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경성상업회의소에서는 정부를 상대로 한국폐제 개혁(韓國幣制改革)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하였다.이 문서에서 조선 상인들은 격화되어 가는 화폐금융공황의 와중에서 파산하는 조선 상인들의 참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그 해결책을 호소하고 있다. 1904년 조선 정부의 재정고문으로 한국에 건너온 메가다 쇼타로(目賀田種太郞)에 의해서 1905년부터 시행되고 있던 화폐정리사업에 의해서 조선인들의 화폐자산은 결정적으로 축소되고, 그것은 결국 화폐금융공황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조선 상인들의 파산을 목적으로 한 일종의 제도적인 폭력이었다. 이에 경성의 조선인상인들은 1905년 7월에 경성상업회의소를 결성하여 대처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조선 상인들 가운데 포목상들이 받은 타격은 매우 심하였다. 1905년이면 벌써 일본의 근대화된 대규모 생산시설에서 생산되고 있던 값싼 일제 면포에 의해서 조선의 재래식 면포시장은 거의 잠식되어 있었다. 특히 일본의 대규모 방직회사들은 폭리를 취할 목적으로 1905년 미에이(三榮組合)이라는 판매동맹을 결성하고 그들의 제품을 미쓰이물산(三井物産)에 위탁하여 면포수출을 독점하고 상품가격을 폭등시키고 있었다. 이에 1906년 10월 조선인 포목상 88명이 미에이조합에 맞서기 위하여 창신사(彰信社)라는 합명회사를 설립하고 소림합명회사(小林合名會社)와 계약하여 일본의 후지(富士)가스방적회사의 제품을 수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림합명회사 역시 조악한 물품만을 공급함으로써 폭리를 취하자 1907년 창신사는 거래를 청산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박승직은 창신사를 탈퇴하고 1907년 8월 면제품을 일본과 직접 거래하기 위하여 합명회사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공익사(共益社)이다.공익사는 창립 당시부터 경성상업회의소의 상담역이었던 일본인 니시하라(西原龜三)가 적극적인 알선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고, 1910년이 되면 일본의 대기업인 이토 추 상사(伊藤忠商社)가 자본에 참여하게 된다. 공익사를 설립하여 활동할 즈음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제일은행의 일본인 지점장으로 하여금 박승직을 도와주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당시에 이미 박승직이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믿을 만한 상대로 인정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로써 매우 선구적으로 매판자본의 모습을 보여 주게 되는 데 이것이 박승직으로 하여금 '일조협력기업의 개척자'라는 영예(?)를 쓰게 하였던 것이다.
■ 배오개의 객주로부터 매판상인으로의 변신
현재 한국의 재벌로 군림하고 있는 두산그룹의 연원은 1898년경에 설립된 박승직 상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매출액의 규모로 볼 때 50위 이내에 드는 재벌그룹 가운데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것이 바로 이 두산그룹이다. 그러나 일제하에 박승직은 일정 규모 이상의 자산가로서 매족행위를 한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씩은 거치던 그 흔한 중추원 참의 한 번 못한 사람으로, 정치적 의미에서의 친일의 족적이 그리 크지 않은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반면에 경제적인 의미에서의 친일을 자본의 매판화라고 한다면 이런 측면에서는 어쩌면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사람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제는 경제적인 의미에서 예속 또는 매판의 실체를 정확히 따져야만 한다. 박승직은 일제시대를 통털어 자신의 자본활동의 영역을 상업활동에만 정확하게 국한시키고 있었고, 상업자본으로서의 자본축적을 위하여 일제자본과의 협력관계를 교묘하게 유지시키고 있었던 사람이다.
박승직은 1864년 경기도 광주에서 당시의 세도가인 여흥민 씨의 위토를 부쳐서 입에 풀칠을 하고 있던 가난한 농군 박문회(朴文會)의 아들로 태어났다. 따라서 일찍부터 상업의 길에 나섰던 것인데 처음에는 전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상행위를 하였다고 한다. 이른바 난전(亂廛)의 형태로 상업활동을 영위하다가 지금의 종로4가인 배오개로 진출한 것은 1890년 경이다. 이 때 박승직상점이라는 간판을 내건 것으로 보아 이미 상당한 자본을 축적하였으며 1905년까지는 그 자본을 더욱 확대하였을 것이다.
1900년에 성진 감리서 주사, 1905년 6품에 승서, 1906년에 중추원 의관, 정3품에 승서 등 돈으로 산 관직의 목록을 보더라도 당시 그의 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일본제 포목제품을 취급하여 폭리를 취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취급품목에서도 종로의 시전상인들보다는 배오개의 객주들이 훨씬 자유로운 상태에 있었음이 사실이다. 나아가 이미 1907년에 일본인과 합동으로 회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나 앞의 이토가 한 발언 등에 비추어 볼 때도 이전에 일본인들과 친밀한 거래관계를 맺어 놓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공익사는 창립 당시 최인성, 김원식, 최경서 등 42명의 객주 출신 포목상인이 1만 원을 출자하여 일종의 익명조합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니시하라의 알선에 의하여 일본인 중간상인들을 배제함으로써 경영을 급속히 확대할 수 있었다. 1908년에는 인천, 수원, 개성, 안성, 부산 등에 대리점을 개설하였으며,이토 추상사와 거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09년에는 면사,면포뿐만 아니라 우피의 수출도 시작하였고, 자본금을 2만 원으로 증자하였으며, 1910년에는 이토 추상사와 합자하여 자본금을 4만 6천 원으로 증자하였다.단 3년 사이에 자본금을 5배 가까이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포목상들이 모두 파산하고 있을 때의 공익사의 이런 속도의 성장은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는데 여기에 매판자본의 본질이 있다 할 것이다. 이때부터 맺은 박승직과 이토 추상사와의 관계는 일제하의 전기간에 걸쳐 유지되는데 이것이 1920년대가 되면 박승직으로 하여금 조선인자본과 일본인자본과의 매우 중요한 매개역할을 수행하게끔 한다.
한편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박승직상점 역시 매우 인상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면포의 판매망을 강원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로 확대하고 있었으며, 취급품목도 늘려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박승직상점과 공익사로 이어지는 판매체계가 형성되는 것인데 이것이 일제의 전기간에 걸쳐 유지되는 매판체계인 것이다. 이에 더하여 박승직은 1905년 김한규(金漢奎)가 중심이 되어 토지|건물임대, 창고업 등을 목적으로 설립한 광장주식회사에 이사로 참여하고 있으면서 1905년 경성상업회의소의 의원으로 참여하여 1911년까지 그 자리를 유지한다. 그러나 경성조선인상업회의소가 일본인 상업회의소로 해소되는 것이 1915년인 데 박승직이 1911년에 벌써 의원직을 그만둔다는 사실도 그의 매판적인 상행위와 관계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1907년에는 경성박람회 협찬회의 역원으로도 참여한다.
■ 매판상인으로서의 절대적 지위 확립과정
1910년대 들어 20년대 초반까지의 공익사의 성장은 매우 눈부신 것이었다. 1914년에는 일약 자본금을 50만 원으로 증자하고 동시에 주식회사로 개편하였는데 이때부터 이토 추계열의 주식소유가 반을 상회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까지 전무로 근무하였던 니시하라는 사임하고 말았다. 1차대전의 활황을 타고 1916년부터는 조선의 북부지역과 봉천,하얼빈 등에까지 지점망을 넓히고 취급품목도 더욱 확대하였다. 1916년만의 순이익이 5만 원을 상회할 정도였다. 그러나 1919년에는 만주공익사를 창립하고 만주내의 모든 사업을 거기에 양도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에서의 공익사의 활동은 이토 추상사의 만주진출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 데 지나지 않았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여기에 또한 매판자본의 비애가 서려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도 공익사의 성장은 계속되어 1920년에는 2백만 원으로 증자하였다가 때마침 닥친 전후불황으로 1921년에 1백만 원으로 다시 감자(減資)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공익사의 성장은 대단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1921년의 공익사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자. 사장에 박승직, 상무이사에 다카이(高井兵三郞), 다나카(田中淸吉), 감사에 최인성, 최경서, 김원식, 다케나카(竹中多計吉)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모두 이토 추상사로부터 파견되어 활동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총주식의 3분의 1을 이토 추상사가 소유하고 있고, 박승직은 겨우 20분의 1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로써 공익사의 성격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박승직상점 역시 1925년에 자본금 6만 원의 주식회사로 개편하게 되는데 공익사의 차입금으로 박승직이 자본금을 불입하는 대신 공익사에서는 업무감독을 위한 사원을 박승직상점에 파견하는 것으로 하였다. 이로 볼 때 20년대 초의 불황 속에서 박승직상점의 성장도 여의치 않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1928년경부터는 경성방직, 조선방직 등 조선내에서 생산되는 면포류에 대하여 위탁판매를 시작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박승직과 경성방직의 연결이 이루어지고, 박승직은 이전부터 맺고 있던 이토 추와의 관계를 이용하여 경성방직이 이토 추로부터 원료, 기술, 판매 등의 측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또한 1932년부터는 박승직이 감사를 맡고 있던 조선직물의 인조견을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박승직상점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서서히 활기를 띠게 되었다.
또 박승직은 1917년에 곡물무역과 정미업을 위하여 공신상회를 설립하였는데 1921년에는 경성곡물신탁의 감사로 취임함으로써 공신상회와 경성곡물신탁으로 이어지는 신매판체계의 또 다른 한 측면을 형성하게 된다. 1916년에는 박승직상점을 통한 면포 판매에 도움이 되게 하고자 '박가분제조본포'라는 분공장을 차리기도 하였다.
이런 상업활동과는 별도로 포목상계에서의 그의 압도적인 지위로 인하여 몇몇 상인들의 친목단체 또는 경제단체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1918년 경성포목상조합을 만들어 조합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1920년에 일본상인들과 연합하여 경성면사포상연합회로 명칭을 변경하게 되는데 그는 여기에서 부회장이 되었다. '일조협동기업의 개척자'라는 박승직에 대한 평가는 바로 1929년에 있었던 이 단체의 기념식장에서 미쓰이물산 서울지점장이 한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었던 것이다. 1919년 준친일단체인 조선경제회의 이사로 참여한다. 1921년에는 '일선기업의 융합'을 목적으로 열린 산업조사위원회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조선인들이 개최하였던 조선인산업대회의 지방위원으로 참여한다. 조선인산업대회는 일제에 대하여 조선인 기업가들에 대한 지원과 보호를 요청하는 것이 주요한 임무로 되어 있었다. 1925년에는 상인들의 친목단체인 중앙번영회의 회장을 맡았다. 이 단체는 1931년 경성상공협회로 개명하게 된다. 그가 1919년 고종의 인산일과 1926년 순종의 인산일에 모두상민봉도단의 단장으로 참가하게 된 것은 이러한 그의 지위로 인한 것이었다. 여하튼 박승직은 매판상인으로서의 그의 지위를 이용하여 경성의 상업계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고 하겠다.
■ 박승직 상점에서 미키상사(三木商社)로
박승직은 1933년 소화기린맥주(昭和麒麟麥酒)의 이사로 참여하게 된다. 이 때 박승직이 소화기린맥주와 맺은 인연으로 해방 후에 그의 아들 박두병(朴斗秉)이 소화기린맥주의 관리지배인을 맡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 두산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박승직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 되는데 그가 이 기업의 이사로 참여하게 된 경위는 명확하지가 않다. 다만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소화기린의 대주주는 일본의 2대 맥주회사였던 기린맥주였다. 기린맥주는 애초에 조선에 분공장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총독부의 반대에 부딪쳐 뜻대로 되지 않자 따로 법인체를 설립하고 영등포에 공장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소화기린의 이사로 단지 2명의 조선인이 참여하였는데, 그들이 바로 김연수*와 박승직이었고 그들이 가진 주식은 단지 2백주씩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소화기린은 유수의 기업가로 성장해 있던 김연수를
통하여 조선내의 맥주 판매를 도모하고자 하였고 김연수는 그를 위하여 박승직을 소개하였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박승직이 그때까지 구축해 놓았던 매판상인으로서의 지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하겠다.
1930년대 들어 활기를 찾아 가던 박승직상점은 일제의 중국 침략 이후에 창립 이래 최대의 호황을 맞이하게 된다. 만주로의 면포 수출이 늘어남에 따라 1938년에는 자본금을 일약 24만 원으로 증자하게 되며, 1943년에는 52만원으로 증자하게 된다. 이에 따라 순이익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1939년에는 23만 원을 기록하게 된다. 1940년부터 면제품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자 박승직상점은 도매부와 소매부를 분리하여 업무의 원활을 꾀하고자 하였다. 1941년에는 박승직상점 도매부의 이름을 미키상사로 바꾸고, 소화기린맥주의 대리점을 개설하여 맥주의 위탁판매를 삼목상사가 겸업하게 된다. 미키 쇼우쇼크(三木承稷)은 박승직의 창씨명이다.
한편 박승직은 전시체제의 와중에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겸 상담역으로,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총력전체제에 협력하였다. 그리고 조선은행에 근무하다가 1936년부터 박승직상점의 상무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던 박두병은 1944년 경성호단의 동대문지구 부단장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친일 전쟁협력활동은 오히려 한말부터 보여준 박승직의 매판적인 상업활동에 비추어 보면 가벼운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