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미, 날아라 흰 고래여
‘한국 여성 시인보 100 년’ 연작 시
한경용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태어났다.
나는 은밀하게 흐르는 물결들의 선장
그러나 이따금 가슴 한 편에 있는 낭떠러지,
그 곳은 살기보다 죽기가 좋은 곳
우리 눈에는 물고기가 살고 사랑은 눈 동공에 사는 물고기의 먹이,
결국 두 눈에 흐른들 사랑만이 물고기들을 키울 수 있으리.
애린의 바람, 모진 사랑, 바다의 창고로 보내 포말이 된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 우리 가족은 집과 양계장과 향나무 정원과 바다를 은행에 차압당했다.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안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일며 용솟음 치곤 했다.
수정동 산동네 열 한 가구가 사는 피난 촌 같은 공동주택
언제나 소녀의 정착은 거두고 버리고 가고 잊고
머무르고 싶은 천막은 없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을 읽곤
눈 밑에서 한 뼘치 아래 아무도 찾지 못하게 숨어 있으리.
흰 고래 모비딕이 미완의 계절풍을 물고 오면
회심의 미소로 새벽에 떠나는 에이햅 선장,
너울성 파도에 갈매기 꾸억 소리,
나는 사라진 섬 하나 품고 있다.
그런 파도 한 마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아프도록 잊. 지. 못. 해 또다시 목마른 계절
내 앞의 문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두 개의 섬 사이사이 당신 같은
고래잡이들을 생각했다.
며칠만 고래가 되어 나신으로 안겼으면 좋겠다.
날렵하게 번뜩이는 칼 하나를 입에 물고 뱃머리엔 작살을 장착한 채,
고래인 나를 향해 끝없이 노를 저어 올 당신,
물새와 산새들이 불새 되어 나는 곳, 자살 그만 비석 위에 놓아둔 향과 촛불, 한 올의 동앗줄로 꽁꽁 묶여 훨훨 날아갈 소망, 그대의 갈비뼈하나 포켓에 넣고 손수건 한 장이 날린 곳으로, 번개치고 천둥치는 날이면 태종대로 달려갔겠다.
당신이 발 묶여 울음이 되고 궁국의 햇살은 이별이라
이미 터득한 머리칼을 흩날리자.
굶주린 짐승이 억세게 우는 바다에서 내 몸이 더 멀리 수평선까지 밀려갔다 밀려올 때 까지
'내가 미치도록 사랑한 한 남자'도
막다른 길에서도 만난 적 없는 그대여,
고래가 되지 못한 내 앞에서 굿바이로 잘 살고 있으라.
홀로 날개를 하강 하면 좋겠다.
“우리는 아무관계도 아니에요”
( 시인동네 07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