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스카이(袁世凱, 1859년~1916년)
위안스카이(중국어 정체: 袁世凱, 간체: 袁世凯, 병음: Yuán Shìkǎi 원세개, 1859년 8월 20일 ~ 1916년 6월 6일)는 중국 허난 성 쉬창 부 샹청 현 출신으로, 중국 청나라 말기의 무관(武官), 군인이며 중화민국 초기의 정치가이자 중화제국의 황제이다.
그의 자(字)는 웨이팅(중국어 정체: 慰庭, 병음: wèi tíng; 위정)이며 호(號)는 룽안(중국어 정체: 容庵, 병음: róng ān, 용암)이다.
청나라 말기에서 신해혁명 직후까지 중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조선과도 관계가 깊어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주재하면서 광서제를 대신함으로 내정 간섭을 수행하였다. 청일전쟁 발발 직전 도주하여 귀국하여 이후, 청나라 군대의 신식군대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귀국 후 무술변법을 계기로 청나라의 실권을 차지하였다. 쑨원과의 대타협으로 선통제(宣統帝)를 제위에서 끌어내려 중국 이천 년의 제국사에 종지부를 찍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성립 후 같은 해 4월 쑨원 임시 대총통으로부터 실권을 위임받았고 이듬해 1913년 4월 1일 쑨원과의 약정에 따라 대총통직을 넘겨받아 임시 대총통에 올랐다. 하지만 제위의 욕망이 있던 그는, 만년에 스스로 황제가 되기 위하여 중화제국 제제운동(帝制運動)을 일으켜 칭제를 감행하였으나, 중국 전체에서 "토원(討袁)"의 깃발이 세워지자 이내 제위를 포기한다. 이후 얼마 안가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이 제제운동은 지방 군벌의 세력이 중앙에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군벌 세력으로 움직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군벌 시대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서 군벌로 잘 알려져 있는데, 후일 북양군벌이 되는 북양군을 창설했다. 그는 실제로는 군벌이 아니다. 그가 창설한 북양군은 청나라의 정규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만 군을 강하게 사병화하고 군대 내에 심복을 두는데,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은 후, 그들 심복들이 본격적인 군벌이 된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후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 그 행정적인 공백을 각 지방군이 군정을 통해서 통치권을 행사함으로 군벌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군벌들이 벌인 내전은 위안스카이의 사후인 1916년 이후 시작되었고, 1920년대에 들어서면 본격화 되며, 1928년까지 계속된다.
두 번의 향시 실패로 문과를 포기한 후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1881년(22세) 양부(養父) 원보경(袁保慶)의 추천으로 청나라의 거물 정치가 이홍장(李鴻章)의 참모인 우창칭(중국어 정체: 吳長慶, 병음: Wú Chángqìng, 오장경) 휘하로 들어갔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이에 조선이 친청 세력인 명성황후의 주도하에 청나라에 구원 요청함. 젊은 위안스카이는 우창칭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서, 이홍장의 천거로 한성 방위 책임자로 머물었음. 그는 청을 대표하는 외교수장은 아니었으며, 떠나기 전까지도 수장이 아닌 외교를 담당하던 북양대신의 파견원의 신분이었음.
그는 조선의 군주를 배알하는 자리에서도 기립하지 않을 것이며, 고종을 ‘혼군(昏君)’이라 칭하면서 폐위를 주장하고 나선다. 조선 정부관료 스무명을 일거에 자신의 측근으로 갈아치웠다. 주조선 미국공사 포크는 이를 ‘무혈 정변’이라고 이름했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 발발 수 일 전, 신변의 안전을 위해 본국으로 도주.
1895년: 톈진(天津)에 주둔하던 정무군(定武軍)에 파견. 정무군을 신건육군(新建陸軍)으로 바꾸고 신식군대화된 무기 및 훈련을 하였으며 많은 심복들을 양성하였다. 이들은 많은 수가 후일 북양군벌의 군벌들로서, 또는 중화민국 초기 정계 및 군계 인물로 활약한다.
1898년: 무술변법에서 개혁파 동지들을 배신, 서태후의 신임을 얻음.
1899년: 공부 우시랑(工部 右侍郞) 산동 순무(山東 巡撫) 서리로 승진. 신형 무기와 훈련으로 무장한 무위군(武衛軍)을 동원하며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였고, 이 일은 그가 능력 있는 장군으로 인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1년: 직례 총독(直隷 總督)겸 북양대신(北洋大臣)에 임명됨.
1902년: 허베이성 바오딩(保定)에서 북양상비군(이후 북양군) 편성.
1905년: 북양군을 북양육진(北洋六鎭)으로 확대 편성. 그 중 하나는 만주족 귀족인 철량(鐵良)의 부대였지만, 다른 5진은 그의 통제하에 있었다.
1906년: 모든 군무에서 사임하도록 종용을 받음. 북양군에 대한 병권을 육군부로 넘겨주었다.
1907년: 북경에서 근무하면서 군기대신(軍機大臣)과 외무부 상서(尙書: 외무부 장관)를 겸직.
1909년: 만주족 섭정왕(攝政王) 재풍(載沣)에 의해 모든 직무에서 해임됨. 일시 귀향.
1911년: 우창에서 봉기 발생.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 진압군으로서 호북의 육군과 해군의 군권 장악.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됨. 그러나, 북양군을 이끌고 한커우(漢口)점령. 이어서 베이징으로 진격, 청나라의 군권을 장악. 쑨원(孫文)과 막후 협약. 쑨원의 혁명당은 황제 퇴위와 공화정 체제를 요구. 위안스카이는 새로운 정부의 대총통으로 선출된다는 조건을 내 놓음. 위안스카이는 혁명당의 이름을 빌어서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퇴위시킴.
1913년: 중화민국 대총통 취임. 중국 국민당 및 국회 해산.
1914년: 임시약법(臨時約法) 폐기. 국무원 해산. 북양군 단기서 등의 군권 박탈. 임시약법의 폐지로 봉건독재적 대총통 권력을 가지게 됨. 유럽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이 발발하자 영·일 동맹을 근거로 연합군 측에 가담한 일본은 중국 산둥 반도의 독일 조차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1915년 1월 만주와 산동반도 등에 대한 일본의 이권을 반영구화하고, 남만주와 내몽골 일부를 일본에 조차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등, 일본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 21개조 요구조건을 위안스카이 정부에 제시했다. 일본은 1915년 5월 7일 위안스카이 정부에 최후통첩을 발하였으며, 위안스카이 정부는 5월 9일 이를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21개조 요구·일본-중국 관계)이 21개조에 대한 처리는 중국의 민중이 위안스카이에게서 이탈하는 계기가 된다.
1915년 12월: 참정원을 조정하여 중화제국 대황제로 칭제(홍헌제; 洪憲帝). 중화민국 연호를 폐지하고 중화제국으로 바꿈. 이에 윈난, 구이저우, 광시 및 광둥 저장 산시(陝西) 후난 쓰촨 등의 지방군이 봉기하고, 중국의 일반 시민은 물론, 자신의 지지기반이었던 북양군의 일부 계파를 포함한 내외적인 반격과 반발을 받음.
1916년 3월 22일: 군주제를 취소하고 중화민국의 연호를 회복함. 이것인즉 사실상 위안스카이 본인이 중화제국 군주 정부에 대한 중화민국 국민당의 항거를 견디지 못하고 끝끝내 보위에서 쫓겨나고 만 실태인데 보위에서 퇴위한 위안스카이는 부연 추가적인 유화책으로, 돤치루이를 다시 기용하고 위안스카이 본인은 다시 중화민국 대총통의 위치로 돌아가기를 희망함. 그러나 봉기가 일어난 지방 각 성의 군벌과 민중은 그를 성토하며, 지방 성의 군벌들은 관계 단절 혹은 독립을 선포함.
5월: 요독증 발병.
6월 6일: 사망. 향년 5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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