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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宮闕)이야기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도성과 궁궐에 대해서는 건설계획, 설계, 공사 등에 참여한 사람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면 왕조실록을 비롯한 다양하고도 풍부한 문헌 자료들이 남아 있어서 보다 많은 사실을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더구나 조선시대에 지어진 궁궐과 도성은 지금까지도 제 자리에 비교적 잘 남아 있다. 물론 처음 지을 당시의 것이 아니고 뒷날 다시 지은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역사의 현장인 궁궐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언제든지 가볼 수 있다.
조선은 태조 1년(1392)부터 순종 4년(1910)까지 27대 518년 동안 지속된 왕조이다. 고려 왕조의 수도였던 개성을 버리고 지금의 서울, 즉 한양에 새로운 왕조의 수도와 궁궐을 건설하여 한성으로 불렀다. 이 한양은 삼국시대 초기 백제의 도읍지로 삼국의 쟁탈지였으나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수도인 경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방에 있는 일개의 군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개성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수도를 보좌하는 곳으로서 특별히 남경으로 승격되었다.
고려 숙종(재위 1095∼1105) 때에는 남경에 성곽과 궁궐을 짓기도 하였으며, 공민왕(재위 1351∼1374) 때에는 남경으로 천도할 계획 아래 궁궐을 짓기도 하였으나 천도하지는 못하였다. 고려 말기에 개성을 대신할 최적의 도읍지로 여겨지기도 했던 한양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뒤에 비로소 새로운 도읍지로 채택되었다. 새로운 도시의 건설에는 막대한 비용과 물자가 요구되었으므로 전국가적인 경제력이 집중적으로 투입되었다.
한양을 명실상부한 한 나라의 수도로 만드는 계획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임시 기구에 소속되어, 도성을 쌓을 터를 비롯하여 종묘·사직·궁궐·시장·도로 등을 지을 터를 결정하고 구체적인 건설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들 가운데 정도전(鄭道傳, ?∼1398)은 도성 건설의 총책임자로 도성 계획, 정궁의 이름과 정궁 안 여러 건물의 이름을 짓고, 종묘와 사직 위치의 결정, 경복궁 설계 등에 깊이 관여했다.
그리하여 정궁인 경복궁은 도성의 한복판이 아닌 북서쪽에 치우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궁성 남쪽의 큰 길 좌우에는 의정부·6조·한성부·사헌부·삼군부 등 주요 관청을 배치하였고, 그 남쪽 동서로 뚫린 큰 길(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길, 곧 지금의 종로)에 시장을 열어 시가지를 형성하였다. 종묘와 사직을 각각 경복궁 왼쪽과 오른쪽에 놓았으나 같은 간격으로 대칭이 되도록 배치하지는 않았다.
도시 전체를 둘러싼 외성은 평지에 장방형으로 쌓지 않고 한양 분지를 외호(外護)하고 있는 백악산·응 봉·인왕산·타락산·남산의 등성이에 산성 형식인 포곡식(包谷式)으로 지형에 맞게 쌓았다. 중국의 주나라 이래로 지켜져 온 주제(周制)를 의식하기는 하였지만 한성의 지형과 풍수적 명당 터를 더 존중하여 도성을 계획하였다.
조선 초기의 집권 관료들은 왕에게 유교에서 규정한 성군(聖君)이 되기를 요구하는 한편, 평소에는 경연(經筵)을 통하여 역사상 왕도 정치(王道政治)를 행한 임금들의 치적을 교육하고, 특히 그들의 거처인 궁궐이 검소하고 누추하기까지 하였다는 고사를 들려주고는 하였다. 이와 같은 유교적 군주관(君主觀)에 적합한 궁궐에 대해서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궁실 제도’라는 이름으로 『주례(周禮)』와 같은 예서(禮書)에 잘 정리해 놓았다.
경복궁 설계를 담당하였던 정도전이 중국 고대의 이상 국가로 유교 경전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라·은나라·주나라 3대(三代)의 정치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던 사실을 감안하면, 주나라의 궁궐 건축에 대한 제도(周制)를 이상형으로 받아들여 경복궁의 설계에 적용하려 했던 것 같다. 더구나 태조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신하라는 위치에서 혁명을 통하여 여러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앞 시대의 왕들처럼 신비로운 존재로도, 절대적인 권력을 보유한 존재로도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민심과 하늘의 뜻을 받아들여 왕위에 오른 지배자로 생각되었다.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는 국도(國都)의 구성 원리로 전조후시(前朝後市, 궁궐을 중심으로 앞쪽에는 정치를 행하는 관청을 놓고 뒤쪽에는 시가지를 형성함), 좌묘우사(左廟右社, 궁궐을 중심으로 그 왼쪽에는 왕실 조상의 사당인 종묘를 놓고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배치함)가 기록되어 있고, 또 궁궐의 구성 원리로는 전조후침(前朝後寢, 궁궐은 앞쪽에 정치를 하는 장소인 조정을 두고 뒤쪽에 임금을 비롯한 왕실의 거처인 침전을 배치함)과 3문 3조(三門三朝, 궁궐 전체를 3개의 연속 중정으로 구성함)가 적혀 있다.
이러한 제도적 규정은 주대 이후 줄곧 중국의 도성 및 궁궐 계획에도 기본적인 구성 원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어겨서는 안 될 규범적 법칙으로서 적용되었다기보다는 이상적 규범으로서, 하나의 기준으로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는 황제의 권력이 막강해지고 국가의 규모가 광대해짐에 따라 거기에 맞는 새로운 도시와 궁궐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도성 제도와 궁실 제도가 생겨났다. 예를 들면 당의 장안성에서는 궁궐을 중앙으로부터 북쪽 끝에 배치하고 궁성 왼쪽(동쪽)에는 동궁, 오른쪽(서쪽)에는 액정궁(掖庭宮, 궁녀가 있는 궁)을 배열하였으며 궁성 앞쪽에 관청을 배치한 다음 황성을 한 겹 더 두르고 그 앞쪽에 시가지를 건설한 뒤 전체를 다시 장방형의 외성으로 둘렀다. 명·청대의 도성 계획도 주제(周制)나 당제(唐制)로만은 설명되지 않는 나름의 계획 원리를 가지고 있다.
한편, 3조는 연조(燕朝)·치조(治朝 또는 內朝)·외조(外祖)를 말하는데 연조(燕朝)는 왕과 왕비 및 왕실 일족이 생활하는 사사로운 구역으로 경복궁 창건 기록의 연침(燕寢)·동소침(東小寢)·서소침(西小寢) 등 3채의 침전이 연조(燕朝)에 속한다. 치조(治朝)는 임금이 신하들과 더불어 정치를 행하는 공공적인 구역으로서 정전(朝禮를 거행하고 법령을 반포하며 조하를 받는 곳)과 편전(便殿, 중신들과 국정을 의논하는 곳)으로 이루어지므로 보평청(報平廳)과 정전(正殿)이 여기 에 속한다. 외조(外祖)는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구역으로 궐내각사(闕內各司) 이하 동서누고(東西褸庫)까지가 여기에 속한다.
창건 당시에 궁궐 이름을 ‘경복궁(景福宮)’이라고 지었던 정도전(鄭道傳, 1342년~1398년)은 각 건물의 이름과 그 뜻을 임금께 올렸는데, 연침(燕寢)을 강령전(康寧殿), 동소침(東小寢)을 연생전(延生殿), 서소침(西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 남쪽의 보평청(報平廳)을 사정전(思政殿), 정전(正殿)을 근정전(勤政殿), 동쪽 누(樓)를 융문루(隆文樓), 서쪽 누(樓)를 융무루(隆武褸),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 남쪽 문인 오문(午門)을 정문(正門) 또는 광화문(光化門)이라고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태조대에 정궁으로 지은 경복궁을 비롯하여 태종대에 이궁으로 지은 창덕궁, 성종대에 3명의 대비를 위하여 지은 창경궁이 있었다. 조선 전기 정치활동의 주무대이자 역사의 현장이며 궁정 문화의 결정체였던 경복궁·창덕궁·창경궁 등 3궁궐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버렸다. 이때 소실되기 직전, 곧 200여 년 동안 조선 왕조의 정궁으로 발전되어 온 경복궁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명종 15년(1506)에 그렸다는 「한양 궁궐도(漢陽宮闕圖)」가 남아 있다면 당시의 한양도성과 궁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겠지만 이 그림 역시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말았다. 현재로서는 영조 년간에 제작되어, 조선 전기 경복궁의 배치 현황을 전해 주는 「경복궁도(景福宮圖)」와 「경복궁지도(景福宮地圖)」만이 국립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조선 전기에 이룩된 높은 수준의 문화적 성과들은 임진왜란으로 거의 다 파괴되고 소멸되었다. 정치적·경제적으로 입은 타격도 대단히 심각한 것이어서 외형적으로나마 이를 회복하는 데에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며 전란으로 입은 피해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단계에 이르는데 1세기가 걸렸다. 궁궐 및 도성도 예외는 아니어서 경복궁·창덕궁·창경궁 등 궁궐을 비롯하여 도성 안의 제반 도시 시설이 화재로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피난처에서 돌아온 선조는 정릉동의 월산대군(月山大君 성종의 형) 집에 임시로 거처를 정해야 할 정도였다.
왕을 비롯한 집권 지배층은 대내적으로는 전란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 황무지로 변한 농토를 개간하여 국가의 재정적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켜야만 하였다. 또 대외적으로는 만주 지역에서 새로 일어난 후금(後金, 1616년에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1662년에 명을 멸망시켜 중국을 차지한 나라)과의 정치적, 군사적 마찰을 외교적으로 극복해야 했다. 이렇듯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위기 상황에서도 종묘(宗廟)와 왕의 거처인 궁궐(宮闕)은 가장 먼저 재건되어야 할 목표로 생각되었다.
종묘와 경복궁을 재건하기 위하여 선조 38년(1605)부터 진행된 중건 계획은 다음 순서로 진행되었다. 첫째, 춘추관이 건국 초기와 성종 때의 공사 및 명종 8년부터 9년까지의 경복궁 중건 공사 등에 관한 문서와 기록을 등서(謄書)로 묶어서 임금에게 바치고 해당 관청인 공조에도 보냈다. 둘째, 공사를 담당할 기구로서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고, 등서를 참고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입안하였다. 그리하여 1606년에는 궁핍한 재정과 민생고를 감안하여 경복궁의 중심 일곽만을 먼저 짓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608년까지 종묘만 중건하였고 경복궁 중건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 대신 창덕궁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1607년(선조 40)에 중건(선정전,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 등)을 시작하여 광해군 5년(1613년)에 공사가 끝났으나 다시 1623년의 인조반정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궁궐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인조 25년(1647년)에 복구되었다. 경복궁에 대해서는 이후 여러 차례 중건 논의가 있었으나 실행되지 못하다가 1865년(고종 2)에 가서야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중건이 시도되었다. 곧, 지금의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불탄 지 270여 년 뒤에야 비로소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에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 역할을 한 것은 창덕궁이었다.
광해군(재위 1608년∼1623년)은 1608년에 재건된 창덕궁에 거처하기를 꺼려하고 다시 1615년에 창경궁을 중건하였다. 그러나 창경궁에도 들어가지 않은 채 새로 인경궁(仁慶宮)과 경덕궁(뒤에 경희궁으로 고침)을 창건하였다. 인경궁은 인왕산 아래 사직단 동쪽에 지었으나 인조(재위 1623년∼1649년) 때 헐려서 창경궁과 창덕궁을 지을 때 이용되었고 지금은 그 터에 일부 복원한 건물이 남아 있다.
경복궁 터는 그대로 둔 채 창덕궁은 정궁, 경희궁은 이궁으로 사용되었으며 창경궁은 창건 당시의 대비궁이라는 용도를 벗어나서 창덕궁을 옆에서 보좌하는 궁궐로 활용되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한 궁성 안에 있어서 함께 동궐(東闕)이라고 불렸던 것에 대하여 경희궁은 서궐(西闕),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정궁인 경복궁은 북궐(北闕)이라고 불렸다. 1865년에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는 동궐과 서궐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궁궐이었기 때문에 경복궁 중건계획을 세우고 건물을 설계할 때에 동궐과 서궐이 많이 참조되었다. 다만, 이때의 동궐과 서궐의 건물은 대부분 1830년에 중건된 것이었다. 이때 건설 공사에 참여했던 기술자들 가운데에는 1865년 이후의 경복궁 중건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다.
궁궐 안의 건물들은 해당 관청의 철저한 관리와 보호를 받았으므로 때맞추어 수리되었다. 또 왕들은 저마다 새로운 건물을 첨가하면서 궁궐의 면모를 부분적으로나마 새롭게 바꾸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동궐과 서궐은 각각 수천 칸 규모로서 100여 채의 복잡 다양한 건물을 갖춘 대궐(大闕)로 발전하였다. 19세기 초까지 꾸준하게 발전해 온 동궐과 서궐은 1829년 서궐의 화재를 시작으로 창경궁(1830), 창덕궁(1833)이 차례로 대규모 화재를 당하여 정전(正殿)·편전(便殿)·침전(寢殿) 등 중요 부분이 불탔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대를 거치면서 200여 년 만에 한꺼번에 소실된 것이다.
이때 중건된 궁궐에 대해서는 공사 보고서격인 『영건도감의궤(營建都監儀軌)』가 있고, 또 소실되기 직전 궁궐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도록 그린 「동궐도(東闕圖)」(동아대학교 박물관 및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가 남아 있어서 당시 궁궐의 모습을 실감나게 전해 준다. 게다가 『궁궐지(宮闕志)』라는 문헌도 이 무렵에 만들어졌는데 조선시대의 궁궐에 대한 사료들을 집대성하여 궁궐 안 건물들의 연혁과 성격, 왕과 왕비가 출생한 곳과 사망한 곳을 쉽게 파악하도록 하였다. 아마도 궁궐 전체가 연속적으로 불에 타자 위기의식을 느낀 왕과 집권 관료들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역대 왕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궁궐의 전모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려 하였던 것 같다.
조선 후기의 궁궐 건축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경복궁 중건이 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270여 년 동안 아무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경복궁 중건은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마침내 실행되었다. 그는 순조(純祖)·헌종(憲宗)·철종(哲宗) 대(1800년∼1863년)의 이른바 세도 정치기를 거치면서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조선왕조를 부흥시키는 방편의 하나로 경복궁 중건이라는 역사적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이미 왕조 체제가 해체되고 있었다. 특히, 양반 관료층이 극도로 부패한 상황에서 대다수 농민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적이 되어야할 만큼 조선사회는 뿌리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왕조 사회의 해체가 이미 크게 진전된 시기에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궁궐 중건을 대대적으로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고종 초년에 중건된 경복궁은 1897년에 고종이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하자 중건 이후 30여 년밖에 활용되지 못한 셈이 되었다. 경운궁(慶運宮)은 대한제국의 황궁(皇宮)으로 전통적인 궁궐 배치와 전각 구성을 갖추고 아울러 서양식 석조 건물을 곳곳에 추가하여 동서 문명 이 충돌하는 전환기의 역사적 경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1910년 병탄(倂呑)이 되기도 전에 대한제국(大韓帝國) 황제의 궁궐인 경운궁(慶運宮)은 이태왕 전하의 덕수궁(德壽宮)으로 변모·축소되었고, 고종 사후인 1920년부터 일제에 의하여 크게 훼손되어 황궁으로서의 면모를 상실하였다. 창덕궁(昌德宮)은 순종 전하의 창덕궁으로 개조·축소되었으며 창경궁(昌慶宮)은 일반에 공개하는 공원으로 전락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은 식민통치의 본거지로 이용당하면서 정궁으로서의 품격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와 총독부박물관이 궁성 남쪽, 총독 관저가 궁성 밖 북쪽 후원에 세워졌으며, 궁성 남쪽이 모두 헐리고 광화문(光化門)마저 건춘문(建春門) 이북으로 옮겨졌다. 창덕궁은 마지막 황제 순종 일가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나, 1908년부터 정전 서쪽 궐내각사(궐내각사)가 일본인들에 의하여 모두 헐렸다. 1917년에 소실된 내전 일곽조차 1920년에 경복 궁 내전을 옮겨 재건하면서 규모·형식·용도 등이 크게 바뀌었다. 창경궁은 정전, 침전 일곽만을 남기고 모두 헐린 채 동물원·식물원으로 전락하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앞에 지어 정궁으로서의 품격을 상실시키고, 조선의 맥을 끊으려 하였다.
또 경희궁은 일제 강점 당시까지 남아있던 건물마저 모두 팔아넘겨졌는데 정전(正殿)인 숭정전(崇政殿)은 1926년에 조계사(曹溪寺)로, 왕의 침전인 회상전(會祥殿)도 1911년 4월부터 1921년 3월까지 경성중학교 부설 임시소학교원양성소로 사용되다가 1928년 조계사로 팔려 옮겨 세워졌다. 편전인 흥정당(興政堂)은 1915년 4월부터 1925 년 3월까지 임시소학교원양성소 부속 단급소학교(單級小學校) 교실로 사용되다가 1928년 3월 광운사에 팔려 이건되었다. 정문인 흥화문(興化門)도 1915년 8월 도로를 수리한다는 미명 아래 남쪽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에 박문사(博文寺)로 옮겨져 산문(山門)으로 사용되었다. 황학정(黃鶴亭)은 1923년 일반인에게 매각되어 사직단 동쪽에 이건되었는데 오늘날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일본 침략자들의 만행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편찬·간행한 『경성부사(京城府史)』에 의하면 1934년 당시 경희궁에는 흥정당터 부근의 행각을 제외하고 모든 건물이 소멸되어 있었다. 이후 경희궁은 일본식 학교 건물 밑에 깔린 숭정전 월대와 같은 파편화된 유구만을 남긴 채 완전히 소멸되다시피 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저지하기 위하여 우리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와중에 경희궁터 북쪽, 즉 원래 왕과 왕비의 침전이 있던 자리 바로 뒤쪽에 거대한 방공호(防空壕)를 건설하고 이를 위장하려고 뒷산을 뭉게서 방공호를 덮었다. 이로 인하여 궁터는 회복할 수 없는 파괴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며 오늘날까지 이 구조물은 철거되 지 않은 채 그 자리에 흉물로서 남아 있다. 한국전쟁 기간에 미군부대가 경희궁에 진주하여 병영으로 쓰는 바람에 다시 크게 파괴되고 말았다.
해방 이후 가장 먼저 복원이 시도된 곳은 창경궁이었다. 창경궁은 일제침략기에 일본인들에 의하여 대부분의 건물이 철거, 훼손되고 동물원과 식물원 복합시설인 창경원으로 전락하였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된 지 30여 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에 발굴·복원 공사로 정전인 명정전 일곽, 편전인 문정전 일곽이 복원되었다.
이를 뒤이어 경복궁에서는 1990년부터 20년간 복원계획에 따라 1996년에 총독부 청사를 헐어내고 흥례문 일곽을 복원하였으며, 이어서 침전 일곽(강령전 일곽, 교태전 일곽, 함원전, 흠경각), 동궁 일곽(자선당·비현합), 빈전 일곽(태원전), 건청궁 등을 복원하였다.
창덕궁의 경우 문화재관리국이 1969년부터 복원을 시도하는 한편, 1976∼1978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보수를 하고 정화 공사를 한 이후 제한 관람을 실시하면서 잘 보존하였고, 1990년대 후반부터 인정전 앞 행각을 복원하고 궐내각사를 차례대로 복원함으로써 옛 모습을 대체로 찾았다. 그 결과 창덕궁은 1997년에 세계문화유산(World Heritage)으로 지정될 수 있었다.
경희궁의 경우 서울중학교의 이전을 계기로 1985년부터 1990년대까지 여러 차례 발굴 조사를 하였는데 이때 「서궐도안(西闕圖案)」(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을 발굴조사와 복원 자료로 활용하였다. 그 결과 정전인 숭정전 일곽이 복원되었으며, 정문인 흥화문도 제자리는 아니지만 숭정전 남쪽에 복원되었다. 그러나 발굴조사 결과 건물터가 확인된 곳에 서울시립역사박물관을 신축한 것은 문화재 복원 원칙에 어긋난 일이다.
2004년부터는 덕수궁에도 복원정비 종합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경복궁 서남쪽에 위치한 건물은 고궁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조선왕조 궁중 문화유산을 연구하는 중심 기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필자 : 이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