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릉의 유래
현재 제가 근무하고 있는 곳은 청량리 205번지에 위치한 사적 제361호로 지정된 영휘원(영휘원과 숭인원)입니다. 그런데 왜 일반 관람객들은 전화를 해서 홍릉을 찾는 것일까요?
그럼 지금부터 저와 함께 홍릉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동대문구 청량리 2동 홍릉 일대는 원래 조선왕조 왕가 소유의 국유림이었습니다. 지금은 도로가 나고 구획이 정리되어 분간하기가 쉽지 않지만, 홍릉일대는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 줄기가 뻗어내려오다가 천장산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야산 지대로서 왕가에서 주로 능 터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천장산 동쪽 끝은 조선조 20대 임금인 경종의 무덤(의릉)이 있고, 구한말에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세상을 떠나고 명성황후 무덤을 현 산림과학원안에 쓰게 되면서 홍릉이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답니다.
현재 산림과학원 정문 왼편에 보면 홍릉터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표석에 기재되어 있고, 내부로 10분-15분 도보로 걸어가다 보면 명성황후를 모신 무덤의 터(홍릉터)가 남아있습니다.
명성황후를 모신 홍릉은 1919년 2월 16일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남양주시 금곡동(홍유릉)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고종의 무덤에 합장을 하게 되었답니다. 현재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에는 다음과 같이 능원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홍릉은 고종황제 및 명성황후가 함께 합장되어 있는 곳입니다. 청량리 산림과학원내 있을 때부터 사용되었던 명칭이 그대로 전해져 홍릉으로 불려지고 있지요. 작년여름 조선왕조 마지막 황세손 이구선생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홍릉이냐고 묻는 전화가 많이 왔었답니다. 참고로 이구 황세손은 영원주변에 모셔져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젠 홍릉에 대해서 아시겠지요? 다음부터는 영휘원에 전화하셔서 홍릉이지요? 하시면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몸담고 있는 영휘원과 숭인원에 대해서 간단히 알려드리겠습니다. 영휘원은 조선 제 26대 고종황제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의 무덤이고, 숭인원은 한말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영친왕이라고도 함)의 큰아들 이진의 무덤입니다. 순헌귀비엄씨라고 하면 대부분 낯설어 하다가도 “혹 드라마 사극에서 엄상궁이란 호칭 들어보셨지요? 바로 그분의 묘입니다.” 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아주 익숙해합니다. 또한 이진의 묘라고 하면 낯설어 하다가도 “이방자여사가 낳은 아기”라고 하면..아! 하는 탄성과 함께 다 알고 있다는 듯 반응을 보이곤 합니다.
순헌귀비엄씨는 평민출신인 영월 엄씨 엄진삼의 딸로서 5세때 아기 나인(나인)으로 대궐에 들어갔고 후에 왕후인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아 시위상궁(사가로 말하면 거의 몸종과 다름없었음)으로 발탁되었는데 그런 처지에 어느날 갑자기 고종황제와 동침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인물이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도 아니고 궁녀의 나이로서는 늙은 편이었던 엄상궁이 어느날 아침 갑자기 임금님 처소에서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왔으니 대궐 사람들이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답니다. 당시에 궁녀가 임금의 승은을 입게 되면 그 사실을 대궐에 널리 알리기 위해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오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저런 일이!” “상감마마께서 귀신한테 홀리셨나?” “혹시 거짓부렁으로 저러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건 사실이었답니다.
이 사실을 듣고 명성황후는 노하여 직접 매를 치려고 형틀을 차리라고 명령했답니다. 민비는 처음에 엄상궁이 워낙 자신과 가까웠고 미더웠던 사이라서, 늙고 못생긴 엄상궁을 임금께서 탐을 낼 까닭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까이 둔 것인데 상상해본일 조차 없었던 배신행위가 일어났던 것이지요.
그 후 민비의 분노는 고종의 계속된 사과로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고, 엄상궁은 대궐밖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엄상궁이 32세 때의 일입니다.
명성황후에게 엄상궁이 내쫓긴 지 10년후, 1895년 일본낭인들에 의하여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5일 만에 엄상궁은 대궐에 다시 들어와 고종의 수발을 들게 되었으나, 국모인 왕비가 시해되고 민심이 흉흉해지고 대궐 안에 공포분위기가 짙게 깔린 분위기속에서 잘못하면 고종임금마저도 일본낭인들에 의해 시해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엄상궁은 기지를 발휘하여 당시 일본보다 힘센 나라고 여겼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고종임금을 피하게 했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아관파천’(1896년 2월)입니다.
그 후 러시아공사관에서 정무를 보게 되었고 엄상궁은 44세(1897년)의 나이에 아들을 얻게 되는 데 그가 곧 영친왕(영왕), 숭인원에 묻히신 이진의 아버지입니다. 고종에게는 12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모두 어린나이에 죽고 나중에 성인이 된 자녀는 모두 4명(마지막 임금인 순종, 궁녀 장씨 소생 의친왕, 엄귀비 소생인 영왕, 그리고 덕혜옹주 )이었습니다. 순종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성불구자였기 때문에 후계자인 왕세자를 책봉하게 되었을 때 10살이나 손위가 되는 의친왕을 제치고 엄귀비의 뜻대로 2살의 어린 영왕이 황태자로 책봉되었습니다.
한일합방이 있은 후에 일본은 고종황제를 태왕으로,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양위를 받은 순종은 조선왕이라 칭하고 황태자는 영친왕이라는 호칭으로 강등시켰습니다. 엄귀비의 아들 영친왕은 조선총독 이토오 히로부미에 의해 일본 황실에 볼모로 잡혀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그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아들마저 볼모로 잡힌 엄귀비의 고통이 오죽했겠습니까? 일제는 해마다 방학 때 영친왕을 조선으로 보내겠다 했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아들을 그리워하던 엄귀비는 58세( 1911년 7월 )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헌귀비 엄귀비는 생전에 모은 재산으로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인재를 키우는 교육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특히 여성들의 신교육을 위해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또한 양정중고교가 재정난에 허덕이자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200만평의 땅을 기증하기도 했답니다. 현재 신위는 청와대 경내 칠궁에 있는 덕안궁에 모셔져 있습니다.
숭인원은 고종황제의 넷째아들 영왕의 큰아들 이진의 무덤입니다. 1921년 8월 일본에서 태어나 영왕과 이방자여사와 일시 귀국하였으나, 생후 9개월 만에(1922년 5월)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당시의 풍습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장례를 치룰 수가 없었으나, 순종황제가 이진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성인왕족의 장례와 동일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분부하고 원호를 숭인원이라 하였으며, 이진 할머님이신 순헌귀비 엄씨가 모셔져있는 영휘원 남측 경내에 묘역을 조성하였습니다.
홍릉의 유래에 대해서..그리고 영휘원과 숭인원에 대해서 이젠 아셨지요? 다음번에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홍유릉에 대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문화재청 혁신인사기획관실 성과관리팀 홍영주 hyj7@ocp.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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