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달도(山達島) 당골재산(235m)
산 행 일 : ‘19. 6. 29(토)
소 재 지 : 경남 거제시 거제면 산달도
산행코스 : 산달도 연륙교→산후마을→해오름정자→당골산→할목재→신전마을→연륙교 원점회귀(소요시간 : 1시간 30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거제도에 딸린 섬 가운데 칠천도와 가조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섬이다. 섬의 크기순으로 연륙교가 놓였는데 이곳 산달도는 2018년 9월에 개통됐다. 섬을 둘러볼 수 있는 방법은 등산과 둘레길 트레킹 등 두 가지로 산후마을에서 출발하여 세 개의 봉우리를 넘어 산전마을에 도착하는 산길은 대략 3.5km로 2시간 정도면 걸을 수 있고, 섬 해안 둘레길도 길이는 7km쯤 되지만 2시간이면 걸을 수 있다. 하지만 둘 모두 특별한 볼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 전국에 있는 모든 산을 다 올라볼 요량이 아니라면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겠다는 얘기이다. 참고로 산달도의 원래 이름은 ’삼달도‘였다고 한다. 달이 뜨면 북쪽의 당골산과 가운데 뒤뜰산, 남쪽의 건너재산 등 섬에 있는 3개의 봉우리가 함께 비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현재의 이름인 ’산달(山達)‘은 한자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이름이지 싶다.
▼ 산행들머리는 산달삼거리 주차장(거제시 거제면 법동리 177-6)
통영-대전고속도로 통영 IC에서 내려와 14번 국도를 타고 거제도로 들어온다. 신거제대교를 건너자마자 1018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내려오면 오래지 않아 소랑삼거리(거제면 소랑리 산 64-2)에 이른다. 우회전하여 ‘산달연륙교’를 건너면 산달삼거리가 나오는데 오른편에 주차장이 있다.
▼ 버스에서 내리자 ‘산달연륙교(山達連陸橋)’가 환영의 손짓을 보내온다. 거제면의 법동리와 산달도(산전리)를 잇는 다리인데 ‘창선·삼천포대교’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오목조목 다듬어진 연륙교의 모습이 나름 운치가 있다. 산달도는 지난해(2018년 9월 20일)까지만 해도 차도선이 오가던 ‘섬 속의 섬’이었다. 그러다가 길이 602m의 저 사장교(斜張橋)가 놓임으로써 본섬인 거제도와 연결됐다. 그렇다면 연륙교(連陸橋)가 아니라 연도교(蓮島橋)라고 하는 게 옳을 수도 있겠다.
▼ 산후마을로 향하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연륙교 아래 방향으로 난 도로를 따르면 된다. ‘산달도 회주도로’로도 불리는 이 도로는 섬을 한 바퀴 돌면서 산후, 실리 산전마을을 지난다. 해안선을 따라 난 도로의 길이는 대략 8km, 마을을 순회하는 버스가 운행된다고 했으나 눈에 띄지는 않았다.
▼ 건너편에는 거제도가 버티고 있다. 산달도와 거제도를 나누어 놓은 바다는 낚시꾼들의 놀이터라고 한다. 아니 산달도를 둘러싼 바다 전체가 감성돔과 도다리, 볼락 등이 많이 잡히는 황금어장이란다.
▼ 10분쯤 걷자 산후마을이 나타난다. 마을표지석이 보이는가 싶더니 반듯하게 지어놓은 화장실도 보인다. 옛 선착장에다 안내문까지 붙여놓았을 정도로 깔끔하면서도 널찍한 화장실이다. 참! 산행을 하면서 흘린 땀을 닦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것도 기억해 두자.
▼ 잠시 후 정자가 지어진 포구에 이른다. 포구라고 해봐야 한 줄로 쌓아놓은 방파제가 전부였지만 말이다.
▼ 부둣가에는 굴 껍데기가 산처럼 쌓여있다. 길 서툰 나그네가 패총(貝塚, 조개무지)으로 오해하기 딱 좋을 정도로 그 부피가 크다. 하긴 인류가 식료로서 조개를 채집한 다음 조갯살을 섭취하고 식용할 수 없는 조개껍질(貝殼)을 폐기하면서 형성된 일종의 쓰레기더미가 패총이니 다를 게 뭐 있겠는가. 이곳 산달도의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아주 오래전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패총이란 생활유적을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산달도 전등패총은 신석기시대 유물로 1970년 처음 출토됐는데 신석기시대의 토기와 유사한 태토를 가진 무문토기편 등이 나왔고 후등 패총에서는 융기문토기, 단도토기 등이 출토됐다.
▼ 산길은 방파제의 반대편으로 열린다. 들머리에 방향표시가 된 ‘산후마을(등산로 입구) 안내판’을 세워놓았으니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산후마을에 대한 이야깃거리라도 적혀있나 하고 안내판을 살펴봤으나 뜬금없이 산달도에 대한 설명만 잔뜩 늘어놓고 있다. 섬에 소토골산과 뒷들산, 건너재산이라는 3개의 산이 있는데 그 사이로 달이 솟아오른다고 해서 ‘삼달’이라고 불러오다가 약 400년 전 이 섬에서 정승이 태어난 뒤부터 ‘산달도’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안내판은 또 섬에서 발견되었다는 패총에 대한 설명과 함께 소를 키우던 목장과 우군수군절도사의 수영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얘기 등도 적고 있었다.
▼ 첫 번째로 만나는 삼거리에서는 왼쪽, 두 번째는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첫 번째는 또렷한 길을 선택하면 되고, 두 번째 갈림길에는 이정표(당골재→ 735m/ 산전마을↑ 2.4㎞/ 산후마을 등산로입구↓ 160m)가 세워져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 탐방로 주변은 펑퍼짐한데다 경계용 담장까지 쳐져 있는 것이 영락없는 경작지다. 하지만 어느 하나 농작물이 심어지지는 않았다. 묵밭으로 변해있는 것이다. 웃자란 잡초와 칡넝쿨 등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하긴 대부분의 주민들이 일거리가 많기로 소문난 굴 양식에 매달리다 보니 밭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키우고, 수확하고, 알을 까고, 패각을 처리하느라 오죽이나 바쁘겠는가.
▼ 등산로는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잡목과 잡초들을 탐방객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을 만큼 잘 정리되어 있고, 경사가 가파른 곳에는 어김없이 통나무 계단을 깔아놓았다. 전형적인 육산(肉山)인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미끄럽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 산길은 제법 가파르다. 아니 아주 많이 가파르다고 하는 편이 더 옳겠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통나무계단을 깔아놓았기 때문에 조금만 속도를 늦춘다면 부담 없이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35분 만에 당골재산의 정상에 올라선다. 도톰하게 솟아오른 모양새의 정상은 이정표(할묵재 515m/ 산후마을 등산로입구 900m)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곳이 정상이라는 것을 확실해 줄 물증은 없다. 그저 청산수산악회에서 매달아놓은 표지판(산달도 당골산 235m)이 이곳이 정상임을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정표 뒤의 나무에는 ‘대부산(大夫山)’이라고 적힌 팻말도 걸려있다. 당골재산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 정상의 진정한 주인은 따로 있었다. 돌탑을 쌓아올렸는데 꽂아놓은 장승과 솟대가 기막힌 것이다. 그 구도나 조각솜씨가 웬만한 작가는 넘보지도 못하겠다.
▼ 정상에서의 조망은 빼어나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이다.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시야를 딱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그 아쉬움을 국제신문의 탐방기사로 대신해 본다. <정상에서의 시원한 조망은 작은 노고마저 잊게 만든다. 북쪽으로는 연륙교 건너 바위로 된 정상이 인상적인 산방산이 시선을 잡는다. 동쪽과 남쪽으로는 거제의 명산인 선자산과 노자산, 가라산이 불쑥 솟아 있다. 남쪽으로는 다리로 연결된 통영 한산도와 추봉도가 시야를 채운다. 서쪽으로는 시야가 열리는 곳이 많지 않은데 당골재산 정상에 오르기 직전 능선에서 시야가 트인다. 한산도 끄트머리를 지나 서쪽에 케이블카 승강장이 있는 미륵산이 잘 보인다. 여기서 시선을 북쪽으로 조금만 돌리면 통영 시가지 뒤로 멀리 지리산 주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또 바로 앞 거제 법동리의 툭 튀어나온 땅끝은 한반도 모양을 닮은 듯이 보인다.>
▼ 하산을 시작한다.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할목재, 그러니까 올라왔던 반대 방향이다. 초반은 경사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평평하다. 하지만 벤치가 놓인 쉼터를 지나면서 상황은 확 바뀌어버린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가파른 내리막길로 변하는 것이다.
▼ 그렇다고 내려서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다. 돌계단으로도 부족해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난간까지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곳에는 통나무계단을 깔았다. 사선(斜線)으로 된 비탈이라서 깔기가 쉽지 않을 텐데도, 보란 듯이 멋진 곡선으로 승화시켜버렸다.
▼ 그렇게 10분 남짓 진행하면 할묵재(이정표 : 뒷들산 530m/ 당골재산 515m)에 내려선다. 회주도로가 생기기 전의 산달도는 산을 넘어가는 고갯길이 각 마을을 연결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곳 할묵재도 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정표 아래서 고민이 시작된다. 뒷들산(217.2m)과 건너재산(209m)까지 답사를 하느냐로 말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졌기 때문이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는 육산에서 그나마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정상에서의 조망인데, 이런 빗속에서는 그런 조망마저도 허락하지 않을 게 뻔하지 않는가.
▼ 마을로 내려오다가 과수원에 심어진 수종(樹種)에 대한 작은 다툼이 있었다. 사과나 배, 매실, 복숭아 등에 익숙해진 일행들의 눈에 생전 처음 보는 열매가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의견이 분분하더니 오래지않아 생김새가 비슷한 ‘귤’로 의견이 좁혀진다. 내가 알기론 분명 ‘유자(柚子)’인데도 말이다. 결국 이곳 산달도의 가장 중요한 특산물 가운데 하나인 유자가 소수의견으로 밀려나버리고 말았다. 민주주의의 함정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산달도 유자나무는 1970년대 후반 마을주민 이규종씨가 처음 들여왔다고 한다. 가격이 비싼 유자는 겨울철 마을의 큰 소득원이 됐다. 하지만 최근 가격이 뚝 떨어지면서 유자 생산에 시큰둥해진 편이란다. 그래도 산전마을 63가구 중 25가구가 한 해 170t 가량의 유자를 생산하고 있다니 명산지임에 틀림없다.
▼ 할묵재를 넘어온 길은 산전마을로 이어진다. 그 길을 따르다보면 산전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다 위 굴 양식장의 하얀 부표들이 파도가 일렁거릴 때마다 이리저리 춤을 춘다. 한마디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날씨까지 맑았더라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 그렇게 10분 남짓 내려오면 산전마을에 이른다. 마을 안길로 들어서니 담벼락이 온통 그림으로 도배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같이 물고기들 천지다. 바닷가 마을이라는 특징을 오롯이 살려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 산전마을은 산달도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그래선지 포구에 지어놓은 마을회관도 당당히 이 층이다. ‘어업인 안전쉼터’도 그 옆에다 별도의 건물로 지어놓았다. 이곳 산전마을에는 산달초등학교(거제초등학교 산달분교장)도 있었다고 한다. 1947년에 개교해서 2003년 3월에 문을 닫을 때까지 총 114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한때는 재학생의 숫자가 250여 명에 달하기도 했단다. 지금은 비록 잡초 가득한 운동장과 녹슨 철봉과 시소만이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겠지만 말이다.
▼ 이곳 산달도의 특산물은 위에서 말한 ‘유자’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굴’이다. 통영·거제 앞바다에서 생산되는 굴이 전국 생산량의 70% 정도를 차지하는데, 이곳 산달도는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생산지라고 한다. 특히 산달도의 굴은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으로부터 청정해역 굴로 인정받아 미국으로 수출까지 하고 있단다. 머구리배에 수북이 쌓여있는 부표들이 그 증거가 아닐까 싶다. 며칠 후면 저 부표들은 종패들을 주렁주렁 매단 채로 바다 위에 널브러져 있을 것이다.
▼ 가리비껍데기와 굴껍데기를 긴 줄에다 꿴 종패들도 곳곳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하긴 산달도 주민의 80%가량이 굴을 생산한다니 그럴 만도 하겠다. 청정해역의 깊은 바닷물 속으로 들어간 굴은 5~6개월 동안 자라 내년 1~2월이 되면 수확을 시작한단다. ‘바다의 우유’로 불릴 만큼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 칼숨, 단백질 등 영양분이 풍부한 굴은 겨울철 입맛을 돋우는 별미이기도 하다.
▼ 굴 껍질을 까는 작업장도 눈에 띈다. 작업량이 만만찮은 모양이다. 알맹이를 빼낸 조개껍데기를 컨베이어벨트(conveyor belt)를 이용해 옮겨야 할 정도로 말이다.
▼ 바닷가 갯벌에는 종패를 매달아 놓았던 거치대가 즐비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굴 양식장은 종패를 부표에 매단다. 그렇게 생산되는 굴은 전국으로 팔려나간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여자는 남자를 위해’라는 캠페인과 함께 말이다. 부언(附言)하면 굴은 남자들에겐 스태미나 강장식품이고, 여자들에겐 피부 미용에 좋은 식품이란다. 가격 또한 저렴하다. 굴이 ‘1월의 명품 식품’으로 알려지는 이유일 것이다.
▼ 산전마을부터는 또 다시 회주도로를 따른다. 그리고 10분 남짓 더 걷자 허름한 화장실을 갖춘 너른 광장을 만난다. 첨부된 지도에 ‘페리선착장’으로 표시되어 있는 곳이다. 연륙교가 놓이기 전, 그러니까 차도선이 오가건 시절에는 섬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다는 얘기일 것이다. 읍내 볼 일을 보고 오는 사람 등 갖가지 일로 섬을 빠져나갔던 사람들이 해가 질 무렵이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들릴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 매표소가 있었을 자리는 현재 새로운 건축공사가 한창이다. 다리가 놓이면서 섬을 찾는 여행객들의 숫자가 부쩍 늘었다니 카페나 펜션이 들어서지 않을까 싶다.
▼ 한쪽 귀퉁이에는 ‘산달섬과 바다’라는 표지판과 함께 ‘산달도 등산로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하지만 자리를 잘못 잡은 것 같다. 선착장이 있을 때라면 몰라도 요즘은 주차장에서 트레킹을 시작하는 게 보통이니까 안내판 역시 그쪽으로 옮겨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