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젊은 시절, 수도 생활의 장애를 극복하고 힘을 얻기위해 세 번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 첫번째는 6·25 전쟁이 일어나 피난길에 올랐던 22세 때의 일입니다.
20대 초반 통도사 강원을 졸업한 나는 대학에 진학해 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 면(面)에 대학생이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던 시절이었고, 우리나라에 대학교도 몇 개 되지 않을 때였습니다.
내가 당시에 그토록 대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출세나 명예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한문 공부를 하여 어느 정도 문리(文理)가 터졌으니 이제부터 현대학문을 배우자 그래서 순전히 한문으로만 이루어진 불교경전을 현대적으로 풀이하고 해석한다면 이 얼마나 좋은 일이랴!'
이렇게 생각한 나는 서울 동국대학의 입학 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서울로 향했는데, 때마침 6·25 전쟁이 터졌습니다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그만 안양에서 인민군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아지트인 동굴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너는 뭐하는 사람이냐?"
"중입니다. "
"중이 뭐냐?"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닦는 사람이오."
"이거 순 부르주아 아니야? 인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무위도식하는 족속들 아니야?"
그들은 점점 거칠어지면서 무지막지하게 대하였고, 나는 묵묵히 있었습니다.
더욱이 당시는 잡히는 젊은이들을 모조리 인민군 의용군 으로 끌고 가서 총알받이로 세울 때였습니다.
'아, 이거 잘못 걸려도 크게 잘못 걸렸구나. 이제 꼼짝없이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죽게 되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조금 있으니 정치공작대원인듯한 말쑥한 사람이 굴 안으로 들 어왔습니다.
당시 정치공작재원들은 학식도 있고 나름대로 교양이 있는 람들 중에서 뽑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나를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이구만. 팔뚝 좀 걷어 보지!"
그래서 옷을 걷어 팔뚝을 내보였더니 단번에 얼굴이 부드러워졌습니다.
"연비 자국이군요. 나도 불교신자요."
그러면서 내 팔뚝을 조심스럽게 만지더니 꿇어앉아있던 내 몸을 일으켜 세우고 의자도 갖다 주고, 그 당시만 해도 귀했던 사이다까지 대접하였습니다.
그리고 통행증을 하나 써주면서, '어디든지 가다가 인민군들이 잡으면 이 통행증만 보여주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차를 태워 드리겠다면서 기다리라고 하더니, 트럭이 한 대 오자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스님 가시는 데까지 잘 모셔 드려라."
그 연비 덕분에 안양에서 김천까지 편안하게 차를 타고 내려온 다음, 진주 집현산에 있 는 응석사(凝石寺)로 걸어서 갔습니다.
응석사에 도착했을 때는 매우 지친 상태였는데, 다행히 주지스님이 쌀밥 한 사발과 반찬 으로 간장 한 종지를 주었습니다.
나는 한 종지의 간장을 모두 밥에 부어 싹싹 비벼서, 사흘 굶은 사람처럼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밥그릇을 비우자마자 주지스님이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나에게는 주민증도 병적계도 없었기 때문에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여차하면 붙잡혀서 총알받이 노릇을 하거나 빨갱이로 몰려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라고해도 떠나지 않자 주지스님의 마음도 바뀌었습니다 .
"그렇다면 공양주(供養主) 소임을 맡아라." "예."
나는 열심히 밥을 짓고,설거지도 아주 깨끗이 했습니다.
주지스님은 만족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
"공양주 노릇, 아주 잘하는구먼."
며칠이 지나자 불공이 아주 많이 들어왔습니다.
주지스님은 나에게 불공 올리는 일을 거들 것을 명하였고, 독경을 남 못지 않게 하였던 나는 목탁을 치면서 유창하게 염불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지스님은 공양주를 그만두고 부전(불공 드리는 직책)을 보라고 하였습니 다.
얼마 동안 부전을 보다가 어느 날 문득 한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생에 대한 애착을 끊고, 무상대발심(無上大發心)을 하여 대도인이 되어야 한다.
기도를 하자. 기도를 하여 힘을 기르자. 7일을 기한으로 정하고 옴마니반메훔 기도를 하되, 잠을 자지 말자.
이렇게 결심하고 나는 부지런히 기도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앉아서 하다가 졸음이 오기 시작하자 서서 옴마니반메훔을 외웠습니다.
그러나 졸음은 정말 참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깜빡깜빡 조는 사이에 목탁은 손에서 미끄러져 나가 발등을 찧었습니다.
몇 번 발등을 찧고 는 '서서 하는 것도 안되겠다' 싶어 마당을 돌아다니며 염불을 했습니다.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
끊임없이 옴마니반메훔을 찾고 비몽사몽간에도 옴마니반메훔을 찾다가 6일째 되는 날, 은행나무 밑의 평상에 잠깐 앉았는데 그 즉시 은행나무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버렸습니다.
순간, 허공 전체가 나의 입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황금대왕이 자기가 들고 있는 병 속으로 무엇이든 '들어오너라' 하 확 빨려 들어가듯이, 허공이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꿈에서 깨어나자 그토록 기도를 방해하던 졸음도 저절로 사라져서 7일 기도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때마침 찾아온 마을 이장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주민증이 없는 것을 알고 만들어다 주었으며, 기도를 잘 마친 나는 더욱 도심을 발하여 정진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하면 힘을 얻게 되고, 생각하지도 않은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부디 수행을 하다가 뜻과 같이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러한 때에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다시금 마음을 굳게 가지고 기도를 하게 되면 힘이 샘솟게 됩니다.
기도로써 시련을 극복하여 불보살님께로, 그리고 불보살의 경지로 더욱 가까이 다가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의 기도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와 같을 때는 거듭 거듭 기도하여 도심(道心)이 걸림 없을 때까지 행하여야 합니다.
바로 그와 같은 경우가 나 의 두번째, 세번째 기도입니다.
나의 두번째 기도는 허공을 삼킨 첫번째 기도를 하고 한달 가량 지난 다음, 응석사 내원 토굴(內院土窟)에서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기도는 소리내어 염불을 한 것이 아니라, 7일 동안 단식을 하면서 부처님의 위대함과 불법의 깊은 진리를 고요히 관조하는 기도였습니다.
7일 단식이 끝나는 날,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응석사에서 대변을 보자 그 똥이 집현산 응석사의 10리 계곡을 타고 홀러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멕켄나의 황금계곡에 황금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나의 똥은 조금도 역겨운 냄새를 풍기지 않고 거대한 흐름을 이루어 흘러내려갔습니다.
내가 조실스님인 금오선사(金烏禪師)께 꿈 이야기를 하자, 스님은 아주 멋진 해석을 내려 주셨습니다.
"몸 속의 똥이 빠져나가는 꿈은 업장소멸(業障消滅)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똥이 골 짜기를 가득 채우며 10리 길이나 이루었다니 업장소멸이 얼마나 많이 되었겠느냐? 일타 수좌는 정말 기도다운 기도를 한 것이 틀림없구나."
진주 응석사에서의 두 차례 기도를 마치고 나는 외삼촌 진우(震宇)스님이 머물고 있었 던 전주의 조그마한 절로 가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마침 그 절에는 내가 어려서부터 그토록 읽고 싶어했던 일본어판 《세계문학전집》이 있었습니다.
경찰 간부 한 사람이 피난을 가면서 맡겨놓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책 속에 파묻혀 읽고 또 읽었습니다. 재미없는 것은 한 차례, 재미있는 것은 거듭거 듭 읽었습니다. 몬테크리스토 백작, 레미제라블, 플루타크의 영웅전, 비스마르크 등을 모두 탐독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넘어가기가 아까운 문장, 마음에 속 드는 글귀들은 대학노트에 촘촘히 적어 넣었습니다. 쓰고 쓰고 또 쓰다 니 어느덧 대학노트가 20권이나 되었습니다.
나는 그 노트 의 표지에 '문학의 자물쇠'라는 뜻으로 文學鎖談〉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혼자 문학도가 되는 꿈을 꾸어 보기도 했습니다.
'이만하면 나도 능히 글을 쓸 수 있겠구나 작가가 될까? 시인이 될까?'
그러나 전쟁은 나를 그 절에 있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1·4 후퇴가 시작되어 피난을 가야만 했고, 문학전집을 보면서 기록한 대학노트를 그 절에 버려둔 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저녁 노을, 수려한 경치를 볼 때마다 〈문학쇄담〉생각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트에 적어놓은 표현을 살짝 인용하여 가미하면 지금의 이 장면을 아주 멋진 문장 으로 묘사할 수 있을텐데‥‥‥
선방에서 참선을 한답시고 앉아 있으면 이 같은 생각들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거기에다 못 가게 된 대학 진학에 대한 미련까지 되살아났습니다.
자연 참선이 올바로 될 까닭이 없었습니다.
혼란 속에서 나의 발길은 해인사로 향하였고,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장경각(藏經閣)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담아 놓은 팔만 개가 넘는 대장경판!
'아, 부처님이야말로 세계에서 제일가는 작가로구나 세계에 4대 문호, 5대 문호가 있다 고 하지만 어찌 부처님과 비교할 수가 있으리.'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신심이 샘솟듯이 일어났습니다.
'그래. 이 장경각에서 기도를 하자. 이렁저렁 시적부적 세월만 보내는 중노릇을 해서는 안된다. 올바로 발심(發心)이 되지 않으면 공부의 진척이 있을 수 없다. 대발심(大發心)을 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기도해 보자.'
나는 해인사 스님께 기도할 것을 허락받고 7일 기도를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목탁을 천천히 치면서 천천히 '석가모니불'을 부르면 마음이 느슨해지기 때문에, 목탁을 빨리 치면서 빨리 '석가모니불'을 부르는 염불법을 택했습니다.
또한 당시는 전란 중이었으므로 적군의 표적이 된다는 이유 때문에 밤이 되면 촛불을 켜지 않고 향만 한 가치 피워 놓은 채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새벽부터 장경각에 있는 법보전(法寶殿)전에서 정성껏 기도를 하였지만 향불 하나밖에 없는 깜깜한 한밤중이 되자 졸음이 찾아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졸음을 쫓기 위해 장경각 경판 사잇길을 돌며 '석가모니불'을 찾았습니다.
깜깜한 장경각 안를 돌다가 조금이라고 졸게 되면 뽀족 튀어나온 경판의 모서리 부분에 머리를 부딪치게 됩니다.
깜빡 깜빡 졸던 나는 수없이 경판에 머리를 부딪쳤고, 부딪치고나면 정신이 번쩍 들어 다시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끼니때만 되면 당시 해인사에 계셨던 자비보살 인곡(仁谷) 스님이 어김없이 오셔 서 나의 귀를 당기며 재촉했습니다.
"가자. 밥 먹으러 가자."
목탁을 놓고 대중방으로 가서 얼른 밥 한술을 먹고는 양치질을 하고 화장실을 찾은 다음, 즉시 돌아와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이렇게 6일을 기도하고 저녁 무렵 소변을 보러 나왔는데, 마침 장경각 뒤쪽에서 지게에 물건을 한 짐 진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지게에 진 것이 무엇입니까?"
"송이요."
"얼마요?"
"2만원이오."
마침 나에게는 꼭 2만원의 돈이 있었습니다. 2만원을 모두 주고 송이를 몽땅 산 나는 부엌으로 가져가서 기쁜 마음으로 적도 굽고 국도 끓였습니다.
"야, 이게 진짜 기도다. 진짜 기도 회향(廻向)이다!"
나는 그 송이로 열심히 음식을 만들어 부처님 전에 올리고, 또 대중공양을 했습니다.
그 리고 이튿날 새벽, 3시에 기도 회향을 하고 새벽예불에 참여한 다음 7일만에 처음으로 등을 방바닥에 붙이자 곧바로 잠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꿈속에 우리 친척인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바랑을 짊어지고 나타났습니다.
"네가 아끼던 대학노트를 가지고 왔다. "
"정말입니까?"
너무나 반가웠던 나는 황급히 달려들어 스님의 바랑에서 노트를 뽑았습니다. 나의 글씨로 빽빽이 채워져 있는 20권의 대학노트! 기쁨에 겨워 열심히 공책을 넘기며 살펴보고 있는, 나의 도반인 창현(昌玄) 스님이 다가오더니 버럭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영 책 껍데기를 못 벗어나는구먼! 야, 선방에서 책을 주무르고 앉아 있으면 선방 망한다는 사실도 모르느냐? 에잇! 안되겠구먼."
창현스님은 나에게 달려들어 대학노트 20권을 모두 빼앗아 쥐고, 양손으로 확 잡아 찢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20권의 노트가 한번에 다 찢어지면서 콰르르 가루로 변해 버 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온몸을 감쌌습니다.
"야, 이놈아! 책을 보면 내가 봤지, 네놈하고 무슨 상관이냐?"
한바탕 싸우려고 벌떡 일어서다가 나는 한 생각을 쉬었습니다.
'에라, 책을 봐서 뭐할꼬? 치워 버리자. 본래 없었던 것으로 요량하지 뭐.'
그리고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사교입선(捨敎入禪), 문자를 버리고 참된 자기를 찾는 참선 공부에만 열심히 매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전에는 나의 바랑 속에 책이 반 이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틈만 나면 책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와 꿈을 꾼 다음부터는 학문에 대한 애착심이 남김없이 떨어졌습니다.
아울러 기도의 원력대로 발심이 올바로 이루어져서 참선수행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네번째 기도는 26세 때인 1954년 여름 오대산 적멸보궁(寂滅寶宮)에서 행하였습니다.
세번째 기도 이후 선방을 다니면서 부지런히 정진하였지만 아직 수행승으로서 부족한 것 이 많고 장애가 많다는 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나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결정코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굳센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중대 결단을 내렸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속가에 갈 사람이 아니다 중노릇 아닌 딴 짓을 할 사람도 결정코 아니다. 오로지 불법을 위해 살다가 죽을 몸인 것만은 분명한 것!
이 기회에 결정심(決定心)을 완전히 다져 놓아야만 한다. 연비를 하자. 손가락이 없으면 세속적인 모든 생각이 저 절로 뚝 끊어질 것이고 손가락 없는 나에게 누가 사람 노릇 시키려고도 않을테니‥‥‥‥
그래서 오대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막상 연비를 하기 위해 오대산으로 들어가기는 했으나 가자마자 성급하게 할 것도 아니고 하여,
여름 한철 석 달 동안 연비에 대한 생각도 점검할 겸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면서 열심히 정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대관령 꼭대기에 구름 한 점이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구름은 마치 내가 날아가는 것처럼 느껴졌 습니다.
'이 몸뚱아리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사람의 일생 또한 저 뜬구름과 같이 어디선가 왔다가 어디론가 가 버리는 것에 불과한 것. 이러할 때 깊 연(緣)을 심어 놓지 않으면 그야말로 허생허사(虛生虛死)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오대산과 같은 좋은 도량에 왔을 때 이 마음을 깊이 다지고 연을 심어야 하리.
이렇게 생각하고 그날 《능엄경》 제6권 사바라이장(四波羅夷章)의 연비(燃臂)에 대한 구절을 다시 한번 죽 읽었습니다.
내가 열반한 뒤에 어떤 비구가 발심하여
결정코 삼매를 닦고자 할진대는
능히 여래의 형상 앞에서
온몸을 등불처럼 태우거나 한 손가락을 태우거나
이 몸 위에 향심지 하나를 놓고 태우면
내가 말하는 이 사람은
비롯 없는 숙세의 빚을 한순간에 갚아 마치리니
길이 세간을 멀리 떠나 영원히 모든 번뇌를 벗어나리라
만약 이렇게
몸을 버리는 작은 인을 심지 않으면 무위도를 이룰지라도
반드시 사람으로 돌아와 그 묵은 빛을 갚으리니
내가 말먹이보리를 먹은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도다
若我滅後 其有比丘 發心決定 修三摩提 能於如來 形相之前 身燃一燈 燒一指節 及於身上 熱一香炷 我說是人 無始宿債 一時酬畢 長損世間 永脫諸漏 若不以此 捨身微因 縱成無爲 必還生人 酬其宿債 如我馬麥 正等無異
그리고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매일 3천배씩 7일 동안 기도를 드린 후, 오른손 네 손가락 열두 마디를 모두 연비(燃臂)하였습니다.
출세·명예·행복 등 사람 노릇하겠다는 미련을 손 가락 열두 마디의 연비와 함께 깡그리 태워 버리고, 나는 홀로 태백산 도솔암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6년 동안 조그마한 갈등도 없이 참선정진하면서, 아주 열심히 부처님 제자답게 살았습니다.
일평생과도 바꿀 수 없는 그 6년의 참된 공부! 그것은 네 번의 기도를 통해 얻은 힘이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갈등이 있으면 기도하십시오. 장애가 많고 공부가 잘되지 않으면 기도를 통해 거듭 발심하십시오.
불보살님께서는 틀림없이 큰 힘을 주실 것입니다.
나의 다섯번째 기도는 1960년 구례 화엄사의 4사자삼층석탑 앞에서 행하였습니다.
6년 동안 도솔암에서 수행한 후 청담스님 등의 권유로 태백산을 내려온 나는 지리산 쌍계사에서 한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비구승단(比丘僧團)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4·19로 물러 나게 됨에 따라, 한동안 움츠리고 있던 대처승들이 일어나 불교계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 불똥은 쌍계사에까지 번졌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며 쌍계사를 점령 하려는 대처승들에 밀려 우리는 화엄사로 옮겨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화엄사 또한 안전지대는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대처승들과 매일같이 싸울 일도 아니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부처님의 제자는 열심히 수행을 해야 한다. 기도로써 이 도량을 지키자.
부처님께서는 이곳을 틀림없이 정법(正法)의 땅으로 보호하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나는 7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낮에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므로 밤에만 기도를 했습니다.
저녁 예불이 끝나면 정성껏 달인 작설차 한 잔을 4사자석탑에 올리고 기도를 시작하여 새벽예불때까지 '석가모니불'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특히 그때 나는 살구나무로 만든 목탁을 치면서 '석가모니불'을 불렀습니다.
살구나무 목 은 아주 연하면서도 듣기 좋고 멀리까지 울려퍼지는 특징이 있었으므로, 내가 치는 목탁 소리는 구례읍 가까이의 마산면에까지 울려퍼졌다고 합니다.
마침내 기도 회향일인 7일째 새벽, 나는 '석가모니불'을 부르며 무아지경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지장암 노스님과 젊은 스님들이 올라와서 나에게 예배를 올리는 것 이었습니다.
"스님, 정말 장하십니다. 스님의 기도에 부처님께서 감응하셨음인지 큰 방광이 있었습니 다. 그 빛이 이쪽에서 솟아 멀리 천은사 쪽으로 높이 높이 뻗어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염불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방광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제트기의 꼬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같은 것이 탑 위에서 천은사 쪽으로 뻗어가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화엄사 밑의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예배를 하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스님, 오늘 새벽에 탑 주위에서 하늘로 치솟는 방광이 한 시간 이상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적이 어찌 그냥 생겨난 것이겠습니까?
저희들은 오직 스님의 도력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스님, 부디 이 화엄사에 오래 머물러 계십시오.
옳은 스님만 계시면 화엄사는 틀림없 이 자리가 잡힙니다.
저희들도 스님을 모시고 열심히 이 절을 지키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화엄사는 대처승과의 싸움이 없는 조용한 절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낮에는 토종벌들이 4사자탑으로 몰려들어 새까맣게 탑을 감싸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스님들이 통을 만들어 바가지로 이 벌들을 받았더니 3통 분량이나 되었으며, 이후 토종벌들은 많은 꿀을 스님들께 제공했습니다.
기도 끝의 방광은 화엄사를 무쟁(無諍)의 수도처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행자에게는 먹을 것이 저절로 찾아든다'는 옛말 그대로, 당시 먹을 것이 변변치 않았던 우리에게 토종벌들까지 스스로 날아와 보약 공양을 올렸던 것입니다.
출처: 일타큰스님저 기도영험담모음 기도(祈禱) 도서출판 효림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