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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신해혁명(辛亥革命, 1911년)-쑨원의 귀국과 초대 임시대총통 취임
1912년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추대될 당시 쑨원
이러한 때에 쑨원은 혁명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미국에 있었다. 그는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그곳의 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고 국내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쑨원은 “열강의 간섭이 없어야 혁명이 성공될 수 있다”고 보고, 먼저 유럽으로 건너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청 정부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 뒤 12월 21일 홍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2월 25일 상하이에 도착하여 임시 정부 조직 문제를 협의하였다.
남북화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난징에서 각 성 대표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12월 29일 17성 대표의 선거에 의해 쑨원은 ‘난징 임시정부’의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됐다. 임시대총통에는 쑨원, 임시부총통에는 리위안훙으로 선출함으로써 1912년 1월 1일에 쑨원은 난징으로 가 총통에 취임한 뒤 국호를 중화민국으로 선포, 1912년 1월 1일에는 ‘민국 원년’으로 하였다.
1월 3일, 쑨원은 대총통의 명의로 각성대표회에 국무원(國務院) 9부(部)의 총장 명단을 제출했는데, 그 명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육군부 총장 - 황싱(黄興)
해군부 총장 - 황종영(黄鐘瑛)
외교부 총장 - 왕총혜(王寵恵)
사법부 총장 - 오정방(伍廷芳)
재정부 총장 - 진금도(陳錦濤)
교육부 총장 -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실업부 총장 - 장젠(張謇)
내무부 총장 - 정덕전(程徳全)
교통부 총장 - 탕수잠(湯壽潛)
이로써 그 동안 주도권 장악을 위하여 벌였던 싸움은 일단락되었고,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북쪽에는 아직 청나라 정부가 그대로 건재해있었고 내부에 입헌파와 구관료들은 위안스카이를 옹호하여 남북화의에서 동맹회가 약속한 대로 청 정부를 무너뜨린 사람이 대총통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중화민국은 수립되었어도 쑨원에게는 더 큰 과제가 가로막고 있었다.
임시참의원과 임시약법
1912년 난징임시정부 내각회의 모습, 가운데가 쑨원.
1912년 1월 28일 난징임시정부 참의원들
쑨원은 난징임시정부(중화민국)를 조직한 다음에 즉시 임시참의원을 구성하였다. 왜냐하면 각 성의 대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으로 그 책임을 다하였기 때문에 참의원을 조직하여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1912년 1월 28일 임시정부조직대강의 규정에 의거 18성의 대표에 의해 임시참의원을 구성하고 각 성 대표회의는 해산했다. 참석자는 43명이었다. 이들의 구성은 동맹회 회원이 33명으로 전체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입헌파는 8명, 기타 2명으로 되어 1/4도 채 못되었다. 표면적으로는 혁명파, 입헌파, 구관료의 연합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혁명파가 장악하였다.
임시참의원이 성립한 후에 국회의 조직은 미국 의회제도를 따랐다. 원로원과 대의원의 양원제를 채택하고 동시에 개회 및 폐회하기로 하였으며, 원로원은 2년마다 1/3을 다시 뽑고, 대의원의 의원은 임기가 4년이었다. 그리고 대의원의 수는 인구비례주의를 채택하였다. 임시참의원의 최대 임무는 ‘중화민국의 임시약법’을 심의하는 일이었다. 2월 7일에 기초위원회가 구성되고 1개월간의 토의 끝에 3월 11일에 마침내 임시약법을 공포하였다.
제1조 - 중화민국은 중화인민이 이를 조직한다.
제2조 - 중화민국의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임시약법은 주권재민, 내각제도, 국민의 기본권을 정한 것으로 쑨원의 삼민주의 사상에 입각해 중화민국의 골격을 이루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은 탄생과 동시에 세계열강에 대한 대책에 부심해야 했고 위안스카이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쑨원은 임시대총통에 취임하기 전에 대총통의 자리를 둘러싸고 ‘중국이 분열되기 시작하면 안 된다’고 간주했으므로 대총통 지위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도할 의사를 밝혔다.
청 멸망과 중화민국 초기
선통제 퇴위·청조 멸망
쑨원이 난징임시정부 임시대총통에 선출되어 한 취임을 계기로 위안스카이는 청 왕조 타도에 적극 나섰다. 1912년 1월 16일 위안스카이는 황태후에게 “황실 우대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면서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처럼 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17일에 열린 황족회의에서 공화정을 수용하라는 요구를 놓고 찬반 양론이 격렬하게 대립하여 결론이 내려지지 못했다.
1월 19일에 열린 황족회의에서 청 황실의 지도력 부재와 무능이 단적으로 드러났다. 위안스카이를 물리치고 혁명군에 끝까지 무력으로 대항하자는 입장이었던 공친왕이 반대파인 선통제의 숙부에게 “그대는 육군을 맡았으니 우리의 병력 상황이 어떠한 지 알겠지?”라고 질문했다. 얼마 전까지 육군을 관리했던 25세의 황숙(皇叔, 황제의 숙부)은 “나는 전쟁을 해보지 않아 알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어전회의에서 결정이 나지 않자 위안스카이의 사주로 1월 26일 진압군 총사령관인 돤치루이 등 47인의 고위 지휘관들이 연명으로 공화정을 요구했다. 또한 이날 군주입헌유지회를 만들어 활발히 공화정 반대 운동을 벌이던 만주족 청년장교 양필(良弼)이 피격됐다(1월 28일 사망). 양필이 암살된 것은 청조에게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1월 30일 어전회의에서 결론이 났고, 이에 따라 내각에 공화정 선포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2월 3일 청나라 황실은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부여하고 그로 하여금 난징 임시정부(중화민국) 측과 퇴위조건에 관한 구체적인 협상을 하게 했다.
일본은 처음에는 중국의 혁명에 대응해 입헌군주제로 내란을 수습하고, 요동반도의 조차기간을 연장하는 것을 포함한 ‘만주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자국에 유리하게 한다는 목표를 정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영국과 협력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화중과 화남지역에 큰 권익을 갖고 있는 영국이 청조를 포기하고 위안스카이의 집권을 통해 내란을 조기에 수습하려고 했다. 미국도 영국에 동조하자 일본은 입헌군주제를 통해 청조를 존속시키려는 의도를 버렸다.
2월 9일 대청황제에 대한 퇴위 후 우대조건 8개항이 확정됐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통제의 퇴위칙서
대청황제가 사위(辭位)한 뒤에도 그 존칭은 그대로 보존하며, 민국정부는 그를 외국 군주의 예로 대우한다.
대청황제가 사위한 뒤에 황실 세비는 400만 량으로 하고 민국이 지급한다.
대청황제는 사위한 뒤에 잠시 궁성(宮城)에 거처하다가 훗날 이화원으로 옮겨간다. 시위인(侍衛人)들은 이전대로 부릴 수 있다.
대청황제가 사위한 뒤에 그 종묘와 능묘는 영원히 봉사(奉祀)될 것이며, 민국이 위병(衛兵)을 배치해 적절히 보호한다.
덕종(德宗)의 숭릉(崇陵)의 아직 완성되지 못한 공정은 규정에 맞게 마무리할 것이며, 봉안예식은 옛 법도대로 한다. 그에 드는 실제 비용은 민국에서 지출한다.
이전에 궁전 안에서 부리던 여러 집사들은 이전대로 부릴 수 있다. 다만 앞으로 환관은 쓸 수 없다.
대청황제가 원래 갖고 있던 사유재산은 사위한 뒤에 민국이 특별히 보호한다.
원래 있던 궁중경비군은 민국 육군부(陸軍部)의 편제에 편입되며, 그 정원과 보수는 이전대로 한다.
그 밖에 청나라 황족에 대한 대우규정 4개조와 만주족, 몽고족, 회족에 대한 대우규정 7개조도 아울러 확정됐다.
2월 11일 황태후가 위와 같은 황실우대 조건을 받아들였고, 12일에 궁전안에 있는 양심전(養心殿)에서 마지막 조회(朝會)가 열렸다. 황태후는 공화국체를 도입을 위하여 황실의 통치권을 포기하며 만한몽회장(滿漢蒙回藏) 5족으로 중화민국을 구성한다는 뜻을 담은 사위조서(辭位調書)를 외무부대신 호유덕에게 건네주고 공표하게 했다. 이로써 진나라의 진시황 이래 2천년 넘게 지속돼온 중국의 황제체제가 종식되고 청나라는 멸망했다.
위안스카이의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과 독재정치
중화민국의 탄생을 알리는 포스터
1912년 2월 15일 임시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가운데)
2월 13일 쑨원은 약속대로 난징 임시정부 임시대총통직을 사임했고 2월 15일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으로 선출되어 무력에 한계가 있었던 혁명군은 위안스카이의 내응(內應)을 얻어 가장 우려하던 열강 무력 간섭을 겪지 않고 공화정체 성립에 성공했다. 이때 쑨원은 자신이 임시대총통직을 사직하는 조건으로 난징을 임시정부 수도로 정하라고 위안스카이에 요구했으나 위안스카이는 2월 말에 베이징 등지에서 일어난 군사 반란을 구실로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1912년 3월 10일 위안스카이는 베이징에서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4월 1일 쑨원은 정식으로 임시대총통직에서 해제되었고 4월 5일 임시공화정부 의회는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이전을 결의로써 혁명파가 위안스카이를 난징에서 견제하려는 시도는 무산되었다.
임시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는 여러 가지 수단으로 혁명파를 무력화시켰다. 군사적 기반을 잃은 혁명파에게 남은 길은 국회와 정당을 통해 위안스카이를 견제하는 것 뿐이었다. 이에 따라 쑹자오런의 주도로 ‘중국혁명동맹회’가 개조되어 1912년 8월 25일 국민당이 창설됐다.
국민당은 1913년 1월과 2월에 걸쳐 시행된 국회선거에서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과반수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의 내각을 꺼린 위안스카이는 암살범을 보내 3월 20일 국무총리로 예정된 쑹자오런을 저격, 3월 22일 쑹자오런은 숨을 거두었다. 위안스카이는 이어 국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1913년 4월 25일 5개국(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러시아) 은행단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액의 차관을 도입하는 협정을 체결하여 독재를 위한 재정기반을 확보했다. 6월에 위안스카이가 국민당 계열의 도독 3인을 파면하자 쑨원, 천치메이등을 비롯한 국민당 세력이 봉기(제2차 혁명)를 호소했으며, 1913년 6월 9일 한 봉기는 6월 9일에서 7월 12일까지 양자 강 중류와 하류 지역 일대에서 전투가 일어났으나나 당시 전란 재발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크게 호응받지 못했고 1913년 9월 위안스카이의 압도적인 무력에 완벽히 결국 진압됐고, 쑨원은 7월 일본 도쿄로 망명했다. 거기서 쑨원은 1914년 7월에 ‘중화 혁명당’을 결성해 국외에서 위안스카이 군벌 정부에 저항했다. 10월에 국회는 ‘공민단’이라 자칭하는 폭도에게 협박받는 가운데 위안스카이를 정식 대총통으로 선출했다. 곧 이어 위안스카이는 국민당 해산을 명하고 대총통 권한을 대폭 강화시킨 ‘신약법’을 제정했다. 결국 ‘위안스카이를 배려한 혁명’이 되어버렸다. 이후 일본이 위안스카이에게 “황제 등극을 인정해 주는 대가로 ‘21개조 요구’를 들어달라”고 요구하자 ‘황제 등극’을 원했던 위안스카이는 이를 수용하여 1915년 12월 ‘황제 제도’의 부활을 시도했다가 군중에게 지탄받아 실패하고(제3차 혁명), 1916년 6월 위안스카이는 사망했다.
위안스카이 사후 북양 정부에서는 패권을 차지하려는 군벌 세력들(직예파, 안휘파)간에 혼전이 시작되었고 남부 광둥 지역에서는 쑨원이 귀국해 1917년 광저우에서 서남군벌 세력들과 연합하여 ‘호법정부’(護法政府)를 조직해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분단과 혼란 시대에 돌입한 중국 정세를 뜻했고 공화제가 결국 명목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영향
국외상 영향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때 1911년 12월 말에 그동안 청에 복속하던 외몽고와 티베트가 혁명에 영향받아 독립을 선언했다. 외몽고가 독립을 선언하자 러시아와 일본은 외몽고를 제외한 북중국에서 양국 간 동서분계가 필요하여 1912년 7월 8일 일본과 러시아 간에 한 ‘제3차 러일협약’에서 양국은 베이징을 지나는 경도선을 경계로 동서를 각각 특수이익지역으로 규정했다.
일변, 티베트는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티베트인들이 각지에 봉기해 중국군을 축출하고 13대 달라이라마인 아왕 로상 툽텐 갸초의 지도 아래 티베트인들은 1917년에 티베트 영토의 거의 전부를 수복했다. 이어 달라이라마는 영국에 원조받아 국왕 겸 교주로서 정교일치 독립 정권을 수립했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 정부는 티베트에 겉으로는 회유책을 구사했으나 실제로는 많은 분쟁을 일으켰다.
청조 발상지였던 만주도 청조 몰락과 함께 열강이 쟁탈하는 대상이 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중국의 중앙정부가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지방군벌이 만주를 차지하자 열강은 이 지역에 명목상으로는 중국 영토로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무주공산 일종이라고 인식했다. 일본은 만주에서 정치상ㆍ경제상 기반을 꾸준히 확충해 나아갔다.
이 밖에 신강 지역에는 신해혁명 발발 당시 양증신이 도독이 되어 신강을 지배하여 독립을 선포했다.
국내상 영향
중화민국 성립으로 황제 체제가 무너지면서 혁명 영향은 민주주의와 자유 분위기가 어느 정도 형성되었지만, 그 기간은 짧았다. 집권 이후 위안스카이의 독재 통치와 복고 풍조와 ‘존공(尊孔) 운동’이 게시를 떨친 데다가 위안스카의 사후 베이징 군벌 행정부를 장악하려는 여러 군벌 세력 간 혼전이 만성화하였다. 중국 정치 중심지는 군벌 세력 간 혼전으로 사실상 무정부 상태하에 놓여 있었고 그 결과 국내 문제와 대외 문제는 모두 불안정한 상황이 끓어오르다가 넘쳐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되는 시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신해혁명을 계기로 국내에서 사상과 문화는 대변한다. 천두슈를 위시한 지식인들은 신문화운동을 주도하여 기존 유교 비판과 문화혁명, 서구 ‘과학과 민주주의’ 숭배를 주창해 특히 학생과 청년층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동향은 사상계와 문화계에서 무정부주의나 사회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주의 의식에 영향을 주게 된다.
우창에 있는 쑨원의 동상. 이 자리는 우창 봉기 당시 ‘호북 군정부’가 수립되었던 자리로 동상 뒤에 보이는 건물은 현재 신해혁명 기념박물관이다.
쑨원을 중심으로 한 중국동맹회가 주축이 되어 신해혁명을 일으켰으나 혁명 성공은 오직 혁명당만의 힘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입헌파를 중심으로 신군, 화교, 회당을 비롯하여 구관료가 참여가 있어서 성공하였으므로 처음부터 철저한 혁명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혁명당 목표였던 삼민주의 이념 중 민족주의를 보더라도 ‘만주족을 축출하고 한족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는데 혁명 후 만주족 청 조정을 타도하기는 하였으나 곧 5족(族) 평등을 내세워 그 뜻이 약화했고 제국주의의 반식민지 하에 있는 중국 위상을 바꾸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쑨원은 혁명 성공을 목적하여 제국주의와 손잡고 청조 당시에 한 불평등조약을 그대로 인정하여야 했다.
그리고 민권주의는 우선 중국사 이래 전제군주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달성됐다고 간주할 수 있는데 특히 아시아에서 첫 번째이면서 평화스럽게 황제를 물러나게 하였던 점은 큰 의의가 있으나 마지막 황제를 향한 예우를 비롯해 소위 ‘황실우대조건’은 혁명 의의를 반감시켰다.
또한, 민생주의가 내세우는 자본의 절제와 지권의 평균 문제는 혁명운동을 시작할 때 이를 강령으로 제정할 당시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해서 혁명 후 삼민주의 이념을 실현하기란 더욱 어려웠다.
혁명 후 새로운 공화국의 임시대총통이었던 쑨원은 무엇보다도 평화스럽게 청 황제를 퇴위시키면서 중국 통일이라는 대명제를 실현하고자 스스로 그 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한 결과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한 구 관료가 그대로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주었고 혁명세력 약화를 초래해 ‘반쪽짜리 혁명’으로 전락해서 신해혁명이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공화제도를 이룩하였다 하여도 중국 사회와 경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은 한계가 있다. 즉, 신해혁명은 제국주의와 봉건 통치를 반대하는 기치를 내걸어 아시아 각국 민족 해방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나, 실상은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성을 근본으로 바꾸지 못했다.
논쟁
오늘날 분단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 학계와 중화민국 학계에서는 신해혁명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중국 공산당의 견해는 '자산계급 부르주아에 의하여 이루어진 혁명'이라고 하여 이를 구(舊) 민주주의 혁명으로 성격을 규정짓고 있으며, 나아가 최근에는 '신해혁명은 신사층이 자신의 보신을 위해 일으킨 단순한 정권 교체적 정변에 불과하다' 고 혁명의 의의를 낮게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국 공산당, 즉 무산계급 주도아래 성공한 공산주의 혁명을 내세울 수 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중화민국 학계와 중국 국민당에서는 중공이 신해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 폄하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반론을 내세우고 있다. 즉, 혁명의 중심이었던 쑨원만 하더라도 부르주아 출신이 아니라는 점을 들고 있다. 확실히 쑨원은 부르주아 출신이 아닌 농민 출신이며 그것도 중농이하의 가정 출신이었다. 그리고 혁명에 참여한 계층은 회당(會黨)을 비롯하여 신지식인, 화교, 신군(新軍) 등 중국의 모든 계층이 참여했기 때문에, 중화민국 학계에서는 신해혁명을 이른 바 '전민혁명'(全民革命)'으로 규정하였다. 이렇듯 중화민국 학계에서는 중국 공산당에서 주장하는 '구민주주의, 자산계급 부르주아 혁명'이란 설에 대한 반론으로 '전민혁명'을 내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