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군국화(軍國化)
메이지시대(明治時代)
메이지 정부는 근대화정책과 중앙집권화정책을 실시하고, 부국강병(富国強兵) 및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를 위해 메이지 정부는 영주적 토지소유제를 폐지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유상 분배하였으며, 지조개정(地租改正)2)을 통해 국가재정을 충실히 다져갔다. 또한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해외에 견물사절단과 유학생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였으며, 서양 기술자들을 초빙하여 서양의 근대화된 제도와 과학기술을 도입하고 습득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서구의 과학문명이 도입되면서 자유주의 사상이 유입되어 1870년대 중반 이후 자유민권운동과 입헌주의적 헌법 제정, 국회 개설 요구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1880년대 이후 내각제도(1885), 관료제도, 경찰기구 정비, 교육제도 개혁, 지방제도 제정을 추진했고, 1889년 메이지헌법(대일본제국헌법)이 제정되어 공포되었다. 메이지헌법은 독일 프로이센의 헌법을 모델로 한 것으로, 국가의 최고 권한을 천황에게 귀속시켜 천황을 절대군주이자 유일 주권자로 규정한 흠정헌법(欽定憲法)이었다.
그러나 1890년부터 일본의 국회는 귀족원(貴族院)과 중의원(衆議院)의 양원제로 운영되었고, 제한선거로 선출된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중의원에 입법권과 예산심의권이 주어져 입헌군주제적 요소도 강했다. 이러한 요소는 정당간의 정책 경쟁을 전개하고 국회의원 선거 결과에 따라서 국회 내에서 내각을 구성하고 정책을 실행해 가는 의회민주주의 발달의 기초가 되었다.
메이지 정부의 부국강병과 근대화정책은 의회 내의 민권파 계열인 야당의 반대와 재정적 궁핍으로 원활하게 추진되지 못했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계기가 된 것이 청일전쟁(1894년)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1895년 대만을 식민지화해 막대한 배상금을 받게 된다. 메이지정부는 이 보상금으로 군비를 확충하고 산업설비를 도입하였으며, 서구 열강과의 대외 무역 거래에 필요한 금본위제 실시에 필요한 기금을 충당하였다. 이것은 일본이 세계 자본주의 국가의 일원이 되고 자본주의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1902년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영일동맹(英日同盟)을 체결하고, 1904년에는 만주 지배권과 조선의 지위에 대한 우선권을 놓고 러시아와 전쟁을 개시했다.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은 러일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지역에서 제국주의 강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일본 근대공업의 발달은 1900년을 전후해 제사업(製糸業)과 방적업을 중심으로 본격화되었다. 이들 분야의 공업화는 당시의 낮은 인건비를 활용하여 중국, 한국에 쉽게 수출되어 생산 확대가 이루어져 단기간 내 국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청일전쟁(日清戰爭, にっしんせんそう)과 러일전쟁(日露戰爭, にちろせんそう)5)을 거치면서 군수산업과 해운조선업도 급속히 발전했으며, 광업면에서는 석탄과 동 생산이 활발했다. 또한 국내와 해외 식민지의 철도 가설이 확대되면서 철도산업도 급격히 성장했다.
다이쇼시대(大正時代)
1911년 메이지천황의 뒤를 이어 다이쇼천황(大正天皇, たいしょうてんのう : 재위 1912~26년)이 등장했다. 이 시기의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군사력과 군비산업이 비약적으로 확충되었고, 만주를 유효하게 지배하고, 한반도, 대만을 식민지화함으로써 생산 활동과 경제 규모는 급격히 커졌다. 그러나 막대한 전비 지출과 해외 공략에 따른 재정 지출이 급증하면서 국채와 외채는 누적되고, 국민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1914년까지 일본 경제는 만성적인 불황에 가까웠다. 이러한 시기에 방적업과 은행업등의 합병에 의해 자본 집중이 진행되었고, 제분·제당·비료·석유 분야에서는 카르텔이 결성되었다. 이에 힘입어 미쓰비시(三菱, みつびし)·미쓰이(三井, みつい)·스미토모(住友, すみとも)와 같은 기업이 재벌기업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침체된 경제를 회생시킨 것은 유럽에서의 1차 세계대전이었다.
일본의 대외 수출은 3배로 늘어났고, 공업 생산액은 5배로 증가하였으며, 경공업 분야와 함께 제철·기계 제작과 같은 중공업도 발전했다. 그 결과 일본은 무역 흑자국이며 채권국이 되었다. 또한 서구 열강이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일본은 중국에 대한 침략을 더욱 본격화해 연합국으로 참전했던 일본은 동맹국 독일의 중국 이권까지도 차지해 버렸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군비 증강과 중국에 대한 침략 진출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은 1920년대 들어 경제 규모의 확대와 교육의 확충으로 전국적인 사회·노동·농민운동이 전개되었고, 도시 중간층들에 의한 자유주의적 민주정치 요구도 증가하였다. 1925년에는 25세 이상의 남자에 한해 보통 선거법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을 배경으로 정당활동이 활발해졌고, 정당 간의 경쟁으로 내각이 교체되는 정당정치가 발달했다(다이쇼 민주주의라는 의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함).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재벌과 결탁한 정당들의 부정부패가 증가하고 전후 경기가 급격히 후퇴하면서 금융공황도 발생해 정당 정치의 무능함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이 거세져갔다.
다이쇼시대(大正時代, たいしょうじだい : 1912~26)를 중심으로 일본의 정치·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민주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사회를 지향하려고 하는 운동과 풍조가 나타났다. 이것을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한다. 이 풍조의 배경에는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있었던 자유와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세계적인 움직임과, 일본 국내에서는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도시 중간층과 무산계급이 성장하였고 그들이 정치적, 시민적인 자유를 추구하게 된 점을 들 수 있다.
그 내용은 보통 선거 제도와 언론·집회·결사의 자유에 의거한 의회중심의 정치, 중국과 조선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중지, 단결권·파업권등 사회권의 승인, 남녀동권, 대학의 자치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1925년에는 보통 선거법이 실현되었고, 자연주의와 시라카바파(白樺派, しらかばは)와 같은 문학사조, 세이토샤(青鞜社, せいとうしゃ)의 여성 해방 운동이 전개되는 성과를 올렸지만, 세계공황에 따른 불황의 여파 가운데서 일본은 데모크라시와는 반대 방향인 군국주의의 길로 나서게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군국주의시대(軍國主義時代)
1920년대 후반부터 경제 혼란과 정당 정치의 부패로 정치 혼란이 거듭된 일본 사회에 1929년의 세계공황의 여파는 일본 경제에 심각한 위기를 야기시켰다. 물가 하락, 수출 격감, 기업 도산, 농산물 가격 하락, 소작쟁의의 격증 등으로 일본 경제와 사회의 혼란은 격화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군부는 1930년대 들어 정당 내각의 의사와 상관없이 단독행동으로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켰다.
그 결과 일본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미국·영국과 진행하던 해군 군축회의에서도 탈퇴했다. 만주사변을 전후해 일부 청년 장교들에 의해 부패정치를 개조한다는 명목으로 군부 독재 정권 수립을 기도한 쿠데타가 두 차례(3월 사건·10월 사건) 시도되었고, 수상이 암살되는 등의 정치 테러가 발생해 정치 혼란은 심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군부의 정치 개입은 증가했고, 1936년에는 군부 내의 주도권을 둘러싼 대립 과정에서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2·26사건)가 발생했으며, 그 처리 과정에서 군부가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의 정치 구도는 군부가 전면에 나타나는 군국주의(軍國主義)체제로 전환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日中戰爭)의 발발로 일본 경제는 계획경제 및 통제경제체제로 전환되었으며, 1938년에는 국가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만주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의 일본의 지위를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시작된 중일전쟁은 당초 일본이 예상한 것보다 장기화되어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중국인들의 반일저항이 거셌는데, 이는 미국·영국·프랑스가 중국 국민당 정부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한편 유럽에서는 1938년 9월 나치독일의 폴란드 침입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1940년 6월에는 파리가 독일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유럽에서 독일의 승리가 계속되자 일본 군부는 독일 및 이탈리아와 손을 잡고 남진해 미국·영국·프랑스의 중국 지원 루트인 베트남을 점령하고 동남아시아로 진출하여 전략 물자를 확보할 것을 주장하였다.
1940년 9월 일본은 독일·이탈리아와 함께 3국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프랑스 식민지인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입하여 점령한다. 또한 동남아시아 침략을 거행하면서 북방의 위협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1941년 4월에는 소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 독일이 소련을 침입하자, 일본 육군을 중심으로 대 소련 공격 주장이 제기되었다.
한편 일본 정부는 1941년 4월부터 만주 및 중국에 대한 일본의 배타적 지배권 인정과 관련해 미국과 협상 중이었다. 그러나 7월에 일본이 남부 베트남을 점령하자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고무 등의 전략 물자 수출을 전면 금지했고, 미국 내 일본인 자산의 동결과 대일 협상에서도 강경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이에 일본은 1941년 12월 1일 천황이 주재한 어전(御前) 회의에서 전략 물자 확보를 위한 말레이반도 침략과 미국의 태평양 함대 전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진주만 기습을 결정함으로써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의 패전을 계기로 일본은 열세로 돌아섰고,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広島, ひろしま)와 나가사키(長崎, ながさき)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또한 8일 소련의 대일 참전이 결정되자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 규정한 항복 조건을 무조건 수용하면서 연합국에 항복하였다.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広島)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파괴된 건물. 원폭의 피해를 상징하는 건물로서 보존되고 있다.
1930년대에 일본에는 두 개의 쿠데타 사건이 일어났다. 모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나 결과적으로 군부의 힘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은 결국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932년 5월 15일, 해군의 청년 장교들이 수상관저, 경시청, 일본은행, 세유카이(政友会, せいゆうかい) 본부 등을 습격해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いぬかいつよし) 수상을 살해했다. 변전소를 습격해 도쿄를 암흑의 세계로 만들거나, 계엄령 선포를 통해 군부가 직접 정치를 움직이는 체제를 만들어 국가 개조를 하려고 했던 애초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의회의 다수정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정당 정치는 사라지고 군부 주도의 정치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5·15사건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1936년 2월 26일 육군의 청년 장교들이 1500명의 병사들을 동원해 수상관저와 경시청 등을 습격해 일부 각료들을 살해하고 도쿄 중심부를 점거했다. 반란군의 목적은 천황과 직결된 정치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사건 초기에 반란군에게 호의적이었던 육국수뇌도 해군과 재계의 반대 움직임을 보고 방침을 전환해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육군의 힘을 강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이 사건을 2·26사건이라고 한다. 두 사건 모두 일본 국내의 경제 혼란, 사회운동의 대두, 퇴폐적 풍조 등에 위기감을 느낀 군부와 우익세력이 정당 정치를 폐지하고 천황 중심의 정치를 실현하려고 한 것에 공통점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일본의 근대 [近代] (사진 통계와 함께 읽는 일본 일본인 일본문화, 2011.9.5, 다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