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 5:1~4 율법주의로 살면 어떻게 되는가?
(갈라디아서 5장)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묵상/갈 5:1-4)
◆ 율법주의의 정의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율법주의는 4절의 말씀처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주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율법주의를 지나치게 좁게 해석한다. 즉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만을 율법주의로 규정하고 그 이후의 삶이 율법주의로 빠지는 것은 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지적한 율법주의는 단순히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의 율법주의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은 자들이고, 구원을 기뻐하고 영생의 복을 감사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성령의 능력까지 체험한 자들이었다(갈 3:2-5). 그런데 이렇게 이미 구원받은 자들에게 왜 율법주의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일까? 이들이 복음적 삶의 방식을 버리고 유대적 삶의 방식으로 바꾸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를 보다 넓게 적용해야 한다. 단순히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만이 율법주의가 아니라, 그 이후의 신앙생활의 방식도 율법에 근거할 경우, 율법주의가 됨을 알아야 한다.
사실 율법주의는 너무나 그럴싸해서 사람들이 쉽게 미혹된다.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등의 계명을 들이밀면서 이런 것을 안 지킬 셈이냐라고 물으면 사람들은 당연히 지켜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마땅히 지켜야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미혹은 항상 그렇게 시작한다. 10퍼센트의 상한 음식을 먹이기 위해서 90퍼센트의 먹을만한 음식을 섞는다. 먹을 때는 문제 없어 보이지만, 결국 탈을 일으킬 것이다.
오늘날 상당수의 성도는 '율법주의'로 살면서도 본인은 그런 사실을 모른다. 왜냐하면 매일 율법주의 설교를 듣고, 율법주의 교인들과 어울리며, 수십 년을 그렇게 생활해 왔기 때문이다. 율법주의가 아닌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려면, 최근에 막 구원받은 성도들 정도일 것이다. 그들은 이제 막 구원받아서 예수님으로 충만하여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서 소위 베테랑을 자부하는 선배들에게 '율법주의'를 배워서 차가운 종교인으로 변모해 갈 것이다.
한국교회는 왜 이렇게 율법주의에 찌들어 있을까?
김태규 목사는 십일조 반대 운동을 펴는 분이다. 얼마 전에는 십일조가 성경적인지를 증명하는 자에게는 3,000만 원 상금을 주겠다고 공식 블로그까지 만들었다. 도대체 없는 살림에 공탁금까지 걸고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으니, 한국교회가 교인들에게 십일조 받기 위해서 그 근거를 찾으려니 율법을 도입하게 되고, 그 결과 성도들이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율법주의로 빠지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십일조가 한국교회 율법주의의 원흉이라고 했다.
그분은 젊었을 때 복음을 깨닫고 십일조 반대 운동을 펼치다가 동료 목사들에게 배척당하고 목회까지 접게 되었는데 그런데도 70세가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그 불꽃이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감탄이 나온다. 그분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자기의 젊음을 모두 바쳤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런 자를 감당하지 못한다.
이분은 헌금을 반대하시는 것이 아니다. 율법주의적 십일조를 반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든지 자기 수입의 몇 퍼센트를 헌금하겠다고 마음에 정할 수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이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을 들이밀면서 십일조를 강요하는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거부해야 한다.
◆ 율법주의의 유형
율법주의는 여러 유형이 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유형은 모세의 율법에는 도덕법도 있고, 제사법, 시민법도 있는데, 제사법, 시민법은 폐하여졌지만, 도덕법은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말 이런 주장은 너무나 그럴싸해서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율법은 613가지나 되는데, 그중에서 어떤 것이 도덕법에 해당하는지 구별해 내는 것은 힘들다. 예를 들면 이웃에게 빚 때문에 담보물을 잡으러 갈 때 그의 집에 들어가지 말고 밖에서 기다리라는 율법(신 24:10-11)은 도덕법인가, 아닌가?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신 25:4)는 명령은 무시해도 되는가? 사도 바울은 오히려 그 율법을 사역자들에게 적용했다(딤전 5:18).
일부는 그런 것을 다 무시하고 십계명만 잘 지키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십계명에서 '안식일'계명은 어떻게 지킬 것인가? 안식일은 본래 토요일인데, 아무 요일이나 잡아서 잘 지키면 되는가? 그렇다면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안식교를 왜 그렇게 이단시하는가?
어떤 분은 십계명에서 안식일 계명만 빼고 나머지는 다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당연히 지켜야 하지만, 이것은 빼고, 저것은 지켜야 한다고 구분하는 당신은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신은 성도가 율법에서 벗어난 존재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유대인이라면 그렇게 제멋대로 빼지 못한다.
우리는 당연히 십계명에서 명령한 것과 같이 간음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이 명령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이기 때문임을 인식해야 한다. 순종의 근거를 율법에서 찾으면 율법의 다른 명령도 똑같이 대해야 하는데,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난 자(롬 7:6)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우리의 성결의 기준을 율법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단순히 행위만이 아니라, 음란한 마음까지도 경계하게 되는 것이다.
성도들은 십계명을 포함한 모든 율법에서 벗어났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어겨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을 넘어서서 그 이면에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율법의 모든 계명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에 녹아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율법주의자들은 끝내 율법을 내려놓지 못한다. 어떤 명목으로든 붙잡고 싶어 한다.
그들은 복음이든, 율법이든 결국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은 똑같은데 왜 그렇게 율법주의를 경계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율법주의는 무엇이 위험한가? 라고 항의한다.
◆ 율법주의의 위험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율법에 각종 좋은 말씀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사도 바울도 부모를 공경하라(엡 6:1,2)든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고전 9:9)는 등의 율법을 자유롭게 인용하면서 성도들의 바른 생활을 가르쳤다.
그렇다면 율법주의의 위험은 무엇인가?
율법주의는 신앙생활을 종의 삶으로 몰아간다. 의외로 많은 성도들이 종교의 짐에 허덕인다.
율법주의는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복과 저주가 주어지는 삶이다. 아들로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거래하는 삶이다. 그의 순종의 동기가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십일조 안 바치면 저주받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바친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주의를 '종의 멍에'를 메는 것으로 규정한다(1).
또한 율법주의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한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그림자가 아니라 실체로 인식한다. 그 결과 율법 속에 나타나지 않은 용서와 겸손과 자비를 놓친다. 그러한 덕목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율법을 실체로 알게 되면 정작 율법의 완성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놓게 된다. 그림자를 붙잡느라고 실체를 놓치는 셈이다. 안식일이라는 날짜는 열심히 지키지만, 정작 그 날짜가 우리에게 주는 참된 교훈을 놓친다. 우상숭배는 하지 않지만, 자기 마음속의 탐심은 눈치채지 못한다. 간음하지는 않지만, 음란한 상상은 멈추지 않는다. 살인하지는 않지만, 매일 분노와 질투 속에서 살고 있다. 십일조는 열심히 하지만, 정작 어려운 형제를 보고는 무심하다. 그런데도 자신은 율법적으로 하자가 없으므로 의롭다고 착각한다. 율법주의로 오랫동안 생활한 사람들 안에는 그리스도가 없다. 그리고 자기를 자랑하고 싶어 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처럼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막 10:20)라고 하지만, 여전히 영생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눈은 율법을 넘어서서 그리스도께로 향해야 한다.
그분 안에 있는 사랑과 용서와 거룩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관용하고, 자비심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바울은 율법에 찌들고 살다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율법에 대해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을 터득했다.
율법주의의 세 번째 위험은 '은혜에서 떨어짐'이다.
율법주의로 살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메마르고 차가운 종교적 위선자가 될 것이다. 율법주의는 근본적으로 '자기의(self righteousness)'를 추구하는 삶이다. 노력해서 이것저것을 행하고 결국은 자기 공로에 도취한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자랑하는지 아는가? 율법주의로 살기 때문이다. 종종 끊임없이 자기 자랑하며 자아도취 하여 있는 사람을 만나면 대단해보인다. 그러나 은혜가 없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그들 자랑대로 훌륭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모르는 자다.
율법주의로 살면 '은혜'에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종교적 행위에 심취하여 점점 교만해지게 된다. 그 결과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이것저것을 함부로 판단하게 된다. 예수님이 기준이 되면 남을 판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도 예수님에 비해 한참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 같은 자를 용납하시는 것을 보고 나도 다른 사람을 용납하게 된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자기 의를 기반으로 하므로 자만하고, 함부로 정죄하며 한쪽으로는 멸시하고, 한쪽으로는 절망한다.
율법주의자들은 대단히 봉사도 많이 하고 매우 종교적이지만, 정작 형제 사랑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물론 사랑하는 척은 하지만, 중심은 고집이 세며, 메마른 종교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나의 노후의 모습이 이렇게 될까 염려한다.
율법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람들이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어떠했는가? 그들이 바로 율법주의의 전형이다. 겉모습은 금식, 구제, 긴 기도, 대단한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기와 질투, 그리고 각종 탐심으로 가득찼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마저 십자가에 못박았다.
오, 우리는 율법으로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신앙 생활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겸손하게 낮아지셔서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빌 2:5-8).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신앙 생활한다는 것이 너무나 추상적인가? 그렇다면 무릎 꿇고 주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려달라고 구하라.
복음에 대한 지식이 우리를 율법주의에서 건져주지 않는다. 우리 마음에 은혜가 임해야 하고, 주님의 마음이 임해야 한다. 우리가 무릎 꿇어야 하고, 겸손히 은혜를 구해야 하는 이유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게 나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는 믿음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주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당신이 있음으로 나도 있고
당신의 노래가 머묾으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 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이인숙 작사. 복음 성가)
[출처] 갈 5:1-4 / 율법주의로 살면 어떻게 되는가?|작성자 야곱
|
첫댓글 사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율법에 속한 십일조를 강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강조하지 않음에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