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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라파타르, 생애의 고지(高地)에 서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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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PAL HIMALAYA ; Sagramatha National Park
2017—[Khumbu Himal] EVEREST.B.C. TREKKING — (7)
▶ 2017년 4월 3일 (월요일) * [EBCT 제8일] - (2)
<포르체>→ <팡보체>→ <소마레>→ <딩보체>
* [평화롭고 따사로운 팡보체 마을] — 기진한 가운데 힘겨운 점심식사
오후 1시 30분, 산모롱이를 돌아 팡보체(Pangboche, 3,930m)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의 초입에는 자연석으로 쌓은 마니월(Mani Wall)이 있다. 마을의 골목으로 들어가 보니 여기저기 키 큰 향나무와 파란 하늘에 오색으로 펄럭이는 룽다르, 마을 집들을 지키듯이 서 있는 타르초, 파란 하늘을 향해 솟은 오색 타르초, 그 산뜻한 풍경은 이제 눈에 익숙하다. 마을은, 경사진 산록에 단계적으로 집을 지어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마을의 뒤쪽 산등성이에는 예의 하얀 스투파(Stupa)가 있고 거기에도 룽다르가 펄럭인다. 좁은 골목길, 마을 한 가운데 매우 규모가 큰 사원[Gompa]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분위기가 거의 우리나라의 사찰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유명한 팡보체 곰파이다.
팡보체 마을 입구의 마니월(Mani Wall)을 지나며
해발 3,930m 팡보체마을에 들다
팡보체 마을 <곰파 게스트하우스> 마당의 야외식탁 (완전 녹초가 된 상태)
백주의 침묵
팡보체 곰파(Pangboche Gompa)에 바로 옆, 마당 넓은 이층집, 해발 4,000고지의 ‘곰파 롯지 레스토랑’의 마당에 들어섰다. 실로 배가 엄청나게 고팠다. 그리고 거기에서 약 30분 이상이 지난 후에야, 이상배 대장을 비롯하여 기원섭, 이진애 신은영 대원 등이 모두 도착했다. 이 대장이 주문한 식단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사이, 김준섭 대원과 김미순 대원은 이곳을 지나쳐 앞서 나아갔다. 그래서 점심식사를 함께하지 못했다. 이것은 진행상의 문제였다. 선두에 가이드를 세워 모든 대원들이 한 곳에 집결하도록 해야 하는데, 동행(同行)의 대원들이 이산(離散) 되었으니 참으로 아쉬운 바가 컸다.
<오늘의 오찬>
뒤에 도착한 기원섭 대원과 두 여성대원은 모두 기진맥진이었다. 밝은 햇살이 내리는 잔디마당의 탁자, 의자에 무거운 몸들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힘겨운 고통의 길을 걸어온 것이었다. 인고(忍苦)의 시간, 아무도 한 마디 말을 하지 않았다. 말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네팔식 군만두와 삶을 계란 그리고 콜라 한 잔씩이다. 바싹 마른 입에 시원한 콜라만이 가슴을 쓸어내릴 뿐 만두와 계란은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그것을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살아야 하는 절박함으로 계란을 까고 만두를 씹었다. 입맛을 똑 떨어지게 한 고소증(高所症), 멀건 대낮 꾸역꾸역 눈물겨운 식사를 했다.
발랄하고 천진하게 놀고있는 <팡보체 아이들> ; 기진한 이방인들을 놀려대는 아이들을 카일러가 보고 있다
* [오후의 트레킹] — 팡보체 마을의 풍경, 인상적인 다랭이밭
오후 3시, 다시 산행(山行)에 들어갔다. 여기 팡보체(Pangboche)는 오늘의 여정(旅程)에서 3분의 1 정도 온 지점이니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마을 위의 산록, 크고 오래된 향나무 군락지를 지나 높은 언덕배기에 올라섰다. 팡보체의 전경(全景)이 한 눈에 들어왔다. 팡보체에는 윗동네와 아랫동네가 있다. 우리가 점심식사를 하고 지나온 곳이 윗동네이고, 아랫동네는 저 아래 임자콜라에 연해 있는, 낮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의 산비탈에는 계단식 다랭이밭이 펼쳐져 있는데 밭의 가장자리마다 돌담을 쌓아 구획을 만들어 놓았으므로, 그 돌담이 만들어낸 풍경이 아주 그림 같이 아름다웠다. 팡보체 윗마을은 곰파를 중심으로 한 옛 마을로 주로 밭농사를 짓는 집들이 있고, 포르체와 소마레 사이를 오가는 길목이다. 아랫마을은 텡보체에서 소마레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로 거의 롯지와 레스토랑이 있는 곳이다.
<팡보체> 윗마을 - 뒤쪽의 거대한 다부체피크 산허리에 우리가 걸어온 길이 실가닥처럼 아득하게 보인다
다랭이밭
<팡보체> 아랫마을 / 다랭이밭 아래에 임자콜라가 흐르고 있다
* [팡보체에서 만나는 산악인 엄홍길 이야기] — 그의 히말라야 인생 역정
언덕배기에서 조금 더 올라오니, 길목에 영문·한글표기가 곁들여 있는 표지판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엄홍길 휴먼스쿨’ 안내 표지판이었다. 여기서 5분 거리에 ‘엄홍길휴먼재단’이 설립한, 팡보체 4,000m 고지에 학교가 있다는 안내이다. 산악인 엄홍길 대장은 박영석 대장과 함께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산악인이다. (박영석 대장은 히말라야 8,000미터급 14좌를 한국 최초로 완등한 산악인으로, 2011년 안나푸르나 남서벽 개척등반에서 실종되었다.)
저 고갯마루 위에 학교가 있다 (길에서 5분 거리)
엄홍길(嚴弘吉)은 1960년 경남 고성에서 2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세 살 때 부모를 따라 의정부시 호원동 도봉산 망월사계곡으로 이사를 해왔다.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 그의 놀이터는 산(山)이었다. 고교시절에도 매일 같이 도봉산을 오르내렸다. 어린 시절 자연스레 배낭 멘 이들과 어울려 지내던 그는 양주고교 시절 바윗군들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산꾼이 되었다. 1979년 고교 졸업 후 그는 설악산에 들어가 ‘희운각대피소’에서 2년간 지내며 물품을 지어 날라주기도 하고 설악산 골짜기 골짜기를 누비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 특수부대인 해군수중폭파대(UDT)에 입대했다. 2~3일에 한 번씩 30kg이 넘는 짐을 지고 설악동에서 희운각대피소까지 걷는 생활을 2년여 한 데 이어, UDT에 들어가 매일매일 혹독한 훈련이 연속되는 수중폭파대원 생활 3년을 거치며 그의 몸은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히말라야 8,000m급 16좌를 등정한 산악인 엄홍길
엄홍길(嚴弘吉) 대장은 히말라야 8천미터 14좌(座)를 완등한 후에도, 로체샤르(8400m)와 얄룽캉(8505m) 등 로체(8511m)와 캉첸중가(8586m) 위성봉(衛星峰)마저 올라, 8,000미터급 16좌를 (세계 최초로) 등정한 산악인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그는 22년 동안 무려 38번의 도전을 감행했고, 그 과정에서 후배 6명과 셰르파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제 그는 오늘의 자신이 있기까지 희생을 하고 도와준 산악인과 셰르파들의 유족을 돕고, 그를 받아준 산(山)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팡보체의 엄홍길 휴먼스쿨] — 함께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중 사망한 술링(Suling Dordge)
엄홍길 대장은 2008년 5월 <엄홍길휴먼재단>을 발족하여 그와 함께 등반하다 사고를 당한 셰르파와 후배 대원들의 유족을 돕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그리하여 2008년 이곳 팡보체(Pangboche)에 <엄홍길휴먼스쿨>(UM HONGGIL HUNAN SCHOOL, 초등학교) 교사(校舍) 지어 문을 열었다. 네팔의 오지 마을 팡보체(3,950m)는 1986년 엄홍길 대장이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 중 조난사고를 당해 사망한 ‘술링 도르지 셰르파(Suling Dordge Sherpa)’의 고향이다. 목숨을 바쳐 엄 대장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도왔던 술링을 잊을 수가 없다. 팡보체에는 지금도 그 술링의 부인이 살고 있다.
2008년 팡보체 산록에 세워진 <엄홍길휴먼스쿨> 준공식
모든 주민 <카타>를 손에 들고 공경(恭敬)의 예(禮)를 표하고 있다
그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술링의 아내에게 적은 돈이지만 생활비와 애들 학비에 보태라고 주곤 했어요. 술링은 자신의 고향에 학교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늘 가슴 아파했어요. 그래서 사고 직후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학교를 지어주리라 마음먹었던 것을 23년 만에 실현한 거예요. 앞으로도 네팔 오지에 학교 짓는 일에 도움을 주고 싶어요. 휴먼재단은 그런 목적을 위해 여러 분들이 힘을 합쳐 만든 거예요.” 당시 이곳 팡보체에 학교를 세운 엄홍길 대장의 인터뷰 내용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때 자기를 도왔던 텐징 노르게이를 평생 잊지 못하면서 노르게이와 네팔을 위하여 오지 마을에 병원과 학교를 지은 에드먼드 힐러리처럼, 엄홍길도 네팔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헌신하고 있는 것이다.
엄홍길이 <휴먼스쿨>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 또, 셀파 술링의 아내를 위로하다
엄홍길은 “1985년부터 2007년 5월 31일 로체샤르(Lhotse Shar, 8,382m) 정상에 올라설 때까지 38번의 고산 등반을 하는 동안 실패와 성공, 좌절과 극복, 고통과 희생 등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것은 다 겪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모든 시험대를 통과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걸 거예요. 히말라야 눈 속에 잠들어 있어야 할 사람이 살아서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는 건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꼭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산에 다녔지만 나를 살려둔 건 분명 세상에서 뭔가 좋은 일을 하라는 산(山)의 메시지일 겁니다. 이제는 도전의 산에서 내려와 내 인생의 산(山)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제겐 그게 17번째 8천 미터 고봉이에요.”
* [팡보체 삼거리에서 소마레 가는 길] — 임자콜라를 따라가는 산록의 길
‘엄홍길휴먼스쿨’을 안내하는 표지판을 지나 높은 언덕에서 앞을 바라보니, 임자콜라(Imja Khola)의 협곡을 따라 우리가 나아가야할 산길이 벼랑의 산허리에 실처럼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길목에 우리의 경유지인 소마레(Shomare, 4,010m) 마을이 아득하게 바라다 보였다. 오늘 우리가 걷는 산허리길의 산체의 정상은 시야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다부체피크(Tabuche Peak, 6,495m)이다. 협곡의 상류에 솟아있는 아마드블람의 거봉(巨峰)은 하얀 구름에 휩싸여 그 진면이 보일 듯 말 듯 하였다. 마니월과 마니스토운이 있는 언더배기를 내려와 평탄한 길로 들어섰다. 이곳은 아직 이른 봄, 날씨는 아늑하고 순한데 산천의 초목은 아직 삭막한 겨울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마른 산록에 여기저기 마른 풀을 뜯고 있는 야크가 눈에 띄었다. 부드러운 워낭소리가 정겹다. 이곳 야크의 워낭은 워낙 커서 그 소리가 둔중하고 아주 부드럽다.
팡보체 고개를 넘는 무거운 발길
임자콜라 왼쪽의 산허리를 따라 가는 길 - 저 계곡의 절벽 위에 <소마레>가 보인다 / 오른쪽 위의 설봉이 구름에 싸인 아마드블람
짐을 잔뜩 싣고 말없이 홀로가는 소
이곳 사람들이 지고 다니는 짐, 잠시 받침대 놓고 쉬고 있다
여기서부터 <카일러>가 동행하며 셔터를 눌러준다 / 선두에 세 대원이 가고, 뒤에 이 대장과 세 대원이 오고 있다
팡보체 아랫마을로 가는 갈림길을 지나, 길은 계속 이어졌다. 오른쪽 임자콜라(Imja Khola)의 물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산허리 길이다. 발이래 허연 계곡의 물이 줄기차게 흐른다. 히말라야 계곡의 물은 희뿌옇다. 설산의 빙하가 녹아 흐르는 물이므로 석회질이 많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팡보체(Pangboche)에서 임자콜라 건너편에는 촐룽체콜라가 있다. 그 계곡 위의 산록을 타고 올라가면 밍보빙하의 언저리에 있는 '아마드블람 베이스캠프(B.C)'로 들어갈 수 있다. 팡보체는 아마다블람으로 들어가는 초입의 마을인 것이다.
벼랑 아래 <임자콜라>
뒤돌아본 <임자콜라>의 풍경 / 절벽 위에 팡보체 아랫마을 / 우리가 넘어온 오른쪽 높은 산길
산길은 비교적 평탄하게 이어져 나갔다. 길목에 자연석으로 쌓은, 오래된 마니월도 있고, 길가의 암벽에 불상과 진언(眞言)을 그려놓기도 했다. 이곳 쿰부히말은 독실한 라마불교도인 셀파족이 살고 있는 곳이므로 그들의 신앙심을 도처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길은 멀었다. 히말라야의 길은 빤히 보이는 데도 쉽사리 이르지 못한다. 구비를 돌면 다시 구비가 나오고 내려가는 듯하다가 급하게 오르막을 치고 오르는 길이 연속된다. 에베레스트나 로체 등 히말라야 거봉을 등정하기 위해서는 모두 이 길을 지나야 한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산악인들이 모두 이 길을 통해 그 베이스캠프로 들어간다. 집이 있는 길가에는 이곳 사람들이 짐을 올려놓고 쉴 수 있는 돌단이나 나무 받침대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의 짐을 싣고 가는 네팔친구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임자콜라와 그 벼랑에 보이는 산길로 이어지는 곳에 팡보체 아랫마을의 집이 아득하게 보이기도 했다.
* [돌이 많은 소마레 마을] — 해발 4,000고지를 넘다
오후 4시 16분, 해발 4,010미터 고지의 소마레(Shomare) 마을에 진입했다. 소마레는 롯지와 상점, 식당이 있는 마을로 완전히 돌투성이 마을이었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계단이나 길은 모두 돌이 깔려있었다. 하루 종일 걸은 피로감, 무거운 다리가 더욱 팍팍하고 아팠다. 가파른 계단의 소마레 마을길을 올라가 언덕배기에 올라섰다. 돌아보니 지나온 임자콜라 계곡의 산허리 길이 아득하게 보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물을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김장재 대원은 진즉에 가버렸고, 팡보체에서부터 앞서 간 김준섭, 김미순 대원도 보이지 않았다. 완보의 대원들과 함께 오고 있는 이상배 대장 등, 뒤에 오는 대원들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이번 트레킹은 사람마다 걸음걸이가 다르고 성향이 달라서, 같은 속도로 함께 걸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필자는 앞서가는 대원을 따라잡고 싶은 생각과 뒤에 오는 대원들과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의 중간에서 속도를 조절하며 트레킹을 하고 있는 중이다. 결국 그렇게 해서 ‘혼자서 걷는 인생길’이 되었다. 몇 걸음 뒤에서 카일러가 따라오고 있었다.
해발 4,010m 고지의 소마레(Shomare)에 들어서다
* [소마레 언덕에서 오소레 갈림길] — 몰려오는 구름 차가운 바람
오후 4시 30분,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짙은 운무가 하늘을 뒤덮어 오고 있었다. 오후가 깊어지면 악천후로 돌변하는 히말리야 특유의 날씨가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머리 위의 하늘과 원근의 산들은 모두 운무 속으로 잠겨 버렸다. 다행히 언덕배기를 내려가니 광활한 평원이 펼쳐지고 길은 아주 평탄했다. 산과 혐곡의 사이의 마른 잔디가 깔린 평원(平原)이었다. 짙은 운무가 주변의 높은 산들을 다 뒤덮어버렸으나 고원의 길은 고즈넉했다. 더구나 이 시간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이다. 카일러가 저만큼 앞서 가고 있다.
소마레 고갯마루 - 짙은 안개가 엄습하고 기온이 내려가고 있다
조용히 혼자서 길을 걷는다. 담담한 마음으로 말없이 걷고 걸었다. 인생은 어차피 혼자서 가는 여정이 아닌가. 세상에 살면서 가족이나 친구가 있어, ‘삶’이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동행을 하고 있지만, 존재(存在)가 지향하는 방향은 각각 다른 것이니, 산다는 것은 결국 홀로 가는 길이다. 호젓한 마음에 한국의 가족을 생각했다. 집을 떠나온 지 8일이 넘었다. 지금 한국은 여덟 시 가까운 저녁 시간이다. 생각하면, 가인(家人)은 일생을 통하여 언제나 고마운 사람이고, 소생(所生)의 아들과 딸들, 마음씨 착한 며느리와 사위, 그리고 눈에 삼삼 보고 싶은 지윤과 영민이, 지난해 11월 첫돌을 지나고 요즘 막 걷기 시작한 연서가 눈앞에 꼬물거리고 있다. 그리고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지인과 친척, 친구들을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음의 동행이다. 그러고 보니 인생은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다. 함께 가는 길이다.
숨이 턱에 차 올라서
평원의 가장자리, 계곡 가까이에 창고처럼 생긴 롯지를 지나간다. 여기는 해발 4,190m의 오르소(Orsho) 평원이다. 롯지에는 ‘Sunset House’라고 적혀 있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적막강산이다. 그래도 운무(雲霧)가 뒤덮어 오는 하늘 아래에서, 만나는 집 한 채가 위로가 된다. 아주 완만하게 올라가는 평원 길을 오른다. 사실 몸은 무겁고 숨이 턱을 치고 있다. 고소증세가 온몸을 휘감고 있는 것이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보니 짙은 안개가 평원에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한 떼의 야크들이 많은 짐을 싣고 다가오고 있다.
4,190m의 오르소(Orsho) 평원의 롯지 <Sunset Guest House>
그렇게 힘겹게 오르다 보니 해발 4,192m ‘삼소옥마(Samso Ogma)’, 거기서 얼마 가지 않아 갈림길이 나왔다. 바윗돌에 낙서처럼 스프레이로 써놓은 것이 ‘이정표’이다. 좌측의 화살표가 ‘Pheriche’,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는 화살표가 ‘Dingboche’이다. 따라오는 여러 마리의 짐 실은 야크떼는 페리체 방향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페리체(Pheriche)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가는 메인로드,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딩보체(Dingboche)이다. 딩보체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EBC] 메인로드에서 벗어나 있으나, 길은 결국 투클라(Thukla)에서 합류한다. 우리는 고소적응을 위해 딩보체에서 이틀을 보내기로 예정되어 있다.
자연석 바위 위에 페인트로 쓴 <이정표> - 페리체(PHERICHE)와 딩보체(DHINGBOCHE)의 갈림길
페리체 길은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로 들어가는 메인로드 (우리가 귀로에 내려오는 길이다)
딩보체는 우리의 유숙지- 딩보체에서 2박을 하며 고소적응을 한 후 페리체 위의 투글라에서 이 길에 합류한다
페리체 패스(고개)를 오르는 야크의 행렬
딩보체 가는 길 / 길 아래 야크카르가(Yak Kharka) ; 카르카는 야크 방목장을 말한다
* [오늘의 기숙지 딩보체 가는 길] — 야크카르카, 페리체 계곡, 다시 가파른 오름길
오늘 우리의 트레킹의 목적지는 딩보체(Dingboche, 4,410m)이다. 카일러가 저만큼 앞서서 걷고 있으니 든든한 길라잡이다. 발아래는 여러 개의 돌담으로 구획된 야크카르카(Yak Kharka)가 펼쳐져 있다. 야크카르카는 야크(Yak)를 기르는 방목장이다. 산길으 아래에는 돌판으로 지붕을 이은 작은 집 한 채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한 곳의 너른 돌담 안에는 여러 마리의 야크가 유유히 풀을 뜯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길은 임자콜라의 협곡 산허리 길로 아득하게 이어져 있었다. 길은 멀었다. 산소가 부족하여 생기는 고소증으로 가슴은 답답한데, 허기진 몸은 천근이요 다리는 단단하게 굳어져서 팍팍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인생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걷고 걸어야 한다. 지금은 오직 걷는 것만이 진리일 뿐이다.
뒤돌아본 야크카르카
자욱한 운무(雲霧)가 천지를 어둡게 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 시각이다. 해는 저물고 갈 길이 아득한 길, 가무잡잡한 얼굴에 흰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카일라가 여간 정겹지 않았다. 지나가는 길목에 돌담으로 둘러쳐진 아담한 집이 있었다.
오후 5시 20분, 두 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이르렀다. 왼쪽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두클라-펠리체에서 내려오는 계곡이요, 오른쪽은 임자체(아일랜드 피크) 등의 빙하에서 발원하는 임자콜라이다. 우리의 목적지 딩보체(Dingboche)는 임자콜라 가까이에 있는 마을이므로 펠리체 계곡의 철다리를 건너 다시 임자콜라의 산록의 벼랑을 타고 올라갔다. 날이 저물고 안개가 자욱하여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지도상으로 보면 임자콜라 바로 동쪽의 건너편으로 아마다블람(Ama Dablam)이 보이는 지점이지만 안개가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배는 고프고 날은 저무는데, 오늘으 도착지는 그냥 오리무중이다. 이런저런 정황이 참으로 무겁고 답답했다. 이상배 대장이 배행을 하고 있지만, 뒤에 오는 대원들이 걱정이 되었다. 계곡에서 다시 가파르게 오르는 산길은 참으로 죽을 맛이었다. 평소 산에 오르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죽을 맛’이라는 표현은 쓴 적이 없다. 그것은 스스로 맥 빠지게 하는 금기어인데, 나도 모르게 그런 자탄(自嘆)이 스멀거리며 기어나왔다. 뒤에 오는 대원들은 얼마나 힘들까. 걱정스러웠다. 거구의 기원섭 대원과 이진애-신은영 두 여성대원의 상태가 어떤지 궁금하고 안쓰러웠다.
짙은 운무가 밀려와 시야를 가리다 - 철다리 건너 다시 올라가야 할 아득한 고갯길
에베레스트 쿰부빙하에서 내려와, 페리체를 경유하는 계곡의 물이 오른쪽 임자콜라에 유입되고 있다.
*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딩보체] — 악천후에 땅거미가 길목에서
산록의 고갯길은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는데 사위(四圍)는 완전히 운무에 휩싸이고 작은 빗방울까지 이마를 때리기도 했다. 저녁때가 되면 닥쳐오는 히말라야 악천후이다. 기온도 급강하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앞에는 고개를 넘어가는 두 아낙이 있었다.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며 걷고 있는데, 한 여인은 아기를 업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걷는 두 여인은 늘 하는 일상처럼 여유가 있고 여간 자연스럽지 않았다. 길 양쪽에 돌탑이 있는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카일러가 “딩보체!” 하며 손가락을 가리키는데 오리무중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한 마디 외침이 밝은 구원의 목소리처럼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조금 내려가니 뿌연 시계(視界) 속에 한 롯지의 건물이 눈이 들어왔다. 돌집으로 지은 파란색 지붕에 흰 글씨로 ‘PEACEFUL LODGE’이라고 쓴 집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서 몇 채의 집을 지나 우리의 숙소에 도착했다. 돌담 안에 ㄱ자로 된 건물이 딩보체 <AMA DABLAM LODGE>였다. 참으로 멀고 먼 험난한 여정(旅程)이었다. 날은 이미 저물었다. 어슬어슬 한기(寒氣)가 들기 시작했다. 기온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계곡을 건너, 가파른 경사의 길을 오르다 - 숨이 턱에 차는 고갯마루
해는 지고 짙은 안개가 몰려온다 / 고소증으로 무거운 몸, 숨이 턱에 차올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 드디어 저기, 마을, 안개 속에 집이 보인다!
오늘 우리의 유숙지 딩보체 마을의 <아마드블람 롯지> (해발 4,410m 고지)
미리 도착한 네팔 친구들의 따뜻한 영접
* [딩보체 아마다블람 게스트 하우스] — 캄캄해진 날, 후미의 대원을 마중나가다
오후 6시, 딩보체(Dingboche, 4,410m) 롯지의 돌담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네팔 친구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우리의 무거운 짐을 지고 먼저 도착한 그들이다. 따뜻한 마음이 고맙고 감동스러웠다. 롯지의 식당으로 들어가니 앞서 온 대원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저 늘어져 앉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먼저 온 김장재 대원이 밥을 짓고 된장찌개를 끓여서, 김준섭, 김미순 대원 등이 이미 식사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몸은 지치고 고소증으로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김준섭 대원 등이 난로 위의 찌개를 가리키며 빨리 식사하기를 권했다. 그런데 배낭을 벗어놓은 카일러가 서둘렀다. 뒤에 오는 이(李) 대장과 대원들을 마중을 나간다는 것이었다. 이것저것 옷가지를 챙기고 랜턴을 준비한다. 그렇잖아도 나 또한 이 대장을 비롯한 후미의 대원들을 걱정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카일러의 그 마음이 여간 고맙지가 않았다. 나도 방한복을 챙기고 랜턴을 준비하여 따라 나섰다. 나만 따뜻하게 밥을 먹고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안개 끼고 금방 캄캄해진 밤, 카일러와 둘이서 롯지를 나섰다. 밤이 되면서 기온이 급강하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길, 조금 걷다가 카일러가 자기가 먼저 가 보겠다며 질주해 나갔다. 조금 전에 아프게 올라왔던 고개를 넘어 안개 속에서 서둘러 걸었다. 랜턴을 밝히고 한참을 내려갔다. 얼마를 갔을까. 어두운 안개 속에서 기원섭, 이진애, 신은영 등 우리 대원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다행스럽고 반가운 마음, 감격이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다들 몸이 무겁고 다리가 천근(千斤)일 것이었다. 이상배 대장도 뒤를 이어왔다. 어쨌든 모두 무사히 올라와서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함께 롯지로 돌아왔다. 저녁 9시가 다 되었다.
아, 오늘의 긴 고행(苦行)의 하루가 끝났다. 여기는 해발 4,410고지의 딩보체(Dingboche), 오늘 아침 8시 포르체를 출발하여 팡보체와 소마레를 경유하여 페리체 계곡의 다리를 건너서 아득하게 올라온 길고도 험난한 여정이었다. 오늘은 하루 고도 600m를 올린 것이다. 이진애 여사는 식사도 하지 않고 배정된 방에 가서 누워버렸다. 고소증과 피로감에 휘말린 듯했다. 모두가 다 그렇지만 엄청나게 힘든 하루를 보낸 것이다. 롯지의 식당은 난로가 따뜻했다. 허겁지겁 식사를 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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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갔다온 것이 벌써 먼 옛날 같은데.....
새로이 생생하게 몸으로 그때를 느끼며 숨 죽여 담숨에 읽어내려갑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