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포 서일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총재를 알게 된 것은 2009년 12월 13일 백포 서일의 사상과 독립운동 이라는 학술좌담회에서였다. 처음 듣는 이름이라 생소하였지만 발표와 토론을 통해 예사로운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으며 그때부터 서일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서일은 교육자이며 애국계몽운동가요, 종교지도자이며 철학자요, 군사전략가이며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독립운동사에서 그의 공적은 묻혀있어서 일반인들은 이름조차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 원인을 나름대로 생각해보면 그의 출생지가 함경북도 경원으로 북한에 위치해 있고, 광복 후에 그의 후손들은 중국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뒤늦게 후손들이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할아버지의 위대한 업적을 밝힐 여력도 없어 아직도 서일 총재는 무후선열로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 모셔져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원인은 연구자들이 서일에 대한 관심이 없고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오히려 서일 총재의 수하 장령이었던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등의 업적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 항일무장투쟁사의 중심이었던 서일 총재의 업적은 가려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일은 청소년시절 애국심이 강하고 국경문제 전문가인 학음 김노규 선생과 함경도지역에서 근대적인 애국계몽운동가이며 경성에 함일학교를 세운 신포 이운협 선생으로부터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통한 애국심과 학문적 소양을 갖추게 되었고, 대종교 중광교조 홍암 나철과의 만남으로 크게 감화를 받아 대종교 포교를 통한 항일무장투쟁의 거점을 마련하면서 삼일철학을 사상적으로 체계화 하였다.
그는 일찍이 교육 계몽운동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와 단군민족정신을 항일무장투쟁의 원동력으로 삼고,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고 이 땅에서 일본을 몰아낼 수 있는 길은 전쟁밖에 없다는 굳은 신념으로 10년 동안에 걸쳐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고 키워왔으며, 1920년의 한일전을 주도하였다.
서일이 주도한 간도 한일전의 승리는 조국광복을 위한 대일무력투쟁 지도자들에게 많은 용기를 주고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을 열어준 쾌거였으며, 서일을 중심으로 준비한 대일항쟁의 첫 결과였다. 그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때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병력양성, 군자금 모집, 무기 확보 등을 성공적으로 준비하여 당시 세계 최강 일본군과 싸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연구는 이에 대한 과정은 무시하고 단순하게 청산리전투만을 가지고 간도전역(間島戰役)을 포장하고 있어 대일항쟁사를 바로 아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서일은 짧은 일생을 살면서 오로지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살신성인한 인물이었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기사를 보아도 알 수 있으며, 그의 애국 애
족하는 숭고한 정신은 마땅히 오늘에 되살려야 할 것이다.
첫댓글 선조들의 피 값으로 누리는 안락과 부가 오늘날 젊은이들을 오히려 무능하게 만들었으니, 제 정신 차리지 않으면 도로 타국에 먹히거나, 물질의 노예로 살게될 것임.
https://www.jabo.co.kr/39666 중국 절강월수외대에 한류바람을 불어넣은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