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서 더 강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유석경 전도사의 이야기
투병 중에도 복음을 전하는 자리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외쳤던 사역자였습니다.
이젠 영상으로만 그녀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네요.
(3분이 아깝지 않습니다. 꼭 보시길)
유석경 전도사는
열두 살 때 예수님을 만나고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던 소녀였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내 평생에 복음을 전하리라!”며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찾아온 원인 모를
두통으로 병원에서 들은
단 한마디는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직장암 말기인데…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수술을 해도 1년이라는
시한부 선고의 직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낙심하며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절망할 수 있겠지만
유석경 전도사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냐고 했지만
저는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냐고 했지만
저는 단 한 번도 하나님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냐는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저에게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의 필요를 잘 아시고
좋은 것을 주신다고 확신하니까요.”
그러나 남들이 알 수 없는
통증에 시달렸던 그녀.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통증 때문에
육체적으론 분명히
고통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석경 전도사는 죽음의 문턱에서
복음을 알게 된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행복을 경험하는 열쇠였습니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복음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확신하며 고백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데
그렇게 행복하고 평안한가요?
복음이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쁘고
아프지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감사합니다.
육신의 고통은 있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습니다
이제 죽어서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을 드디어 만나고
그분과 함께 살 기대와 흥분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렇게도 살 수 있고
이렇게도 죽을 수 있구나!’
그녀의 귀한 고백처럼 크리스천에게
이땅에 살면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 같습니다.
#1. (27:10~29:40)
제가 죽게 된 것에 대해 불쌍하다, 이런 성도님들의 반응을 보면서 저는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현세 중심의 사고를 하고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건강하고 평안한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머리 깊숙이 뿌리 박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안 믿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함께, 요즘 이 교회에 뿌리 박힌 현세 중심의 사고를 복음의 능력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데 제 남은 삶을 바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돈이 많고, 건강하고, 자식들 좋은 대학 간 사람들 보면 다 부러워하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본인도,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축복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어디에, 돈 많은 것, 건강한 것, 자녀가 좋은 대학 간 게 축복이라고 쓰여있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여러분,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계십니까?
마태복음 7장 13-14절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여러분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크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를 부러워하고 계십니까?
마태복음 7장 2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여러분, 삶 속에서 복음의 능력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계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으로 만족하며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의 예배자 되기 위해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고 계십니까? 아니면 이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은혜 받는 데 만족하고 계십니까? 우리 각 사람이 삶 속에서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우리 가정이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우리 목장이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2. (31:55~43:10)
이 고통의 시간을 통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된 것이 제게 큰 축복이었습니다.
저는 암에 걸리기 전에도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그때는 제가 어떻게 생각했냐면, ‘이 고통을 통해서 주님께 더 나아간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사람들이 모든 일이 잘 될 땐 주님을 간절히 찾지 않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을 찾게 되고 또 주님께 가까이 나아간다고 생각했고, 그런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저도 그랬고요.
근데 암에 걸린 후에 제가 새롭게 깨달은 것은, 아버지께서 내가 고통 당하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가 고통을 당하는 걸 원하지 않으심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내가 고통 당하는 것을 허용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고통 당할 때 하나님께서 더 아파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프게 되니까 많은 사람들이 저를 위로하고 싶은데, 위로할 말이 없으니까 하는 말들이 참 비슷합니다. 참 많이 들은 말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아유, 죽은 나사로도 살리신 주님께서 널 살려주실 거야.”입니다. 굉장히 여러 번 들었는데요. 많은 분들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신 것에 주목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나사로의 이야기를 보면서 다른 것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예수께서 나사로가 병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당장 가지 않으시고 이틀을 더 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장 고쳐주실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그 사이에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가 빨리 해결되길 바랍니다. 아픈 사람은 빨리 건강하길 바라고요, 결혼 못한 사람은 빨리 결혼하길 원하고, 자식이 없는 사람은 빨리 아이를 갖길 원하고, 사업이 망한 사람은 빨리 돈을 벌길 원하고, 공부하는 사람은 빨리 학위를 따길 원하고, 직업이 없는 사람은 빨리 취직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죠.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신다면서,
능력도 있으시다면서,
왜 내 문제를 당장 해결해주지 않는가?
저는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그 해답을 발견했습니다.
※ 예수님께서 왜 나사로를 당장 고쳐주시지 않고 이틀을 더 지내셨는가?
첫째,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자는 자를 깨운 것처럼 쉽기 때문에 죽기 전에 고쳐주기 위해 빨리 가실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11절에,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빌립보서 4장 6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근데 우리는 보통 거꾸로 하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는데, 모든 것에 염려하며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빌립보서 이 말씀이 무조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라 하고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 나사로의 이야기가 알려줍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께는 쉽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도 쉽습니다.
그 능력의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필요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 필요를 채워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암에 걸려서 얼마 못 산다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전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절망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제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제가 이 병에서 낫는 것이 필요하다면 고쳐주실 것이고, 제가 죽는 것이 더 좋다면 천국에 데려가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예수와 사는 것이고, 죽어서 천국 가서도 예수와 사는 것입니다. 죽을 병에 든 것이 제게 전혀 절망할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힘드십니까?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모든 문제, 하나님께는, 예수님께는 너무 쉽습니다.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지 다 알고 계십니다.
둘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나사로가 죽게 되었을 때 그 현장에 안 계셨던 것을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왜? 우리가 믿음이 연약한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 정도를 봐야 예수를 믿을 정도로 연약한 사람인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가 거기에 없었던 것이 기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실제로는 믿지 않습니다.
분명히 마가복음 9장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걱정하잖아요.
이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도,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지 않잖아요. 이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연약한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볼 때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문제들이 해결되고 우리의 고난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을 봐야만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을 잠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1장 4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끝이 옵니다. 그 고난의 끝에서 그 고난을 끝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아니,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이용하신단 말인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이 병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보다 내 아버지가 내 고통 때문에 더 아파하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병을 통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나사로 이야기에 보면,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저는 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의 고통을 이용하는 분이시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직접 당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우리의 죄를 없애주시기 위해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통을 허락하시지만 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고통을 안 당하도록 그 고통을 지고 싶으신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우리 대신 죽었다는 것만 봐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고통 당할 때 눈물을 흘리시면서 우리보다 더 아파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이 너무 힘들 때, 너무 힘든 나머지, 그 힘든 기간이 길어지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나?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나를 이렇게 버려두시나 의심이 듭니다.
그런 의심이 들 때,
예레미야애가 3장 33절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우리를 고생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일까요?
창세기 1장,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보다 인간을 지으셨을 때 “심히” 좋았노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여러분을 보시면서 내가 “심히” 좋다.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싫어지실 때, 거울을 볼 때마다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내가 “심히” 네가 좋다.
창세기 5장에 하나님의 본심이 나옵니다. 남자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 창조하시자마자 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싶으신 그 마음.
스바냐 3장에 보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볼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여러분이 느끼길 바랍니다.
이제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레미야애가 3장에,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저는 이 잠잠히란 말이 좋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출처] 말씀 기록 - 유석경 전도사님 간증|작성자 비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