 송이를 보았을 뿐이다.
누구라도 일견하여 발아래 놓인 무수한 침봉들을 아름다운 꽃이라고 여길 것이니, 화채란 다
름 아닌 침봉의 제국이고 그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이 봉우리의 이름이 아니겠는가? 우리
일행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사명대사가 읊은 금강산의 ‘진헐대(眞歇臺)’를 ‘화채봉’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성
싶다.
濕雲散盡山如沐 습한 구름 다 걷히니 산은 목욕한 듯
白玉芙蓉千萬峯 백옥 같고 연꽃 같은 천만 봉우리
獨坐翻疑生羽翼 홀로 앉으니 뒤집으니 몸에 날개가 생긴 듯
扶搖萬里御冷風 만 리를 잡아 흔들며 찬바람을 탄다
노산 이은상이 대청봉에 올라 보고 느낀 감정 또한 화채봉에서 우리가 보고 느끼는 감정이다.
“나는 지금 이 彌高崇嚴한 極處에 올라 저 雲霧層 아래로 萬壑千峰을 나려다보고 멀리 一望
無際한 東海를 가슴에 안고 잇서 人間의 苦惱를 밖으로 들여다보는 듯이 생각할 때 한줄기
熱淚가 내 손등에 떨어짐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은상,「雪岳行脚」)
태양이 가득한 화채봉에서 무려 30분을 보낸다. 만학천봉을 보고 또 보고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이 경치를 이대로 두고 가자니 아쉽기 짝이 없다. 화채봉 동릉을 간다. 바윗길
을 사면으로 살짝 비켜 지나다 암릉 암봉과 맞닥뜨린다. 오른쪽 가파른 사면을 깊이 떨어져
길게 돈다. 등로가 그렇게 났다. 예전에 맞은편에서 화채봉을 직등하려다 암릉에 막혀 뒤돌
아서 이 길로 왔었다.
12. 가운데 골짜기는 천불동계곡
13. 집선봉
14. 집선봉과 울산바위
15. 칠성봉
16. 가운데는 범봉
17. 범봉
18. 대청봉
19. 공룡능선과 그 주변
20. 아래 골짜기는 천불동계곡
21. 화채봉 정상에서
22. 화채봉 정상에서
▶ 설악동 설악초교 부근
다시 능선에 진입하고 잠시 동안 잔잔하게 지나다 △1,216.7m봉의 전위봉인 1,250m봉을
오른다. 외길로 아기자기한 암릉이다. 상당히 길다. 숲속 벗어난 암릉이라 조망이 훤히 트인
다. 뒤돌아보는 화채능선이 장성 장릉이고 그 끄트머리 대청봉에는 안개가 걷혔다.
△1,216.7m봉의 삼각점을 확인하려 했으나 줄달음하는 통해 놓쳤다.
1,042.1m봉 오르기 전이다. 선두그룹 4명이 지났고 그 뒤에는 제임스 님이 앞장섰다. 다수
가 그 뒤를 잇는다. 갑자기 제임스 님이 뱀에 물렸다며 소리친다. 등로 왼쪽에 거목이 쓰러져
드러난 뿌리에 독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지나다 무심코 손으로 집고 말았다. 왼손 인지
끝이 물렸다. 하필 독사가 어깨 높이의 나무뿌리에 있었고 색깔도 얼른 눈에 띄지 않아 누구
라도 집기 쉬웠다.
독사에 물린 곳을 칼로 째고 독을 입으로 빨아내게 하고 나서 노끈으로 독이 퍼지지 않도록
묶게 했다. 너무 아픈지 몇 번이나 비명을 지른다. 제임스 님은 아름다운 동행하는 오모 님,
해피 님과 함께 진전사 쪽으로 하산하게 한다. 거기가 택시를 불러 속초 병원에 가기가 가깝
다. 남은 자들은 산행을 계속한다. 그러나 산중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등산 중에 뱀에 물리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길춘일(1966~ )이 그의 단독종주기 『71일간
의 白頭大幹』(1996)에서 독사에 물리고 치료한 과정을 자세히 적었다. 길춘일은 1994년
7월 17일부터 9월 25일까지 71일간에 걸쳐 백두대간의 남쪽 끝 지점인 지리산에서 진부령
까지의 백두대간을 일체의 지원 없이 종주하였다.
그는 상주 화령재를 가기 전에 바위 밑에서 큰 독사를 만났는데 독사가 무는 시늉을 하기에
장난치다가 그만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물렸다. 그도 물린 데를 칼로 째고 피를 빨아내고 고
무줄로 꽁꽁 묶었다. 그러고 나서 산을 내려와 우여곡절을 겪은 후 상주 적십자병원에 도착
하여 응급실로 갔다. 그 병원에는 이런 경우를 처치할 전문의가 있었다. 그는 6일간 입원하
여 치료를 받았다.
그 전문의의 말씀, 우리나라 독사는 맹독성이 아니라서 2시간 안에 병원에만 오면 치료가 거
의 된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뱀에 물리면 피가 통하지 않게 뱀에 물린 곳을 묶는데 우
리나라 뱀은 독이 혈관을 통하여 퍼지지 않고 근육과 신경을 통하여 퍼지기 때문에 치료하기
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는 편이며 뱀에 물린 곳을 굳이 묶을 필요도 없다고 한다.
863.8m봉은 Y자 능선 분기봉이다. 오른쪽은 송암산과 진전사로 간다. 제임스 님 일행을 오
른쪽 진전사 쪽으로 보내고 남은 일행들은 왼쪽으로 간다. 병원에서 치료받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 산행시간 또한 넉넉하다. 가장 긴 코스를 잡는다. 길 좋다. 완만하게 오
르내리는 소나무 숲길이다. 정작 피골 산책길은 여기다. 이따금 나뭇가지 사이로 울산바위와
달마봉을 감상할 수도 있고.
619.8m봉은 ┣자 능선이 분기한다. 직진한다. 이다음 Y자 갈림길에서는 오른쪽으로 간다.
왼쪽은 피골 입구라 국공이 순찰할지 모른다. 오른쪽 동네에 섞이는 편이 낫다. 321.3m봉을
넘고부터는 발소리과 말소리에 이어 숨소리까지 죽인다. 살금살금 동네에 내려서는 데 놀고
있던 여자 어린아이 둘이 우릴 보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안녕하세요!’ 합창하여 인사한다.
사실 요즘은 국공보다 동네사람이 더 무서운 세상이라 깜짝 놀라 인사를 안 해도 된다고 사
정한다. 설악동이 적막하다. 근처에서 우리 오기를 기다리던 두메 님이 달려오고 속초로 간
다. 제임스 님은 속초보광병원에서 링거주사를 맞고 있다 한다. 우리는 곧장 장수목욕탕에
들러 외옹치 횟집으로 갈 것이다.
23. 대청봉과 화채봉
24. 대청봉
25. 화채봉
26. 멀리는 서북주릉, 앞은 화채능선
27. 쓰러진 고사목 뿌리에 똬리를 틀고 있는 독사
28. 멀리 뒤는 상봉과 신선봉
29. 멀리 가운데는 저항령, 그 오른쪽은 황철봉
30. 달마봉
31. 설악동 동네 화단에 핀 코스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