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직 팽개치고 독립운동
군자금·연락망 구축 맹활약
대구서 결성된 '대한광복회' 총사령에 추대
효성 지극…붙잡힐 각오로 어머니 빈소 찾아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한일병합)로 나라를 잃은 지 어언 9년, 일제의 폭압 통치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갔다.
1918년, 그 해는 벽두부터 매서운 찬 바람이 몰아쳐 가뜩이나 움츠러든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차갑게 했다.
이 해 2월 박상진은 은거하던 안동을 떠나 만주로 망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만주와 상하이(上海)에서는 동지들에 의해 독립운동기지들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곳에서는 국민주권과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새로운 국가건설론이 탄력을 받고 있었다. 그 곳 동지들은 박상진을 향해 손짓하였고, 그는 이제 국내에서는 더 이상 비밀 결사 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던 터였다.
만주 망명을 결심하던 바로 그 시각, 경주 녹동 본가로부터 생모가 위독하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만주로 갈 것인가, 그리운 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인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는 어머니를 택했다.
양반 가문에서 자란 그가 생전에 어머니를 뵙지 못하고, 자식 손으로 어머니를 묻지 못하는 불효를 저지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향이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일제로부터 요주의 인물 1호로 꼽혀왔던 터였다. 고향에는 그를 체포하려 혈안이 된 일제 경찰들이 상주해 있었다. 결국 그는 어머니의 빈소에서 상복 차림으로 체포되었다. 박상진은 대한광복회 총사령답게 일경의 포박을 거부했다. 그는 자신이 평소 아끼던 백마를 타고 조선인으로서, 그리고 명문가의 자제답게 의연하게 경찰서로 향했다.
고헌 박상진(固軒 朴尙鎭, 1884~1921)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난 1884년 울산 송정동에서 태어나, 경주 녹동의 백부에게로 입양되었다. 생부 박시규(朴時奎)는 승정원 승지를 지냈고, 양부 박시룡(朴時龍)은 홍문관의 교리를 각각 역임했다. 관직자 배출이 어렵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그것도 형제가 청요직(淸要職)을 나란히 역임한 상황을 고려하면, 그의 집안은 경주 인근은 물론이고 경상도 일대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그러한 문재들을 배출할 정도로 집안의 경제력도 넉넉했다. 이러한 가풍 속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유가(儒家)의 법도를 익히고 과거를 통해 입신하려는 꿈 많은 소년이었다. 그의 소년 시절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에 마수를 뻗치던 암울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그는 재능있는 당대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했듯, 입신하여 이름을 드날리는 것이 세상에 태어난 자로서의 임무라 생각했다.
그러던 그에게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14세 되던 해인 1897년, 벌써부터 '태백산 호랑이'로 이름을 날리던 신돌석을 고향 울산 송정동에서 대면한 것이다. 그 때 신돌석은 약관 20세의 청년이었다. 두 사람은 금세 의기가 투합하여 의형제를 맺었다. 신돌석은 훗날 가장 신뢰하는 인물로 박상진을 기억했지만, 사실 그 때까지 박상진은 현실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평범한 수재였을 뿐이다.
당시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다는 사실과, 이대로 가면 조선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을 일깨워준 이는 왕산 허위(旺山 許蔿)였다. 선산 출신의 대유학자 허위는 일찍이 관료로 진출하면서 그의 학문적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박상진도 왕산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경세지학을 익혔다. 그렇지만 스승 허위는 유가주의만을 고집하는 고리타분한 전통 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유학의 현실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는 혁신 유림계 인물로 전환해 있었다. 그런 그가 제자 박상진에게 근대 교육과 근대법, 그리고 근대 경제학을 강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허위는 박상진을 그가 이끌던 의병부대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수행하던 평리원(平理院)의 판사 소임을 제자가 이어주기를 바랐다. 스승이 못다한 일을 제자가 마무리하기를 바란 것이다.
이후 박상진은 스승의 권유로 서울 양정의숙(養正義塾)에 입학하여, 법률학과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1908년 스승 허위는 13도 창의군(倡義軍)의 군사장으로 선봉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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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송정동에 있는 박상진의 생가. 울산시에 의해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으나 가세가 기울면서 타인의 소유지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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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진공 작전을 주도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박상진은 양정의숙에서 공부에만 몰두했다. 스승이 처형당하자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 지낸 후 1년간의 심상(心喪)을 입으면서 제자의 예를 극진히 표시했을 뿐이다. 이 때까지도 그의 관심은 전통 양반의 세속적 관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박상진은 1909년 10월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이듬해 평양지원의 판사로 발령받았다. 그토록 바라던 부모의 열망과 자신의 소망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판사직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가 사법시험에 합격하던 그 해,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했다. 그리고 그가 판사 발령을 받던 1910년, 안중근은 처형되었다. 출세를 바로 코앞에 둔 그에게 안중근의 의거는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니었다. 판사직을 팽개친 그는 이듬해 만주로 건너가 안중근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국권 회복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
마침 1911년 중국에서는 쑨원(孫文)의 주도 아래 신해혁명(辛亥革命)이 발발하였고, 그는 먼발치에서나마 중화민국(中華民國)의 건국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하다는 사실, 그리고 무력만이 국권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는 독립운동단체들의 연락망 구축과 독립운동자금의 마련이 가장 절박한 과제라 판단했다.
박상진은 1912년 가산을 털어 대구 약전골목 어귀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했다. 국내외 독립운동단체들과의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고,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는 1915년 대구 안일암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 참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마침내 대구 달성공원에서 '대한광복회'가 결성되었고, 그는 총사령(總司令)에 추대되었다. '대한광복회'는 관념적이거나 타협적인 자세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혁신 유림계의 뼈저린 자기 반성을 기반으로 조직된 단체였다. 그들은 반민족적 친일 지주들의 응징을 통해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고, 독립군 양성과 기지 건설을 위한 군자금 모집에 무력을 동원하고자 했다. 박상진은 '대한광복회'를 전국 규모의 비밀 결사 조직으로 확대해 나갔다.
의연금 요구·무력응징…친일부호들 손 본 '광복회'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모금과 친일 부호배(輩)의 처단에 눈부신 활동을 보였다. 이들은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동광산과 직산광산을 습격하는가 하면, 경주에서 세금을 수송하던 우편마차를 탈취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모집한 자금은 무기 구입이나 군자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푼돈에 지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부호배의 강제적인 협조가 절실하다고 판단한 박상진은 반민족 친일 지주들에게 의연금 납부를 종용하는 한편, 저항하는 지주들에게는 무력에 의한 응징도 서슴지 않았다.
1917년 영남의 부호 서우순에 대한 협박이 실패로 돌아가자, 총사령 박상진은 포고문 형식으로 전국 자산가들에게 일정 금액을 기부할 것을 독촉했다.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칠곡의 대지주 장승원을 처단하기도 했다. 장승원은 허위가 의정부 참찬으로 재직할 당시 후일 독립운동자금으로 20만원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고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약속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경찰에 밀고하는 등 반민족적 행위를 일삼았다. 또한 소작인에 대한 잔혹한 수탈로 지역민들의 원성도 높았다.
'대한광복회'의 실체는 1918년 1월 악질 친일파인 충남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의 암살사건을 계기로 전면에 드러나고야 말았다. 충남경찰부의 수사망이 좁혀지자 조직원 이종국은 동지들을 배신·밀고했으며, 이 과정에서 '대한광복회'는 와해되었다. 어머니의 빈소에서 체포된 총사령 박상진은 1921년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그와 활동을 같이 했던 동지 채기중·김경태·임봉주·강순필 등도 같은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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