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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월도(落月島)
여행일 : ‘19. 8. 31(토)
소재지 : 전남 영광군 낙월면 송이리
산행코스 : 상낙월도 선착장→재계미→땅재→진월교→당너매→쉼터→하낙월리→진월교→상낙월리→상낙월도 선착장(소요시간 : 7㎞/ 3시간 10분)
함께한 산악회 : 좋은사람들
특징 : 영광 법성포에서는 22km, 목포와 70km, 관문인 향화도 포구는 20.5km 떨어진 조그만 섬이다. 남쪽으로 신안군 임자면 해상과 북쪽으로는 각이리 해상, 서쪽으로는 공해상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섬은 대부분 완만한 경사의 구릉으로 이루어졌다. 북서쪽에 발달된 해식애도 다른 섬들에 비해 그 규모가 작은 편이다. 때문에 눈에 담을만한 빼어난 풍경은 별로 없는 편이다. 큰갈마골해수욕장과 외양마지가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섬의 역사는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600년 무렵으로 본다. 백제가 망하자 왕실과 귀족의 후손들이 피신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여말 선초에 군역과 부역을 피해 도서지역으로 들어가는 백성이 늘었고, 왜구의 침략과 삼별초가 몽골에 항전하여 서남해안 섬들을 점령하면서 군사력이 미치기 어렵게 되자, 섬을 비우는 정책인 ‘공도정책’(1416~1881)을 실시했다. 그래서 현 주민의 선조들은 대부분 임란 이후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참고로 조선 초기만 해도 이 섬은 진월도(珍月島)로 불렸다. 이는 ‘진다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진다리’는 진흙(뻘)이 많은 곳을 의미한다. 이후 진들>진덜>진달>진달이로 되면서, ‘진’자는 달이 진다는 개념으로 전이되어 떨어질 ‘낙(落)’자와 달 ‘월(月)’로 표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육지인 영광 법성포쪽에서 이 섬의 위로 달이 지는 모습을 보면 바다로 달이 떨어지는 것같이 보인다는 설과, 섬의 모양 자체가 초승달 모양이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해동지도(海東地圖)’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 고지도에는 낙월도(落月島)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도 알아두자.
▼ 찾아오는 방법 : 낙월도로 들어가려면 일단은 영광군 염산면에 위치한 향화도항까지 와야만 한다. 낙월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너른 주차장에 내리면 영광의 랜드마크라는 ‘칠산타워’가 길손을 반긴다. 올해 문을 열었는데 높이가 111m에 이른다니 전남지역의 전망대 가운데 가장 높다 하겠다. 땅끝전망대(39.5m)와 완도타워(76m), 정남진전망대(45.9m), 고흥우주발사대(52m), 진도타워(60m) 등 다른 전망대들은 100m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타워는 1·2층은 매점과 특산물판매장, 활선어판매장, 향토음식점 등이 입주해 있고 3층엔 하이라이트인 ‘전망대’가 있다. 송이도나 낙월도로 들어가는 여객선의 매표소도 1층에 들어있다. 참고로 향화도는 과거에 갯벌로 연결된 섬이었으나 현재는 간척지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참! 축제기간 중엔 무료라고 해서 칠산타워에 올라보니 영광의 바다와 내륙을 360도 조망할 수 있는 풍경이 훌륭했다. 새우잡이로 유명한 칠산 앞바다를 끼고 반듯반듯한 농지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푸른 바다와 녹색의 들과 산에 눈이 시원해졌다.
▼ 송이도까지는 차도선(車渡船)인 ‘섬사랑 12호’가 하루 3회(07:30, 10:30, 15:30) 왕복 운항한다. 승객 105명과 차량 20대를 한꺼번에 운송할 수 있는 180톤급 여객선이다. 배의 뒤로 보이는 다리는 무안군 도리포(해제면)과 영광군 향화도(염산면)의 해상구간(1,840m)을 잇는 ‘칠산대교(七山大橋)’이다. 연말 개통을 앞두고 마무리공사가 한창인데 수천 년 동안 견우와 직녀처럼 서로 쳐다만 보고 살았던 무안군 도리포와 영광군 향화도가 하나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 느려터진 배에서는 할 일도 없다. 마침 바닥도 온돌이라서 부족한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리고 70분 정도 되는 뱃시간을 늘어지게 자고나자 어느덧 낙월도에 도착한다. 낙월도는 면적 1.28㎢에 해안선 길이가 11.2km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41개의 무인도를 포함한 52개의 도서(島嶼)로 이루어진 낙월면 관내에서도 안마도와 송이도에 이어 세 번째일 따름이다. 하지만 면소재지여서 공공건물들로 인해 인근의 다른 섬들에 비해 번화하다는 느낌이었다. 참고로 낙월도는 상낙월과 하낙월 두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여객선은 두 섬의 선착장에 모두 정박한다. 하지만 여행객들은 대부분 상낙월도에서 몸을 내린다.
▼ 선착장에서 내리면 커다란 표지석이 길손을 맞는다. ‘상낙월도’라는 지명 외에도 ‘새우의 고장’이라는 부언(附言)까지 달고 있다. 표지석의 맨 위에다 등이 굽은 새우를 그려 넣기까지 했다. 그만큼 이곳 낙월도가 새우와 관련이 깊다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1970-80년대 낙월도 주변 바다는 새우의 황금어장이었고, 낙월도는 인근 임자도 전장포와 함께 전국 새우젓 생산량의 50%를 차지했었다. 이에 따른 폐해도 있었다. 목돈을 쥐어보겠다고 ‘멍텅구리배(전통적인 방식으로 새우를 잡는 어선)’를 탔던 사람들이 고된 노역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부표를 타고 탈출하다가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기도 했던 것이다. 1987년 태풍 셀마 때는 무동력선이었던 멍텅구리배 12척이 난파돼 53명의 어부가 사망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 안전문제와 선원들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 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정부는 1995년 멍텅구리배를 모두 폐선(廢船)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배 한 척이 100명을 먹여 살렸다는 낙월도의 주요 소득원이 끊긴 셈이다. 멍텅구리배가 폐선된 이후 낙월도의 새우잡이도 쇠락하고 말았다.
▼ 선착장 앞 정자 쉼터로 나오니 길이 둘로 나뉜다. 왼편은 ‘목포해경 낙월도파출소(이곳에는 해양파출소 말고도 일반 파출소도 있다)’를 거쳐 상낙월 마을로 연결된다. 파출소 뒤에 보이는 붉은 벽돌건물은 공중목욕탕이다. 갯벌에 빠진 아랫도리도 씻을 겸해서 돌아오는 길에 들어가 봤는데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물도 시원스럽게 쏟아져 나왔다. 아무튼 우린 이곳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나있는 둘레길을 따르기 위해서이다. 포구에서 시작되는 이 길은 달바위와 몽돌로 이뤄진 재계미해변, 큰갈마골해수욕장, 후박나무가 숲을 이룬 땅재 그리고 바위 두 개가 솟아있는 쌍복바위를 돌아 포구로 이어진다. 상낙월도와 하낙월도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서 하낙월도까지 함께 둘러볼 수도 있다. 둘을 합친다고 해도 3시간이면 족하니 망설이지 말고 나서볼 일이다.
▼ 10분쯤 걸었을까 낙월도내연발전소가 나온다. 지난달에 들렀던 송이도의 내연발전소보다 오히려 더 큰 것을 보면 면소재지에 대한 예우일지도 모르겠다. 이 발전소의 바로 아래, 그러니까 낙월도 선착장의 북방파제 위쪽에는 쉼터용 정자가 지어져 있다. 위령비(慰靈碑)도 보인다. 사라호태풍(1959)과 셀마태풍(1967) 등 각종 재해로 사망해 해안가에 묻혀있던 27기의 무연고 유골(새우잡이 어부가 아닐까 싶다)을 발굴·안치하면서 그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것이란다. 안내석은 이곳의 지명을 ‘달바위(月岩)’라고 적으면서 낙월팔경(落月八景)의 하나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낙조(落照)의 명소라는 부언까지 달아놓았다.
▼ 배롱나무(목백일홍) 꽃이 곱게 핀 시멘트포장 길을 따라 잠시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누군가는 이곳을 ‘재계미삼거리’라고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땅재고개’로 넘어가는 길을 무시하고 오른편으로 진행한다. 이정표가 윗머리(웃머리)로 표시한 방향이다.
▼ 길이 조금 좁아졌지만 여전히 시멘트 포장길이 이어진다. 걷는 내내 바다가 시야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점도 같다. 낙월도 트레킹에서 보이는 풍경은 지난번 송이도에서 보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주변 바다에는 송이도와 대·소각이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떠있는가 하면 햇볕에 반짝이는 은빛 바다는 풍경이 곱다. 조수간만의 차이로 생겨나는 풀등도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썰물이 빠져나가면서 모래사장처럼 섬이 생겨나는 현상인 풀등은 자연현상으로도 신비롭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줘 더욱 신기하다.
▼ 산허리를 자르며 구불구불 나있는 둘레길은 물이 흘러가듯 유연하다. 주변 풍경은 길이 구부러질 때마다 다른 멋을 보여준다. 그렇게 잠시 걷자 오른편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재계미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인적이 뜸한 탓에 길은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하지만 발목을 휘감는 칡넝쿨만 조심한다면 내려갈 수는 있다.
▼ 300m 길이라는 재계미해변은 어른 주먹 크기의 몽돌이 깔려있다. 하지만 보여주는 풍광은 보잘 것이 없다. 엊그제 다녀온 백령도의 콩돌해안은 물론이고 지난달에 들렀던 이웃 송이도의 몽돌해안에도 훨씬 못 미친다. 해수욕장으로 문을 열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몽돌의 반대편 바닷물과 맞닿는 곳에는 결이 고운 모래가 파도를 맞이하는데 아기자기한 바위들과 어울려 운치를 더해준다.
▼ 둘레길로 되돌아와 트레킹을 잇는다. 둘레길 중간 중간에는 벤치를 놓아두었다. 어떤 곳에는 운동기구도 함께 배치했다. 주변 풍경을 차분하게 감상해보라는 배려용인 모양이다. 섬 주민들에게는 체력단련용인 모양인데 자주 이용하기엔 조금 먼 거리가 아닐까 싶다.
▼ 조금 더 걷자 또 다른 길 하나가 바닷가를 향해 나있다. 하지만 길은 이미 없어져 버렸다고 봐야 한다. 하도 사람이 안 다니다보니 토끼나 다니기 딱 좋을 정도로 넝쿨식물들이 가득 차버렸다. 게다가 기시넝쿨까지 섞여있다. 통행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얘기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다. 저 아래에 또 어떤 색다른 풍경이 펼쳐질지 모르니 말이다. 사력을 다해 헤쳐 나간다. 해변까지의 거리가 100m도 채 되지 않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 어렵게 내려선 해안(큰애기고랑이 아닐까 싶다)은 고생한 만큼의 눈요깃거리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저 너덜겅이 끝없이 펼쳐질 따름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를 외치면서 기어 나왔건만 헛고생만 한 셈이다.
▼ 둘레길로 되돌아나가야 하지만 그냥 해안을 따라보기로 한다. 또 다시 풀숲을 헤치고 나갈 일이 너무나 까마득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걷기에 큰 무리가 없어 보이는 해안의 상황도 그런 결정의 한 요인이 되었다.
▼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결정이었다. 너덜이 바위로 변하더니 끝내는 절벽으로 승화해 버렸기 때문이다. 절벽의 아랫도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있어 아래로 내려설 수도 없었다. 크랙(crack)에 의지해서 바위와 씨름하길 1시간, 둘레길로 걸었을 경우 10분도 채 되지 않을 거리에서 나는 한 시간이나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손바닥과 팔뚝에 수많은 상처를 남기면서 말이다. 어디에 부딪쳤는지 카메라도 고장이 나버렸다. 참! 중간에 산자락을 파고들어 보기도 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길을 내가면서 올라가봤지만 50m쯤 진행하다 포기하고 말았다. 빈틈없이 들어찬 잡목에다 넝쿨식물들까지 뒤엉켜 있어 토끼 한 마리 제대로 통과할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 위험구간이 끝나자 해안을 곱게 장식하고 있는 해식절벽이 눈에 들어온다. 해식동굴(wave-cut terrace)이 보이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을 만들어 놓기도 했다. 해식지형의 전형적인 변화과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해식절벽이 해식동굴을 거쳐 ’씨 아치‘로 변하고, 씨아치는 또 세월이 흐르면서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 해식절벽이 끝나자 모래사장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다. ‘큰갈마골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은 폭이 200m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결이 고운 모래사장 너머로 갯벌이 길게 펴져있어 얼핏 보기에는 엄청나게 넓어 보인다. 거기다 풍광 또한 빼어난 편이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해식절벽이 양 옆을 감싸고 있는가 하면 정면의 적당한 거리에는 송이도와 소각이도, 대각이도 등의 섬들이 있어 눈요깃감으로 제법 쏠쏠하다. 참! 썰물 때면 해수욕장의 모래사장 길이가 2㎞까지 늘어난다니 참조한다. 또 하나, 모래사장 너머 갯벌에는 한때 지주식 김양식을 했던 흔적이 보인다. 오래전에 김 양식장은 철거했지만 그때 세웠던 나무 말뚝들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해수욕장을 빠져나와 다시 둘레길로 올라선다. 이어서 잠시 후에는 재계미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땅재’에 올라선다. 옛날 이 고개에는 성황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월 초사흘에는 아래 사진에 보이는 팽나무 앞에서 당산제를 지냈단다. 수령이 300년인 저 팽나무는 민간신앙의 본산으로 제사를 지내고 농악놀이를 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또한 섬에서 가장 시원한 곳이라서 여름철이면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단다. 그래선지 팽나무 아래에는 지금 정자가 지어져 있다.
▼ 이정표(선착장 가는길/ 당산 가는길)가 지시하고 있는 ‘당산’ 방향으로 진행한다. 후박나무가 숲을 이룬 경사지 계단을 올라가니 낙월도에서 가장 높은 지점인 당산이 나온다. 하지만 이동통신사의 중계탑이 세워져 있어 정상으로서의 기능은 못하고 있다. 그게 미안했던지 나무그늘 아래에 벤치를 놓아 쉼터로 활용하도록 했다.
▼ 잠시 후 ‘누엣머리’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만났으나 개의치 않기로 했다. 아까 큰갈마골해수욕장에서 바라보던 풍경일 것 같아서이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데크전망대가 나온다. 예쁘게 펼쳐지는 바다풍경을 조금 더 차분하게 바라보라는 모양이다. 주변 풍경과 하나가 되어서 말이다.
▼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한마디로 끝내준다. 몽돌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송이도를 위시해서 소각이도와 목섬, 대각이도가 지척에서 손짓하고, 송이섬과 대각이도 사이로 안마도와 오도, 석만도 등 안마군도들이 멀리서 고개를 내민다. 그 오른편에서 점들로 나타나는 것은 아마 칠산도일 것이다.
▼ 다시 길을 나서는데 진행방향 저만큼에서 커다란 바위 하나가 고개를 빼꼼히 내민다. 오랜 세월 먼 바다에서 불어온 거센 바람이 빚어놓은 탓인지 그 자태가 자못 범상치가 않다. 혹시 이정표에서 보았던 ‘쌍복바위’일지도 모르겠다. 상낙월도에 똑 같이 생긴 바위가 둘 있는데, 하나는 바닷가에 다른 하나는 산 중턱에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쌍복바위에는 슬픈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마을에 정혼한 두 쌍의 남녀가 있었단다. 나라의 부름을 받는 때가 되어 한 남자는 육군, 다른 남자는 수군으로 입영하게 되었다. 육군으로 입영한 남자는 소식을 자주 전하며 여인의 외로움을 달래주었고 여인 역시 남자의 소식이 올 때마다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들여 남자의 무사함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수군으로 입영한 남자는 떠난 지 몇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고 여인 또한 정성을 들여 치성하지 않았다. 이후 난리가 평정되어 소집되었던 군사들이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에 두 여인도 선창에 나가 정혼자의 귀가를 기다렸는데, 두 남자 중 육군에 입영하였던 남자만이 건강한 몸으로 귀향하고 수군으로 입영한 남자는 전사통지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에 수군으로 입영한 남자의 여인은 자신의 치성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라 생각해 뒷산 복바위에 올라가 자결하고 말았다. 부모는 불쌍한 딸의 사체를 인양하여 바다가 보이는 산 중턱에 안장하였다. 이후 여인이 부모의 꿈에 나타나 지아비는 바다에 있는데 어찌 혼자 산에 있겠느냐며 바다에서 영혼이나마 서로 만날 수 있도록 관을 무덤에서 파내어 혼숫감으로 준비한 가위·인두·상자·장롱과 함께 바다에 띄어 달라고 부탁했단다. 깜짝 놀란 부모가 딸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이때 던진 혼수물품들이 모두 상낙월도 해면의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 이젠 하낙월도로 건너갈 차례이다. 상낙월도와 하낙월도는 약 500m 정도의 좁은 수로를 끼고 간만의 차이에 따라 붙었다 나뉘기를 반복한다. 썰물 때면 모래바닥이 드러나면서 하나의 섬으로 변한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수시로 건너다닐 수는 없었기에 1989년 두 섬 사이에 방조제(防潮堤)를 설치해 차들도 다닐 수 있는 완벽한 하나의 섬이 됐다. 그러나 제방을 쌓은 뒤 해수가 유통되지 않아 갯벌이 죽어가자 2014년 제방 50여m를 잘라내 다리를 만들었단다. 이 다리가 바로 ‘진월교’이다. 아무튼 이곳 진월교까지 오는 데는 2시간이 걸렸다. 1시간 남짓이면 가능한 거리를 길도 없는 해벽에서 헤매느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 진월교를 건너는데 두 섬의 사이 바다가 거무튀튀한 배를 드러내고 있다. 썰물 때인지라 바다에 숨어있던 거대한 모래밭이 그 자태를 드러낸 것이다. 아까 낙월도에 들어올 때 선원이 하던 말이 실감이 난다. 바로 코앞에 낙월도를 두고 멀리 돌고 있는 배를 보고 궁금해 하는 나에서 거대한 ’모래등‘ 때문이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100ha에 이르는 거대한 모래등이 썰물 때면 그 자태를 드러내는데 그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낙월도 사람들은 이를 풀등이라 부르는데 모래도 아니고 개펄도 아니며 모래와 개펄이 섞여 있어 발자국도 남지 않는 단단한 모래톱이다. 저 풀등은 낙월도 사람들의 중요한 수입원이기도 하단다. 맛이 많이 난다고 하여 ‘맛등’이라고도 불리는데 주변 수산시장에서 귀한 몸값을 자랑한단다. 또한 ‘백하새우’와 ‘참새우’의 산란지이기도 하며 민어, 꽃게, 농어 등 수산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란다.
▼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외양마지’가 눈길을 끈다. 서슬 시퍼런 해안절벽이 바다를 향해 길게 뻗어나갔는데 그 위에다 데크로드를 걸쳐놓았다. 갯바위 낚시의 명소로 알려져 있으니 낚시꾼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아닐까 싶다.
▼ 연도교(連島橋)인 진월교를 건너 하낙월도로 들어선다. 마을 방면으로 이어지는 길을 잠시 따르다 오른쪽에 나타나는 경사진 길로 들어서면 하낙월도 트레킹의 시작이다. 이어서 초원 같은 길을 잠시 걷자 정자가 나타난다. 길은 이곳에서 둘로 나뉜다. 그런데도 마땅찮은 이정표는 오른편만 ‘낚시터 가는길’로 표기하고 있다.
▼ 오른편으로 방향을 틀자 ‘외양마지’가 나온다. 상·하낙월도를 통틀어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반도처럼 불쑥 튀어나간 바위능선만 해도 아름다운데 거기다 데크 계단까지 만들어놓아 화룡점정(畵龍點睛)으로 승화시켜버렸다. 덕분에 서슬 시퍼런 바위절벽에 걸쳐진 계단이 주변 풍경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그것도 잘 그린 그림이다.
▼ 바닷바람을 맞고 자란 방풍나물이 지천인 능선의 끄트머리로 나가자 조망이 툭 트인다. 좌우로 펼쳐지는 해안절벽은 물론이고 상·하낙월도를 이어주는 진월교가 상낙월도와 함께 어우러진다. 그런데 그 풍광이 자못 멋스럽다.
▼ 큰 바위가 어디선가 굴러온 것처럼 바위와 바위 사이에 걸려 있다.
▼ 정자 앞 삼거리로 되돌아와 계속해서 둘레길을 탄다. 하낙월도의 둘레길도 조성 자체는 잘 되어 있다. 하지만 관리가 소홀한 탓에 걷기가 불편할 정도로까지 변해있다. 아니 정자쉼터 이후부터는 진행자체가 아예 불가능해져 버렸었다. 찾는 이들이 적은 탓도 있었겠지만 탐방객이 걸을 수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저번 송이도 탐방 때도 거론했었지만 이곳 영광군청의 게으른 행정에 문제가 있지 않나 싶다. 아무튼 하낙월도의 둘레길은 방금 전에 들렀던 와양마지와 할미골, 당너매, 작은골 그리고 전망좋은 장버래쉼터를 거쳐 선착장으로 이어진다.
▼ 하낙월도 둘레길은 시야가 탁 트여 걷는 내내 바다와 섬들을 바라볼 수 있다. 임자도와 지도, 어의도, 해제반도가 하늘과 바다를 양분하면서 풍경화 한 폭을 만들어낸다. 참! 길을 걷다가 왼편으로 길이 나뉘는 곳을 두어 번 만났으나 이정표가 없기에 그냥 통과해버렸다.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정자가 나온다. 권장코스 가운데 하나인 당너매가 이 근처일 텐데도 난 찾아보지를 못했다. 이정표가 세워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너매의 몽돌해변은 낙월도의 자랑 중 하나인 묵석이 많이 발견되는 곳이기에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 얼마쯤 걸었을까 정자쉼터가 있는 삼거리(이정표 : 마을 가는 길/ 당너머)가 나온다. 계속해서 둘레길을 따라야 하낙월도의 명소인 ‘장벌해수욕장’으로 연결되는데 우린 그만두기로 한다. 칡넝쿨이 길 전체를 뒤덮어버려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난 장벌래쉼터 근처에 있다는 초분(草墳)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풍속이기에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아쉬운 일이다.
▼ 작은 고개를 넘자 ‘하낙월리’가 나온다. 낙월도의 동쪽해변은 갯벌이 많고, 서쪽해변은 절벽이 많아 사람이 사는 마을은 동쪽 산자락에 둥지를 틀었다. 하낙월리는 주민이 69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다. 목포나 영광, 광주 등에 거주하면서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을 뺄 경우 주민의 숫자는 이보다도 훨씬 줄어든단다. 나머지 주민들도 비람이 많이 부는 추운 겨울에는 육지로 나가 살다가 고기잡이가 시작되는 봄에 돌아오는 경우가 많단다. 마을을 돌아다니는데도 주민들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 마을은 대체로 한적하다는 느낌이다. 모든 행정기관이 상낙월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일하게 있는 교회가 가장 큰 건물인데 이마저도 십자가가 없다. 교회의 기능이 이미 사라졌다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 마을 앞 너른 공터에는 정자를 지어 주민들의 쉼터로 활용하고 있다.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작은 공원, 즉 ‘쌈지공원’을 만들어놓았다. 그 앞에 세워놓은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돌장승이 길손을 맞는다.
▼ 건너편에는 상낙월도가 있다. 초승달처럼 생겼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은 고구마 모양을 하고 있다고도 한다. 무학대사가 이르기를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豕眼見唯豕, 佛眼見唯佛)’이라 하지 않았던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생김새 또한 달리 보이는 게 정상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상낙월도와 하낙월도는 둘이자 하나이다. 둘 사이에 낀 약 500m 정도의 좁은 수로에 물이 빠지면 모래바닥이 드러나면서 하나의 섬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썰물 때면 길이 생기고, 밀물이 들어오면 바닷물로 뒤덮여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왼편에 보이는 진월교는 오작교(烏鵲橋)이다. 서로를 그리워하던 두 섬이 저 다리를 통해 하나가 됐으니 말이다.
▼ 마을 앞을 지나자 잘 만들어진 선착장과 물양장이 나온다. 진월교를 건넌지 50분 만인데, 블랙야크에서 인증장소로 삼는 마을 표지석은 이곳에 세워져 있다. ‘새우의 고장, 하낙월도’. 역시 새우를 내세우고 있다. 그만큼 세우와 인연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긴 지금은 비록 퇴락했지만 새우잡이가 전성기를 이루던 시절에는 영광 법성포와 맞먹는 새우젓 상권이 형성되기도 했단다. 어렵던 그 시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푸른 꿈을 안고 전국 각지에서 청년들이 몰려들어 이 작은 섬이 흥청거렸던 적도 있었단다. 참고로 새우는 잡는 즉시 적당량의 소금과 버무려야 한다. 이때 굵은 소금은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되며 가늘고 쉽게 부서지는 소금이어야 한다. 소금 중 최고의 품질은 5월의 봄볕과 바람이 만들어낸 소금이다. 여기에 6월에 잡힌 살이 통통한 새우를 버무린 ‘육젓’은 맛과 향 그리고 때깔마저 좋아서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 이젠 상낙월도로 돌아갈 차례이다. 이곳에서도 같은 배를 탈 수 있지만 둘레길 탐방 대신 낚시를 선택했던 권사장님이 갑오징어를 잡아놓았다고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쫄깃쫄깃한 식감의 횟감을 앞에 놓고 반주를 기울일 수 있는데 내 어찌 잠깐의 발품을 마다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진월교’를 건너 상낙월도에 들어서자 섬에서는 찾기 힘든 골프연습장이 눈에 띈다. 연습장의 뒤편 언덕 위에도 독특한 외형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으나 용도를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 잠시 후 일반 파출소가 보이는가 싶더니 초등학교, 이어서 면사무소와 보건소가 줄을 잇는다. 이곳 낙월도가 면소재지라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낙월면에서 가장 큰 섬은 안마도이고 다음이 송이도이다. 낙월도는 세 번째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이곳 낙월도는 예로부터 중심 섬으로 어미섬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고 한다. 섬이 크고 인구가 많다고 면소재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위치가 어디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낙월도가 다른 섬을 제치고 면소재지가 된 것은 육지와 가까울 뿐만 아니라 생활권이 목포였다는 것이 원인이었지 싶다. 그렇지 않다면 주민이 234명에 불과한 작은 섬이 어떻게 면소재지가 되었겠는가.
▼ ‘낙월초등학교’는 규모가 제법 큰 편이다. 1931년 낙월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으며 1950년에 낙월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1981년에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1991년에 낙월서국민학교를 통합하여 현재에 이른다. 초등학교 안에는 ‘작은 도서관’도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기존의 교실을 리모델링한 탓에 규모가 40평도 채 되지 않지만 도서보관실과 공부방 외에도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영화감상실’과 부모와 함께 독서할 수 있는 ‘모자방’까지 들어서 있단다. 도서 3,400여 권과 DVD 250장을 소장하고 있다니 작은 섬에 있는 멋진 문화공간이라 하겠다.
▼ 배가 도착할 때까지의 자투리시간을 이용해 마을을 둘러보기로 한다. 꼼꼼하게 살펴본다고 해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빈집이 여럿 보인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찾아온 날이 마침 휴일이었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너무 한적하다는 느낌이다. 아니 점점 공도화(空島化)되어가고 있다는 요즘의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는 시구(詩句)가 생각난다. 새우잡이가 한창이던 1980년대만 해도 낙월도의 유동인구가 1,000여 명이 훨씬 넘었다니 어찌 그런 생각이 나지 않겠는가. 새우잡이배를 타는 사람만 해도 400~500명은 족히 되었다니 얼마나 붐볐겠는가. 그런데도 지금은 민가보다도 공공건물의 숫자가 더 많아 보이는 것이다.
▼ 어른 주먹보다 약간 더 큰 돌로 지어진 집도 보인다. 매끈하게 생긴 것이 아까 몽돌해안에서 보았던 그 돌들이지 싶다. 그중 검은 색의 돌들은 묵석(墨石)일 것이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하낙월도에서는 수석으로 꾸민 꽃밭도 보았었다. 이곳 낙월도가 수석으로 인기가 높은 묵석의 산지로 유명하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그렇게 귀한 돌들을 건축자제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라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돌의 반출이 금지되어 탐석(探石)이 소용없게 되었단다. 수석 애호가들은 아쉽겠지만 모든 자연은 있던 그 자리에 있는 게 순리가 아니겠는가. 참고로 낙월도는 전국에서 이름난 묵석의 산지로 알려진다. 석질이 다이아몬드 다음으로 강해서 묵석 애호가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데 수석 붐이 일었던 1970년대 초반에는 수집가들로 붐비기도 했단다. 수천 년 동안 파도에 시달린 검은 돌들이 무수히 널려 있었는데 그걸 줍겠다고 전국에서 하루에도 수백 명이 몰려왔다는 것이다.
▼ 다시 돌아온 향화도항은 ‘영광 천일염·젓갈 갯벌축제’가 한창이다. 초대가수의 노랫가락에 맞춰 어깨까지 들썩거리는 사람들도 꽤 보인다. 흥겨운 축제분위기에 한껏 취해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은 조금 썰렁한 느낌이다. ’영광9경(靈光九景)의 하나인 ‘칠산타워’에서 ‘영광9미(靈光九味)의 하나인 ’젓갈‘과 ’영광9품(靈光九品)‘의 하나인 ’천일염‘을 내세운 축제인데도 파는 매장은 고작 한 곳씩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축제의 마지막 날이라서 다른 매장들은 이미 철수했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영광군은 볼거리인 ’9경(九景 : 백수해안도로·4대 종교문화유적지· 불갑사·칠산타워·가마미해수욕장·불갑저수지 수변공원·숲쟁이꽃동산·송이도 몽돌해수욕장·천일염전) 외에도 먹을거리인 9미(九味 : 굴비한정식·간장게장·황금보리돼지·보리새우·덕자찜·황토갯벌장어·청보리한우·보리떡(빵)·백합)와 살거리인 9품(九品 : 영광굴비·모싯잎송편·천일염·대마할머니막걸리·간척지쌀·태청딸기·태양초고추·찰보리쌀·설도젓갈)을 함께 선정해 놓고 있다. 경관 좋은 곳에서 놀면서 맛있는 음식도 사먹고, 돌아갈 때는 특산품들을 사가라는 의미일 것이다.
♧ 에필로그(epilogue), 이왕에 낙월도에 왔으니 이곳의 명물인 새우에 대해 한걸음 더 나아가 보자. 낙월도를 대표하는 3가지를 고른다면 새우젓과 멍텅구리배인 중선(重船:큰 배) 그리고 묵석(수석)이다. 투박한 전통적인 한선을 개량한 배로 10~17톤에 이르는 무동력선을 멍텅구리배라고 한다. 나무로 만들었는데 돛이나 노는 물론 엔진도 없어 스스로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래서 동력선이 바다 한가운데까지 견인해 가면 그곳에 닻을 내리고 새우잡이를 했다. 멍텅구리배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이다. 당시 낙월도의 인근 바다에서 나는 대표적인 어종은 새우였다. 잡아 올린 새우를 염장한 것이 젓갈인데 5월의 오젓과 6월의 육젓은 뒷맛이 개운하고 담백하며 소화를 돕고 장을 튼튼하게 해 준단다. 동절기에 잡은 새우로 만든 ‘동젓’은 임금님께 올리는 진상품이기도 했단다. 동새우로 김치를 담그면 발효가 잘 되고 그 맛이 개운하며 감칠맛이 더해진다고 해서 최근에는 동젓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참고로 서해안의 새우잡이 배인 멍텅구리배는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만들어져서 사용되었다 한다. 예전에는 전라도에서는 ‘중선’(重船: 큰배) 또는 ‘젓중선’, 충청도에서는 ‘실치잡이배’, 경기도에서는 ‘곳배’, ‘젓배(醯船: 젓을 담그는 배)’라고 불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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