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이 창건된 것은 1405년 (태종 5)의 일이지만, <태종실록>12년 5월 22일 조에 '진선문 남쪽에 누문(樓門)5간을 짓고 돈화문이라 한다'고한 것으로 보아 돈화문이 창건된 것은 태조 12년 5월 22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종도 주조하여 돈화문 다락에 걸고 옛 제도에 따라 그 종을 울렸던 사실이 예문관 제학 변계량이 지은 <돈화문루 종명>에 다음과 같이 밝혀져 있다.
".... 해당 관청에 명하여 종을 주조하여 궁문에 다니 옛제도를 그대로 따라 지킴으로써 문무 백관이 조현하기 위하여 모이는 조회 시간을 엄격하게 지키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종을 단 것은 관직자들이 그 직책을 다하여 한 치의 허물없이 나라의 운수를 영원히 하늘과 땅과 함께 하고자 함이다.'
이처럼 돈화문의 종을 때 맞추어 침으로써 기강을 엄히 하고, 나아가 나라의 만년 번영을 기원하던 것이었다
돈화문과 관련해 알수없는 점은 돈화문의 지붕양식이다. 1820년대 그려진 <동궐도>에 의하면 돈화문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그려져 있으나, 현재는 우진각지붕으로 남아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문이 모두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의문점이 아닐 수 없다. 화공의 실수일까?>
그런데 이때의 돈화문은 규모가 크지 못하였던 것 같다.<문종실록>원년 6월 13일 조에 실려 있는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창덕궁의 돈화문을 고쳐 짓게 하였다. 장차 휘덕전(輝德殿)에서 제를 지내기 위함이었다."라는 기록을 보아 돈화문이 1451년에 증축된 것을 알 수 있다.
일설에는 세종의 상여가나가기 어렵거나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에 높고 큼직한 문이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전하고도 있다.
그로부터 56년 뒤에 또다시 높직한 큰문으로 고쳐졌음이 <연산군일기> 12년(1506) 6월 23일 조에 , '돈화문을 고대(高大)하게 하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연산군이 폐위되기 석달 전의 일이므로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처럼 한양 초기에 몇차례씩 고쳐 키운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다른 모든 전각과 함께 불에 탔으므로 지금의 돈화문은 1611년 (광해3)에 중건된 것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인조반정 때 창덕궁 내전이 온통 불에 탔고 순조 때에 인정전이 화재를 입었으나 다행히도 돈화문만은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 근래 와서 돈화문을 수리하던 차에 대들보에 먹글씨로, '옛 문이 불에 타서 임진왜란 후에 새로 지었다'고 써 놓은 중건 때의 기명(記銘)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으로는 가장 오래 된 것(380년)이라 할 수 있다.(보물 383호).
경종 원년 (1721)에 보수시킨 기록이 있고 1890년대에는 왕실에 자동차가 나타나면서 차량의 진출이 가능하도록 문지방을 끼우고 뺄 수 있도록 하였으며 현재는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문지방이 없는 상태이다.
돈화문의 구조
돈화문의 짜임새를 살펴보면 정면 5간, 측면 2간으로 정면이 73.7척이고 측면이 26.1척이며, 우진각 기와지붕인 다포집이다.
안 팎으로 둥글린 기둥이 버티고 그 가운데에 가로로 줄지어 세운 네모 기둥에 큼직한 널문짝이 달려서 안쪽으로 여닫게 되어 있다.
아래층은 앞, 뒤, 옆면에 모두 12개의 둥근 평주가 버티었고, 위층은 12개의 병렬주와 2개의 고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층 굴대 부분의 짜임은 아주 간단하여 기둥 아랫몸에는 아무런 장치가 없이 몸의 짜임은 없고, 가운대로 3간 널문짝이 달려 있다.
문인방과 머름방 위에 홍살이 있고, 좌우 끝 간 흙벽 위와 아래에 중재(中材)를 들였다. 공포는 아래위 층이 모두 내삼출목, 외삼출목으로 바깥 부분에는 삼제공이 겹쳤고 , 그위의 도리받침 가닥은 운각(雲刻)하였다.
공포 안쪽 부분에는 행공첨차처럼 끝이 일자지고 바닥은 굴렸다. 삼제공부터는 운공(雲空)처럼 되어 기둥 사이로 뻗어 올라가서 천장에 닿고 , 보 아래에서는 보아지가 되어 대들보를 깊숙이 받았다. 이문은 공포나 귀공포에 가첨자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 가첨차는 주심포 건물에 남아 내려오는 형태라서 그것이 남대문에는 남아 있는데 돈화문에는 생략되었다.
아래층 대들보는 좌우 두 개로 두 개의 고줏몸에 맞추어졌고, 가운데칸에선 곧바로 건너질러서 고주가 대들보를 받치고 있다. 천장은 대들보 몸에 붙인 우물천장으로 짜여져서 매우 견실하다. 또한 청판(廳板)마다 꽃무늬 단청이 베풀어져 있다. 오르내리는 층계는 맨 끝 칸에 마련되어 있다.
같은 시기의 건물이면서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과는 건축 기법이 다르나 위층 바닥이 청마루로 된 점은 같으며, 따라서 남대문의 우물마루와는 아주 다르다.
위층 굴대는 멍에창방위로 중방목을 포개어서 남대문이나 동대문처럼 조그만 널문짝을 쭉 돌려 달아서 밖을 내다볼 수 있게 하였다. 널문 위로는 창방이 짜여지고, 그 위에 평방이 놓여 공포를 받고 있다.
공포의 짜임는 아래층과 같고, 내목도리 아래에는 장화반(長華盤)을 놓았다. 좌우 측간(側間) 고주가 솟아오른 부분의 대들보는 고주에 기둥머리가 놓인 채로 지탱되어 있고, 그 바깥 칸 대들보는 고주에 기둥머리가 놓인 채로 지탱되어 있고, 그바깥 칸 대들보는 앞뒤로 곧게 건너질러 있다.
보머리는 아래층과 마찬가지고 운각되어 남대문의 삼분두 양식보다 뒤떨어진 기법을 나타내고 있다.
대들보위에는 짧은 동자기둥이 중도리와 마루보를 받았고, 동자기둥위로는 첨차목이 짜여져서 도리받침 장혀를 지탱하고 있다. 마루보 아래에도 보아지가 있고, 위에는 대공(臺工)이 놓여 종도리를 받고 천장은 서까래가 내보이는 연등천장이다.
돈하문의 처마는 겹처마로 물매 곡선이 알맞고, 각 등성마루를 양성하여 거기에 취두, 용두, 잡상을 베풀었으며 사래에 토수를 끼웠다.
<돈화문 잡상>
돈화문의 구조는 조선전기에 건축한 남대문과는 그양식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으나 , 조선중기의 수법이 담겨 있어서 그 시기를 대표하는 건물 중의 하나이다.
임진왜란 직후 같은 시기에 지은 창경궁의 홍화문보다 연약한 편이기는 하나, 견실한 짜임새와 다양한 양식 등 그 모양새는 훨씬 아름답다.
특히 가운데 고주를 생략하여 위층 공간을 훨씬 더 넓게 쓸 수 있게 한점은 홍화문에서도 생각해내지 못한 장점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돈화문의 현판은 감정바탕에 흰글씨로 양각되었고 액자는 연화당초문으로 치장하였다.
돈화의 뜻은 [중용(中庸)]의 '대덕돈화 (大德敦化)'에서 취한 것으로 "교화(敎化)를 도탑게 한다." 는 뜻이라 한다.
삼공이 앉았던 나무그늘
돈화문을 들어서서 주변을 둘러보면 느티나무, 회화나무가 무성하다.
여름이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가을이면 단풍으로 고궁의 정취를 한껏 살려주고 있는 나무이다.
문 하나 사이로 도심의 소음이 사라지고 조용하고 정취있는 궁궐이 드디어 전개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느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군림하기도 했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휴식처로, 때로는 서당의 선생이 강학(講學)하는 민족의 애환이 집결된 장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창덕궁의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는 마을의 정자나무가 아니라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나무이다.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는 한자로 쓰면 모두 '괴(槐)'가 되는데 괴는 주(周)나라로부터 궁내에 심었던 나무의 대표적 수종이다.
<주례(周禮)>에 보면 , 주나라 시대에는 궁의 고문 (皐門: 궁성의 가장 바깥 루문 )과 응문 (應門:궁중의 정문 )사이에 느티나무와 회화 나무를 심어서 이 나무 밑에 삼공(三公 :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나란히 마주보고 앉아 오는 이를 맞이 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제왕의 궁전을 괴신(槐宸)이라 고도 하며 , 삼공의 자리를 괴위(槐位)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제도를 따라 궁궐 입구에 괴수(槐樹)를 심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