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8일부터 8월 3일까지 고구려 유적답사를 하면서 지나게 되는 지역의 역사를 두루 정리해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통화시 지역의 독립운동 유적에 대해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통화시는 고구려 답사를 할 때 한번쯤은 지나가게 되는 교통의 요지로, 제약업을 비롯한 화학공업이 발달한 번화한 도시입니다. 집안시는 통화시의 소속입니다. 혼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통화시는 집안시보다 규모가 큰 도시로 과거에도 우리 동포들이 많이 이주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도 많은 독립운동 유적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부민단과 신흥무관학교입니다.
1912년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에서 “부여의 옛 영토에 부여의 후손들이 부흥결사를 세운다.”는 뜻으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합니다. 초대 총장은 1907년 13도 창의군의 군사장으로 서울진공작전에서 총지휘를 맡았던 허위의 친형인 허혁이 맡았습니다. 이어서 이상룡이 총장이 되었고, 그 아래에 서무, 법부, 검무, 학무, 재무 등의 부서가 만들어지고, 지방 조직도 만들어졌습니다. 부민단은 만주에 있는 동포들의 자치를 담당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민족 교육을 실시했으며, 궁극적으로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민단은 1919년까지 활동을 했습니다. 1919년 4월 군정부가 성립된 것을 계기로 부민단을 모체로 한족회가 성립되며 발전적으로 해체됩니다. 부빈단 본부는 통화현 합니하(哈泥河)에 있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등이 길림성 통화시 유하현 삼원포에 설립한 신흥강습소에서 출발했습니다. 1912년 이회영 등이 통화현 합니화에 정착지를 확보해 이주하면서, 그곳에 학교 건물 8동을 신축하고 정식으로 학교를 설립합니다. 1913년 신흥중학교로 바뀌었고,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었는데, 점차 군사반에 전력합니다. 신흥중학교의 교사로 여준, 김창환, 여규형 등이 활동했고, 1914년 생도수는 약 40명이 있었고 이들은 18~25세 정도였습니다. 이들은 지리, 역사, 산술, 수신, 한문, 체조, 중국어를 학습했고, 군사훈련과 받으면서도 농사에도 힘썼습니다. 1919년 일본군 출신 지청천, 김경천 등이 망명해 신흥학교에 참여해 기존 시설이 부족해지자, 1919년 5월 류하현 고산자로 본부를 옮기고 신흥무관학교로 명칭을 바꿉니다. 하지만 합니하에 있는 기존의 학교도 분교로 계속해서 운영됩니다. 합니하의 학교는 초등군사반을 편성해 3~6개월 과정의 군사훈련을 시켰습니다. 류하현 고산자에는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간부를 양성합니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약 2천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북로군정서, 대한의용군 등에서 활동합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과 생도들은 청산리전투에서 큰 공을 세웁니다. 하지만 일본군의 보복으로 1920년 7월 신흥무관학교는 폐교됩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를 다시 세우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 검성중학원, 신창학교 등이 세워졌지만, 끝내 신흥무관학교는 다시 문을 열지 못합니다. 해방 후,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를 부활하기 위해 신흥초급대학을 세웠으나, 경영난으로 1951년 조영식에게 인수되었고, 1960년 경희대학교로 교명이 바뀌게 됩니다.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합니하 지역은 지금 현재 통화에서 백두산 방면으로 가기 위해 지나는 G11번 공로 주변에 위치한 광화진(光華鎭) 고려관자(高麗館子) 지역입니다. 통화시내에서 북북서 방면으로 23㎞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답사 도중 직접 유적지를 방문할 시간은 없지만, 이 지역에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를 아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