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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 스크랩 배를 매며/ 장석남
물방울(이선자) 추천 0 조회 45 16.08.30 00: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배를 매며/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말도 없이

등 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 부터 닿는다


사랑은

호젓한 부둣가에 우연히

별 그럴 일도 없으면서 넋 놓고 앉았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만드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함께

매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을 떠 있다



-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 2000)

.....................................

 

 지난 일요일 동시를 쓰는 김현숙 시인 집안의 혼사가 있어 서울에 다녀왔다. 고민환 김현숙의 큰딸인 은정 양과 박광호 엄혜숙의 작은아들인 민석 군이 서울대학교 호암교수회관에서 올린 결혼식이었다. 은정 양은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나와 서울사대부속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고, 민석 군은 같은 학교 경제학과를 나와 대한민국에서 가장 연봉이 높은 직장으로 알려진 곳에서 일하고 있다. 이 시는 그들이 보내온 청첩장의 첫머리에 첫째 연과 마지막 연을 빼고 인용한 글이었다. 그리고서 어느 시인의 사랑에 대한 통찰을 오래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저희 두 사람, 부부라는 이름으로 긴 여행을 시작하는 자리에 함께해 주시면 큰 기쁨이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사랑이 그렇게 갑자기 조용히 찾아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신부의 은사인 주례선생님은 이렇게 멋진 청첩장을 받고서 무척 흐뭇했다며 가르친 보람이 있다고 말했다. 14회 소월시문학상을 받은 이 작품은 사랑이 어떻게 오는지를 빼어난 서정적 감각으로 무척 아름답게 표현한 시다. 좋은 시를 읽는 느낌은 몸과 마음속 어딘가에 리듬을 타고 환해져서 음악처럼 살아난다. 사랑은 간절히 기다리는 게 아니라 넋 놓고 있다가 뒤에서 느닷없이 밧줄을 던지면 깜짝 놀라면서 그 줄로 배를 매듯이 거부할 수 없는 인연으로 맺어진다는 것이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모든 사소한 것들이 하나의 의미로 다가와 같이 묶여진다. 그리고 그런 것을 처음 알아 가는 것, 아무 의미 없던 것들이 새롭게 깨어나서 의미로 다가오는 이러한 것들이 사랑의 놀라운 힘이 아닐까.


  ‘배를 매보는 일은 이 세상에서의 참으로 드문 경험일 테지만, 시인의 고향이 덕적도라는 사실을 환기한다면 경험에서 우러나온 심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배를 매면서 사랑도 그렇게 우연히, 넋 놓고, 어찌할 수 없이 찾아오는 것임을 깨달았다. 한 사람이 사랑의 대상을 만나 그와 사랑을 시작했다는 것은 그동안의 모든 유동적이고 유보적인 상황이 끝나고 그 대상과 묶여지는 것을 의미하기에 혼자일 때와는 모든 게 달라진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개체와 개체만의 결합이 아니라 개체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사물, 심지어 시간까지도 함께 공유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배를 매는 행위가 밧줄로 구속하는 것이지만 배는 묶여서 구름이 빛을 가리는 시간과 잔잔한 일렁임이 크게 출렁이는 시간까지도 기꺼이 함께하는 것이다.


  이 시는 고등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도 수록되어있고, 같은 시집에는 <배를 밀며>라는 시도 있다. ‘내 안으로 들어오는 배를 밀어내 보냈는데도 내 가슴 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간절한 그리움의 대상을 말하는 시다. 이별을 의미하는 것처럼 읽히지만 결국은 사랑을 더욱 간절하게 하고 사랑의 큰 힘을 각성케 하는 시인 것이다. 이날 늠름하고 잘 생긴 신랑 박민석 군과 화사하고 어여쁜 신부 고은정 양의 행진 모습을 보노라니 세상의 모든 부러움을 그들이 다 안은 듯했다. 주례 선생님이 말씀하신 물질과 정신의 완벽한 결합체처럼 보여서가 아니다. 아파치인디언의 결혼축시 마지막 구절을 음유했다. ‘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행복하리라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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