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죽으심을 눈앞에 두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온전히 감당하심으로 구원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셔서 세 번에 걸친 기도를 통해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시고, 마침내 십자가를 감당하시기 위한 모든 영적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45절말씀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주님께서 두 번이나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지만,그들은 깨어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육체의 소욕을 이기지 못해 결국 깊이 잠들어 버렸습니다. 자신들이 깨어 기도하지 않는다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안일함과 자만심에 빠져 그들은 영적으로 깊이 잠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기도의 끈을 놓지 않으시고 세 번의 기도를 모두 마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돌아오셔서, '이제는 자고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깨어 기도하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 눈앞에 이르게 되었음을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보라’라고 말씀하신 후, '때가 가까이 왔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때'란,당신께서 죄인의 손에 팔리는 때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속 ‘손에’라는 단어를 원어 성경에서는 ‘~안으로 들어가다’라는 전치사와 함께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손 안으로 팔리신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인들이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과 그 권속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제 예수님은 죄인들을그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또 다른 죄인들에게 넘겨져, 그 죄인들로부터 끔찍한 고난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팔린다’라는 표현은 원어상으로 ‘버리다, 내어주다’라는 의미를 갖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죄인들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하게 버림당하게 되실 것임을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말씀하신 ‘때’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철저히 버림받아 수난을 받으셔야 할 시간이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미리 정해 놓으신 바로 그 구속 사역의 성취의 시간을 의미하며, 그러한 때가 가까이 왔음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46절말씀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과 함께 가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당신과 함께 더불어 행동을 취해야 함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함께 가자고 하신 곳은 어디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함께 가자고 하신 곳은 직접적으로는 십자가의 자리로 함께 나아가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제자들은 모두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고 모두 도망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과 함께 가야 할 곳은 결국 십자가의 자리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십자가의 자리로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의 자리가 곧 부활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고통 속에 죽는 죽음의 자리가 곧 영원한 생명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있을 수 없고, 죽음이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자리로 나아가고,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야 주님과 함께 부활과 영생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9장에는 제자들모두가 십자가의 자리, 죽음의 자리를 피하여 도망했지만,오히려 십자가와 죽음의 자리를 찾아온 사람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아리마대 요셉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사람들에게 숨겼었습니다. 그는 가진 것이 많은 부자였기에,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감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후, 오히려 그는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함으로, 자신이 주님을 따르는 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국사범으로 십자가에 처형된 죄인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처럼 자신을 드러내고,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사건이 곧 자신의 죄 때문임을 그가 인식했기 때문이며,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함께 탐욕과 이기심 가득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거듭난 자가 된 것입니다.
이에 그는 자기 자신이 죽어서 묻히게 될 새 무덤을 준비할 정도로 자기 집착이 강한 자였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놓을 각오로 그 새무덤에 예수님의 시체를 모셨습니다. 이 일로 인해 예수님의 부활을 두려워하는 모든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주목을 당하고, 배척을당할 것이지만, 그는 기꺼이 이 모든 것을 감수하며, 자신의 무덤을 예수님께내어 드렸습니다. 그 결과 그의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죽음이 머물러 있어야 할 무덤이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으로 가득한 곳,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생명의 장소가 되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 함께 가자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이 어디겠습니까? 결국 십자가의 자리 아니겠습니까?
십자가의 자리에 나아가야, 그곳에 나와 함께 계신 주님을 만나뵐 수 있고,
십자가의 자리에 나아가야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대속의 은혜를 회복할 수 있으며,
십자가의 자리에 나아가야, 사망권세를 이기신 주님과 함께 부활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를 회복함으로 비로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처럼, 주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면 죽은 자의 시신이 썩어 사라지는 영원한 죽음을 담는 그릇일 수밖에 없지만, 주님이 계심으로 그 무덤이 오히려 부활의 장소와 부활의 증거로 승화된 것처럼, 죄와 사망의 그릇에 불과했던 우리들의 삶은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이 역사하시고,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영광의 도구로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날을 하루 앞둔 오늘,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 부활의 주님과 함께 다시금 일어나 새롭게 세워질 수있도록, 죄와 사망 그 자체였던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죄와 사망의 그릇이었던 우리들의 심령과 삶속에 주님을 모심으로, 부활의 아침을 준비하고 기다리는복된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