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에서는 양녕이 세종(충녕)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미친 척을 하여 보위를 양보했다고 전해지거나, 어리와의 사랑을 위해서 왕을 포기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사에서 언급하는 양녕의 언행은 태종의 미움을 받기에 충분하였던 것 같습니다. 양녕대군은 군왕수업인 학문연구의 억압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세자의 학업량은 하루 열 시간도 넘었다고 합니다. 과다한 공부에 시달려온 양녕의 거짓말은 자꾸 늘어가고 태종에게 꾸지람을 듣는 횟수도 늘어납니다. 태종에게 심한 질책을 받게 되면 양녕은 많은 분량의 반성문을 바쳐서 위기를 모면하곤 했습니다.
주색잡기를 좋아하고 특히 여자문제가 복잡하였으며, 공부를 멀리하다 보니 양녕대군은 스승만 보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합니다. 양녕대군은 마음에 드는 여자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마구 불러다 같이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심지어 큰아버지(정종)의 애첩과 매형의 애첩까지 건드렸습니다. 더구나 양녕대군은 처세술의 잔머리도 강했던 것 같습니다.
태종이 진노하자 이를 모면하고자 외숙부들의 잘못을 일러바쳐서 결국 두 명의 외숙부가 억지로 자결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왕위를 잇게 된 것에는 이러한 양녕대군의 반복된 잘못에 이유가 있습니다. 양녕대군 때문에 주위의 문지기, 내시 등 억울하게 태종의 노여움을 받은 자가 한둘이 아니며, 개중에는 곤장과 유배, 사형을 당한 자들까지 있었습니다.
양녕대군에게도 안쓰러운 면은 있었습니다. 교육의 강압이 그처럼 심하지 않았다면 양녕대군이 그렇게 빗뚫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무예와 예술에 능하였고 이미 태종의 정사를 일부 이양 받아 하며 잘 처리했기 때문에 아예 왕의 자질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태종은 장남을 많이 아꼈습니다. 조선 건국이후 장자계승이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더구나 조선건국은 신진사대부의 협조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성리학적 국가를 만드는 것에 목적이 있었으므로 학문적 소양이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러기에 태종의 관심이 더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양녕이 견디기에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종의 달램과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양녕대군의 방탕한 생활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전 중추부사 곽선의 첩 "어리"가 예쁘다는 소문에 선물을 보내어 유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리는 조정의 늙은 대신 곽선의 첩이었습니다. 어리는 양녕대군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지조를 지켜야 한다며 사양했지만 양녕대군이 직접 찾아가서 어리를 억지로 동궁에 데려 갑니다.
이미 14세에 혼인을 하여 부인까지 있는 상황에도 양녕대군의 여색 탐하기는 끝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장인인 김한로는 양녕대군의 지시를 받들어 어리를 궁궐에 불러들이는 것에 협조하기까지 합니다. 어리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양녕대군은 어리를 동궁에 기거시키며 사랑 놀음에 빠져 살았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결국 이 일은 발각이 되고 마는데, 어리의 임신 때문이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태종은 노발대발하였답니다. 그냥 기생도 아니고 이번에는 조정 대신의 첩을 강제로 데려왔으니 왕실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리는 곽선의 첩이었습니다. 곽선은 양녕대군의 서슬에 눌려 어리를 빼앗기고도 그때까지 말도 못하고 지내왔습니다. 태종은 김한로와 어리 등을 유배시키고 이를 도운 양녕대군의 수발인력들을 죽여 버립니다.
자중하고 반성해도 모자랄 이때에 결정적인 충돌이 일어납니다. 양녕대군이 장문의 항의서를 태종에게 보낸 것입니다. 아버지도 여자를 거느리고 탐하였건만 왜 자신은 그러면 안 되냐, 나중에 자신이 왕이 된 후 어쩌려고 그러냐는 식의 협박에 가까운 항의서였던 것입니다.
결국 태종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세자폐위를 발표합니다. 처음엔 양녕대군의 아들을 세자로 올릴까 했었으나 후환이 생길까하여 셋째 아들 충녕을 세자로 삼았는데 이렇게 세종대왕이 탄생합니다. 그러면서도 태종은 한없이 울었다고 전해집니다. 양녕은 유배의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양녕은 유배를 가서도 기생을 부르는 등의 짓을 했고, 이 사실은 태종이 알게 됩니다. 그러나 양녕은 유배지에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 사이에 쫓겨나서 유배를 간 어리는 이 상황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을 매고 자결을 하고 맙니다. 얼굴이 예쁘다는 이유로 강제로 남편을 떠나 궁궐에 숨어살았던 어리입니다. 그리고 유배의 길에 오른 어리는 왕실이 엉망이 되고 양녕이 세자에게 쫓겨나는 상황에 이르자 자책이 심하였습니다. 어리는 그렇게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이런 풍파를 일으키고도 양녕은 골치 아픈 왕족으로 살아갔습니다. 전격적으로 짧은 기간에 왕에 오르게 된 세종이 죽은 뒤에 문종이 왕에 오르고 단종이 다시 왕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곧 세조의 반역으로 단종이 폐위되었습니다. 이에 양녕이 나서서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결국 단종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더구나 말년에 양녕은 또 다른 남의 첩을 건드리는데, 알고 보니 자신의 셋째 아들의 애첩이었습니다. 셋째 아들은 이 사실을 알고는 목을 매어 자결해 버립니다. 말년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양녕대군의 이야기였습니다. 어리의 죽음이 가련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