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윤과 같은 인물 만인을 모아도 이상설 한 분에 못 미칠 것이다.”
* 뤼순 감옥 신문 과정에서 실제 진술한 내용
이 말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심문 받을 당시 일본 경찰에게 실제 진술했던 말입니다.
이범윤 선생이 간도 지방에서 한인보호에 힘썼던 독립운동가로 안중근, 전덕제 등을 이끌고 일제기관을 공격하고 일본 요인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며 독립운동을 펼쳤던 훌륭한 독립운동가라는 것을 알고 있는 안중근 의사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이상설 선생에 대한 절대적 존경심과 선생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 이상설 선생(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안중근 의사도 극찬했던 이상설 선생에 대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배움이 즐거웠던 천재 소년
이상설 선생은 어린 시절 신동으로 불렸습니다. 독학으로 한학뿐만 아니라 근대적 학문까지 섭렵했는데요. 17세 때는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극에 달해 건강까지 해쳤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선생이 단순히 머리가 좋은 천재가 아니라 노력하는 천재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죠.
20살 이상설 선생은 이미 칭송 받는 큰 학자가 되었고, 2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27세에 성균관 교수가 되었습니다.
선생이 노력으로 닦아놓은 탄탄대로를 미끄러지듯 나아갔지요. 배움의 폭도 매우 넓어, 유학은 물론 정치, 법률, 경제, 사회, 수학, 과학, 철학, 종교 등 모든 신학문 분야까지 연마하였다고 합니다.
헤이그 특사
▲ 헤이그 특사 3인 (좌측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상설 선생, 이준 선생, 이위종 선생. 헤이그 특사 3인의 이름입니다. 우리나라는 왜 네덜란드 헤이그로 3명의 특사를 보냈던 것일까요? 그 배경을 알려드리겠습니다.
1907년 6월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될 예정이었습니다. 이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발의했으며 세계 각국에 초청장을 보냈지요. 우리나라는 정식으로 초청장을 받지는 못했지만 러시아 황제가 비밀리에 초청장을 보냄으로써 평화회의에 참석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고종은 이 기회를 통해 구미열강의 도움으로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을 비롯한 이준 선생, 이위종 선생 3인을 특사로 임명하고 헤이그로 보냈던 것이죠.
세 사람은 헤이그에 도착하여 숙소를 잡은 뒤, 그 숙소에 당당하게 태극기를 걸고 한국의 사절로서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헤이그 특사들이 비밀리에 초청장을 받아서 왔던 터라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일본대표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세 특사가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은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대표로서 공식적으로 참석하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헤이그에 오긴 했으나 정식으로 초청장을 받은 것이 아니므로 회의 참석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특사들은 회의의 의장이었던 넬리도프 백작에게 초청장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항의하며 회의 참석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특사들은 포기하지 않고, 비공식적인 활동을 통해 일제에 강압적으로 국권을 빼앗긴 사실을 여러 열강들에게 알리고자 노력했습니다.
성명회, 권업회, 그리고 대한광복군정부
▲ 성명회 선언서의 서명
헤이그 특사 활동에서 돌아온 이상설 선생은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이곳에서 연해주의 의병들을 하나의 군단으로 통합한 13도의군을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성명회를 조직하여 일본 정부에 국제공약의 배신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보내고, 각국 정부에는 ‘합병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 선언서’를 보냅니다.
이에 대해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 성명회 중요 인물을 체포하라는 요구를 했고, 성명회와 13도의군 주요인물 42명이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선생 또한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다가 다음 해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연해주 지역 주요 인물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다시 모여 권업회를 창립하는데요. 권업회는 외적으로 실업활동을 권장하고 민족교육 및 한인사회의 정치적·경제적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안으로는 ‘독립전쟁론’을 구현하는 데 목표를 두고 광복군 양성을 도모하였지요. 이러한 광복군 양성 활동은 바로 이상설 선생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비밀리에 광복군을 양성하고 있던 권업회는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풍문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기에 맞춰 한인의 민족의식을 높이고자 대한광복군정부를 건립하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당국의 탄압과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한 러시아, 일본의 동맹으로 조직을 유지하지 못한 채 해체되지요.
선생은 중국 상해로 이동해 신규식, 박은식, 유동열 등과 합세하여 신한혁명당을 결성했습니다. 하지만 독립운동으로 건강을 돌보지 못한 탓에 병을 얻어 48세의 일기로 순국하였습니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선생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한 한이 그대로 녹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주목받았고 평생을 조국을 위해 몸 바친 천재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 4월 22일 이상설 선생 순국 제98주기 추모제가 충북 진천에서 진행되었는데요. 짧지만 굵었던 선생의 생애를 되돌아보며 추모의 마음을 간직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