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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全國의 風景 돌아보기. 首都圈. 서울 鍾路區
(가) 鍾 路 區
(01) 서울 淸溪川 -08.11.19-
* 淸溪川 -길이 10.84km -流域面積 59.83㎢
北岳山·仁王山·南山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盆地의 모든 물이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往十里 밖
살곶이다리[箭串橋] 근처에서 中浪川과 合流,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漢江으로 進入하는 河川으로,
본래의 명칭은 ‘開川’이었다. (*箭: 화살 전 *串: 땅이름 곶)
朝鮮의 漢陽定都 당시 淸溪川은 自然河川으로, 平時에는 汚水가 괴어 매우 不潔하고, 洪水 때는 民家浸水의
물난리를 일으켜, 제3대 太宗이 治水事業을 시작해 開渠工事를 벌였다. 英祖 때 浚渫·兩岸石築·流路變更 등
본격적인 開川事業으로 直線이 되었다. (*汚: 더러울 오 *渠: 개천 거 *浚: 깊게 할 준 *渫: 파낼 설)
純祖·高宗 때에도 浚渫工事는 계속되었으며, 橋梁은 水標橋·五間水橋·廣橋·永尾橋·觀水橋 등 모두 24개가
있었다. 日帝强占期 初 淸溪川으로 이름이 바뀌고, 대대적인 준설공사가 이루어졌다. 光復 後에도 淸溪川의
維持管理에 힘쓰다가 1958년 覆蓋工事에 착수, 1960년 1단계로 廣橋∼舟橋 間을 너비 50m의 幹線道路를
만들었으며, 1967년~1976년 淸溪高架道路를 건설, 上流에서 城東區 沙斤洞까지 5.4km 구간을 覆蓋했으나
中浪川 合流地點까지 2.4km 구간은 복개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2003~2005년 서울시 淸溪川復元事業은
光化門 東亞日報社 앞~城東區 신답철교 구간 5.8km까지 총 22개의 橋梁을 중심으로 [正祖班次圖]를 비롯한
역사적 자료를 復元해 都心 속 河川으로 개통했다. (*蓋: 덮을 개)
(02) 廣通橋 石材로 사용한 貞陵 屛風石 -11.07.09-
太宗 10년(1410)에 洪水로 土橋이던 廣通橋가 流失되고 溺死者가 또 발생하자 石橋로 改築했으며,
광통교는 都城 안에서 처음 架設한 石橋이다. 한편 太宗은 광통교를 石橋로 改築하면서 父親 太祖의 繼妃
神德王后(?~1396) 康氏 墓所인 貞陵을 현재 貞洞에서 城北區 貞陵洞으로 遷葬하면서 옛 貞陵의 屛風石 등
石物을 사용하여 石橋로 만들었다.
(03) 貞陵 屛風石을 거꾸로 설치한 廣通橋 石材 -11.07.09-
石工이 無心하게 거꾸로 설치했는지, 일부러 거꾸로 설치했는지는 알 수 없다.
(04) 서울 高宗 御極 四十年 稱慶紀念碑. 鍾路區 世宗大路 네거리 -09.05.19-
*서울 高宗 御極 四十年 稱慶紀念碑 -사적 제171호-
高宗 卽位40주년과 51歲에 耆老所 入所記念으로 세운 碑石으로 高宗이 大韓帝國을 宣布하고, 皇帝로 呼稱한
記念도 담겨 있으며, 碑殿 안에 있다. 耆老所는 正二品 이상의 文官 중 70세 이상 된 사람을 優待하는 제도로,
이후 王들이 오래 살지 못해 耆老所에 들어가는 이가 없어, 高宗은 51세에 들어가게 되었다.
碑殿은 20세기초 전통적인 建築樣式의 틀이 해체되기 직전에 세운 건물로 이 시기에 세운 德壽宮의
여러 건물과 함께 중요한 연구자료이다. (*耆: 늙을 기)
(05) 道路元標. 서울 世宗大路 네거리 -16.03.09-
道路元標는 서울 高宗 御極 四十年 稱慶紀念碑 옆에 있으며, 全國 主要都市와의 距離起點이다.
1914년 처음 설치 당시에는 지금의 世宗路 中央에 설치했으며, 1935년 현재 위치로 옮겼다. 1997년 원래
위치에서 남쪽으로 151m 떨어진 세종로네거리 교보빌딩 앞에 새로 설치했다. 현재 各 地方과의 거리기점은
원래 위치인 世宗路 中央이 基點이다.
(06) 大韓民國歷史博物館, 鍾路區 世宗路 -17.05.08-
(07) 景福宮 光化門 獬豸像, 관화문 앞 왼쪽에 있다. -17.05.08-
해태(獬豸)는 ‘해치’라고도 하며, 외뿔을 가진 동물로 羊을 닮았으며 靈物로 인식된 想像의 동물이다.
사람의 是非曲直을 판단하는 재주가 있어 聖君을 도와 현명한 일을 많이 했으며, 만일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 뿔로 받아넘기는 ‘定義의 動物’로 생각되었다. (*獬: 해태 해 *豸: 해태 태. 벌레 치)
(08) 景福宮 光化門. 景福宮의 正門 -17.05.08-
太祖 4년(1395) 創建되어 三峰 鄭道傳이 四正門으로 命名하고 午門이라고도 했으며, 世宗 7년(1425)
集賢殿 學士들이 ‘光化門’이라고 바꾸었다. 壬辰倭亂 때 燒失되어 高宗 1년(1864) 興宣大院君의 景福宮
再建으로 옛 모습을 되찾았다. 韓日合邦 후 1927년 朝鮮總督府가 解體, 東門인 建春門 북쪽에 移建하고,
6·25戰爭 때 폭격으로 燒失되었다. 1968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면서 도로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으나.
2006년부터 光化門 復元 및 移轉工事가 시작되어 2010년 전통적인 옛 모습을 되찾았다.
(09) 景福宮 勤政殿(국보 제223호) -13.09.02-
*景福宮 勤政殿 -국보 제223호-
勤政殿은 朝鮮時代 法宮인 景福宮의 中心建物로, 臣下들이 임금에게 新年賀禮를 드리거나 國家儀式을
거행하고, 外國使臣을 맞이하던 곳이다. ‘勤政’은 天下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三峰 鄭道傳이 지었으며, 現 建物은 壬辰倭亂 때 燒失되어 高宗 4년(1867) 再築했다.
앞면5칸·옆면 5칸의 2층 팔작지붕건물로, 基壇인 月臺의 귀퉁이나 戒壇周圍 난간기둥에는 十二支神像을
비롯한 動物像을 彫刻했다. 勤政門에서 勤政殿에 이르는 길 左右에는 文武百官들의 地位를 표시하는
品階石이 놓여 있으며, 勤政門 주변으로는 行閣이 연결되어 勤政殿을 둘러싸고 있다.
(10) 景福宮 慶會樓(국보 제224호) -13.09.02-
*景福宮 慶會樓 -국보 제224호-
勤政殿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慶會樓는, 나라에 慶事가 있거나 使臣이 왔을 때 宴會를 베풀던 곳이다.
처음 지을 때는 작은 규모였으나, 太宗 12년(1412)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再築했다. 壬辰倭亂으로 燒失되어
돌기둥만 남아 있었으나 高宗 4년(1867) 景福宮을 再築할 때 다시 지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樓閣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했다.
慶會樓는 우리나라에서 單一平面으로는 규모가 가장 큰 樓閣으로, 간결하면서도 호화롭게 장식한
조선 후기 누각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11) 國立民俗博物館. 景福宮 境內 -13.12.13-
景福宮 경내에 있는 國立民俗博物館은 光復과 함께 開館했던 南山民族博物館이 1950년 國立博物館에
흡수된 후, 1966년 文化財管理局에서 景福宮 修政殿에 1600여 점의 民俗資料를 수집해 臨時機構로
民俗博物館을 開館했다. 1975년 景福宮內 前 現代美術館을 수리해 國立民俗博物館으로 開館했으며,
1982년 옛 中央博物館 건물로 移轉하고, 1992년 지하 1층, 지상 3층에 屋塔層을 갖춘 건물로 단장했다.
1995년 1만 6,000여 점이 遺物을 歷史室·生活1실·生活2실에 나누어 展示하고 있다.
(12) 서울 毓祥宮[七宮](사적 제149호). 鍾路區 宮井洞 -09.05.10-
*서울 毓祥宮 -사적 제149호-
英祖의 生母이며 肅宗의 後宮 淑嬪 崔氏의 神位를 모신 祠堂으로, 英祖 元年(1724)에 세워 淑嬪廟라고
했으나 英祖 29년(1753) 毓祥宮으로 昇格했으며, 高宗 19년(1882) 火災로 이듬해에 復舊했다. 毓祥宮은
‘七宮’이라고도 하는데 1908년 여러 곳에 分散되어 있는 7개의 宮들을 이곳에 옮겼기 때문이다.
七宮은 毓祥宮, 儲慶宮, 大嬪宮, 延祐宮, 宣禧宮, 景祐宮, 德安宮을 일컫는데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生母로 正妃에 오르지 못한 7인의 神位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육상궁은 나지막한 담에 둘러싸여 있으며, 제사 지내는 건물 주위의 뜰은 韓國式 庭園의 典型을 이루어
정숙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毓: 기를 육 *儲: 쌓을 저 *祐: 복 우)
=儲慶宮; 元宗의 生母 仁嬪 金氏의 묘 =大嬪宮; 景宗의 생모 禧嬪 張氏의 묘
=延祐宮; 眞宗의 生母 靖嬪 李氏의 묘 =宣禧宮; 莊祖의 生母 暎嬪 李氏의 묘
=景祐宮; 純祖의 生母 綏嬪 朴氏의 묘 =德安宮; 英親王의 生母 淳嬪 嚴氏의 묘
(13) [畵聖 謙齋 鄭敾의 집터] 標石, 景福高等學校 校庭 -08.11.30-
謙齋 鄭敾은 漢陽 幽蘭洞 蘭谷에서 태어나 성장했는데 유란동은 서울의 景福宮 뒤쪽, 白岳山 아래로 현재의
鍾路區 淸雲洞에 있는 景福高等學校 근처로, 이곳은 지금도 白岳山, 仁王山, 南山, 冠岳山, 멀리 漢江邊의
경치까지 보이며 서울 중에서도 경치가 좋기로 손꼽히고 있다. 謙齋는 자신이 살던 곳에서 보이는 漢陽의
경치를 자주 그렸다. <三勝眺望圖>, <長安煙雨圖>에는 謙齋가 늘 보았던 仁王山과 白岳山 기슭에서
내려다보이는 漢陽市街의 全景이 담겨 있다. 이 작품들은 지금은 고층빌딩의 숲이 되어버린 서울 市街地가
본래는 깊고 그윽한 詩的 靜趣를 느끼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음을 보여준다. (*敾: 기울 선 *眺: 바라볼 조)
(14) 宗廟(사적 제125호) 正殿. 薰井洞 -12.10.08-
‘左廟右社의 原則’은 <周禮> [考工記]에 古代의 都城 造營 原則에 따라 宮闕을 중심으로 穀神과 土神에게
祭祀지내는 社稷壇은 그 右側(서쪽)에 두고, 王室의 祠堂에 해당하는 宗廟는 그 좌측(동쪽)에 배치하는
원칙을 가리킨다. (*穀: 곡식 곡)
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宗廟는 景福宮 左側(동쪽)에, 社稷壇은 右側에 造成했다.
*宗廟 -사적 제125호-
宗廟는 朝鮮王祖의 王과 王妃, 死後 追尊된 王과 王妃의 神位를 모시는 祠堂으로, 본래의 건물인 正殿과
별도의 祠堂인 永寧殿과 여러 附屬建物로 구성되었다.
太祖 3년(1394)에 漢陽으로 遷都하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完工했다. 太祖는 4代 追尊王(穆祖, 翼祖,
度祖, 桓祖)을 正殿에 모셨으나, 世宗 때 定宗이 昇遐하자 모셔둘 正殿이 없어 중국 宋나라 制度를 따라
世宗 3년(1421) 永寧殿을 세워 4代 追尊王의 神位를 옮겨 모셨다. (*穆: 화목할 목 *桓: 굳셀 환)
正殿은 壬辰倭亂 때 燒失되어 1608년 再築하고, 여러 차례 補築을 통해 현재 19칸의 건물이 되었으며,
19王과 30王后를 모시고 있다. 永寧殿도 壬辰倭亂 때 불에 타 1608년 再築해 현재 16칸에 15王과
17王后 및 마지막 皇太子인 高宗의 아들 李垠과 夫人의 神位를 모셨다. 正殿 앞 뜰에는 조선 83명의 功臣을
모신 功臣堂이 있고, 重要無形文化財인 宗廟祭禮와 宗廟祭禮樂이 전한다. (*垠: 지경 은)
正殿은 同時代 單一木造建築物 중에서 延建坪 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크나, 裝飾이 없고 儉素한 건물이다.
中國의 宗廟가 9칸인데 비해 19칸의 긴 正面과 水平으로 된 건물모습은 세계에 類例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로, 東洋古代文化의 성격과 특징을 연구하는데 貴重한 자료가 담긴 遺産으로,
1995년 유네스코 世界文化遺産으로 登載되었다.
(15) 社稷壇(사적 제121호), 社稷洞 -14.10.18-
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社稷壇은 右側(동쪽)에 造成했다. (*稷: 피 직)
*社稷壇 -사적 제121호-
土地의 神과 穀食의 神에게 祭祀 지내던 곳으로, 太祖가 漢陽에 首都를 정하고, 宮闕과 宗廟를 지을 때
太祖 4년(1396)에 造成했다. 土地의 神에게 제사 지내는 國社壇은 동쪽에, 穀食의 神에게 제사 지내는
國稷壇은 서쪽에 배치하고, 神座는 각각 북쪽에 모셨다. 제사는 2월, 8월, 冬至와 섣달 그믐에 지냈으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祈雨祭나 豊年을 비는 祈穀祭를 이 곳에서 지냈으며, 社稷署가 祭祀의 수발을
맡았다. 1902년 社稷署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1921년 日本人들은 社稷壇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고,
1940년 都市公園 社稷公園이 되었다.
(16) 서울 社稷公園 檀君聖殿 -10.05.16-
檀君聖殿은 日帝强占期에 日帝가 社稷壇을 공원으로 造成하면서 세웠던 寺刹이 있던 곳을 光復 後 韓屋으로
新築·開場한 聖殿으로, 檀君王檢 模型像과 影幀을 奉安하고 매년 開天節에는 檀君에 대한 茶禮儀式 行事가
열린다.
(17) 檀君聖殿 內 檀君 像 -14.10.18-
(18) 서울 郵征總局(사적 제213호), 堅志洞 -09.03.31-
*서울 郵征總局 -사적 제213호
朝鮮末期 郵便業務를 담당하던 관청으로 高宗 21년(1884에 설치되어, 그 해 10월 처음 郵便業務를
시작한 곳이다. 당시 우편업무는 중앙에 郵征總局을 두고 지방에 郵征局을 두는 體系를 갖추었으나,
甲申政變의 실패로 郵征總局은 폐쇄되었다. 1893년 電郵總局이 우편업무를 다시 이었으며,
工務衙門 驛遞局, 農商工部 通信部, 通信院 등으로 이어나갔다. 이 건물은 처음으로 近代式 郵便業務를
시작한 곳이며, 郵征總局 開局式을 계기로 開化派가 甲申政變을 일으킨 장소이다.
(19) 서울 雲峴宮 老安堂, 興宣大院君의 사랑채, 雲泥洞 -09.03.21-
*서울 雲峴宮 -사적 제257호-
雲峴宮은 興宣大院君이 살던 집으로, 高宗이 태어나 王位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韓屋은 제일 앞 남쪽에 大院君의 사랑채인 老安堂이 있고, 뒤쪽인 북쪽으로 行廊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북쪽에 안채인 老樂堂이 있다. 高宗이 卽位하자 興宣大院君이 이곳에서 政治하면서 宮闕과
直通으로 연결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0餘年間 정치하면서 勢道政治의 弊端을 제거하고 人事·財政 등에서
大幅改革하고, 壬辰倭亂으로 燒失된 景福宮을 再建했다. 지금은 宮의 일부가 德成女子大學으로 사용하고
있고, 放送局 시설도 있다. 이로 인해 大院君이 즐겨 사용하던 我在堂, 迎和樓와 恩信君·南延君의 祠堂도
없어졌다. (*弊: 폐단 폐)
(20) 昌德宮 錦川橋(보물 제1762호), 臥龍洞 -07.05.03-
*昌德宮 錦川橋 -보물 제1762호-
錦川橋는 昌德宮 敦化門과 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明堂水 즉 錦川 위에 설치한 교량으로, 昌德宮
創建 6년 뒤 太宗 11년(1411)에 설치했는데, 여러 차례 火災와 戰亂에도 불구하고 최초설치 때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構造는 虹霓를 2개 설치하고, 물가의 築臺는 扶壁구실을 하고 있으며, 다리 측면의 虹霓 사이
벽에는 鬼面形을 浮彫하고, 그 아래쪽의 홍예 基盤石 위에는 남쪽에 해태상, 북쪽에 거북이상 등 動物像들을
배치했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며, 宮闕의 威嚴, 상징적 彫刻像과 아름다운 文樣,
견고하고 장중한 築造技術 등이 돋보이며,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
(*虹: 무지개 홍 *霓: 무지개 예)
*錦(禁·玉)川橋; 이 다리를 건너는 官人들이 淸廉한 마음으로 백성과 나라를 위해 임금에게 나아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21) 昌德宮 仁政殿 (국보 제225호)과 品階石, 臥龍洞 -07.05.03-
*昌德宮 仁政殿 -국보 제225호-
仁政殿은 昌德宮의 正殿이며, ‘仁政’은 ‘어진 정치’라는 뜻이다. 光海君 때 重建된 이후 純祖 3년(1803)
火災로 再建, 哲宗 8년(1857년) 補修工事 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仁政殿 앞 넓은 마당은 朝會를 했던
뜰이란 뜻으로 ‘朝廷’이라고 부른다. 三道 좌우의 品階石은 文武百官의 위치를 나타내는 표시로 文武官
各 18品階를 새겼다. 正祖 때 朝廷의 位階秩序가 紊亂해졌다고 臣下의 品階에 따른 비석을 세웠으며,
3품 이상을 堂上官, 3품 이하를 堂下官이라고 한다. (*紊: 어지러울 문)
品階石에 맞추어 동쪽에는 文官, 서쪽에는 武官이 중앙을 향해 서는데, 文官은 동쪽에 위치해 東班,
武官은 서쪽에 위치해 西班이라고 했으며 이를 합쳐 朝鮮時代의 上流階級을 兩班이라고 했다.
(22) 昌德宮 後苑 芙容池, 魚水門과 宙合樓 -07.05.03-
昌德宮 後苑 芙容池 일대에는 天圓地方의 연못 주위에 芙蓉亭, 魚水門과 宙合樓, 暎花堂이 들어선 지역이다.
魚水門은 宙合樓의 정문으로, ‘魚水’, 즉 ‘물과 물고기’는 國王과 臣下를 뜻하며 임금과 臣僚의 관계가 물과
물고기의 관계와 같아야 함을 暗示한다. 昌德宮 宙合樓(보물 제1769호)는 正祖 1년(1776) 御製·御筆을
보관할 목적으로 건립한 2층건물로 正祖의 政策開發과 改革政治, 文藝復興의 産室로 丁若鏞, 朴齊家, 柳得恭,
李德懋 등 다양한 人材들이 활동하던 중요한 공간이며, 1층은 王室圖書 保管, 2층은 閱覽室이다.
(*芙: 연꽃 부 *蓉: 연꽃 용 *懋: 무성할 무)
(23) 昌德宮 淸漪亭 -07.05.03-
昌德宮 後苑 玉流川 주변 정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亭子로, 仁祖 14년(1636)에 건립한 궁궐에서 유일하게
초가지붕을 얹었다. 임금은 亭子 앞쪽에 논을 만들어 벼를 심고, 收穫 후에는 볏집으로 亭子의 지붕이엉을
잇게 했는데 農事의 소중함을 백성들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淸漪亭과 또 다른 玉流川 주변
정자인 逍遙亭 사이에 있는 御井에서 나오는 샘물은 玉流川으로 흘러 든다. (*漪: 잔물결 의)
(24) 昌慶宮 弘化門 (보물 제384호), 臥龍洞 -14.11.25-
*昌慶宮 弘化門 -보물 제384호-
昌慶宮의 正門으로 成宗 15년(1484) 건립했으며, 壬辰倭亂(1592) 때 燒失, 光海君 8년(1616) 再建하고
여러 차례 補修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우진각지붕건물로 동쪽을 향하고 있는 점이 特異하며,
여러차례의 수리와 단청으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었으나, 昌慶宮·昌德宮과 같은 건물과 함께
17세기 初盤 木造建築의 연구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25) 昌慶宮 明政殿 (국보 제226호) -05.10.27-
*昌慶宮 明政殿 -국보 제226호
昌慶宮의 正殿으로 成宗 15년(1484) 건립했으나 壬辰倭亂으로 燒失, 光海君 8년(1616) 다시 지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의 單層建物로, 景福宮이나 昌德宮의 正殿이 2층으로 巨大한데 비해 宮闕의
正殿으로는 작은 규모이다. 내부 바닥에는 벽돌을 깔고 임금이 앉는 의자 뒤로 日月五嶽圖 병풍을 설치했다.
明政殿 남쪽의 文政殿과 주변 行閣은 1983년부터 3년간에 걸쳐 대부분 復元하고, 日帝 때 格下되었던
昌慶苑이라는 명칭을 昌慶宮으로 還元했다.
(26) 서울 景慕宮址(사적 제237호), 蓮建洞 -14.02.22-
*서울 景慕宮址 -사적 제237호
<東國輿地備考>에는 昌慶宮 동쪽, 宮闕의 庭園 이름이 含春苑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서울大
醫科大學 附屬病院이 있는 곳이다. 含春苑은 成宗 15년(1484) 이곳에 나무를 심고 담장을 둘러 사람의
출입을 금했으며, 成宗 24년(1493) 含春苑으로 昌慶宮에 딸린 庭園이 되었다. 仁祖 때는 함춘원의 절반을
太僕司에 나눠주고 말을 기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英祖 40년(1764) 思悼世子의 祠堂을 이곳으로 옮기고, 正祖가 景慕宮으로 불렀으며, 光武 3년(1899)
思悼世子의 位牌를 宗廟로 옮기고, 景慕殿으로 이름을 고쳤다. 光武 4년(1900) 景慕宮 터에 太祖·世祖·成宗·
肅宗·英祖·純祖의 影幀을 모시던 永禧殿을 옮겨 세웠다. 日帝强占 後 경모궁일대에 京城帝國大學을 세우면서
원래의 모습을 대부분 잃었으며, 6·25전쟁으로 燒失되어 원래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어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含春門뿐이다.
(27) 서울 淸溪川 五間水門. 淸溪川 6街에 있던 朝鮮時代의 水門 -14.11.19-
興仁之門에서 乙支路 6街로 가는 漢陽都城 아래에 있던 水門으로, 5칸으로 이루어졌다고 五間水門이라고 하며,
朝鮮初期 都城築城 때 設置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城壁 아래로 흐르는 淸溪川 냇물이 都城 밖으로 잘 빠지도록 설치한 水門으로 사람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쇠창살로 만든 철문을 설치했으며, 크기는 1.5m정도이다. 隆熙 1년(1907) 下水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水門을 헐고, 같은 자리에 콘크리트교량을 架設했으며, 이때부터 五間水門을 오간수다리·오간수교·
오간수문교로 부르게 되었으며, 五間水門과 五間水橋는 別個이다. 1950년대 末 淸溪川 覆蓋工事로 완전히
없어졌다가 2003년 7월부터 淸溪川復元사업의 일환으로 歷史遺蹟을 발굴할 때 虹霓 등 五間水門의 遺物이
발굴되어 復元事業을 추진해 五間水門의 전통적인 모양을 살려 5개 水門과 虹霓를 再現했다.
(28) 서울 興仁之門 (보물 제1호) -09.03.31-
*서울 興仁之門 -보물 제1호-
興仁之門은 서울 漢陽都城 8개의 門 가운데 동쪽에 있는 門으로, ‘東大門’이라고 부르는데, 태조 5년(1396)
都城 築城 때 建立했으며, 端宗 元年(1453) 改築하고, 현재 있는 門樓는 高宗 6년(1869)에 再築한 것이다.
興仁之門은 유일하게 風水上 ‘之’字가 추가 되었으며,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바깥쪽에 半圓形의 甕城을
쌓았는데, 敵 攻擊을 防禦能力 向上을 위한 것이다.
(29) [京城軌道會社터] 標石, 鍾路區 昌信洞 東大門 호텔 앞 -08.02.12-
1930년~1961년 뚝섬과 광나루까지 京城 軌道會社의 軌道電車가 운행하던 始發地, 乘客輸送, 땔감,
채소 등의 物資輸送과 자갈 채취와 그 운반, 서울市民의 週末 郊外 나들이의 중요한 교통시설이었으며,
1963년 運行이 中止되었다.
(30) 서울 앨버트 테일러 家屋(딜쿠샤)(국가등록문화재 제687호) -08.11.02-
*서울 앨버트 테일러 家屋(딜쿠샤) -국가등록문화재 제687호-
1919년 3.1운동 당시 堤岩里 虐殺事件(1919.04.15)을 全世界로 打電한 AP通信 特派員 앨버트 테일러
(Albert Wilder Taylor) 夫婦가 居住하기 위해 杏村洞에 1923년 건립한 家屋으로, 역사적 인물의 삶을 照明하고
당시 時代相을 보여주는 역사적 공간으로 건축적 가치가 있다. H字形 平面의 지하1층, 지상 2층의 프랑스식의
벽돌건물로 외벽의 벽돌 쌓기 방식이 일종의 ‘공동벽 세워 쌓기(rat-trap bond)’로 한 켜는 면이 표면에
나타나도록 세워 쌓고 한 켜는 면과 마구리가 번갈아 나타나도록 쌓았다.
(31) 洗劍亭 터(서울시기념물 제4호). 鍾路區 新營洞 -13.12.11-
*洗劍亭 터 -서울시기념물 제4호- -岩盤 1基, 土地 131.5㎡
洗劍亭은 肅宗 때 北漢山城을 築城할 때 軍士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도 하며, 燕山君의 遊興을 위해 세운
亭子라고도 전한다. ‘洗劍亭’이란 이름은 光海君 15년(1623) 仁祖反正 때 이곳에서 光海君의 廢位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날을 세웠다고 한데서 ‘洗劍’이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英祖 24년(1748)에 改築,
1941년에 燒失되어 1977년 옛 모습으로 復元했다.
(32) [蕩春臺 터] 標石. 鍾路區 新營洞 -13.12.11-
蕩春臺는 新營洞에 있던 墩臺로, 燕山君이 1506년에 세운 樓臺이며, 경치 좋은 이곳 일대를 宴會場所로 삼고
시냇물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위에 蕩春臺를 지었다. 英祖 때는 이 일대에서 武士들을 選拔·訓練시켰다고
鍊戎臺라고도 했다. (*墩: 돈대 돈)
(33) [白石洞天] 刻字 -11.04.09-
白石洞天은 北岳山 北斜面 付岩洞 백사실계곡에 있는 朝鮮時代 別墅이다.
*서울 付岩洞 白石洞天 -명승 제36호
서울 付岩洞 白石洞天은 1800년대 都城에 인접해 조성했던 別墅 관련유적으로 주변 自然景觀이 秀麗한
곳에 建物址(사랑채, 안채 등)와 연못 등이 남아있으며, 인근에 [白石洞天]·[月巖]등의 刻字바위가 있다.
白岳山(北岳山) 뒷자락에 北漢山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自然景觀이 秀麗한 백사골에 조성된
洞天(山川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의 하나로 주변에 흰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고 [白石洞天]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白石’은 中國의 名山인 ‘白石山’에서 비롯된 것으로 ‘白石山’은 ‘白岳山’에서 착안한 것으로 본다.
白石洞天은 南北을 중심으로 六角亭子와 연못이 있고, 약 3.78m 정도의 높은 垈地 위에 사랑채 부분과
안채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현재 사랑채와 亭子 등은 건물터에 基礎만 남아 있고, 담장과 石築 一部가
남아 있다.
(34) 靑瓦臺 관람 -09.05.19-
-(1-9) 全國의 風景 돌아보기. 首都圈. 서울 中區에 계속 -
첫댓글 공짜로 잘 보고간땅께!감사해요
고산
별도로 알릴 곳이 없어 이곳에 알리네요
먼저 올린 왕릉이야기( 04(세종과 소헌왕후)에서 효종의 인선왕비의 妃자가 婢로표기되었다고 수정해달라는 댓글이 달려있어 알리니 본문 수정 요망합니다 늘 고산의 글을 연호마을에 옮기곤 했는데 관심들이 있으니 오자가 있다고해서 확인해보니 맞네요 그래서 스크랩해 온글이라그 에선 못고치지만 원문은 고치겠다고 했습니다
되게 할 없는 할배가 일을 만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