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죽으심을 눈앞에 두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온전히 감당하심으로 구원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 열두 제자와 함께 오르시어 기도하셨습니다. 특별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세 사람과 함께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신 주님은 그들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당부하신 후, 그들로부터 조금 나아가셔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첫 번째 기도를 마치신 주님께서는 세 제자들이 있는 곳에 돌아오셨습니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깨어서 기도하라고 당부한 제자들은 모두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며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이처럼 책망하신 이유는 그들이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로 인해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서 기도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 일부러 그들을 데리고 기도의 자리에 나아오시고, 그들이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셨지만, 육신이 마음을 이기지 못함으로 잠이 들어 버린 그들에 대해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다시금 당부하신 주님은 두 번째 기도를 하시기 위해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회피하시려는 마음이 강하게 드러난 기도였으나, 두 번째 기도는 이를 겸허히 수용하시고 순종하시려는 기도로 바뀌었고, 당신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하시는 강한 의지와 결단이 드러난 기도였습니다. 두 번째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또 다시 제자들에게로 나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기도를 마치시고 또 다시 제자들에게로 나아오신 것은 그들이 깨어 기도하고 있는지 돌아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절박하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두 번씩이나 제자들을 돌아보러 오셨다는 것은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그 공포와 처절하게 싸우시면서도 제자들을 돌보시는 주님의 모습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며,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해줍니다. 누가복음22장31~32절에 의하면 주님은 겟세마네 기도 직전에도 베드로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다고 말씀하셨으며, 그리고 요한복음17장12절에 의하면 성만찬 후에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시기를 제자들을 보전하고 지키시는 것이 당신의 소원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이처럼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눈앞에 둔 순간에도 제자들의 믿음을 걱정하시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처절하고 치열한 영적인 싸움 중에도, 그들을 염려하시며 그들에게 다시 오신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라는 책망과 명령을 듣고도, 이를 까맣게 잊은 채 모두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주님으로부터 책망과 당부의 명령을 듣고도 또 다시 잠들어 있는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시험 당하지 않게 깨어서 기도하려는 마음보다 잠들고 싶은 육체의 소욕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주님께서 경고하신 ‘그들이 당하게 될 시험’에 대해 그들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이 굳이 깨어서 기도하지 않더라도, 자신들에게 별 일이 있겠냐는 식의 안일한 마음과 혹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자신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교만함이 그들을 잠들게 한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앞으로 당할 시험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크나큰 위기라고 인식했더라면, 아마도 자신들의 허벅지를 꼬집어서라도 깨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당할 시험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무사안일함과 근거없는 자만심에 빠져 주님이 그들에게 다시 오신 것도 모른 채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그냥 두시고, 세 번째 기도하시기 위해 나아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또 다시 같은 말씀으로 세 번째 기도를 하셨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기도를 통해 당신께서 겸허히 십자가 죽으심을 수용하고 순종할 것을 결단하며,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겠다고 기도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왜 주님은 또 다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같은 말씀으로 다시 기도하셨다는 것은, 같은 말을 반복하며 기도하는 중언부언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의미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인 반면,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을 위해 같은 말씀으로 간절하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당신께서 십자가 죽으심을 수용하고 순종하기로 결단하셨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의 죽음을 회피하려는 시험이 얼마든지 당신 마음속에 들어올 수 있음을 아시기에, 그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기 위해 세 번째 기도를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마음으로 다짐을 하고 결단을 한다고 해도, 이것이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지 주님은 알고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시험에 대해 경각심을 갖지 않고안일함과 자만심으로 잠든 것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기도로 승리하시기 위해 기도의 끈을 놓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기도를 마치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45~46절 말씀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처음 기도하실 때 보이셨던 고민과 슬픔과 두려움의 모습은더 이상 주님께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대히 “이제는 가자”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를 향해 한발 내딛으셨습니다. 기도를 통해 모든 영적인 준비를 온전히 마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복음 18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한 교훈을 주시기 위해 베푸신 일명 ‘불의한 재판장 비유’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어느 한 도시에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장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과부 한 사람이 찾아와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청원했습니다. 하지만 불의한 재판장은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을 줄 수 없는 과부의 청원을 무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부는 ‘자주 가서’ 재판장에게 자신의 청원을 들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불의한 재판장은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지만, 만일 이 과부의 청원을 들어주지않는다면 분명 자신을 괴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과부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통해 주님은 이런 교훈을 주셨습니다.누가복음18장6~8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장도 이렇게 과부의 간절한 청원을 들어주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장은 오래 기다렸다가 어쩔 수 없이 원한을 풀어주었지만, 공의로우시고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겠느냐고 말씀하시며, 속히 원한을 풀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억울하게 당한 원한에 대해서도 우리가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기도할 때, 오래 참지 않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자주 가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어찌 응답해 주시지 않고, 또 어찌 당신의 힘과 능력을 부어주시지않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모든 가르치심을 마치신 후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끝까지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기도하는 믿음의 사람을 볼 수 있겠느냐며 주님께서 안타까운 탄식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염려하셨던 믿음 없는 자들이, 당신의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실 이 때에,제자들을 통해 보여지니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천 년 전 오늘 주님은 밤새 대제사장들에게 온갖 모욕과 조롱 가운데 심문을 받으셨고, 이천 년 전 지금 이 시간에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하는 소리를 듣게 되셨습니다. 이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아 십자가형을 언도받으시고, 머리엔 가시관이 씌여지고, 모진 채찍질 당하신 등으로 당신이 지실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게됩니다. 그리고 두 손과 발에 못이 박혀 고통 중에 운명하시게 됩니다.
주님은 이미 이 모든 고초와 고통을 당신께서 당하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이 모든 것을 감당하실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끝까지 기도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신다는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심으로 얻게 된 결과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염려하시는 믿음 없는 자들이 우리가 되어서는 안되지않겠습니까?
나에게 별일이 있겠냐는 근거없는 자만심과 안일함을 버리고, 어떠한 상황이라도 우리가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않고, 끝까지 기도의 끈을 놓지않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나의 목적을 위한 중언부언이 아닌, 오직 아버지의 원대로 살기를 원한다는 같은 말로서 우리의 기도를 채울 수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과 같이 어떠한 고초와 고난이 우리 앞에 놓인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감당하고도 남을 믿음의 사람으로 날마다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성금요일을 맞은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가 주님과 함께 같은 말로써 기도하고, 주님과 함께 승리하는 복된 날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