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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교회사 (교수용)
[서론]
근세교회사는
연대로는 1648~1800년
사건으로는 웨스팔리아조약 ~ 프랑스혁명까지의 교회사를 말한다.
☞ 웨스팔리아조약 -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 있었던 30년간의 종교전쟁을 종식시킨 조약
☞ 프랑스혁명 -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시민혁명
이 시대의 전반적 흐름은
ㄱ. 이 시대는 종교개혁시대의 후기로 개혁이 성공한 나라는 교황권이 약해지고 왕권이 강해져 제왕신수설이 주장되어 새로운 문제점으로 떠올라 이에 대한 반동으로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이 나타나게 되었고
ㄴ. 이 시대에 종교개혁은 지속되었으나 그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고 철학사상은 강화되어 인간의 이성을 기준 삼아 성경을 비판하거나 신앙의 자유를 남용하여 형식적 교리적으로 타락하는 일이 발생하자 그 반동으로 부흥운동 등이 발생하였는데 그 예로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운동, 영국에서 일어난 메도디스트 운동 등이다.
☞ 제왕신수설 - 국왕의 권력은 신(神)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므로 의회나 국민이 이에 간섭할 수 없다는 주장
근세시대의 특징
사고적 특징 - 근세는 중세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즉 중세의 천상적, 내세적인 자유의 약속으로부터 지상적, 현세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과 투쟁이 일어났던 시대이다. 아쉽게도 근세에는 건전한 신학이 아닌 인간의 이성과 자율만을 강조하는 신학으로 바뀌어 가게 되었다.
따라서, 신율로 특징 지워진 중세와는 달리 근대와 현대는 인간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자율의 시대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신 중심의 사고에서의 인간 중심주의적인 사고방식에로의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는 블란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명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인간중심으로 인간의 존재를 규명하려는 예다.
이러한 근대신학의 변화는 앞서 일어났던 르네상스(문예부흥)와 자연과학의 발달이라는 새로운 운동들이 근대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문예부흥 - 14~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운동으로 학문과 지식을 부흥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신대륙의 발견, 지동설의 등장, 봉건제의 몰락, 상업의 성장, 종이·인쇄술·항해술·화약과 같은 신기술의 발명이 이루어졌다. 르네상스 정신의 시작은 인문주의(Humanism) 운동이었다. 즉 ‘인간성 연구’라고 정의될 정도로 인간중심적인 경향을 보였다.
☞ 자연과학의 발달 - 인간의 사고를 ‘중세적 신율적 이성’에서 근대적인 자율적 이성으로 전환시켜 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과학적 탐구는 성경의 초자연적 요소, 계시, 기적 등을 거부하는 비판적인 반종교적인 방향의 길을 열게 되었고, 자연과학과 이성이 인간사의 규범적인 힘으로 떠올랐고,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거부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 특징 - 특히, 중세시대는 카톨릭이 기독교 교리를 각 민족의 지배의 도구로 사용하였는데 종교개혁시대 이후 개신교들이 이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개신교는 그간 카톨릭이 교권과 속권을 다 차지하려고 시도할수록, 혹은 국왕이 교권을 침해하려고 군림할수록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저항하였다.
근세시대 문제점 - 근현대인들이 추구해온 자율, 해방, 창조성은 중세의 획일적인 신학구도 속에 사로잡혀있던 것과는 달리 신학과 철학, 그리고 정치, 사회 온 영역에서 다원화현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근세적 다원화 성향은 교회분열의 원인이 되었고, 심지어 타교파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성전(聖戰)이라는 명목아래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 예) 36년간에 걸친 프랑스 위그노전쟁(1562-1598), 20년간에 걸친 영국혁명 또는 청교도혁명(1620-1640), 30년간에 걸친 종교전쟁(1618-1648)이 발생됨.
근현대교회사의 사상적 흐름
근세시대의 현상인 자율과 이성과 개인주의와 세속화로 인한 합리주의 성향적 흐름으로 인하여 소시니안주의나 합리주의 그리고 계몽주의 시대사조로 인한 사회병리 현상들이 교회와 사회와 정치 가운데 속속히 드러나게 되었다. 신학적인 면에서 보자면 중세의 획일적인 신학구도 속에 사로잡혀있던 사람들이 진정한 신학과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처음으로 고민하기 시작하다 보니 각자의 입장에서 성경과 전통을 해석함으로써 신학의 다양성을 가져오게 되었고, 교회의 가르침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신학적 분열이 거의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긍정적으로는 이러한 일련의 새로운 사조의 등장은 당시 프로테스탄트가 새롭게 자리매김을 하는데 효과를 가져와 신앙고백주의적 정통주의, 경건주의, 퓨리탄운동, 복음주의적 부흥운동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진정한 교회관을 세워가는 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 소시니안 - 탈정통주의, 삼위일체설부정,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단
제1장 퓨리탄 시대의 영국
1. 영국의 청교도 운동
[서론] 영국의 헨리 8세(Henry VIII)가 이혼문제로 로마 교황청과 대립하다가 교황권의 통제를 받지 않는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를 설립했다. 즉 영국의 종교개혁은 다분히 정치적 차원이어서 카톨릭적일 뿐 아니라 종교는 정치의 도구여서 이 요소들은 구체적이고 성경적인 개혁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만을 안겨다 주었고 여기서 시작한 것이 청교도운동이다. 많은 핍박과 순교가 있은 후 1543년 크롬웰을 위시한 청교도들은 왕당파를 물리치고 집권하여 청교도의 시대를 열어가게 되었다.
1) 청교도의 정의 및 의의
① 청교도(puritans): 영국교회의 종교개혁을 신학적, 형식적, 제도적으로 철저하게 하려고 한 개신교인들
② 청교도 운동: 영국국교회(성공회) 내의 카톨릭적 요소들을 제거, 미신적 행사를 타파, 교회를 정화하려는 운동
③ 의의: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반국교적 신앙운동
④ 청교도의 교리(특색) 및 생활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 강조: 말씀중심, 신본주의, 정통적 신앙, 열정
⒝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강조: 하나님의 영광, 주일성수, 근면, 성실, 정직, 노동, 교육, 가정, 자연(창연)예찬
⒞ 정교분리 강조: 민주적 장로교회, 교회의 독립
청교도주의 정의
순수한 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을 주장하는 영국교회가 전제정치에 반항하고 정교분리를 강조하며, 종교적 자유를 주장하고 아직도 카톨릭적 제도 관습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대한 반동 개혁운동이다. 특징은 의로우신 하나님을 내세우며 엄격하고 순결한 생활태도를 강조하면서 점차 율법주의적 경향을 띠기도 하였다. 그들은 엄격한 자기훈련을 강조하고 확고하게 안정된 의무와 책임을 촉구한다.
청교도들의 자유교회
신학적으로 칼빈주의였으며 역시 칼빈의 제네바교회에서 많이 모방해왔다.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 장로교회의 입장에 입각하여 제정된 것이다. 청교도들이 정교분리를 주장한 것은 교회는 결코 국가의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내부적으로 행정적으로 민주적이며 자유로워야 하며, 영국의 민주화에 기여하였다.
청교도주의 교리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히 여겨 성경에서 그들의 교리와 생활의 근거를 찾았다. 합리주의자나 신비주의자들처럼 치우치지 않고 전통적인 신앙과 열정을 함께 강조하고, 예배의식을 개혁하며, 예배 순서 중 말씀을 가장 중시했다. 그것은 말씀을 듣고 회개한 심령만이 바른 기도와 찬송 헌신 등을 드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만이 가능하며 구원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칼빈주의에 굳게 섰다.
성경은 문자적해석 경향이 많았고, 쾌락에 제한을 가하여 건전한 가정을 보편화시켰으며, 성실과 근면의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물질과 시간낭비를 싫어하고, 오락을 멀리하였다. 이처럼 거룩을 강조한 결과 자연히 엄격하고 억누르는 도덕적 훈련이 강조되었고 율법주의와 바리새주의적 성향을 띠고 하나님의 공평함과 정의로움에 치우쳐 사랑과 자비와 용서가 부족한 경향으로 기쁨이 결여된 면이 있다.
청교도의 사회적 영향
영국인의 마음속에 성경적인 정신을 심어주었다. 가정적인 온화함 인격존중 폭넓은 인간관계 겸손함, 유머, 동정심, 지적인 성향 등 영국의 교육과정에 끼친 영향이 크다.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 역시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고, 사치스러운 지출과 세상적인 쾌락을 절제하고 강인한 추진력으로 자본주의 기업정신과 공업을 발전시키는데 공헌하였다.
2) 청교도의 기원
① 헨리8세 시대에 취리히에서 개혁주의 사상을 배우고 돌아온 존후퍼가 소개하고 실천(교회제단 설치 반대, 임직시 제복 착용 반대)하고 메리 여왕 때 처형.
② 메리 여왕 박해 시에 스위스 등지로 피난갔던 개신교인들이 개신교적 교육을 받은 엘리자베드 여왕이 즉위하자 800여명이 귀국하여 칼빈주의적 개혁운동을 시작.
③ 켐브리지 대학이 개혁운동의 중심이 됨(토마스 카트라이트 교수)
④ 엘리자베드 여왕의 말기에는 청교도가 전 개신교 세력의 과반수가 됨.
⑤ 엘리자베드 여왕의 뒤를 이은 제임스1세 즉위(1603년)로 영국은 퓨리탄의 시대가 되었다.
☞ 메리여왕 - 개신교를 박해한 왕, 1553년에 왕위에 오른 메리는 로마교회를 부활시키고 교황권을 재확인하였고, 이때 개혁파 성직자가 2,000명이나 사형을 당하였다.
3) 청교도운동의 전개
① 천인의 청원: 제임스 1세에게 퓨리탄이 주축이 된 800명이 개혁안을 제출(목사의 타임지 겸직반대, 로마교회풍의 의식개혁)
② 흠정역 성경(King James Version) 개역
③ 신대륙 이주: 제임스 1세가 국교주의를 택하여 개신교인들 박해, 2만 여명 신대륙(미국)으로 이주, 메이플라워호(1620년).
4)청교도의 지도자들
① 존밀턴(john milton, 1608-1674): 런던 출생, 1625년 케임브리지대학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단정하고 수려한 용모와 청순한 생활태도 때문에 ‘크라이스트대학의 숙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그녀는 크롬웰의 비서관으로써 왕정복고를 반대하여 투옥되었다. 옥중 저서로는 "실락원" "복락원"등이 있다.
☞ 크롬웰 - 경건한 칼뱅주의자로 청교도혁명 당시 국왕 찰스 1세에 맞선 의회진영의 유력한 장군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포괄한 공화국의 호국경(섭정)을 지냈고, 종교적 관용(신앙의 자유)의 가치에 대해서도 깊은 신념을 갖고 있었다.
② 존번연(John Bunyan, 1628-1688): 1628년 영국 베드퍼드의 엘스토우에서 대장장이였으며, 청교도인 메리와 결혼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1657년 독립 목사가 된 번연은 설교를 성실히 하였지만, 국왕인 찰스 2세는 영국국교회(성공회)를 제외한 교파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침례교도인 존 버니언은 감옥에 갇히는 탄압을 받았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 천로역정"이 있다(1678년).
☞ 성공회 - 16세기 잉글랜드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 교회"(English Church)에서 공식 명칭을 "잉글랜드 성공회"(Church of England)로 불러왔으며, 초기 개혁교회에서 파생된 만큼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개신교적 전통이 존재하나, 사도들의 성사(주교제도)와 상당 부분 천주교의 교리와 관행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륙의 개신교와 비교가 된다. 캔터베리 대주교는 잉글랜드 성공회의 최고위 성직자이자 세계 성공회 공동체의 명예상 대표로서 활동한다.
③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 1636년 성공회의 신부로 청교도혁명 때는 의회파에 속하여 크롬웰군의 군목 ·고문으로서 일했다. 왕정복고 후, 찰스 2세가 궁정사제로 선임하고, 성공회 감독직에 임명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비복종파(非服從派)에 공동보조를 취하였다. 성공회와 청교도의 중간에서 조정을 시도, 《공도문(公禱文)》을 개정하였는데, 사보이 종교회의(1661)에서는 수용되지 않아, 온건한 반(反)성공회주의자가 성공회 내에 머물 수 있도록 하는 데 실패하였다. 리처드 백스터는 청교적인 부분은 있으나 성공회와 청교도 즉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조화에 노력하고자 했던 신학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다분히 위험적인 신앙의 노선이 있었음이 보인다.
④ 존 오웬 (John Owen, 1616-1683): 웨일즈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오웬은 '청교도의 왕자'라고 불린다. 그의 전집(Works)은 건전한 가르침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면 제일 먼저 택해야 할 책들이다. 현재 그의 글들은 25권으로 나와 있다. 그의 전집은 영어로 된 신학서의 최대 보고이다. 오웬은 국교회 교사에서 장로파로 전향, 옥스포드 대학 부총장으로 일을 하다가 왕정복고 후 은퇴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히브리서 주해" "그리스도의 영광" "죄의 억제" 등이 있다.
2. 영국의 성경 번역
영국에 복음이 들어간 것은 3세기 이전이었으나 안정된 번역판 성경인 흠정역이 나오게 된 것은 청교도시대였다. 성경번역사업이 중요한 것은 일반 성도들이 자국어로 된 말씀을 접할 수 있으며, 성경만 읽어도 카톨릭이나 이단 등의 잘못된 교리는 사라질 수 있다.
1) 존 위클리프역 성경 - 최초의 영어번역판, 신구약 라틴어 판, 영역(1382년). 150년간 사용, 라틴어 성경에 근거했고, 오당시로서는 편리하고 대단한 것이었지만 오래된 사본 참고들을 사용치 않은 약점 있이 있어 이를 보완한 틴데일역이 나오게 된다.
2) 틴데일역 성경 - 독일에서 신약이 번역되었고, 구약을 포함한 전체 번역본은 1535년에 나왔다. 틴데일은 희랍어어 능통하고 7개 국어를 구사하며 여러 번역본들을 참고하여 근대어 번역성경이 나오기까지 문체와 내용에서 줄 모본이 된 번역성경이다.
3) 카버데일역 - 마일즈 카버데일이 토마스 크롬웰의 도움으로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영역성경 발행하여 국왕 헨리8세에 바쳤음, 틴데일의역에 의존하면서 완성되지 못한 부분은 라틴역, 루터독일역을 참고하였다.(1535년)
4) 메투역 - 틴테일역의 빠진 부분 보충(1537년), 틴데일역의 개역이라고 볼 수 있다.
5) 대성서 - 헨리 8세의 명령으로 카버데일이 착수한 메튜헨리역의 보충(1530-1539). 교회 강단용으로 사용
6) 제네바성경 - 일반회중용, 박해 시 제네바로 망명한 위팅함 등이 번역, 절 구분, 청교도가 애용(1557년)
7) 감독성서 - 대감독 파커와 8인의 감독이 번역(1568년), 강단용인 대성경과 대중의 제네바 성경을 하나로 대신하기 위해 개역작업 끝에 나온 성경으로 대성경의 본문을 약간 수정하고 외경은 대성경과 같았으며, 난외주나 절 구분 등은 제네바 성경을 따랐다.
8) 로마 교도역 - 신약(1582년), 구약(1619년) 독일에서 번역
9) 흠정역(KJV) - 제임스 1세 때 54인의 학자가 3년간 번역(1611년), 이 번역성경은 틴데일, 커버데일역을 주요 하고, 여러 역본과, 희랍어사본, 히브리어사본도 크게 이용, 랭스신약과 루터의 독일어 성경도 참고 되었으며, 언어학적 문학적인 세련미도 엿보였으며, 철자문제나 번역 등의 문제점도 있었으나 250년 이상 영어시용권에서 성경으로 영광을 누렸다.
☞ 흠정역 성경(KJV) - 영국 제임스 1세가 영국 성공회에서 사용하도록 지정한 공식 성경으로 역사상 1538년, 1568년, 1611년에 출간한 3가지 중에서 마지막에 공인된 1611년판 킹제임스 성경을 흠정역 성경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킹제임스 성경은 성령의 완전한 영감으로 단번에 번역된 책이 아니요, 다른 번역서와 같이 사소한 수정과 변경을 지속해 온 많은 성경 역본 중 한 권이다. 따라서 흠정역을 유일무이한 성경이라고 절대시하며 흠정역만 읽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등의 고집은 타당하지 않다. 흠정역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은 좋으나, 다른 성경을 모두 사단이 변개했다는 식의 주장은 바르지 않고, 더구나 한글 흠정역은 초창기 급하게 제작되느라 문제가 많았다. (흠정欽定 : 황제가 제도 따위를 손수 제정하는 일이나 그 명령으로 된 제정을 이르던 말)
제2장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회의
[서론] 장로교의 핵심된 교리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이에 따른 요리분답이 복잡한 정치적 양상을 띠고 작성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종교개혁 이후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개신교의 중요한 교리적 지침서가 되었으나 보다 일목요연한 교리서가 필요했다. 그래서 기독교강요의 아들 격으로 탄생한 것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으로 장로교 발전과 체제에 커다란 유익을 주었다. 이 고백문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 장로교회에서 신앙과 교육의 표준으로 사용하고 있다.
1) 배경 및 동기 - 영국 찰스 1세 때에 의회를 장악한 퓨리탄 의원들이 결의하여 웨스트민스터에서 연 새로운 종교회의를 말한다.
찰스 1세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의회를 탄압하고 의회소집 금지(1629-1640), 의회가 세금, 군비징수를 위해 의회 소집했으나 그의 정책을 공격하자 왕은 3주 만에 의회를 해산했다. 그러나 정치 종교적 자유를 내건 스코틀렌드 반란으로 의회 없는 통치가 중단되었고, 그 해 국방비 지출을 위해 의회를 재소집하자 의회는 캔트베리 대주교 로드의 투옥, 감독정치 폐지, 새로운 종교회의를 웨스트민스터에서 개최키로 의결하였다.
2)회의 목적
① 영국 교회의 새로운 신조, 정치, 의식의 제정 위해
② 이를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까지 획일화시키기 위함.
3) 회의 기간 - 1643년 7월 - 1649년 2월까지
4) 장소 -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5) 회원 - 총 155명(목사:121명, 상원의원: 10명, 하원의원: 10명, 기타: 4명).
6) 결의 - 영국교회의 신조[39개조]를 수정하다 중단하고 아일랜드 신조를 기초로 새로운 [웨스트민스터 신조]작성하였고, 내용은 ①예배법 ②교회정치 ③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④대소요리문답서 등이다.
7)의의 - 퓨리탄(청교도) 운동이 한국에 미친 영향을 매우 크다. 칼빈주의에 따른 교리체계, 전세계 장로교회가 채택, 한국은 1917년 9월 1일 제 6회 총회에서 수정 채택, 1646년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제정된 표준문서 중 주요 부분이 되었다.
1. 배경 및 동기
영국 찰스 1세 때에 의회를 장악한 퓨리탄 의원들이 결의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연 새로운 종교회의다.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1643년 영국 찰스 1세 때 영국의 웨스트민스터에서 모인 회의로, 기간은 1643년 7월 1일부터 1649년 2월 22일까지이며, 회원은 성직자 121명, 보좌역으로 상원의원 10명, 하원의원 20명, 기타 4명으로 도합 155명이었다. 이 회의를 통하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교회정치, 공중예배를 위한 지침이 마련되었다. 이 세 가지 문서들은 장로교에서 대작으로 꼽히는 것으로 칼빈주의를 잘 요약하고 있다.
2. 회의 전 정치적 상황
1) 찰스 1세의 등극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만큼 왕권신수설로 자신을 높였으며 행동은 전제주의적이었다. 그는 대중의 정서적 동향을 이해할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는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고 납세 거부자를 투옥하였다. 궁정목사인 맨워링은,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왕이 부과한 세금을 거부하는 자는 저주의 위험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의회는 맨워링을 구금과 벌금형에 처할 것을 판결했으나 찰스 1세는 그를 사면하고 주교로 승진시켰다. 이것 때문에 왕과 의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1629년 드디어 왕은 의회를 해산시킨 후 스스로 통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종교·정치적 전망이 어두워지자 청교도들은 절망하기 시작하여 아메리카 이주를 계획하고 1628년 메사츄세츠로 이민하기 시작하였다.
2) 스코틀랜드의 반란
찰스 1세가 의회 없이 통치한 기간은 영국이 상당히 번영하던 시기였으나 그것은 스코틀랜드의 반란으로 중단되었다. 1637년 윌리엄 경의 건의로 찰스는 스코틀랜드의 장로교에 구교회에서 사용하는 예배의식을 강요하였다. 이에 대하여 1638년 스코틀랜드인들은 그들의 정치·종교적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죽기까지 싸우겠다고 하는 국가 계약을 채택하였다. 찰스 1세는 이것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대를 일으켰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는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의회를 소집하였다. 의회는 찰스 1세가 가지고 있던 정부의 기능을 제압하고 왕이 제정한 불합리한 세금을 불법화시켰고, 의회를 해산할 수 있었던 왕의 권리는 의회의 용인 없이는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3. 웨스트민스터 회의
1) 회집
의회는 계속하여 개혁안을 추진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에 보다 합치되고, 영국 국교회를 스코틀랜드 국교회 및 해외의 다른 개혁교회들과 보다 더 일치되도록 하는 교회체제를 수립하고자 한다는 의회의 취지를 선언하였다. 이 계획을 보완하려는 목적으로 의회는 학식이 많고 경건하며 분별력 있는 성직자들로 구성된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는 의회에서 그들에게 제기하는 주제들과 안건들을 협의하고 조언하는 것이 임무였다. 이 회의는 121명의 성직자들과 동등한 논쟁 및 투표권을 지닌 보좌역들로서 10명의 상원의원 및 20명의 하원의원들로 구성되었다. 스코틀랜드 국회에도 위원 파견이 요청되어 4명의 성직자와 2명의 장로들이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2) 성격 및 결과
웨스트민스터 회의는 교회 재판소도 아니었고 교회적 권위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이 회의는 종교개혁 사업의 일체성과 통일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소집된 협의 기구로서 행정 당국자들에게 조언과 안내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회의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내에서의 종교 문제의 일치를 약속하고, 감독제를 반대한다는 내용의 '엄숙 동맹'과 관련되어 있었으며 그 문서를 승인하였다. 처음에는 국교회의 신조[39개조]를 수정하다 중단하고 아일랜드 신조를 기초로 새로운 [웨스트민스터 신조]작성하였다.
이 회의는 1644년 의회에 예배지침과 장로교 교회 정치체제를 제출하였다. 1646년 회의는 그 유명한 신앙고백서를 준비하여 제출하였는데, 이를 1647년 스코틀랜드 총회가 받아들였고 이후 스코틀랜드와 미국 장로교의 표준이 되었다. 또한 의회는 1647년 두 개의 대소요리문답을 완성하였다.
왕권신수설 [王權神授說] - 국왕의 권력은 신(神)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므로 의회나 국민이 이에 간섭할 수 없다는 주장, 왕권신수설은 유럽근대초엽에 전개된 정치학설로서 군주권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크리스트교 개념에 의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 형성과정은 중세의 군주권은 신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성경에 “시이저의 것은 시이저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는 것을 근거로 정신적 영역에 있어서는 교황이 최고권을 가지며, 세속적 사항에 관해서는 신성로마황제가 최고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이 신앙고백은 33개의 장으로 되어 있으며, 지금도 그 완전한 형태가 사용되고 있다. 또한 이것은 현대에 널리 사용되는 기독교 교리의 구분법인 서언, 성경, 하나님, 인간, 그리스도, 구원, 교회, 최후의 일들 등의 순서로 되어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청교도들이 가지고 있던 성경적 계시의 도식을 원숙하고 가장 신중하게 공식화한 것이다. 이것은 칼빈주의에 있어서 최후의 가장 위대한 신조였으며, 지적인 면과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 '기독교강요'의 훌륭한 자녀이다. 그러므로 시대가 변하고 신앙 형태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장로교 교회들은 예외없이 이 신앙고백이나 혹은 이 신앙고백을 약간 수정한 형태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2)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 문답서
대요리문답은 설교 해석을 위한 것이고 소요리문답은 아동의 교육을 위한 것으로, 이것들은 언제나 칼빈주의의 가장 유명한 해설서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의 주된 특성은 모든 인류의 뿌리인 최초의 인간으로부터 원죄를 도출시키는 견해 외에도 행위의 계약과 은혜의 계약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행위 계약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류 종족의 대표인 아담에게 그의 후손들을 포함하는 분명한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아담은 후손들의 대표로서 자신의 불순종에 의하여 자신을 위할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한 언약을 상실하였다. 행위 계약이 실패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계약을 체결하셨다.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작정 문제에 있어서 타락 후 예정설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죄를 인간 자신의 행위로 분명히 설명하고 인간의 파멸에 대한 인간의 실제적인 책임을 나타내고 있다.
근년에 일부 장로교회에서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채택된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역사적 문서로 평가하고 있기도 하지만 세계 대부분의 장로교회에서는 이것을 신앙과 교육의 표준으로 삼고 있다. 퓨리탄(청교도) 운동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한국은 1917년 9월 1일 제 6회 총회에서 수정 채택, 1646년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제정된 표준문서 중 주요 부분이 되었다. 이처럼 웨스트민스터 회의와 그 산물들은 장로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서를 작성하여 교단끼리의 분열과 분쟁을 막아 나가야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목차
제 1장 - 성경에 관하여
제 2장 - 하나님과 성삼위일체에 관하여
제 3장 -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관하여
제 4장 - 창조에 관하여
제 5장 - 섭리에 관하여
제 6장 - 사람의 타락, 죄, 형벌에 관하여
제 7장 - 사람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에 관하여
제 8장 -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하여
제 9장 - 자유의지에 관하여
제10장 - 효력 있는 부르심에 관하여
제11장 - 의롭다 하심에 관하여
제12장 - 자녀로 삼으심에 관하여
제13장 - 거룩하여짐에 관하여
제14장 - 구원적 믿음에 관하여
제15장 - 생명에 이르는 회개에 관하여
제16장 - 선행들에 관하여
제17장 - 성도들의 끝까지 견딤에 관하여
제18장 - 은혜와 구원의 확신에 관하여
제19장 - 하나님의 법에 관하여
제20장 -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관하여
제21장 -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
제22장 - 합법적 맹세와 서원에 관하여
제23장 - 국가의 위정자에 관하여
제24장 - 결혼과 이혼에 관하여
제25장 - 교회에 관하여
제26장 - 성도들의 교제에 관하여
제27장 - 성례들에 관하여
제28장 - 세례에 관하여
제29장 - 주의 만찬에 관하여
제30장 - 교회의 책벌들에 관하여
제31장 - 대회들과 협의회들에 관하여
제32장 - 사람의 죽은 후 상태와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하여
제33장 - 마지막 심판에 관하여
제3장 근세철학의 기원
근세철학의 배경
근세철학이 태동하게 된 배경은 문예부흥과 종교개혁의 끼친 영향이 크다. 문예부흥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일으킨 운동이었다. 즉 자연을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데서 탈피하여 그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관찰·연구하고 실험 및 활용하는 대상으로 보게 된 것이다.
이어서 발생한 종교개혁은 인간이 교회의 속박을 벗어나 정신세계에 자유를 선언하게 하였다. 즉 카톨릭에 매여서 정신적 자유를 잃고 획일화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안팎에서 일어난 두 운동은 철학 즉 인간의 위치와 사실을 발견하려는 이성의 중요성에 대해서 엄청난 변화를 주었으며, 기존의 스콜라주의는 파괴되고 새로운 우주관과 인생관이 대두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근세철학의 기원인 것이다.
근세철학의 큰 틀은 대륙의 합리론(이성 낙관주의)과 영국의 경험론(경험에 근거한 지식)으로 나뉘어진다. 이 두 주의는 18세기의 계몽주의를 등장시켰고, 근세철학과 과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근세철학은 이전의 체계에 반발하여 절대적인 권위를 인간 이성에 두고,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학에 있어서는 기본 교리들이 무너지고 인간 이성이 우위에 서는 등 무신론의 흐름으로 이탈하게 되었다.
☞ 스콜라주의 - 중세기 특히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완성되어 '중세철학'이라고 불릴 만큼 중세기를 풍미한 철학이다. '스콜라'(Schola)란 라틴어로 학교를 뜻하는데 학교에서 가르치던 학문은 신학과 철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철학은 기독교를 보다 합리적으로 설명하며, 신앙의 근거와 동기를 입증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였기에 '기독교철학'이라고도 불렀다. 이 철학을 통하여 철학과 신학은 조화 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는데 이를 스콜라주의라 부른다. 고전2:1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는 바울의 사상과 배치되는 주의다.
☞ 계몽주의 - 지식수준이 낮거나 의식이 덜 깬 사람들을 깨우쳐 인류의 보편적 진보를 꾀하려 한 이념으로 신이나 교회의 권위에 바탕을 둔 특권이나 제도에 반대하고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를 제창하였으며,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자연과학의 발달
중세 말기의 실재론(realism)과 유명론(nominalism)의 논쟁은 결국 유명론의 승리로 끝났다. 유명론은 경험철학을 이끌어내었고, 그것은 이전의 독단적 절대주의를 배척하는 대신 실험·관찰의 방법을 도입했다. 13, 14세기에는 사물에 대한 실험적인 연구가 계속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으로 또는 비밀리에 행해졌는데, 이들은 바로 연금술사(鍊金術師)이다. 그들은 실제적이고 실용가치가 있는 것, 즉 '돈이 되는 것'을 만들어내기에 골몰했으며, 지식을 구하려는 동기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연구하는 과정을 통하여 많은 지식을 축적하게 되었고, 그것은 근세 과학의 발전을 위한 훌륭한 토대가 되었다. 이 당시에 이루어진 업적들로는 계산법의 발전, 화약, 나침반, 인쇄술의 발명, 원양항법의 발젼, 지동설의 탄생 등이 있다. 피사의 레오나르도 피보나치(L.Fibonacci 1170-1250)는 1202년에 「계산론」을 저술하였고, 네덜란드의 스테빈(S.Stevin 1548-1620)은 소수(小數)를, 스위스의 뷔르기(J.Brgi 1552-1632)는 대수(對數)를 발견하였다. 또한 네덜란드의 할렘(Haarlem)의 승원(僧院)에서는 1446년 이전에 활판(活版)인쇄를 하였고, 독일의 구텐베르그(1400-1468)와 영국의 캑스톤(1422-1491) 등이 인쇄업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런 배경 속에서 코페르니쿠스(1473-1543)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천체의 운행을 명확히 분석하여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지동설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것을 실증하지는 못했다. 그것을 다시 연구한 사람이 브루노(1543-1600)인데, 그는 범신론적 철학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지동설을 입증한 것은 갈릴레오(1564-1642)인데, 그는 「별의 사자」, 「2대 체계대화」 등의 저술을 통해 지동설을 주장하였다. 한편 케플러(Keppler 1571-1630)는 태양으로부터 유성의 궤도, 시간, 거리를 규정하는 법칙들을 발견하였다. 이들 이후에는 뉴튼(1642-1727), 보일(R.Boyle 1627-1691), 데카르트, 파스칼, 호이헨스(1629-1695) 등이 활약하였다.
☞ 실재론(realism) - 중세를 대표한 철학이론, 즉 철학에서 "실재론" 혹은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란 "세계나 자연 따위가 주관의 인식 작용과는 독립하여 외부에 실체로서 존재하며, 우리는 외부의 세계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고 또한 탐구할 수 있다"는 입장을 가리킨다. 가령 만물의 배후에 영적세계나 인식불가한 물리적 실재가 있음을 포함시킨다는 인식론의 하나다.
☞ 유명론(nominalism) - 근세를 대표한 철학이론, 실재론과 대립된 주장으로 보편(普遍)과 개체(個體)의 관계에 대해 보편이 우선해서 존재한다고 하는 실재론에 대해, 개체가 우선해서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과학 연구에 촉진제가 되었지만 신학과 결별한 결과 유물론의 탄생 배경이기도 하다.
근세철학 요약
1. 서설
1) 문예부흥 -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창연)눈을 뜨게 함
2) 종교개혁 - 로마교회(카톨릭)의 교리와 전통의 속박을 풀고 개인의 판단권을 인정
3) 근대철학 - 상기 개혁운동의 영향으로 철학 역시 나름대로 우주와 인생을 새롭게 해석하려 함.
2. 과학의 발달
1)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 - 폴란드 천문학자, 태양중심설, 지동설 주장
2) 케플러(Kopler, 1571-1630) - 독일 천문학자, 행성 운동의 세 법칙 발견
3) 브루노(Bruno, 1548-1600) - 이탈리아 철학자, 태양 중심설에 의한 철학, 범신론
4) 갈릴레오(Galileo, 1564-1642) - 이탈리아 물리학자,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학문적으로 증명, 지동설
5) 뉴우튼(Newton, 1642-1727) - 영국의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 만유인력법칙 발견.
☞ 천동설(지구중심설) -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기 전인 16세기까지 일반적으로 인식된 우주의 구조에 관한 견해로 지구를 중심하여 천체가 돈다는 설이다. 그러나 정밀한 천체 관측법이 등장하여 혹성의 불규칙한 운동이 발견되자, 우주의 여러 원운동이 합성되었다는 '동심천구설'(同心天球說)이 등장하지만 설명에 미흡하여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에 의해 최초로 지동설이 주장되었고, 후에 코페르니크스에 의해 재주장되었다.
☞ 지동설(태양중심설) - 태양이 천체의 중심이여 지구가 그 주위를 도는 혹성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아리스타르코스는 단순한 논거로 접근했는데 거대한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보다는 반대의 경우가 더 자연스럽다는 논리적 근거였다. 보다 과학적인 지동설은 바로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하지만 지구가 움직이는데도 날아가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는 등 역학적 근거는 빈약한 것이었다. 그 후 케플러(J.Kepler)에 의해 별들 사이에 자기장에 의한 인력(引力)이 있으며 혹성은 원운동이 아니라 타원 운동을 한다는 혹성의 제3법칙을 발견하였고, 이것을 기초로 하여 갈릴레이(G.Galilei)가 관성법칙을 발견하고, 뉴튼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지동설은 완전한 역학적 타당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근세철학자들의 사상
근세시대 사상가 중에 과학적인 방법론에 의해 지식의 향상을 꾀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철학체계를 수립하려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베이컨과 홉즈가 있고, 그 뒤를 대륙의 이성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따랐다. 이들의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근세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프란시스 베이컨(Fransis Bacon, 영국, 1561-1626)
베이컨의 이상은 과학, 예술 등 모든 인간의 지식을 전체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의 철학과 과학을 개혁하고자 했으며 학문의 정체를 비판했다. 당시 의학의 연구는 이론에 그쳤고 철학은 여전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독무대였는데 베이컨은 이들의 가르침을 환영 또는 유령이라고 했다. 그는 "지식은 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지식의 효용을 강조했으며, 특히 재래 학문의 무용성을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과학이 미신과 비조직적인 사변 및 신학과 뒤섞이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베이컨은 이러한 종류의 과학으로는 자연의 활동에 대한 근본원리 발견에 적합지 않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의 사상의 주류는 유명론이었고, 탐구방법은 선입관념을 버리고 직접 자연에 접하여 얻은 경험을 기초로 하여 점차 추상적 관념으로 나아가자는 귀납법적이었으며, 탐구에 영향을 미치는 4대 우상 등을 배격하고 실험과 경험의 중요성 강조한 경험주의 철학을 성립하는데 힘썼다. 베이컨과 홉즈의 뒤를 이어 흄도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경험주의적 탐구 자세를 지켜 나갔다.
☞ 베이컨의 4대 우상(偶像) - 1. 종족의 우상 : 자연을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편견 2. 동굴의 우상 : 개인의 성격 취미 습관의 차이 및 자라온 환경 교육의 차이에서 오는 편견 3. 시장의 우상 : 잘못된 말과 소문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편견 4. 극장의 우상 : 기존의 전통이나 권위를 맹신하는 데서 오는 편견
☞ 귀납법 - 귀납법(歸納法, inductive method)이란 개개의 사례를 관찰함으로써 이러한 사례들이 포함되는 일반 명제를 확립시키기 위한 추리를 귀납이라고 하며, 귀납에 의한 과학적 연구법을 귀납법이라고 한다. 따라서 귀납법은 구체적인 관찰, 조사, 실험을 통하여 일반적인 정설, 법칙, 또는 진리를 유도하는 방법을 말한다. 예) 여러 증거를 모아 결론에 도달하는 법정에서 많이 쓰는 추론법 중 하나다.
2) 토마스 홉즈 (Thomas Hobbes, 영국, 1588-1679)
홉즈는 과학의 방법을 인간 본질에 대한 연구에 적용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그는 인간의 지식과 도덕적 행위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제시하였다. 즉 인간이란 본래 이기적인 것이어서 자연 상태로 라면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세계가 되므로 서로 계약을 맺어서 국가를 이루고 전권을 주권자에게 위임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사회 계약의 선구자가 되었다. 즉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는 사람은 계약으로써 국가를 만들어 자연권을 제한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의지에 그것을 양도하여 복종한다. 홉즈는 전제 군주제를 가장 이상적인 국가 형태라고 생각함으로 중세의 자연법에 대한 개념에서 탈피함으로, 결국 통치권에 대한 강력한 권위주의적 개념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보이는 세계와 현상 즉 유물론의 기초 위에서 철학 전개한 것이 그 특징으로, 그는 베이컨과는 달리 연역법도 중시하여 귀납과 연역의 양자의 상보적 관계에 의하여 이성의 올바른 추리인 철학이 성립된다고 생각하였다.
☞ 연역법 - 추론법의 하나로 누구나 의심하지 않고 믿는 일반적 원리를 근거로 하여 어떤 특수하고 구체적인 사실을 주장하는 방법을 말한다. 예) 사람은 죽는다는 대전제 하에 “철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철수는 죽는다.” 대개 종교적 논리에서 많이 활용하는 논법이다. 연역법과 귀납법은 상호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 유물론 - 모든 실재는 오직 물리적인 것뿐이라고 주장하는 사상으로, 사고와 감정 그리고 의지 활동은 물리적인 육체의 운동에 지나지 않으며 육체가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물리적 세계와 상호 작용을 주고받은 결과로 생겨난 움직임 이상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는 모든 형이상학적 가치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관찰 가능하고 측정 가능한 대상만이 존재한다고 보는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3) 데카르트(Descartes, 1596-1679)
근세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데카르트는 유물론을 반대하고 자아의 권위를 주장한 이상주의 철학의 근원을 개척했다. 과학을 중시하고 기하학을 학문의 규범으로 삼았는데 그것은 베이컨이나 홉즈와 일치한다. 그의 주된 관심은 지적인 확실성이었다. 그는 이것을 위해 모든 것들을 의심하였다. 계시론, 하나님에 관한 관념, 세계의 가치, 모든 물리적인 사물들 등 모두가 의심의 대상이었다. 그의 철학은 자아의 존재, 즉 "내가 생각하는 고로 내가 있다"(cogito ergo sum)라는 말로 출발한다. 이 명제를 가지고 데카르트는 하나님의 존재와 물리적인 우주를 연역적으로 증명해 내려했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는 사유하는 이성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이성만 강조한 이성적 합리주의였다. 신의 존재 역시 인간이 사고한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존재하게 하신 신이 존재하신다는 가정에 근거하여 설명하였다. 그는 나, 신, 물질을 3실체로 보고 신은 제1실체요, 마음과 물질은 제2실체라 했다. 요약하면 그는 대표적인 합리주의자로 사상은 대륙의 합리론, 연역법, 인간의 이성을 진리의 기초로 삼음, 명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의 가장 큰 영향은 모든 개념을 철저히 의심해야 한다는 것과 수학적인 확실한 증명의 필요였다.
☞ 합리주의 - 합리주의(rationalism)란 이성과 사유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이것을 최고의 원리로 삼아 진리의 원천으로 간주하며 행위의 결정자로 간주하는 태도를 말한다. 합리주의는 과학적 탐구와 교육이 인류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자유롭고 조화있는 사회질서를 보장해 줄 수 있다는 낙관적인 견해를 가진 계몽사상가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합리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과대평가하고 지나치게 찬양하는 점이 전통적 기독교와 대비된다. 17세기 합리주의 특징은 반종교적이나 비종교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그 체계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18세기는 17세기의 틀에 박힌 정신과 정교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반대하는 이성적 합리주의 체계를 만들었다. 이 사상 체계의 발전은 화폐경제의 침투, 봉건적 신분 질서의 붕괴, 시민의식의 앙양, 자연과학 및 생산 기술의 발달 등이 가져온 합리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었지만, 이로 인한 인간 내면의 가치 하락, 생활 감정의 공허, 질을 양으로 대치, 사적 이윤추구, 개성상실 등에서 비난받기도 한다.
신학에서의 합리주의 - 계몽운동의 합리적 비평정신은 기독교 자체 내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런 활동은 1740년과 1840년 사이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성경을 비평하는 등 불완전한 이성으로 절대 진리를 판단하려는 위험한 시도로 여겨지게 되었다.
☞ 경험주의(empiricism) - 넓은 틀에서는 합리주의에 속하나 합리주의와 대조를 이루는 경험주의의 선구적 인물은 베이컨이다. 베이컨은 과학의 실험정신에 근거해 새로운 학문 방법을 주창하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 논법식 연역 추리로는 결코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없다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경험과 관찰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귀납법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인간은 자연의 하인이요 해석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연의 질서를 관찰한 만큼만 알 수 있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 그 이상은 결코 알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경험주의는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이성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이성만 강조한 이성적 합리주의와는 크게 대비가 된다.
4) 스피노자 (Benedict Spinoza, 1632-1677)
대표적인 범신론자인 스피노자에 의하면 만물은 무한한 실체이며, 하나님 또는 자연이며, 사고와 외연이라는 두 양태 혹은 특성으로 알려져 있고, 모든 유한적 인격들이나 속성들은 이것의 표현이다. 우주의 원이며 신은 밖으로 창조된 원인이 아니고 내재한 원인이나 유한한 사물 외에 존재치 않고 신은 물질에 존재하고 물질은 신에 의하여 존재한다고 하였다. 인간 역시 분립하려는 원욕을 버리고 대우주의 생명 중에 자아를 투입하여 사랑할 때 비로소 대우주를 보게 되고 영원한 위성을 나의 것으로 삼게 되어 진정한 평화를 얻는다. 이런 범신론은 기하학의 방식에 의하여 철학적 사색을 하였던 결과다.
① 생애: 유대인으로 유대 교리와 학문을 배우고 후에는 자유파와의 친교로 유대교에서 파문 당함.
② 사상: 범신론 - 자연과 신을 동일시
5)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① 인식론의 시조, 인식론적 경험철학을 개발
② 이성에 의한 자유행동 주장
③ "신의 존재는 인과사실(원인 없는 결과 없음)로 증명되며, 종교는 이성적이어야 한다."
6) 버클리(Berkeley, 1685-1753) - 아일랜드 주교이며 철학자로써 유신론을 세움.
대륙 이성론
1) 개요
새로운 관심사와 강조점에 의해 바로 전(前)시대의 철학과 구분되는 시대가 있는데 그것이 17세기의 대륙 이성론이다. 창시자는 데카르트(L.Descartes)였으며 그의 새로운 철학이 이른바 근세 철학의 출발을 이루었다. 스피노자(Spinoza), 라이프니츠(Leibniz)와 함께 이들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연역 가능한 진리체계를 가지도록 분명한 이성적 원리들을 구성하고자 했다. 이들의 주요 논점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리의 원천이라고 생각되는 인간 정신의 이성적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종교의 주장을 거부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철학적인 추론을 초자연적인 계시와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2) 이성 낙관주의
이들은 주관적인 감정과 열정은 진리를 발견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지만 인간 정신은 우주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에 따라 활동하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인간 이성에 대한 낙관주의적 견해이다.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는 어떤 관념들은 인간의 정신 속에 생득적(生得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과 적절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들 생득적 진리들을 경험에 의해 분명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들 이성론자들은 궁극적으로 물질세계를 물리학의 기계론적 모형을 본떠서 해석했으며, 모든 물리적인 사건들을 결정론으로 귀착시켰던 것이다. 한편 데카르트는 실재를 사유와 연장으로 구성된 이원론으로 기술했으며, 스피노자는 다양한 속성과 양태를 가진 자연이라는 단일체만이 존재한다는 일원론을 제시했다. 라이프니츠는 단 한 종류의 단자(monad)가 존재하지만 자연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단자가 있어야 한다고 하여 다원론자가 되었다.
영국 경험론
1) 개요
이성론자들의 바로 뒤를 이어 나온 근세 철학의 두 번째 부류인 영국의 경험론자들인 로크(Locke), 버클리(Berkeley), 흄(David Hume)은 이성론자들의 전제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경험론의 등장은 겸허했지만 그것은 곧 근세 철학의 진로와 관심사들을 변경시켜 놓을 만한 것이었다. 베이컨이 인간의 모든 지식을 전체적으로 재구성하려고 한 반면, 영국 경험론의 창시자인 로크는 땅을 좀 더 깨끗이 쓸어서 지식으로 가는 길에 널려 있는 쓰레기를 제거하려는 보다 소박한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인간 정신이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담하고 독창적인 해석을 가했으며 인간 정신에서 기대할 수 있는 지식의 종류 및 정도를 기술하였다.
2) 경험에 근거한 지식
로크는 인간 지식의 영역은 경험에 기인하며 또한 경험에 의해 제약을 받고 있다고 했다. 베이컨과 홉즈에 의하면 지식은 관찰 뒤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렇게 해야 경험론자라고 불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로크가 비판적 의문을 제기한 것은 과연 인간의 정신이 우주의 참다운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데이비드 홉은 이러한 비판적인 주장을 더욱 밀고 나가, 보증되어 있는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실험과 관찰을 통해 확실한 지식을 확보하려는 초기 경험주의는 나중에 인간의 정신 능력을 의심하는 극단적 경험주의로 발전하였다. 한편으로 대륙에서도 이성을 숭배하는 합리주의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근세 철학의 발전은 15세기를 특징지었던 계몽운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계몽운동은 개인 생활과 사회생활의 다양한 측면들에 이성의 법칙을 적용하고자 하는 의식적인 노력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근세 철학의 등장으로 인간의 세계관과 사고 및 행동에 막대한 변화가 왔고 기독교도 이에 따라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제4장 영국의 자연신론과 대륙의 계몽주의 사조
자연신론 서론
17세기 초반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일단의 영국 작가들 사이에 비정통적인 신앙관이 나타났는데 이것을 이신론(Deism) 또는 자연신교라 부른다. 이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6세기 프랑스에서였지만 발전은 영국에서 이루어졌다. 명예혁명 후 영국에서는 비교적 종교적 표현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영국 교회의 광범위한 역습에도 불구하고 이신론은 정점에 달하였다. 이신론은 계시나 교회의 가르침과는 상반되게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이성을 사용하여 획득한 일단의 종교지식을 받아들인다. 즉 자연신교(초월신교)는 창조세계가 하나님 섭리 없이 신이 정해놓은 법칙에 의해 자연히 존재한다고 해서 자연신교라 부른다.
☞ 이신론 - 자연신교를 일컫는 다른 이름, 이신론(理神論)은 18세기 계몽주의시대에 등장한 철학(신학)이론으로 세계를 창조한 하나의 신을 인정하되, 그 신은 세계와 별도로 존재하며 세상을 창조한 뒤에는 세상, 물리법칙을 바꾸거나 인간에게 접촉하는 인격적 주재자로 보지 않는다. 그에 따라 계시, 기적 등이 없다고 보는 철학, 종교관이다.
자연신교의 발단
자연신교는 기독교를 근대 과학적 합리성과 조화시켜 세련된 종교를 만들려는 노력에서 출발하였다. 자연신교 주장자들은 당시 공격 대상이던 기독교의 비이성적 신비적 요소(이적)을 제거하여 반기독교적인 세속주의(유물론)로부터 기독교를 지켜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격적인 계시와 기독교의 기본교리에 대하여 거부하는 입장이 되어 정통 기독교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다. 자연신교가 신을 우주의 원인(창조)으로 보는 등 무신론과는 반대적 개념이었지만 신의 섭리와 내재하심과 인적격 관계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유신론이라고 하기 어렵다.
자연신론의 신관
1) 제1원인자로서의 신
자연신교에서 하나님은 '초월적 세력', '제1운동자', '제1원인' 또는 '과거 원인들의 끝없는 복귀의 종착점' 등으로 이해된다. 제1원인자인 초월적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였으나 스스로 운행하도록 버려두셨으므로 하나님은 내재하지도 않으시고 완전한 인격자나 인간사의 주권자나 섭리자도 아니신 것이다. 따라서 자연신교의 하나님은 멀리 있는 낯설고 소외되며, 창조만 해놓고 집을 비운 무책임한 존재에 불과하다.
2) 닫힌 세계의 창조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폐쇄체계(Closed system) 안에서 '인과 율의 일치체'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결정론적인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단지 창조만 하셨을 뿐이므로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는 이적이나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자연신론은 17세기말에서 18세기 전반기의 짧은 기간 동안 프랑스와 영국의 학문세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그 후 자연신론은 여러 가지의 약점이 발견되므로 급속히 사라졌다.
☞ 인과율[因果律] - 모든 일이나 사물은 원인에 의해 그 결과가 발생한다는 원칙이다.
자연신론의 인간관
자연신교에서 인간 역시 하나님과 본질적 관계에서 파악하지 않고 단지 인간적 차원만 고려한다. 자연신교의 하나님은 인간과 교통하지 않으신다. 즉 자연신교의 인간은 단지 창조의 부속품 혹은 우주의 고아로서 인간일 뿐 신앙의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신론 요약
1. 자연신론(Deism), 초연신론, 초월신교
1) 발단
① 16세기 개혁자들이 신앙에만 의존한데 반하여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이성주의 신학사상
② 계시는 이성으로, 종교는 도적 철학으로 대치시킴
③ 이성으로 종교의 근본도리를 캐내려는 사상
2) 주장(교리)
① 신의 존재 인정
② 창조주는 자연법을 세움
③ 인간에게는 양심과 자유를 주심, 자연은 신의 완전한 창조이므로 특별계시가 필요 없음.
3) 대표자
① 에드워드 허버트(1651-1748) 자연신교의 시조
② 톨랜드(1670-1722) 합리적 자연신교 주장
③ 콜라즈(1676-1729) 자유 이성론 주장, 예언 부인
4) 결과
① 죄악과 투쟁하고 물리칠 영적인 능력을 주지 못함
②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으로 붕괴: 이성의 한계를 정하므로 이성을 유일근거로 자연신교는 점차 붕괴
③ 버틀러, 흄, 파레이 등이 자연신교 비판, 기독교변증
☞ 순수이성비판 -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 순수이성이란 이성적 요소 외에는 아무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그 자체로서의 이성을 말한다. 즉 철학의 인식체계를 지적하는 말로 사실일지라도 합리적 논리 즉 이성이 수납하지 않는 것이면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철학의 문제점이었다. 이런 철학의 잘못된 인식체계를 비판하고 이성에 경험을 추가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 순수이성 비판이다.
계몽주의 사조
계몽사조라는 용어는 베이컨의 「신기관」이 출판된 때부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판되기까지의 철학 발전을 가리킨다. 자연신론은 이 계몽사조의 발전에 근거한다. 이들은 전통과 권위의 근거인 역사에 대해 반기를 들고 18세기 관념들이 영원성을 지닌다는 신념에 차 있었다. 계몽사조는 기성 기독교에 대해 공격을 가하고 그 자신이 과거에서 해방되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인간의 이성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모든 불행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 베이컨의 “신기관(新機關)” - 신기관은 베이컨이 1620년에 발간한 책으로, 새로운 학문의 도구 또는 방법을 의미한다. 그의 학문의 방법은 우상논리에 치우치지 않는 귀납법 등 순수이성에 기대는 엄격한 합리적인 것이었다. 이 주장은 비판철학자 칸트에 의해 반박 당하게 된다.
계몽사조는 이성의 힘을 낙관하여 이성에 비추어 모순된 현실의 사회제도를 개조하려는 사상으로 이성과 배치되는 성경의 계시 및 신앙을 비판하여 계시와 이성의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계몽주의자들은 과학을 면허장으로 하여 온갖 분야에 대해 비판적 자유를 행사하였고, 그 결과 한 번도 제대로 의심해 보지도 않고 권위와 사제의 가르침을 따르던 서구인들이 마침내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계몽사조 요약
영국에서 자연신교와 회의적 사상이 풍미했는데 그것이 프랑스에 전해져 극단적 유물론 반기독교적 계몽주의 사상이 되었음, 즉 이성의 힘으로 모순된 현실의 사회제도를 개조하려는 사상, 이성과 배치되는 성경의 계시와 신앙을 비판하였다.
※ 주요 계몽주의자들
① 볼테르(1694-1778) - 프랑스 자연신교 거장, 계몽사상의 선구자, 90여권 저서, 무신론은 아니었으나 기독교 특히 천주교를 풍자하고 비판
② 디데로(1713-1784) - 유물론적 감정주의, 무신론적 자연주의
③ 홀바하(1723-1779) - 무신론적 자연주의자, "신 관념을 버리고 자연을 취하면 행복을 얻는다"
④ 루소(1712-1778) - 그의 사상은 독특하여 이성무용론, 낭만주의자, "자연으로 돌아가라" "자연은 사람을 선량하게 하나 잘못된 통치가 불행하게 만들므로 정부를 통제해야 한다." 주장
⑤ 라이프니츠(1646-1716) - 독일철학자, 신학자, 수학자, 단자론 주장(세계는 다양한 실체의 독립된 단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은 원초적인 단자), 그의 결론은 인간은 자신의 생득적 관념을 해명하며 인식하는 제한적인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1724-1804)
[업적]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프로이센의 철학자, 칸트는 계몽시대를 마무리 지어 막을 내리게 한 거대한 인물이다. 칸트의 비판 철학은 인간의 이성 능력에 대한 분석으로 이루어졌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최고 존재에 대한 탐구를 착수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제기한 것이다.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통합한 선험주의(a priori)를 주장하는데, 이는 칸트 철학의 가장 중요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종교와 신학에 있어서 칸트의 위치는 훨씬 중요하다. 왜냐하면 칸트가 이전 시대의 이성적 철학작품들을 철저히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론들은 합리적 관념들을 분석해 치명타를 입히는데 공헌했다.
[문제점] 그는 신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자였지만 외부로부터 오는 신지식을 부정함으로 특별계시를 부정하고, 도덕을 통해 신을 찾아가려는 철학적인 방법을 버리지 못했으며,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 역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것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감각적인 대상과 초감각적 대상, 철학과 신학을 분리하는 이원론에 빠져 버렸다. 그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교리의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으로서의 인간의 도덕적 의무에 대한 하나의 도덕 종교였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이른바 3대 비판서라 불리는 『순수 이성 비판』(1781), 『실천 이성 비판』(1788), 『판단력 비판』(1790)과 『학으로서 등장할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에 대한 서론』(1783), 『도덕의 형이상학』(1797) 등이 있다.
정리
① 계몽주의 막을 내리게 한 거대한 철학자, 근대철학의 아버지, 비판철학의 창시자, 독일관념론 철학 형성
② 계몽사조를 반대 -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하여 비판철학 세움
③ "순수이성비판" - 기독교의 적을 막아준 이론, 반면 기독교의 초자연주의 배격, 이성적 구속개념 부인
④ "실천이성 비판" - 신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는 시도, 도덕의 근본 전제, 즉 신을 찾는 이성의 실현은 최고선을 실현하는 것(신을 영접해야 최고선이 실현되는 복음과 반대적), 의지의 자유, 신, 영혼불멸설 주장
⑤ "판단력 비판" - 자연계와 도덕계의 조화 시도
⑥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 - 종교를 실천이성 곧 도덕으로 대체시킴
제5장 경건주의 운동
경건주의운동은 부흥운동 혹은 영적대각성운동으로 16세기 종교개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1670년 독일을 비롯 스위스, 네덜란드 및 영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종교적 각성이 일어났다. 영국에서는 이 운동을 웨슬레 부흥 운동 또는 복음주의 부흥 운동이라고 불렀다. 이 운동은 19세기까지 이어져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 있다. 경건주의 운동은 성령과 내적 생명을 존중하는 운동으로 교회생활의 모든 분야, 예배 의식에 대한 신학에서부터 각 개인의 경건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깊은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성경 중심적 도덕주의, 인간의 죄악에 대한 예리한 감각과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 개인적인 회개, 기도와 헌신의 실제적인 거룩성, 이웃의 필요에 대한 따뜻한 관심, 찬송에서 영감과 정감어린 감정의 충만 등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도 일컬어지는 17,18세기의 경건주의 운동에 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경건주의의 배경과 특징
1. 경건주의의 배경
(1) 30년 전쟁(1618-1648) - 오랜 전쟁을 겪으면서 물질적으로 도덕적으로 희망을 발견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엇인가 새롭게 갱신되어야 한다는 강한 욕구가 시작되었다.
(2) 청교도주의 - 로마교적인 침체적이고 구태의연한 종교적 생활을 벗고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갈망이 있었다.
(3) 정통주의 - 칼빈 루터 등의 개혁파에서 바른 교리는 되찾았지만 교리와 그 해석에 강조점이 있었을 뿐 교회에는 영적 은혜가 넘치지 못했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생활에 소홀함으로 성화 및 영적인 면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2. 경건주의의 특징
경건이란 바른 신앙운동으로 오늘에도 살아있는 운동이며, 모든 성도가 참여하는 평신도 운동이며, 더 빈번하고 풍성하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성경 운동이며, 경건주의 시대에 와서 비로소 양로원, 빈민원, 고아원, 학교, 병원 등을 설립한 점에 미루어 사랑의 운동이고, 성령 받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선교 운동이기도 하다.
경건주의의 영향
1. 경건주의의 강조점
경건주의에서는 내면적, 주관적, 개인적인 성경공부와 기도로의 복귀를 강조했다. 평신도들이나 목회자들이나 날마다 실질적인 경건 생활로서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야 했다.
(1) 경건주의자들의 주장
신비주의와 경건주의는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공통된 점이 많다. 다른 점은 경건주의는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내적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실제적인 윤리적 변화를 이루려는 것이다.
2. 경건주의의 결과
[긍정] 경건주의 운동은 성경 연구에 자극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신학적 이론에서 실제적 방면으로 주의를 기울이게 하여 중용을 얻을 수 있게 하였고, 성령의 감화와 개인의 갱생의 필요를 깨닫게 하고, 교회를 더욱 활력 있게 했으며 선교에도 치중하게 하였다. 경건운동은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부정] 반면 경건주의는 극단의 금욕주의와 엄격한 자기 부정을 강조하거나 회심을 말하지 않는 모든 맹목적 기독교인을 거부하며, 교리보다는 생활을 일방적으로 강조한 면이 있었다. 즉 경건주의는 형식화된 정통주의 기독교에 생명력을 회복시키는데 크게 공헌했으나 자신의 영혼 구원에만 관심을 쏟는 개인주의적 신앙이 그 근본적인 결점이었다.
3. 경건주의가 끼친 영향
(1) 경건주의는 20세기 종교계에 성서신학을 출현하게 하였다. 종교개혁 당시는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여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기 위해 원전 연구를 많이 하였다. 이 원전 연구는 성서의 고등비판의 결과 성서의 권위를 파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지만 경건주의자들은 성경을 연구하되 성서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위한 새로운 성서 연구 방법을 만들어 놓았다. 이 점에 있어서 경건주의자들의 공헌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2) 경건주의자들은 현대 에큐메니즘(Ecumenism)에 큰 공헌을 하였다. 저들은 그리스도인들 간에 무엇이 다른가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무엇이 같은가를 찾아 연합시키려는 운동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교리학에 대한 단순화를 추진하였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이 부분은 장점이랄 수 없다. 하지만 큰 틀에서는 자유주의자에게 깊은 믿음을 고양시켜 보수로 돌아오게 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 에큐메니즘 - 에큐메니즘(ecumenism)은 범세계적인 그리스도교의 일치와 협력을 지향하는 운동이나 경향을 말한다. 20세기에 들어와 특히 활발해졌는데 이 운동은 가톨릭 쪽보다 프로테스탄트 쪽에서 훨씬 일찍 시작했다. 목적은 세속화와 교파분열을 막고 공산주의에 대해 공동대처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지만 결과는 그 반대로 W.C.C가 보여주듯 카톨릭과 일치, 이교 수용, 공산주의 옹호 등 본질에서 벗어나고 있다. 우리 개혁주의 입장은 '에반젤리칼'(evangelical)이다. 에반젤리칼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evangelion)을 최고의 가치로 놓고 그것에 온전히 헌신하는 신앙적 태도를 가리킨다.
(3) 경건주의는 사람이 종교적인 인간이 됨으로써 저절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관념을 깨뜨렸다. 종교나 종교성이라고 하는 것은 전통 애호가들의 주장이다. 참된 신앙은 개인이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인격적 만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들 경건주의는 개인적이고도 체험적인 것으로써의 종교, 전 인격적인 참여에 의한 삶의 증거, 하나님 말씀에 의한 능력이 나타나는 생활, 영혼 없는 제도 ․ 생명력 없는 몸 ․ 내용 없는 형식 등에 대한 저항 등이 전체에 흐르는 핵심을 이루었다.
경건주의운동의 주요 인물
1. 필립 야코브 스페너(Phillp Jacob Spener, 1635-1705)
독일 경건주의의 창도자는 루터 교회의 목사 스페너였다. 그는 영국의 청교도들에 관한 책과 독일의 신비주의에 관한 책들을 읽는 중에 크게 감화를 받았고, 그의 성경읽기 운동은 경건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2. 아우구스트 프랑케(August Franke, 1663-1727년)
경건주의 운동이 독일에 있어서 최고 절정에 이르게 된 것은 프랑케라는 탁월한 지도자가 있을 때였다. 그는 스페너의 부름을 받고 베를린으로 가서 할레 대학을 물려받아, 그곳을 경건주의의 중심지로 만들고, 거기서 1727년까지 사역하였다. 그는 회심의 경험을 얻으려면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며, 충분히 준비한 설교를 하며, 공부를 하기 전후에 기도할 것을 권장하였다. 할레 대학은 프랑케의 지도 하에 경건주의적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할레 대학은 훌륭한 교사, 목사, 외국 선교사 및 유력한 평신도들을 유럽에 공급하게 되었고, 할레 대학이 창설된 지 340년 동안에 약 6,000명의 신학자가 배출되어 한 때는 경건주의가 루터 교회에 큰 감화를 끼치었다.
3. 진젠돌프와 모리비안
(1) 진젠돌프
진젠돌프는 스페너와 프란케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그의 사상은 그들의 사상을 확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722년 보헤미아 형제들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그의 넓은 사유지 한쪽 구석을 지정하여 주어 ‘헤른후트’(Herrnhut, ‘주님이 지키신다’)이라는 단체를 세우게 하였다. 헤른후트는 경건주의의 종교적 핵심, 선행, 엄격한 도덕, 근면을 중심으로 형성된 하나의 수도원과도 흡사했다. 할레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과 같이, 헤른후트의 아이들은 부모의 지도를 떠나 교육되었고 양육되었다.
진젠돌프 백작은 열렬한 종교적 열심과 위대한 조직의 재간이 있었으므로, 이 빈약한 단체를 능히 잘 인솔하여 신앙적인 활력의 근원으로 만들고 전도의 큰 세력을 만들었다. 백작과 모라비아 교도들은 위대한 큰 유산을 남겼으니, 그것은 존 웨슬레가 모라비아 교도들로부터 새로운 감명과 영감을 얻어 영국의 메도디스트(Methodist)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또한 사상 면에서는 실라이어마허(Schleiermacher)를 배출하여 간접적으로 세계의 신학에 큰 공헌을 하였다. 루터파 정통과 합리주의에 반대하며 진젠돌프는 “마음의 종교”를 강조하였고, 예수와의 매우 친밀한 교제, 회개의 감정적 경험, 산상수훈의 윤리 등을 강조했다.
(2)모라비아 교회(Moravian Brethreni; Unitas Fratrum)
모라비아파 교회는 보헤미아인 후스의 후계자들이다. 박해를 받아 깊은 숲속 은밀한 곳에서 조직을 형성해 세력을 연명해 나갔는데, 그들은 스스로를 ‘동포교단’(Unitas Fratrum) 이라고 불렀다. 카톨릭교도의 박해를 받아 보헤미아 형제들은 크리스챤 데빋(Christian David)을 인솔자로 1772년 색슨으로 이주하였다. 이 보헤미아 형제들을 찐젠돌프(Zinzendolf)라는 백작이 자기 영토 내에 거주하게 하였고, 1727년 8월 13일 모라비아 교회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 단체의 정신은 그리스도와 친밀한 연합을 하고,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으로서, 특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전폭적인 정신을 기울이는 데 있었다. 또한 이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그린랜드, 그리고 미국인 중의 인디언들 가운데도 선교를 하였다. 모리비안들은 선행, 신비주의, 찬송, 기도서 등에서 그들의 복음적인 경건을 표현했다.
경건주의의 영향
1) 근대 선교에 끼친 영향
독일 경건주의운동의 직접적이고 가장 큰 소산이라면 그것은 선교운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모라비안 운동에 끼친 영향
모라비안의 영적 지도자인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폰 진젠도르프 백작은 심오한 신앙적 확신에 가득 찬 사람으로서 할레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할레 대학에서 수학하는 동안에 그는 경건주의에 큰 감화를 받았으며 항상 경건주의의 빛 아래서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였다. 모라비안이 갖는 의의는 세계 곳곳에 기독교 신앙을 퍼뜨리는 큰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들이 선교하는 곳곳마다 영적 후손들을 성장시켰다. 존 웨슬리가 새로운 광명과 영감을 받아 그로 하여금 놀라운 부흥운동을 하도록 한 것도 모라비안에게서 받은 감화 때문이었다. 모라비안은 경건주의의 최상의 결실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라고 하였다.
3) 웨슬리의 감리교운동에 끼친 영향
경건주의가 영국에 전래된 것은 모라비안들에 의해서 된 것이지만 그것이 영국교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 데에는 웨슬리의 힘이 매우 컸다. 그는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성결클럽을 만들어 경건훈련을 하였는데, 이럴 즈음에 웨슬리 형제가 이 단체로부터 북미개척선교사로 파견되어 가는 도중 배에서 풍랑을 만나 위험에 처했을 때에 당황하지 않고 찬송을 부르며 평화롭고 침착하게 행동하는 모라비안들을 보고 싶은 감명을 받았다. 영국에 돌아오자 웨슬리는 모라비안인 피터 볼러를 만났고 웨슬리의 신학형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과 온전한 성결과 성령의 내적 증거는 선행이나 인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앙에 있음을 강조하였고 따라서 이상의 모든 체험은 순간에 얻는다고 가르쳤다. 그러던 중 올더스게이트에서 열림 모라비안 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을 때 홀연히 회심하여 거듭나는 경험을 얻게 되었다. 웨슬리는 두 가지를 강조하였는데 첫째는 회심의 정서적 경험이었고 둘째는 그리스도인의 완전 성화였다. 또한 지금 실제로 죄를 벗고 성결한 생활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강조하였다. 웨슬리의 복음운동은 인간내심의 혁신운동이요 교회 혁신의 복음운동이었다.
☞ 루터의 로마서 서문 - 내용은 교리서신인 로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 즉 율법, 죄, 은혜, 믿음, 의, 육, 영과 같은 단어들의 바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읽는다면 시간만 허비하게 될 것이라면서 자세히 설명하면서 추상적 구원이 아닌 실재적 구원의 누림을 강조한 것이다.
4) 미국의 대각성운동에 끼친 영향
18세기 동안에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 뉴일글랜드에서는 유럽에서 얼마 전에 일어났던 것과 유사한 개인 경건에 관한 각성이 여러 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의 운동과 다른 점은 이러한 각성이 모든 교파를 초월함으로써 미합중국을 형성하기까지 영향을 끼친 개신교 기독교를 형성하게 된 사실이다. 이 운동은 처음에는 1730년쯤 펜실베니아에 있던 메노나이트파와 모라비안파에서 나타났다. 이 부흥운동의 대표적 주자는 요나단 에드워즈, 조지 휘필드 등이었고 이 운동은 회의주의와 불신앙 사상과 더불어 교회가 큰 싸움을 하는 중에 일어난 것으로 당시 독일에서는 진젠돌프 백작의 지도 아래 헤른후트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영국에서는 웨슬리의 지도 밑에 감리교 운동이 일어났다.
☞ 요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1703-1758) -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요 신학자이며 목회자요, 미국의 대각성운동의 선구자로서, 웨슬리의 체험과 유사한 영적체험을 했고 하나님의 압도적인 영광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얻어지는 종교적 체험이 없는 교인은 정상적인 교인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 미국의 대각성운동 - 이 운동의 진원지는 뉴저지의 다리탄 계곡(Raritan Vally)의 화란 개혁운동 써클이었다. 이곳에서 프렐링 후이센(J.Frelinghuyesen)이 보다 깊고 생생한 신앙을 가지도록 교인들을 일깨우기 위해 6년 동안 부흥운동을 일으킨 것이 마침내 미국전역을 휩쓴 부흥의 격류를 일으켰다. 이 시기에 18세기 미국신학계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는 프린스톤의 총장이요 미국최대의 신학자로서 절대 칼빈주의자로서 신학의 굳건한 골격을 세워 주었고 함께한 휫필드와 함께 대각성운동을 일으켰다. 18세기말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제2의 대각성운동이 진행되어 동부에서 서부로 파급되었는데 이 운동의 주도적인 인물이 바로 찰스 피니(Charles GrandisonFinny.1792-1875)였다. 그는 부흥회에 새로운 방법을 적용 반복적 언어구사, 거칠고 때로는 강력한 언어를 구사하며 갑자기 예배의 패턴을 바꿈으로 훨씬 강력한 부흥의 격류를 일으키게 되었다. 19세기말의 가장 두드러진 부흥운동은 무디(Dwight L.Moody 1837-1899)에 의해 이룩되었다. 1870년대에 무디가 전국적으로 부흥집회를 개최할 즈음 생키(Ina,d.Sankey)는 감명 깊은 찬송으로 무디를 많이 조력하기도 했다. 그의 언어는 단순하였고, 그의 정신은 따뜻하며 성실하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으며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전향시켰다. 무디의 부흥운동은 외국 선교에도 열풍을 일으켜 이와 같은 부흥운동은 한국선교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5) 근대 자유주의 신학에 끼친 영향
독일 출생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쉴라이에르마허는 어린 시절 모라비안 학교에서 죄의식과 은총의 필요성과 효용성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할레 대학에 가서 칸트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베를린에서 목사로 봉직하는 동안에 낭만주의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그 결과 종교란 지식과 행동을 포함한다는 전통적인 경건주의에서 벗어나 종교란 제 3의 영역, 곧 감정의 영역에 속하며 참된 종교란 무한자에 대한 감지요 경험이라면서, 그러므로 성경 역시 하나님께로서 비롯된 계시나 역사상에서의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대한 기록이라고 하였다. 즉 인간의 종교적 감정에 신을 상정함으로서 모든 신학적 체계를 형성하는 그의 자유주의적인 견해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정통성을 무너뜨리는 경건주의적 주관주의로서 매우 조심스럽게 연구해야 한다.
☞ 낭만주의 - 낭만주의는 복잡한 문화운동으로 쉽사리 정의하기가 불가능하지만 인간의 감정이 이성보다 중요하며, 집단보다는 개인이, 분석보다는 종합이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는 사고의 틀을 가졌고, 이성을 신뢰한 나머지 인간의 따스한 육체와 피를 영혼 없이 움직이는 기계로 타락시켰다면서 계몽주의 철학자들을 혹독히 비판하였다.
정리
1. 경건파 운동
1) 배경
① 17세기후반 루터파를 배경으로 시작
② 30년 전쟁 말기에 독일 교회가 정통주의를 내세우고 경건생활에 무관심하므로 영적침체 현상에 직면
③ 교회가 신학논쟁으로 경색, 영적 은혜 상실
④ 교회의 세속화, 풍속 문란
2) 의의
① 신비주의 계통의 운동
② 성령님의 내적 생명을 중시하는 운동
3) 주장
① 신학 이론을 떠나 성경으로 돌아가자.
② 심령의 빛을 가진 자가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
③ 성령님의 성결케 하는 능력으로 마음의 빛을 가질 수 있다.
4) 주요인물
① 슈페너(Spener, 1633-1705)
② 프랑케(Franke, 1663-?)
③ 벵겔(Bengel, 1687-1751)
5) 결과
① 업적(공헌)
⒜ 성경연구 자극
⒝ 신학이론을 실제적인 방면으로 전환
⒞ 성령님의 감화
⒟ 여기에서 모라비안파가 생김
⒠ 선교열심(할레대학 중심으로)
② 단점
⒜ 현실도피 경향
⒝ 교회 균열 조짐 : 교회안의 교회운동
⒞ 교리를 무시하여 기독교의 변질을 쉽게 초래
⒟ 쇠퇴 이유: 지도자들의 후계자 양육 실패
⒠ 신학운동의 결여
제6장 복음주의 운동
영국에서 시작,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주의 사상에 의하여 치명타를 입은 기독교는 그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체계만 지키고 있을 때 무기력한 기독교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운동이 있었으니 그것은 복음주의 운동이었다. 영국국교회와 비국교도는 17세기의 내전이 끝났을 때 모두 영적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었다. 합리주의는 모든 종교사상에 침투하였고 정통신앙조차도 기독교는 도덕 체계에 부과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전도사업은 전무했으며 문맹이 만연하고 법은 무자비하게 집행되었으며, 술취함이 기승을 부렸다. 이러한 때에 엄청난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복음주의적 부흥이었다. 이것은 결국 모든 영어 사용 국가로 퍼져 나갔고 그 대표적인 운동가들은 존 뉴톤, 윌리엄 윌버포스, 존 웨슬리, 죠지 휫필드, 토마스 찰머스 등이었다. 사실 미국에서 요나단 에드워드에 의해 영국보다 먼저 복음주의운동이 일어나 웨슬리가 그 경험담을 읽고 자각할 정도였지만 큰 세력이 되지 못하다가 독일의 경건주의 모라비안주의 영국감리교의 영향을 받고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복음주의 정의
복음주의는 개인의 회심 체험을 중시하고, 성경말씀에 대한 충실한 신앙을 강조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자동적으로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 즉 사회구성원이 되는 기독교 주류사회의 명목상의 그리스도인, 문화적 그리스도인과는 다른 충실한 믿음과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것이다.
1. 영국 국교회 내의 복음주의
1) 존 뉴톤(J.Newton 1725-1807)
18세기 후반 영국국교회(성공회) 내에서는 감리교도들의 열정과 신앙을 모방한 많은 성직자들이 생겨나 이들에게도 '복음주의자들'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는데 이들 중 대표적 인물은 존 뉴톤이었다. 그는 많은 성직자들에게 주교의 명칭도 없이 주교 이상의 영향을 미쳤다.
2) 윌리엄 윌버포스(W.Wilberforce 1759-1833)
윌버포스는 의회의 일원이었으며 영국 사회 상류층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스위스를 여행하는 도중 회심하여 이러한 상류사회에 복음주의적 입장을 저술을 통해 설명하고, 노예매매 반대 운동과 복음전도 운동을 벌여 주목을 받았다.
2. 비국교도 내의 복음주의
1) 초기 복음주의
감리교가 출현하기 전에도 청교도주의와 복음주의가 결합된 상태로 비국교도 내에 있었다. 부흥의 도구가 된 아이작 왓츠의 찬송가, 부흥설교로 유명한 필립 도드리지, 은혜로운 성경주석서를 저술한 매튜 헨리 등을 들 수 있다.
2) 감리교의 등장
18세기 초엽 비국교회는 국교회와 마찬가지로 차갑고 죽은 정신이 만연하였다. 감리교가 처음 그 모습을 보였을 때 달갑지 않은 시선이었지만 세리와 창기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자 비국교도들은 감리교도들의 방법을 배우기 시작하여 대부흥을 이루었고, 침례교도들과 회중교회 교인들도 복음주의에 사로잡혀 열광적으로 선교하였다.
3. 스코틀랜드에서의 복음주의
1) 토마스 찰머스(T.Charlmers)
그는 복음주의 반대자였으나 그 후 목사로서 교구민들과 함께 보내면서 실천적 복음주의를 인식하게 되었고, 그의 영향으로 스코틀랜드에서 전체적인 주목을 끌게 되었다.
2) 자유교회 설립
복음주의적 원칙에 자극을 받은 자유교회는 스코틀랜드 전역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국내외에서 모든 종류의 선교사업에 투신하였고 광범위한 부흥을 가져오게 하였다.
4. 웨슬리와 감리교회(1703~1791)
웨슬리는 18세기가 낳은 위대한 부흥사요, 개혁자요, 신학자였다. 18세기의 영국의 상황은 이신론이 휩쓰는 이성주의에다가, 도덕적 타락과 부패가 전 사회를 풍미하고 있었을 때 웨슬리는 복음적 회심 체험, 정화 운동, 창의적 종합에 강조점을 두며 복음을 전했다. 그의 신학의 토대는 성경과 체험이다. 그는 성경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고 체험을 중시했고, 성화를 강조했으며, 뜨거운 신자요 열렬한 전도자요 동시에 냉철하고 위대한 신학자였다. 그의 일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은 바로 1934년 5월 26일, 올더스게이트 가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이었다. 이렇게 가슴이 뜨거운 웨슬리는 하나님은 그 시대의 개혁자로서 쓰셨다.
감리교의 표준교리
웨슬리가 주장한 감리교의 표적은 '마음과 생활의 성결을 의미하는 구원이었다. 성결의 생활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고 소망 가운데서 형제를 사랑하며 선을 행하는 신앙생활이다. 곧 감리교인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마음과 행실에서 그리스도인임을 말한다. 웨슬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리교의 표준교리는 이신득의(以信得義), 온전한 성화, 예수그리스도의 대속, 사죄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확신, 만인에게 주어지는 은총, 진리 안에서 진실한 생활을 하면 타락하지 않는다는 교리, 영영한 형벌, 원죄 인정 등이다. 그는 성경과 체험 이외에도 전통과 이성을 포함시켜서 감리교 교리 형성의 4대 표준으로 삼았다.
웨슬리와 메도디스트 교회
1)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부흥운동
① 출신: 영국교회(성공회) 목사의 19남매 중 16번째, 모친 수산나로 부터 경건한 교육받음
② 옥스포드 대학생활: ' Holy Club'조직, 학문연구, 매일 밤 기도모임, 성경읽기, 구제
③ 미국 조지아 주에 선교사로 파송, 성과 없이 돌아오는 길에 풍랑 중 배안에서 모리비안 교도들로 부터 감동 받음
④ 1738년 5월 24일 모라비아 교회의 기도회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체험.
⑤ 독일의 진센돌프를 찾아가서 경건생활을 배움(2주간)
⑥ 1739년 5월 브리스틀에서 처음으로 야외 설교를 하여 큰 부흥운동이 일어남
⑦ 1739년 5월 12일에 브리스틀에 처음으로 메더디스트 교회를 설립, 1740년 7월 23일 감리회조직
메도디스트 교회
1) 유래 -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웨슬리를 중심을 종교계의 침체를 바로잡기 위하여 성경 연구와 감옥 방문 전도 등이 감리 교회의 시초이다.
☞ 메도디스트 - (Methodist, 규칙준수주의자), 웨슬리 당시 주변 사람들은 우리들을 보고 ‘규칙쟁이’란 뜻을 가진 영어의 메도디스트(Methodist)라고 불렀다. 그들이 시간을 은혜로 알고 바르게 사용하고, 물질과 몸을 통하여 진실과 행함을 나타내고, 도덕적으로 성화를 위해 애쓰고, 훈련을 통하여 사도적 성결의 윤리를 추구하며, 거룩 안에 자라가려고 힘쓰는 것을 보고 붙인 별명이다.
2) 조직
① 비사제적 감독 정치
② 중앙 집권적 조직.
③ 감독은 총회에서 투표 목사는 감독이 파송되었다.
④ 직원은 목사 장로 권사 속장 유사 탁사 등이다.
3) 교리
① 하나님은 은혜 무차별적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렸다(만인 구원, 예정론 거부)
② 지옥에 가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다.
③ 자기 구원에 대하여 성령님의 확신을 얻을 수 있음.
④ 원죄는 믿지만 완전 타락은 불신.
⑤ 의롭게 된 자는 거룩하게 되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여야 한다.
5.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① 1714년 영국 글로스터에서 태어났으며 당대의 위대한 설교자라고 평가 받고 있다.
② 옥스포드에서 웨슬리와 함께 ' Holy Club' 활동
③ 옥외집회 - 많은 청중, 큰 회개운동
④ 메시지 - 칼빈주의적인 설교, 영국교회(성공회)에 지도자들로부터 배척당함
⑤ 미국에서 7차례 집회, 단체조직 안했음, 웨슬리와 구원관의 차이로 함께 사역할 수 없었음, 전도여행 중 과로로 사망.
☞ 웨슬리와 휫필드의 구원관 차이 - 웨슬레가 알미니우스적인 해석을 받아들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한 반면, 휫필드는 칼빈주의적 해석으로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즉 알미니우스 주장은 구원 받고 못 받고는 각자 믿음에게 달렸다는 주장임에 반해 하나님의 선택과 성령의 은혜를 받은 자는 믿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칼빈주의다. 신기한 것은 칼빈주의자도 전도는 알미니우스적으로 하고 알미니우스자들도 기도와 감사는 칼빈주의적으로 한다.
6. 복음주의 결과
복음주의는 성경의 메시지로부터 유래한 신학체계인 동시에, 기독교에서 일어난 독특한 운동, 즉 경건하고 헌신적인 신앙 풍토이다. 그것은 곧 종교개혁 운동, 경건주의 운동, 청교도운동, 대각성운동, 부흥운동, 근본주의 운동, 성결운동, 은사운동 등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존 웨슬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하나님의 택하심+성령님의 도우심, 성화)보다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간의 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을 예정하심을 부정하며 만인구원론을 주장하므로서 비성경적인 알미니안 주의적인 위험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흥운동의 기초가 된 웨슬리의 학문연구, 매일밤 기도모임, 성경읽기, 구제 등은 길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제7장 신비주의 운동
1. 퀘이커파(진동파)
퀘이커(Quaker)는 17세기에 영국의 조지 폭스가 창시한 교파로 대한민국에서는 '종교친우회'라고 칭한다. 퀘이커라는 이름은 하나님 앞에서 떤다는 조지 폭스의 말에서 유래했다. 1650년대에 조지 폭스(George Fox)가 제창한 명상운동으로 시작하였고, 영국 정부에 의해 탄압받았으나, 윌리엄 펜이 불하받은 북아메리카 식민지 영토에 도시(현 미국 펜실베이니아)를 세워 이주함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퀘이커 교도들은 예정설과 원죄 개념을 부인하고, 세례와 성찬식도 목사도 없으며 예배에 순서도 없고 영감 받은 자가 없으면 침묵하며 묵상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으므로 각자가 마음에서 하나님을 직접 찾고 신성을 기른다면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고, 각자는 침묵을 통해 내면의 빛을 볼 수 있도록 한다. 그들은 무교회주의에서 무교리주의로 빠져 성경의 절대권 부정, 교회제도 부정 면에서 이단적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집단촌을 형성하여 격리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2. 스웨덴보르그 신비주의
1) 생애
1668년 1월 29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출생, 과학기구 발명에 큰 공헌, 55세 때 신접주의자가 되었다. 1747년 히브리어를 연구하면서 ‘하늘의 비밀’이라는 책을 저술, 1772년 3월 19일 런던에서 여행 중에 객사하였다.
2) 사상
신관은 노스틱적인 영적 세계와 육적 세계의 고통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영이시오, 인간이시다. 세계관은 신은 물질세계에서 초월했지만 동시에 만물 속에 계신다. 창조는 유에서의 창조이다. 인간관은 인간은 작은 우주이며, 우주는 하나의 거인이다. 원죄가 없으니 믿음으로 의인이 될 필요가 없다. 부활은 없다. 영으로 계속 산다. 재림은 영적 세계를 볼 때 이루어졌다. 자연과학과 종교사상의 기이한 결합으로 구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스웨덴보르그의 사상은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한국에도 새예루살렘교회, 새교회 란 이름으로 포교하고 있다. 말씀을 떠난 신비주의는 악령에 사로잡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노스틱주의 - 노스틱주의는 영지주의라고도 하며 영은 선하고 육이나 물질은 악하다는 이원론으로 초대교회부터 기독교를 위협했던 적이다. 이런 이원론의 기초로 창조도 악한 신인 Dimiurge의 창조로 보고 부정하고,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금욕으로 육체를 학대하는 금욕주의도 바로 영지주의 의 산물이다.
제8장 카톨릭 내의 사상운동
종교개혁에 의한 충격을 받은 후 계속적으로 개신교의 도전을 받게 된 카톨릭은 자체적으로 그 체제를 정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내적으로는 교회개혁위원회나 수도원 운동 등을 통하여, 외적으로는 예수회 활동과 트렌트 회의를 통하여 체제를 정비하고 나갔지만 개혁에 대한 몸부림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예수회와 같은 과격성은 교황청으로 하여금 묵과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으므로 예수회는 일시적인 정지활동 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카톨릭 내부에서는 밑으로부터 개혁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쟌세니즘과 콰이어티즘이었다. 그러나 쟌세니즘은 과격한 예수회와의 충돌과 자체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진전을 이루지 못하였고, 콰이어티즘은 중세의 급진적 신비주의 경향을 소유함으로서 대중화되지 못하였다.
☞ 트렌트(Trent) 회의(1545-64) - 트렌트 회의는 독일황제 찰스 5세에 의하여 제의되고 교황 바울 3세에 의하여 소집되었다. 황제는 트렌트 회의를 통하여 신구교가 다 같이 공명할 수 있는 교리적 통일을 이루어 거기에서 오는 서구 기독교의 연합된 힘을 가지고 회교권 터키의 세력을 대항하려는 동기가 있었지만 실패하고, 반면에 교황은 카톨릭적인 교리확정을 얻어 이단 박멸을 위한 종교 재판의 수단으로 사용하려 하는데 성공하였다. 트렌트 회의 결의 사항은 ‘성경과 전통은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 성경해석권은 교회에게만 있다. 원죄는 세례로 사함을 받는다. 성례는 7가지이며 이 은혜의 방편을 잘 이용함으로 자범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 구원은 믿음과 행위를 통하여 얻는다. 제사장은 신부들 만이며 미사는 희생의 제사이다.’
☞ 예수회 - 예수회는 전통적인 수도회가 내세우는 삼대 서원인 청빈, 정결, 순명 외에 구원과 믿음의 전파를 위해 내려지는 교황의 명령을 지체 없이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네 번째 서원이 덧붙여져 내부적인 개혁과 종교개혁의 물결로부터 교황과 가톨릭교회를 지키려는 급진주의적 단체다. 한 때 반교황주의 정서가 팽배한 당시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정부의 압박에 못 이겨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예수회를 폐지하는 법령을 공포했으나, 예수회가 특히 교육과 선교 영역에서 수행하던 일을 다시 맡아야 한다는 요구가 끈질기게 계속되어 1814년 교황 피우스 7세는 예수회를 재건했고, 항로 및 신대륙을 발견함에 따라 세계 미개척지역으로 가톨릭교회를 확장시키는 선교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쟌세니즘
1) 의의
17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카톨릭 내부에서 일어난 정화운동으로 종교개혁 여파로 카톨릭의 반어거스틴적으로 기울어진 경향을 우려하고 본래 카톨릭이 따르던 어거스틴 신학을 부흥시키고, 예수회의 도덕적 폐해를 개탄하여 개혁하고자 노력한 사상운동이었다. 카톨릭이 반어거스틴으로 기울어진 것은 루터나 칼빈 등이 어거스틴의 칭의론 예정론 등을 강조하여 카톨릭을 개혁하려 하자 그 반동에서였다. 그러나 카톨릭은 하나님께서 주신 내부와 외부에서 주신 개혁의 기회를 배척하고 개신교 정죄에만 급급한 나머지 자신들의 교리적 정체성마저 버리게 되었다.
2) 주요인물
창시자는 쟌센(1585-1638, 네델란드 출신, 스콜라 철학을 반대하고, 어거스틴의 죄론, 은총론을 주장하고, 인간이성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회심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총임을 주장하였다. 쟌센의 동조자로 수학자요 물리학자인 파스칼이 있으며, 그는 교황의 무오설을 부인하고 교황은 감독의 머리일 뿐 무오하지는 않다고 하였다. 그 결과 예수회를 동원하여 쟌세니즘을 박해하고, 루이 14세도 낭트칙령을 무효화하여 개신교를 박해하고 쟌세니즘과 콰이어티즘 탄압하였고,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칙령을 내려 쟌세니즘을 완전히 정죄하였다.
2. 콰이어티즘(정숙주의)
콰이어티즘(Quietism) 운동은 카토릭 내에서 발생한 신비주의의 하나로 신교의 퀘이커운동에 비길 만하다. 이 운동은 스페인 몰리노(Michael Molinos, 1640-97)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는 “평화를 얻는 길은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조용히 맞기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를 포기하고 변화하고 개조되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신능력이 정지되고 수동적이 되어야 한다. 영혼의 작용은 순전한 묵상과 움직임이 없는 정지상태에서 하늘의 빛이 들어오는 것을 받는데 있다”고 했다. 콰이어티즘은 프랑스에서도 자생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귀용부인(Madame Guyon)으로 예수회의 박해로 10년이 넘도록 투옥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비판] 그러나 진정한 평안과 신인연합은 수련함의 인간의 노력과 행위에서 말미암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무념묵상하는 그런 비움이 아니다.
3. 로마교회의 예수회의 금지
종교개혁 이후 로욜라의 예수회 설립은 교황권 강화에 큰 힘이 되었는데 그것은 예수회가 교황에 대한 절대복종을 그 모토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과 결탁된 집단은 부패하듯 시간이 흐른 후 각국은 물론 심지어 교황으로부터 배척을 받게 되었다. 예수회의 타락의 원인은 위대한 지도자가 나오지 못했고, 돈을 탐내고 안일을 구하고 음모를 잘 꾸몄기 때문이다. 중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그 습관에 동화되어 기독교의 본질을 버리기까지 하였으며, 남미에서 군대를 훈련시켜 스페인과 포르투갈 군대를 공격하였고, 국왕 엠마누엘 1세의 암살 음모가 적발되어 예수회의 재산이 몰수되고 포르투갈 프랑스 스페인 나폴리 등지에서 추방되었다. 이 4개국의 건의로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예수회 활동을 금지하는 방침을 세웠으나, 러시아와 프로이센에서는 불응하였고, 카톨릭의 적극적인 선교 및 체제유지와 권력확대를 위해 전위부대로 쓰기 위해 금지된 지 41년 만에 1814년 교황 피우스 7세가 재흥을 허가하였다.
제9장 미국의 초기 기독교
최초로 미국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유럽에서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온 청교도들이었다. 이들은 신앙적으로 무척 순수했으며, 마을을 교회 중심으로 이루어갔다. 미국 초기의 신앙 열정은 뜨거웠고, 순수한 형태의 복음의 유입을 배경으로 청교도적 정신은 미국을 매우 부유한 나라로 만드는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여러 종파들은 비복음적 요소들도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고, 미국의 교회들은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등의 사회적인 한계를 면치 못했고, 영국인들이 대서양 연안을 따라 정주하면서 식민지화가 시작되었으며, 그 후 미국은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으로 한층 성숙되었고 기독교계도 다양한 운동으로 신앙의 깊이를 더해 갔다. 그러나 유럽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1. 초기의 미국
1) 영국과의 독립전쟁
18세기 후반부터 영국 정부는 통치를 강화하여 식민지 주민들과의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775년 주민들이 비축한 화약고를 공격하는 영국군과 전투를 한 것이 독립전쟁이다. 1776년 7월 4일 13개 식민 지역의 대표들이 필라델피아 대륙의회에 모여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논, 1782년 파리회담에서 정식으로 비준을 받았다.
2) 기독교 교파 현황
영국인들이 모두 귀환했으나 웨슬리는 홀로 남아서 미국 특유의 감리교를 만들어 1784년 미국 감리교를 창설하였다. 침례교는 버지니아 및 다른 남부 식민주들에서 기세를 떨쳤으며, 회중파는 뉴잉글랜드와 그 일대에서만 증가했다. 많은 교파를 초대교회의 순수한 복음으로 통일시키려는 운동이 일어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것도 하나의 교파가 되어 버렸는데 바로 크리스챤 교회(Christian Church 기독교 제자파)가 그것이다.
☞ 미국 내 교파 분포 : 뉴잉글랜드(청교도), 펜실베이니아(퀘이커교도), 메린랜드(카톨릭), 남부(영국국교도(성공회))
2. 미국의 대각성운동
1차 대각성운동은 1726년 데오도어 프레링스하우젠이 행한 설교에서 발단되었다. 이 부흥운동의 대표적인 주자들은 길버트 테넨트와 아들 윌리엄 태넨트, 조나단 에드워즈, 휫필드 등이었다. 이 운동으로 교회부흥은 물론 미주성서협회, 해외선교회, 아메리카 식민협회, 미국금주협회 등이 세워졌고, 여권운동도 있었으며, 제2차 각성운동 후에는 각 민족들이 특정한 교파와 맺고 있던 상관관계가 무너져 한 교파 안에 여러 민족이 섞여 있었다.
3. 남북전쟁
미합중국은 노예제도를 실시하고 있었고 교회 역시 노예제도에 대한 찬반으로 심한 분파가 일어났다. 남북전쟁으로 노예제도거 폐지되었으나 남북 양측의 증오와 편견은 계속되었다. 남부의 교회들은 공공연하게 흑인들을 조소하였고 노예였던 흑인들에게 교회를 떠나라는 압력이 가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각종 흑인들의 교회, 교파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흑인 침례교, 유색인 감리교 감독교회 등이 그것이다. 이들 남부 흑인교회는 북부의 흑인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아프리카 선교에 중요한 몫을 담당했다. 인디언들과 멕시코인들 역시 복음과 함께 폭력과 약탈을 같이 받았기에 복음을 오해했다. 그러나 두 차례의 대각성운동은 신앙의 본질을 찾고 생활 속에 그것을 실현하려는 노력으로 미국 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어 금주, 금연, 절제, 성수주일, 노예제도 폐지 등 활발한 운동으로 성숙한 미국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10장 프랑스 대혁명
프랑스대혁명은 루이16세 등 절대주의 아래 구제도에 대한 시민계급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이었다. 당시 프랑스 시민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평균 수명이 25세를 넘지 못했으며, 문맹율은 2/3 이상이었으며, 신분제로 인해 승려와 귀족들은 특혜를 누리고 평민들은 2중 3중 부담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왕 루이 16세는 미국 독립혁명을 지원한 군사비 때문에 재정궁핍에 빠지게 되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정총감 칼론의 제안으로 특권층에 과세하는 임시지조를 제안했는데 반발로 불가능하자 특권층과 평민층 대표로 한 3부회를 열기로 한 결과 국민의 여망인 헌법과 의회정치의 개설에 착수함으로 왕권은 3부회 최고책임자를 파면하고 국민의회를 해산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여기에 분개한 프랑스 시민들이 동부 요새이며 정치범을 수용하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므로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농민 폭동은 전국에 퍼져 영주의 저택을 습격하고 교회와 귀족에게 바치는 조세와 부역을 거부했고, 의회는 인격적 종속관계, 십분의 일세, 영주재판권 등을 폐지했고, 1971년 절대 왕정은 무너지고 입헌군주제 등의 새로운 정치형태가 생겨났지만 이 헌법은 군주제보다 인민주권에 입각하고 있었기에, 파리의 민중은 1,000여명의 반혁명분자를 처형하고 선거를 통해 국민공회를 발족시켜 1793년 루이 16세를 혁명광장에서 처형하고 급진적 개혁을 단행함으로 자코뱅당에 의한 공포정치를 이어갔다. 그 후 온건파가 자코뱅당을 몰아내고 집정정부를 세우므로 결국 유산시민의 승리로 끝났고 자본주의 발전에 탄탄대로를 만들어주었다.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로마 카톨릭의 부패가 그대로 드러난 사건으로 당시 학정과 억압 그리고 빈곤에 시달리던 대다수의 프랑스 국민들에게 있어서 제 1급 신분에 해당하는 사제와 신부들의 사치와 타락은 결코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이 대혁명을 일으킨 후에 국민정서의 안정을 위해 이성의 존중과 찬양에서 찾았다는 것은 기존 종교체제에 대한 강한 반발이었음에 틀림없다. 프랑스의 이성에로의 전환은 이후 정신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그만큼 종교의 영향은 감소하였다.
☞ 신분제의 모순 - 신분제의 모순 중 특히 세금 문제에서 1신분인 성직자와 2신분인 귀족은 세금이 면제되었지만 3신분인 평민들에게는 과중한 세금 부담이 지워졌다. 당시 프랑스는 국가 부채가 엄청났는데 이 부담을 지운 당사자는 정작 왕을 비롯한 1, 2신분의 사람들이었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3신분에 속하는 평민들이었던 것이다.
1. 원인
1) 가톨릭 교회의 부패 - 가톨릭교회는 국가 전체 부의 20%를 차지하고 납세 의무도 없었다.
2) 경제적 불균형 - 대다수 국민이 가난한 생활을 하고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들만이 호화 생활을 하였다.
3) 정치적 타락 - 왕권의 횡포와 매관매직의 횡행.
4)사회 계급의 모순 - 성직자, 귀족, 농민으로 3계급이 분리되어 있고 제1, 제2 계급의 착취가 심하였다.
2. 발생의 결과
1) 1789년 5월 5일 재정 궁핍으로 승려, 귀족, 평민으로 삼민회를 소집하여 국사를 위임한 데 있다.
2) 그 해 7월 14일 바스티유(Bastille)성을 공격하고 자유, 평등, 박애의 날로 축하하였다.
3) 계급 폐지, 교회 재산을 국유화, 위그노의 예배 자유를 허용.
4) 1792년 9월 21일 공화 정치를 실시, 루이 16세를 위시한 교관들을 처형하였다. 그해 11월 7일에 가톨릭의 반대로 공화 정치를 폐지.
5) 나폴레옹의 출현...공포 정치와 내란의 와중에서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
6) 유럽 각지의 새로운 기풍 조성의 자극제가 되었다.
3. 혁명의 의의 확산
1) 유럽 각지에 새로운 기풍 조성의 자극제가 되었다.
2) 자유주의, 국민주의 발생
3) 교황의 정치적 권위 종식.
(근세교회사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