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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哀汝等, 苦心誨喩, 授與經法. 悉持思之, 悉奉行之. 尊卑, 男女, 眷屬, 朋友, 轉相敎語, 自相約檢. 和順義理, 歡樂慈孝. 所作如犯, 則自悔過. 去惡就善, 朝聞夕改. 奉持經戒, 如貧得寶. 改往修來, 洗心易行. 自然感降, 所願輒得.
내가 그대들을 불쌍히 여겨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르치고 깨우쳐 경법을 전수하니, (경의 의리를) 모두 수지하여 사유할 것이며, 모두 봉행하되, 존귀한 자, 비천한 자, 남자, 여자, 가족, 친구 모두 서로 전하여 가르칠지어다.
스스로 구속하고 점검할 것이며, 태도가 화순하고 의리에 맞게 (일체 중생을) 즐거운 마음과 자비심과 효심으로 대할 것이며, 행한 바가 만일 과실을 범했으면 스스로 잘못을 참회하여, 악을 없애고 선으로 나아가야 하며, 아침에 들으면 저녁에는 고쳐야 하느니라. 경전의 가르침을 받들어 수지하는 것은 마치 가난한 자가 보배를 얻은 것과도 같나니, 지난날의 악행을 고치고 미래를 닦으며, 마음(의 때를) 깨끗이 씻고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고친다면, 자연히 제불과 감응하여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 원하는 바를 문득 얻을 수 있느니라.
내가 너희들을 불쌍히 여겨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르치고 깨우쳐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 방법을 전해주니, 모두 수지하여 사유할 것이며, 모두 봉행할 지어다[吾哀汝等, 苦心誨喩, 授與經法. 悉持思之, 悉奉行之]. 부처님께서는 세간과 출세간의 진상(眞相)을 분명하게 보셨으므로, 우리들이 윤회 속에 떨어져 의혹을 일으키고 업을 지으면서도 자신과 생활환경의 진상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여, 잘못 생각하고 잘못 보고 잘못 말하고 잘못 행함을 철저하게 다 보셨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나면, 그 뒤에는 악의 과보가 있으며, 응보는 스스로 받아야 하며,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합니다. 오늘 기연(機緣)이 무르익어 이 경전을 만났으니, 우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발원할 수 있으며, 행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고난 속의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간절하고 간곡하게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수여경법(授與經法)에서경(經)은 경전으로 인생의 진상을 설명하는 것이며,법(法)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어 원만하게 불도를 이룰 수 있는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실하게 받아들여 그것을 수지하여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고 언제나 사유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마치 대세지보살이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부르면 앞에 나타나 당연히 오시므로 반드시 부처님을 보게 된다.고 한 말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끊어야 한다고 시키셨으면 곧 끊어야 하며, 즉 오역십악입니다. 우리에게 해야 한다고 시키셨으면, 곧 행해야 하며, 즉, 오계십선입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사바세계를 떠나 즐거운 마음으로 극락에 가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그대로 행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나 자신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를 뿐만 아니라, 진심진력으로 남에게 권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주변에 있는 존귀한 사람, 비천한 사람, 남녀, 권속, 친구들에게 계속해서 서로 가르치고 말하여, 한 가정에서 한 국가에 이르기까지 서로 권면하여 진실한 법을 국내외까지 넓혀나간다면,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일체 잘못된 사상과 행위를 구속하고 반성하고 점검하여 힘써 잘못을 고치고 스스로 새롭게 할 것이며, 태도가 화순하여야 하며 의리에 어긋나서는 안 되며, 즐거운 마음과 자비심과 효심으로 대하라[自相約檢. 和順義理, 歡樂慈孝]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자신이 먼저 실행하여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며, 말과 행동을 경전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을 단속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대중과 함께 있을 때에는 화순(和順)해야 합니다.화(和)는 육화(六和)를 실천하는 것이며,순(順)은 항상 중생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항상 따른다는 것은 이지적이며, 감정적이 아닙니다. 항상 따르는 속에서 상대방을 계발시키고 상대방을 변화시켜 그로 하여금 깨닫고 뉘우치도록 합니다.
환악자효(歡樂慈孝)는 세상을 살아가고 사람을 대할 때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입니다. 대승경 속에서는 보살이 있는 곳은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기쁜 마음을 일어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중생을 다치게 할 생각이 없으며, 뿐만 아니라, 중생을 다치게 하는 행위는 더욱 없습니다. 자비는 청정한 것이며 평등한 것이며, 분별과 집착이 없습니다.
효(孝)자는 수학(修學)하는 큰 근본이며, 모든 불법(佛法)은 효(孝)자를 발양하고 광대하게 한 것입니다. 효(孝)자는 중국의 육서(六書) 중에서 회의(會意)문자에 속합니다. 위의노(老)자와 아래의자(子)자로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위의 한 세대와 아래의 한 세대는 하나이지, 둘이 아니며, 위의 한 세대는 또한 위의 한 세대가 있고, 아래 한 세대는 또한 아래의 한 세대가 있습니다.
과거는 시작이 없고, 미래는 끝남이 없다는 것이 바로 효(孝)자의 뜻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일체 중생과 자신이 한 몸이어서, 시간적으로는 삼세(三世)를 다하고, 공간적으로는 시방을 두루 하며, 전 우주가 바로 하나의 자신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데, 어찌 자비에 무슨 분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중생을 구제하시고자 함이 중생을 감격시키고자 하신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처와 중생은 근본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당연히 먼 조상까지도 다 기억해야 하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부모님에게 공경하지 않고, 어찌 효도하지 않는 도리가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유가(儒家)에서부모님의 장사를 공경히 지내고, 조상에게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면, 백성들의 덕이 후덕한 데로 돌아갈 것이다[愼終追遠, 民德歸厚].라고 말하였으며, 이 의미는 대단히 광범위하고 심오합니다.백성의 덕이 후덕한 데로 돌아간다는 제사의 효과이며, 풍속과 인정이 돈후해짐을 말합니다. 천지만물과 자신은 한 몸[一體]입니다.
불법(佛法)에서는 세 가지 몸을 말하고 있는데, 첫째 법신입니다. 법은 일체 법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체 사람과 사물을 포함하며, 바로 일체 현상이 다 그 안에 들어있으며,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의 진신(眞身)입니다. 진실대로 아는 것이 바로 청정한 법신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 몸은 법신의 일부분이며, 그러나 이 뜻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고도 어렵습니다.
고덕들은 항상 꿈을 꾸는 것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꿈을 꾸는 순간에는 자기도 있고 산하대지도 있으나,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꿈의 경계는 마음이 변화하여 나타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능히 나타난 현상[能現相]은 진실이지만, 나타난 바 현상은[所現相] 허망한 것입니다.
온 허망이 바로 참이며, 온 마음이 바로 꿈입니다[全妄卽眞, 全心卽夢] 지금 하나 질문하겠는데, 꿈속에서 어느 것이 자신이 아닙니까? 자신 이외에는 얻을 수 있는 한 법도 없습니다. 눈앞의 산하대지와 우주허공 어느 법인들 자성이 변화하여 나타난 것이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어느 날 일체 중생과 산하대지가 전부 자신이구나 하고 인정한다면, 이미 법신을 증득하였으며, 부처가 되었음을 축하합니다.
법신을 증득한 후에는 보신과 응화신 역시 얻게 됩니다. 현재 눈앞에 분명하게 펼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사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을미혹되고 전도되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불보살과 우리는 둘이 아닙니다. 이러한 이치를 분명하게 인식해야만 비로소 효도를 다 할 수 있으며, 아직 성불하기 전에 하는 행위에는 매우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모든 불보살들은 대자대비할 수 있지만 우리은 할 수 없는가 하는 이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행한 바 말과 행동이 과실을 범하였으면 반드시 깊이 스스로 잘못을 참회해야 한다[所作如犯, 則自悔過]. 성현이 아닌 이상 어느 누군들 잘못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성현 가운데 대성(大聖)만이 과실을 없앨 수 있습니다. 만약 잘못을 알고 고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선은 없습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며, 깨달은 후로는 수행해야 합니다.
수행은 바로 잘못을 고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잘못을 알고 잘못을 고치는 것이 바로 진실한 공부입니다. 범부는 과실이 너무나 많으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현의 글을 읽는 목적은 바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여 깨달아 수행하도록 도와주는데 있으며, 잘못을 발견하면 즉시 고쳐야 합니다.
경(經)은 깨달도록 해줄 수 있고, 계(戒)는 잘못을 고치도록 해줄 수 있으니, 경과 계를 받들어 수지함은 마치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음과 같습니다. 과실(過失)을 알고 능히 고친다면, 장래에 다시는 잘못을 범할 리가 없습니다.
마음의 때를 깨끗이 씻고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고친다[洗心易行]. 마음속의 번뇌와 망상과 집착을 깨끗하게 씻어내며, 몸과 입과 뜻의 삼업의 잘못을 힘써 고치려고 하면, 저절로 모든 보살과 천지의 선신과 감응이 있어서 모든 원하고 구하는 것을 다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습니다.
佛所行處, 國邑丘聚, 靡不蒙化. 天下和順, 日月淸明. 風雨以時, 災厲不起. 國豐民安, 兵戈無用. 崇德興仁, 務修禮讓. 國無盜賊, 無有怨枉. 强不淩弱, 各得其所.
부처께서 교화를 행하신 곳은 국가와 도시와 촌락이 감화를 받지 않은 곳이 없으며, 천하가 화평하고, 해와 달이 청명하고, 제때에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재앙이 발생하지 않으며, 나라가 풍요롭고 백성들이 편안하여 군대와 병기가 소용이 없느니라. 사람들이 다 도덕을 숭상하고 인자함을 베풀고, 힘써 예의와 겸양을 닦아 나라에 도적이 없으며 원망하고 억울한 일이 없으며, 강자가 약자를 능멸하지 않고 각자가 다 자신에게 알맞은 자리를 얻느니라.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가시는 곳마다 반드시 경을 강의하고 법을 말씀하여 그 지역을 교화하셨습니다. 불타 교육이 전파하여 이르는 곳이면 국가와 도시와 촌락이 다 교화를 입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국(國)은 국가이며, 읍(邑)은 도시이며, 구취(丘聚)는 마을입니다. 어느 곳을 막론하고 단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베풀기만 해도 그 지역 사람들은 즉시 부처님의 교화를 입었습니다.
교육의 목표는 고금이 달라, 오늘날은 단지 생계를 도모하기 위해 학생들이 하나의 기술만을 능숙하게 익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의 교학목적은 기질을 변화시켜 성현이 되길 희망하는데 있었습니다. 불법(佛法)의 교학은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학생들로 하여금 범인의 경지를 뛰어넘어 성인의 경지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가(儒家)의 교학목표는 세 가지로, 첫째는 군자(君子)가 되는 것이고, 둘째는 현인(賢人)이 되는 것이고, 셋째는 성인(聖人)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교학목표 역시 세 가지로, 첫째는 아라한이 되고, 둘째는 보살이 되고, 셋째는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악을 변화시켜 선을 행하고, 재난을 변화시켜 좋은 일로 만들고, 화를 변화시켜 복을 만들고, 난폭을 변화시켜 인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천하화순(天下和順)에서화(和)는 화목이며,순(順)은 순종하여 어긋나지 않음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치에 밝아 이치를 따르고, 법을 지켜 법을 따르면, 사회는 자연히 상서롭고 화목하게 됩니다.해와 달이 청명하며, 제 때에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재앙이 발생하지 않으며, 나라가 풍성하고 백성들이 편안하다[日月淸明. 風雨以時, 災厲不起. 國豐民安]. 이 구절은 앞에서 말한마음을 씻고 행동을 바꾸면 자연히 감응하여 내려온다[洒心易行. 自然感降].를 가리키며, 그 속에 내포하고 있는 뜻은 서로가 같습니다. 이는 자연현상을 가리키며, 이는 지금 사람들이 말하는 자연의 생태입니다.
이러한 자연현상은 우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유는 만물은 일체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착하면 비바람이 순조로우며,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천재(天災)가 겹쳐서 발생합니다. 재앙(災殃)과 상서(祥瑞)는 모두 사람의 마음을 지표로 삼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우리들이 거주하는 지연(地緣)을 알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만약 오염방지를 강화하지 않으면 50년 후에 이 지구는 인류가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환경의 오염은 마음의 오염으로 말미암아 감응하여 발생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현재 사람들의 마음의 오염정도는 환경오염보다 몇 배나 더 심각합니다. 불가에서 항상의보(依報)는 정보(正報)에 따라 변한다.고 말합니다.
고대에는 만약 큰 재난을 만나면, 그때마다 항상 황제는 목욕재계하고 소식(素食)을 하고 자신을 돌이켜 책망하였으며, 아울러 천심(天心)이 돌아오기를 기원하였습니다. 이는 절대로 미신이 아닙니다. 만약 사람들이 전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고, 마음을 닦고 행동을 바꾼다면, 자연히 천하는 화순(和順)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화합한 후에야 비로소 천지가 화합함을 얻을 수 있어서 제 때에 알맞게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며 재앙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산물이 풍부하며, 국민들의 생활이 부유하고 안락하며, 전쟁의 재난이 없으며, 도덕을 숭상하는 것은 모두가 다 자비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만물을 대하며, 일을 만나도 서로 인내하고 양보하여 다투어 고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국내에는 도적이 없고, 민간에는 억울함이 없으며, 강자가 약자를 속이지 않는 것은 재물과 위세로서 남을 침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크게 행해지는 곳에는 대중들이 부처님의 훈도를 받아 나쁜 생각과 나쁜 행동이 모두 이미 사라지고 없기 때문에, 편안히 살면서 즐겁게 일하며 천하가 태평합니다.
지금 사회가 어지러운 근원은 바로 빈부의 격차가 고르지 않음이며, 이는 사실상 영원히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각자가 지은 업의 선과 악이 다르기 때문에, 자연히 부귀와 빈천의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만약 과거ㆍ현재ㆍ미래, 삼세의 인연을 능히 알아야만 각자 자신의 분수를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수 천 년 동안 조대(朝代)를 바뀌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장기간 나라가 태평하고 사회질서와 생활이 안정되었던 때가 많았습니다. 군주제도 시대에는 육부(六部) 중에서 첫째가 예부이며, 교육을 전담하였습니다. 한나라 이후는 이중적 교육으로, 재상 이하는 예부에서 공맹교육을 추진하였습니다. 직접 황제의 관할에 속한 것은 불교교육이었으며, 이것 역시 사회교육으로, 그 깊고 넓은 정도가 전국에까지 미칠 수 있어, 유가 교학과 서로 협력하였습니다.
부귀한 사람들은 글을 읽는 기회가 비교적 많았으며, 책을 읽어 이치를 깨달아 어떻게 인격을 형성하고 일을 처리함을 알았습니다. 또 어떻게 해야 자신의 부귀를 보전해야 하는지를 알아, 몇 세대를 걸쳐 전해져도 쇠퇴하지 않는 가문들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불교가 사회의 안정과 민중의 행복에 막대한 공헌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我哀汝等, 甚於父母念子. 我於此世作佛, 以善攻惡, 拔生死之苦. 令獲五德, 升無爲之安. 吾般泥洹, 經道漸滅. 人民諂僞, 復爲衆惡. 五燒五痛, 久後轉劇. 汝等轉相敎誡, 如佛經法, 無得犯也. 彌勒菩薩, 合掌白言: 世人惡苦, 如是如是. 佛皆慈哀, 悉度脫之. 受佛重誨, 不敢違失.
내가 그대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깊나니, 나는 이 세계에서 부처가 되어 선으로써 악을 다스려 생사(윤회)의 고통을 뽑아 없애어, 그대들로 하여금 다섯 가지 덕을 얻고 작위함이 없는[無爲] 편안함에 오르게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열반에 들어간 후에 경도(불법)가 점점 사라질 것이며, 그때에는 사람들은 서로 아첨하고 속이면서 다시 온갖 악을 지어, 오소(五燒)와 오통(五痛)이 오래 지나간 후에는 더욱 극렬해질 것이니, 그대들은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여 부처님의 경의 이론과 방법에 맞게 수학하여 범해서는 안 되느니라.
미륵보살은 합장하고 부처님께 아뢰길,세상 사람들이 오악을 지어 얻은 오통과 오소의 고통의 과보는 이러하고 이러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대자대비하신 마음으로 중생을 불쌍히 여겨 모두 다 제도하여 벗어나기를 희망하시니, 부처님께서 거듭 가르쳐 주심을 받아 감히 어기지 않겠나이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이 육도(六道)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생사 윤회함을 불쌍히 여겨 마음에 비원(悲願)을 일으키길, 마치 부모가 자식을 염려하는 것처럼 특별히 이 세상에 오셔서 부처가 되어 선으로 악을 다스리고 생사의 고통을 없애주셨습니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은덕은 한 생에 지나지 않지만, 불보살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어 세세생생 영원히 돌보십니다. 간절하고 간곡하게 우리에게 악을 버리고 선을 닦아 생사를 끊을 것을 권하십니다. 만약 불법(佛法)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중에서도 특히 이 염불법문을 만나지 못하면, 한 생에 윤회에서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불가(佛家)에서는 항상 부처님 일을 하는 문중(門中)은 한 사람도 버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보살은 이미 중생에 대해 두루 다 보살피거늘, 어째서 중생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서 여전히 윤회의 수레바퀴를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원인을 자세히 궁구해보면, 아마도 대다수의 중생이 선근과 복덕의 인연이 모두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바로 스스로를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근과 복덕의 인연이 성숙하여 불타의 경법(經法)에 대해 즉시 능히 믿고 받아들여 성실하게 공부하여 생사의 대사를 해결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은 말법시대입니다. 부처님께서 비록 세상에 계시지 않더라도 경전은 여전히 세상에 남아있으니, 만약 가르침에 따라 행할 수 있다면, 직접 우리 귀로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생사윤회의 근본은 중생의 잘못된 견해와 사상이라 하셨습니다. 이 무량하고 무변한 견혹과 사혹을 부처님께서는 크게 다섯 가지로 귀납시켰습니다.
⑴ 신견(身見: 아견)이며, 몸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몸은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소유이지, 내가 아닙니다. 만약 나라고 한다면, 죽은 후에 몸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육도를 윤회하겠습니까?
그래서 진아(眞我)와 몸은 둘입니다. 대승이나 소승에서나 모두 자신에게 이익이 있는 것을 모두 악이라 말하였으며, 이는 아견(我見)을 증장시킴으로 인해, 아집과 아견을 가지게 되는데, 어떻게 삼계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몸은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몸을 이용해 도를 닦고, 거짓을 빌려 참을 닦습니다.
⑵ 변견(邊見)입니다. 대승불법에서는 중도(中道)를 말하는데, 이는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육조단경》에서 육조는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고 하였습니다. 만약 어느 한쪽에 집착하면 바로 한 물건이 있습니다. 또한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의 두 가지 견해 역시 변견(邊見)에 속합니다. 만약 마음과 몸이 단멸(斷滅)한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은 단견에 속하고, 몸과 마음이 영원히 항상 머문다는 견해에 집착하는 것은 상견에 속합니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모두 한쪽에 치우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말한 상대론은 일체 중생이 모두 상대적인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것을 아는데, 이는 불법(佛法)에서 말하는 변견과 비슷합니다.
⑶, ⑷ 성견(成見)으로, 하나는 수인(修因)이고, 하나는 증과(證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항상 인과를 잘못 생각합니다. 인이 아닌데 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를 계금취견(戒禁取見)이라고도 말합니다. 선인(善因)은 선과(善果)를 얻으며, 악인(惡因)은 악보(惡報)를 받으니, 이는 고정불변의 이치입니다.
인도에서 일부의 수행자들은 정공(定功)이 매우 깊어 선정을 얻으면 곧 신통력이 생기고 천안통을 얻습니다. 한 수행자는 소가 죽은 후에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우계(牛戒)를 수지하여 풀을 먹고, 밭을 갈고, 소와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죽은 후에 하늘에 태어나기를 희망하였습니다. 그는 소의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 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죽은 후에 반드시 소로 변할 것이라는 생각에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가 전생에 하늘에 태어날 씨앗이 있었기 때문에 선과(善果)가 성숙하여 하늘에 태어난 것이며, 그가 금생에 소였기 때문에 하늘에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지(因地)상의 잘못입니다.
둘째는 과(果)상에서의 잘못으로, 과가 아닌데 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이를 견취견(見取見)이라고도 말합니다. 일반 종교인들은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영생(永生)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하늘은 구경이 아니며, 설사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 태어나 팔만 대겁(大劫)의 수명을 가지게 될지라도 목숨이 다하면 여전히 윤회에 들어갑니다. 이 네 가지 이외에도 나머지 정견(正見)에 맞지 않는 사상은 모두 삿된 견해(私見)에 속합니다.
사혹(思惑) 역시 크게 다섯 가지가 있으며, 즉,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ㆍ오만ㆍ의심입니다. 이 견혹과 사혹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도를 윤회합니다. 생사의 근본을 제거하려면 반드시 견사를 끊어야 합니다. 소승의 성자는 88품의 견혹을 끊어야 소승초과 수다원을 증득하며, 즉 성자(聖者)의 대열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삼악도에 떨어지지 않으며, 천상과 인간 세상을 일곱 차례 왔다 갔다 합니다. 그리고 사혹이 다 끊어지면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됩니다.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아 스스로의 수행에 의지하여 증득하는 것을독각(獨覺)이라 말하고, 십이인연을 관(觀)하여 도를 깨달은 것을 연각(緣覺)이라 말합니다. 이 두 가지는 다 소승에 속합니다. 비록 소승에 속하지만 수행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보통 사람이 한 생 동안에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염불법문은 견혹과 사혹을 끊을 필요가 없으며, 오로지 한 마디의 아미타불의 명호를 의지하기만 하면 공부에 힘을 얻어 견혹과 사혹을 조복시켜 작용을 일어나지 않게 하여, 마음속에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ㆍ오만ㆍ남과 나ㆍ시비가 없으며,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성취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법문은 만약 견혹과 사혹을 끊지 않으면, 설사 수행함이 대단히 훌륭하여 사선팔정(四禪八定)에 도달할지라도, 단지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날 수 있을 뿐이며, 삼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을 생각하되, 마음을 온전히 아미타 부처님에다 고정시켜 놓는 것을 염불삼매라 말하며, 그 힘은 선정과 유사하며, 또한 깊은 선정에 들어갈 필요 없이 곧바로 서방의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습니다.
다섯 가지 덕을 얻게 하고 끊임없이 향상하여 반드시 위없는 불과에 도달하게 한다[令獲五德, 升無爲之安]오덕(五德)은 바로 오선(五善)이며, 청정한 계율이며, 경계를 향상시켜 무위(無爲)의 편안함에 올려놓는 것입니다.무위(無爲)는 불생불멸이며, 왕생하여 물러나지 않고 부처가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부처님께서는 79세에 열반에 드심을 보여주신 이래 지금까지 3천 여 년이 되었으며, 세상은 이미 말법시대에 들어섰습니다. 부처님의 경전과 수행방법은 날로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수학하는 사람들이 매우 적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마치 여전히 흥성하고 것 같지만, 사실은 이미 그 가치가 폄하되었습니다. 경전은 옛날과 변함이 없지만, 잘못된 이해와 잘못된 수행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부처님께서는《화엄경》에서 불법(佛法)을 말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비록 지혜가 있을지라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수행자는 경장(經藏)을 깊이 궁구하여 마음으로 증득한 바가 있고, 감응이 있어야만 비로소 비슷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저 자신의 총명에만 의지한다면 잘못 말하는 것을 피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이러한 시대에는 스스로 경전을 읽어 직접 불타의 교법(敎法)을 계승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먼저 자신의 문언문(文言文)에 대한 기초를 튼튼하게 다지고 나서, 매일 《무량수경》을 두 번 성실하게 독송하면 1년 후에는 반드시 경을 읽는 능력이 생길 것입니다. 만약 경론을 연구하고자 한다면, 저는 고인의 주해를 읽을 것을 주장합니다.
송나라 이전에는 주로 손으로 쓰는 것에 의지하였으나, 그 후에 목각판이 발명되면서 비용이 상당히 올랐습니다. 고인의 주해가 만약 정말 가치는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경도(經道: 불법)가 점점 소멸되고 사람의 마음 역시 점점 거짓되어 진실하지 못하면, 반드시 다시 죄업을 짓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중생의 시작이 없는 겁 이래의 번뇌가 원인이거늘, 안으로는 성현이 교화하는 훈도가 없고, 밖으로는 사회의 나쁜 풍기에 감염되어, 이처럼 안팎이 서로 협공을 하니, 오소(五燒)와 오통(五痛)은 훗날로 가면 갈수록 오염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더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저는 1982년에 처음으로 미국에 왔으며, 그 후로 대만과 미국을 왕래 한 지가 벌써 13년이나 되었습니다. 제가 본 사회의 상황은 해가 갈수록 좋지 않게 변하였고, 세상의 기풍(氣風)도 날로 나빠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불제자들은 서로 권면해야 하며, 친구 사이에 서로 잘 아는 사람은 좋은 말로 권하여 악을 끊고 선을 닦게 해야 합니다.
복덕을 갖춘 사람은 들으면 즉시 받아들입니다. 인연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기회를 엿보아 말을 하며, 말이 이근(耳根)에 한번 들어가기만 해도 그 사람의 아뢰야식인 팔식의 밭 속에 씨앗을 뿌리게 되며, 이는 영원히 도의 씨앗이 됩니다.
32품에서 37품까지는 모두 선악시비와 인과응보를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정토를 닦는 사람은 적어도 매일 이 여섯 품을 하루에 한번씩 독송하여 자신을 각성시켜 하루의 생각과 행위를 점검하여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악을 끊고 선을 닦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 바지계염불(持戒念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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