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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07일(토요일) 대구 한천서원 시향에 참가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강릉역에 도착하였다.
07시 35분 동해행 기차를 타고 08시 18분경 도착하여 아침을 먹고, 09시 03분 기차로 제천에 11시 55분경 도착하여서 점심을 먹고, 대전에 가서 환승하여 동대구역에 내렸습니다. 약 9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강릉에서 서울, 서울에서 대구로 KTX기차를 이용하였으면 시간이 훨씬 단축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음기회에는 KTX기차를 이용하자고 전남표 유교신문기자님과 합의하였습니다.
대구방문은 경유지로 3번 정도 다녀온 적이 있어 아주 낯선 지역이었는데, 전남표 기자님이 전종득 전종친회장(前宗親會長)과 연락하여 회장님의 도움으로 모텔에 투숙하였는데, 토요일이라서 비용이 추가되었습니다.
전종친회장(前宗親會長)님께는 2017년 정선군 남면 낙동리 산120-7에 소재한 중시조 諱 “愃” 시향에서 인사드린 적이 있고, 그 때 연설이 인상적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쓴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全鍾得 全氏中央宗親會長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중시조께서는 신라 성덕왕때 외교사절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곳은 우리종친들 마음의 고향이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다음날 11월 08일 아침7시에 관문시장에서 순대국밥을 먹고 전종친회장(前宗親會長)님의 지인의 차를 타고 약 20분경과하여 한천서원에 도착하였습니다. 거의 제일 먼저 도착한 경우여서 주위를 산책할 기회가 생겨서 지형을 살펴보니 주위에 산이 둘러싸여 있어서 아늑한 분지형태의 지역이었습니다.
가창면이라서 ‘佳昌’인지 ‘佳窓’인지 궁금하였습니다. 조사해 보니 ‘嘉昌’이었습니다.
시골이지만 어린이놀이터도 새로 생겨서 발전하고 있는 곳이라는 인상을 받았으며, 한천서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염수재 (옥천 전씨 재실, 전극태의 퇴헌일기 발행장소)라는 재실도 볼 수 있었습니다.
한천서원에 걸린 편액을 사진 찍으면서 완문(完文)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족보수권에 내용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찾아보았으니, 내용이 없어서 해문을 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노생’이라는 젊은이가 도사가 준 구멍 뚫린 베개를 베고 자다가, 베게 구멍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공간에 들어가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나도 한천서원 앞에 있는 은행나무 고목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 시간여행하여 조선시대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마치 132년 전 1888년 고종25년 시대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대구대도호부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에 있는 한천서원에는 마치 영화 촬영 현장같다고 가정해 보았습니다. 주연, 조연, 엑스트라 등이 한복과 제례복을 입고 있었으며 나는 엑스트라로써 촬영이 없는 동안 주연과 조연을 활동을 배우기 위해 열심히 관찰하였으며, 가끔 나도 엑스트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한천서원은 재실 부지가 넓고 건물배치가 잘되어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분들을 보았으며, 문중의 부인들이 행사진행에 도움을 주려 왔나보다 짐작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한국인성예절교육원’에서 봉사 활동하는 분들이었고, 다과를 접대하고 있었습니다. ‘정미진’지도사는 학생들에 교육하는 한천서원관련 내용(왕건드라마 포함)을 브리핑도 해 주었습니다. 예절교육원에서는 전통 체험장을 운영하는데 한천서원, 도동서원, 육신사, 화전고택을 주로 이용한다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내일 한천서원에서 예절교육을 하는데 견학오라는 초청도 받았습니다.
진설하는 것을 살펴보니 생고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생소하였는데 서원 향사에는 생고기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서를 읽어보면 방향이 복잡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실제로 시행하는지 늘 궁금하였는데, 오늘 행사를 보니 내내 예서와 방향이 일치함을 보았습니다.
2시간여가 지나서 본행사가 진행되었으며, 서원 시향은 처음 보는 것이라서 유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깊은 인상이 남는 것은 향교에서 예행연습 후 하는 행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물 흐르듯 진행되었고, 내가 본 시향 중에 가장 교과서에 가까운 행사였다고 생각되었으며 많이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야사(野史)보다 고증에 관심이 많아 정부기록을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1881년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제감감찰 전홍교에게는 兒馬 1필, 아헌관에게는 內下大豹皮 1령, 종헌관에게는 內下豹皮 1령, 찬례, 집례, 대축에게는 加資, 능사 참봉은 陞六, 그 외 참여자는 判下대로 시상하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적으로 제사를 얼마나 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감감찰의 역할은 7일전에 파견되어 부정한 행위를 멀리하고, 제물, 제기, 청소, 진설, 복장 및 행동이 의례에 벗어나지 않았는지 감찰합니다. 지금의 제도로 이야기하면 검찰청 검사가 행사장에 파견되는 것과 같다고 이해하였습니다.
서로 둥글게 모여서 인사를 하고 사전교육(오리엔테이션)을 하는 모습도 낯설었고 알자가 초헌관을 비롯한 참례자를 일렬로 안내하여 삼문(三門)중 동편 문으로 안내하는 것이 엄숙하였으며, 정성으로 시향에 임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알자(謁者)의 역할을 잘 몰라서 관심사항으로 지켜보았으며, 헌관을 모실 때 마다 읍(揖)하였고 말없이 동작과 실제행동으로 안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지휘자는 집례이고 실제로 앞장서 행동을 안내하는 역할인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오늘 집례는 대구향교에서 다년간 활동하였다고 들었으며 향사가 한 치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이 원만히 진행하는 모습이 믿음직스러웠습니다.
초헌관은 여러 차례 단(壇)에 오르고 내려서 활동량이 많고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어떤 제사에서는 초헌관이 술을 올리기 전에 재배하고 올리고 나서 재배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헌관은 술만 올리고 재배를 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유교신문 전남표기자님은 재배하지 않는 것이 예법에 맞고, 술잔을 향에 세 번 돌리는 풍습도 잘못된 것이라는 알려주었습니다. 또한 중간의 문은 신문(神門)이고 동문은 들어가는 문이고 서문은 나가는 문이라는 삼문의 기능도 설명 들었습니다. 절에서도 중간의 문은 사용하지 않고 동쪽과 서쪽을 사용하는 이유가 이해되었습니다.
음복례는 보통 서서 술을 마신 후 대추 등을 안주로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상에다 주과를 옮겨서 형식을 갖추는 것을 보게 되었다.
망료례를 문서상으로 보고 실제로 못 보았는데 건물 뒤쪽 특정한 장소에서 축문을 태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필(禮畢)의 순서에서
문서로는 보았지만 실제사례를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알자가 초헌관께 예필(禮畢)을 고하는 것을 확실히 보았습니다.
행사 끝난 뒤 부근에 있던 분(전익상 구악회회원)이 강릉에서 오신 분을 찾기에 대화하게 되었습니다. 합천에 계신 청은 전호열 족장(완산파)의 전화로 강릉에 오신 분을 만나보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족장님과는 평소에 종사(宗史)에 관한 대화를 많이 한 바 있습니다. 모처럼 제가 대구에 왔기에 족장님을 뵙고 싶어서 전화 드렸는데 추향의 일정을 통보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참석 못한다고 아쉬워 한 바 있습니다.
전태우 정선전씨 중앙종친회 회장님은 정선 재실에 모신 여러 신위들의 공적을 체계적으로 조사하여 홍보함이 중요하다는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마치 최면술사가 ‘하나 둘 셋’하는 구령으로 현실 세계로 돌아오듯 조선시대(1888년)에서 현실세계인 대한민국 시대(2020년)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 한천서원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한천서원은 충렬공과 충강공을 모시는 서원입니다.
전이갑, 전의갑 장군의 고려사절요의 공산전투기록에서 신숭겸과 김락은 독립적으로 언급되었으나, 두 분이 『諸軍敗北』속으로 포함되어서 아쉬웠습니다.
고려사절요 > 高麗史節要 卷1 > 太祖神聖大王 > 太祖 10年 > 9월 > 견훤이 경주를 함락시키고 태조를 공산에서 패배시키다 927년 9월 미상(음) 견훤이 경주를 함락시키고 태조를 공산에서 패배시키다 직접 정예 기병(騎兵) 5천 명을 이끌고 가서 공산(公山)의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요격하였는데, 크게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견훤의 병사들이 왕을 에워싸 매우 위급한 상황이 되자 대장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뭇 군사들도 패배하여 달아나고 왕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원문] 고려사절요 > 高麗史節要 卷1 > 太祖神聖大王 > 太祖 10年 > 9월 > 견훤이 경주를 함락시키고 태조를 공산에서 패배시키다 927년 9월 미상(음) 견훤이 경주를 함락시키고 태조를 공산에서 패배시키다 ○九月. 甄萱攻近品城, 燒之, 進襲新羅高鬱府, 逼至郊畿. 新羅王遣連式來告急, 請救之. 王謂侍中公萱大相孫幸正朝聯珠等曰, “新羅與我同好已久, 今, 有急, 不可不救.” 遣公萱等, 以兵一萬赴之. 未至, 萱聞之, 猝入新羅王都. 時, 王與夫人嬪御宗戚出遊鮑石亭, 置酒娛樂, 忽聞兵至, 倉卒不知所爲. 王與夫人奔走城南離宮, 侍從臣僚宮女伶官皆被陷沒. 萱縱兵大掠, 入處王宮. 令左右索王, 置之軍中, 逼令自盡, 强辱王妃, 縱其下, 亂其嬪妾. 乃立王之表弟金傅爲王, 虜王弟孝廉宰臣英景, 盡取子女百工兵仗珍寶, 以歸. 王聞之, 遣使弔祭, 親率精騎五千, 邀萱於公山桐藪, 大戰不利. 萱兵圍王甚急, 大將申崇謙金樂力戰死之, 諸軍敗北, 王僅以身免. 萱乘勝, 取大木郡, 燒盡田野積聚. 王甚哀二人之死, 以金樂弟鐵崇謙弟能吉子甫竝爲元尹, 創智妙寺, 以資冥福. 崇謙光海州人, 勇猛長大, 常從征伐有功. 後諡壯節, 配享太祖廟庭. |
후손된 입장으로서는 고려사절요에 신숭겸, 김락, 전이갑, 전의갑으로 기술되었으면 하는(大將申崇謙金樂全以甲全義甲力戰死之)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를 보완하는 정부기록이 있으니 각양수교등록(숙종11년, 1685년)입니다.
그 후 견훤의 난에 역전(力戰)하다 전사(戰死)하니 태조가 그 공열(功烈)을 아름답게 여겨 이갑의 시호를 ‘충렬’이라하고 아우 의갑의 시호를 ‘충강’이라 사(賜)하고 그 자손이 하향(遐鄕)에 멀리 떨어져 살아 비록 잔미하더라도 군력을 면제하고 특(特) 전지(傳旨)를 내려 문무반열(文武班列)에서 재목에 따라 등용할 것을 이조 병조 예조에 계의(啓依)하여 왕이 윤허하니 선왕의 보공(報功)하는 전장(典章)과 같았다. 을미년에 명하여 선현 자손을 특별 성책(成冊)하는데 이 두 형제의 자손도 적서(嫡庶)를 가리지 말고 전은을 베풀 것이며 봉사자손(奉祠子孫)에겐 각별히 거두어 쓰고, 지자손(枝子孫)과 천한 자라도 군무를 면하라고 하였다. 조선조에 와서 태조 태종 선조 효종대왕 등 모든 임금 때에 전지(傳旨)가 이러하였다. [원문] 甄萱之亂力戰死之太祖嘉其功烈諡以甲爲忠烈公諡義甲爲忠康公其子孫落在遐鄕雖極殘微勿定保事特蒙敎東西班隨材收用之意亦自吏曹禮曹入啓依允聖敎丁寧先王報功之典章章如是至於乙未沙汰考講之時先賢子孫別件成冊而二公子孫嫡庶並以下入講例而奉祠子孫則各別收用諸枝子孫賤庶亦勿定軍保逮朝鮮太祖大王太宗大王宣祖大王孝宗大王列聖以來奉承傳敎 |
행사가 끝난 후 안내부스에서 서성이고 있었는데 대구 구악회 (대구지구 전씨 청장년회) 전영주 회원이 멀리 강릉에서 왔으니 소개해 드리겠다고 하여서 인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인터넷에서 주로 활동한다고 인사를 드렸더니 카페 제목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답변을 미처 하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대구종친회 회장님께 대표로 카페제목이 기재된 명함을 드렸습니다. 명함을 많이 가져와서 카페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드려야 하는데 조금 가져온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경포호수 부근에 관심정(寬心亭) 정자 복원사업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인사하면서 관심정 복원에 대해 홍보를 하였습니다. 우선은 복원취지에 찬성하는 서명을 받고 있고, 서명방법으로 1,000원을 통장에 입금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고 홍보하였습니다.
점심으로 제공된 도시락을 먹으면서 버스를 이용하여 대구북부터미널까지 방법에 대하여 여러분들에게 문의하였습니다.
그 때 성주에서 오신 ‘전하수’성주지구종친회회장님이 차편을 소개해 주어서 편하게 북부 정류장에 도착하였고, 15시 30분 원주행 버스시간이 좀 남아서 성주종친회장님이 짭뽕국물에 고량주를 대접하셔서,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원주에서 강릉 가는 버스가 조금 늦게 연결되어 저녁을 먹고 강릉에 도착하니 21시경이었습니다. 5시간정도 걸렸습니다. 기차로 갈 때보다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습니다.
한단지몽[ 邯鄲之夢 ] 요약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덧없음과 영화(榮華)의 헛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邯 : 땅 이름 한 鄲 : 땅 이름 단 之 : 의 지 夢 : 꿈 몽 노생(盧生)이 한단의 장터에서 도사 여옹(呂翁)의 베개를 베고 잠들어 있는 동안 일생의 경력을 모두 꿈꾼 고사에서 나온 말로, 인간 일생의 영고성쇠(榮枯盛衰)는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심기제(沈旣濟)는 중국 중당(中唐)의 전기작가(傳奇作家)로, 당대(唐代) 전기소설의 대표작인 《침중기(枕中記)》를 저술하여, 명나라 탕현조(湯顯祖)의 희곡 《한단기(邯鄲記)》의 바탕이 되었다. 다음은 《침중기》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나라 현종(玄宗) 때의 일이다. 도사 여옹은 한단(邯鄲)으로 가는 도중 주막에서 쉬다가 노생이라는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산동(山東)에 사는데, 아무리 애를 써봐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산다며 신세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으로 구멍이 뚫린 도자기 베개를 꺼내 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속에서 점점 커지는 베개 구멍 속으로 들어가 보니, 고래등 같은 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 명문가인 그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하여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 후 10년간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려 잡혀가게 되었다. 노생은 포박당하며 "내 고향 산동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았으면 이런 억울한 누명은 쓰지 않았을 텐데, 무엇 때문에 벼슬길에 나갔던가. 그 옛날 누더기를 걸치고 한단의 거리를 거닐던 때가 그립구나"라고 말하며 자결하려 했으나, 아내와 아들의 만류로 이루지 못했다. 다행히 사형은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가 수년 후 모함이었음이 밝혀져 다시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노생은 모두 고관이 된 아들 다섯과 열 명의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하게 살다가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그런데 노생이 기지개를 켜며 깨어 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노옹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메조밥을 짓고 있었는데, 아직 뜸이 들지 않았을 정도의 짧은 동안의 꿈이었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인생은 다 그런 것이라네."라고 웃으며 말했다. 노생은 한바탕 꿈으로 온갖 영욕과 부귀와 죽음까지도 다 겪게 해서 부질없는 욕망을 막아준 여옹의 가르침에 머리 숙여 감사하고 한단을 떠났다. 이 이야기에서 '한단지몽'이란 말이 비롯되었으며, 인간의 부귀영화나 인생의 영고성쇠가 다 꿈같이 부질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한단몽(邯鄲夢)·한단지침(邯鄲之枕)·한단몽침(邯鄲夢枕)·노생지몽(盧生之夢)·황량지몽(黃粱之夢)·일취지몽(一炊之夢)이라고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단지몽 [邯鄲之夢] (두산백과) |
한천서원 완문 [ 충렬공 전이갑, 충강공 전의갑 ] 완문해문 완문을 성급하는 일로 입안을 내린다. 행정에 있는 전씨는 견훤의 난 때 순절공신 충렬공과 충강공의 후예이다 두 공의 충의(忠義)는 성훈전교(聖訓傳敎)가 거듭 있어서 두 공의 후예에게 수백세토록 연호잡역(煙戶雜役)을 시키지 말도록 하라는 윤지가 본래 있으니, 어찌 한 두가지라도 영을 내릴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 두 선생의 후예에게는 이른바 잡역을 면제하고 다시는 핍박하지 말도록 하는 뜻으로 이에 완문을 성급하겠다. 호포 외에 무릇 잡역에 처하면 완문에 의거해 시키지 말도록 하기를 영구히 준행하기를 마땅히 할 것 계사칠월 부관 [原文] 完文 爲完文成給事下立案 杏亭全氏 卽甄萱之亂 殉節功臣 忠烈忠康公之後裔也 二公忠義 則聖訓傳敎累有 而二公之後裔 數百世烟戶雜役勿侵事 綸旨自在 則豈可致令一二乎 從此以往 以兩先生後裔 則所謂雜役爲免 更勿侵逼之意 玆以完文成給爲去乎 戶布之外 凡處雜役 則依完文勿侵 永久遵行宜當者 癸巳七月 府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