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는 1799년에 에칭과 애쿼틴트aquatint(워시 드로잉의 효과를 내는 에칭의 한 방법)를 병용한 80점(후에 3점을 추가)을 모아 『로스 카프리초』라는 제목으로 동판화집을 발행했다.
표지에는 고야의 자화상이 있었다.275 1793~98년에 제작된 이 시리즈에는 유머러스한 표현에 악몽과 같은 불길한 요소가 항상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고야의 기법은 렘브란트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보이지만, 작품의 모티브는 사회적인 관습과 교회의 병폐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며 마녀와 악마가 등장하는 장면에는 죽음의 무도 같은 요소도 들어 있다.
시리즈는 속담, 사회에 대한 다소 직설적인 비판, 마녀세계에 대한 재담 등 조롱과 분노의 색채를 띠었다.
‘카프리초’라는 말은 ‘종작없는 생각’이란 뜻이다.
에칭화를 보면 공상과 상상이 한껏 표현되었으며 기분 나쁜 환상적인 요소와 공포, 위협 등 어두운 면이 두드러진 데서 그의 사상이 얼마나 자유로우며 선동적인지 알 수 있다.
이런 경향의 초기 작품으로 1793년 산페르난도 미술 아카데미를 위해 제작한 작품 중 <마을의 투우>, <정신병원>, <감옥소 내부>276 등이 있다.
에칭은 동판에 항산성 물질인 그라운드를 입히고 그 위에 뾰족한 도구로 밑그림을 새겨서 질산 등 부식액에 넣으면 그라운드가 벗겨진 그림 부분이 부식되면서 동판에 홈이 패여 새겨진 선을 이용하는 판화기법이다.
최초이자 최고의 에칭의 거장은 렘브란트로서, 그는 인그레이빙과의 연관을 전적으로 배제하고 이 기법의 특성인 자유로움을 활용하여 빛과 분위기,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대가적 솜씨로 공간을 표현한 300점 이상의 에칭 작품을 제작했다.
18세기 베네치아 화파의 위대한 화가 티에폴로와 카날레토 또한 에칭을 이용하여 분위기 효과를 포착했으며 로마의 에칭 제작자이자 고고학자였던 잠바티스타 피라네시는 불길한 상상의 감옥 내부 장면을 그린 연작〈감옥〉(1745년경)에서 에칭을 이용해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1778년경 궁전에 소장된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대부분 동판화로 모사한 적이 있는 고야는 연작 〈전쟁의 참화〉277, 278를 통해 피라네시보다 더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표현했다.
<카프리초 No. 39: 선조에게 돌아감>279은 당나귀가 자신의 조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장면인데,. 조상들 역시 당나귀인 것이다.
이는 귀족 숭배에 대한 고야식 조소이다. <카프리초 No. 43: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탄생한다>274는 인간이 이성을 버릴 때 인간의 상상 속에는 악이 생긴다는 점을 말하는 작품이다.
기에마르드는 고야가 자신의 풍자 에칭인 <카프리초 No. 34: 그들을 압도한 잠>282, <카프리초 No. 17: 제대로 끌어올렸다>, <카프리초 No. 31: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한다> 등을 대사관 인쇄기로 제작하는 것을 허락했다.
고야가 『로스 카프리초』에 대한 판매를 시작한 지 불과 이틀 만에 이단심문소의 요청에 의해 중단되었다고 한다.
27점의 사본이 팔렸는데 4점을 오수나 공작 부부가 구입했다.
사회 풍속에 대한 그의 가차없는 풍자 중에는 궁정 스캔들을 다룬 것도 있으며, 어떤 에칭은 역사적 맥락을 알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한 수수께끼 같은 것도 있었다.
기교에 뛰어난 그는 사회적·정치적 비판을 예술로 함축성 있게 포장해냈다.
그의 주제는 매춘, 미신, 이단심문소, 탐욕, 야심, 권력의 남용 등을 망라했으며 뛰어난 그의 상상력이 이런 주제를 활기찬 이미지들로 변용시켰다.
『로스 카프리초』를 구입한 사람들 상당수는 외국의 고야 숭배자들이다.
고야의 양식에 가장 매료된 사람은 들라크루아였다.
그는 1818년 혹은 1819년부터 고야의 작품을 모사하기 시작했으며, 1824년 『로스 카프리초』에서 영감을 받아 모사하면서 변형된 자신의 모티브를 제작하기도 했다.281, 284
프랑스인의 스페인 문화에 대한 선호와 더불어서 고야의 영향은 마네와 드가의 작품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났으며 마네에게 고야는 매우 중요했다.
마네도 들라크루아와 마찬가지로 『로스 카프리초』에서 영감을 받아 모사하면서 변형된 자신의 모티브를 제작했다.287
고야는 1816년에 <라 토로마퀴아>로 알려진 투우를 모티브로 판화 33점을 제작했다.288
무어인이 전한 투우는 스페인의 국기로서 17세기 말까지 궁정의 오락거리로 귀족들 사이에 성행했으나 18세기 초 부르봉 왕조시대에 이르러서는 현재와 같이 일반 군중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투우는 매년 봄 부활제의 일요일부터 11월까지 일요일마다 마드리드·바르셀로나 등 도시에 있는 아레나arena라는 투기장에서 개최된다.
투우는 투우사를 소개하는 장내 행진으로 시작되며, 투우사는 중세풍의 금과 은으로 장식된 화사한 복장을 걸치고 엄숙하고 화려한 연출과 함께 투우 특유의 분위기를 엮어낸다.
투우사와 싸울 소는 들소 중에서 골라 투우장에 내보내기 전 24시간을 완전히 빛이 차단된 방에 가두어 둔다.
피카도르는 교묘하게 말을 부리면서 창으로 소를 찌르고 소는 흥분하여 성질을 억제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게 된다.
이때 반데릴레로가 등장하여 소의 돌진을 피하면서 여섯 개의 작살을 차례로 소의 목과 등에 꽂는다.
작살이 꽂힐 때마다 소는 더욱 미쳐 날뛰며 이에 따라 장내는 야릇한 흥분에 싸이게 된다.
이때 주역 마타도르가 검과 붉은 천을 감은 물레타라를 들고 등장하여 거의 미쳐버린 소를 유인하고는 교묘하게 몸을 비키면서 소를 다룬다.
싸우기를 약 20분, 장내의 흥분이 최고도에 이를 무렵 마타도르는 정면에서 돌진해 오는 소를 검으로 찔러 죽임으로써 투우는 끝난다.
마타도르가 물레타로 소를 다룰 때의 몸동작은 고전 무용의 한 동작 같이 아름답게 보인다.
1819년 말 고야는 두 번째로 큰 병을 앓았고 이때 마드리드 교외에 퀸타 델 소르도(귀머거리의 집)라는 별장을 구입했다.
그는 1820~22년 동안 이 집에서 14점의 대작들을 제작했다.
‘검은 회화 Black Painting’라고도 알려진 이 작품들은 대부분 검정색, 회색, 갈색으로만 그려져 있어 고야의 상상력에 병적 경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824년 고야는 건강을 이유로 페르디난도 7세에게 국외로 나가는 것을 허가받아 프랑스의 보르도에 정착했다.
그는 그 해 파리에서 두 달을 지냈고 1826년과 1827년에 잠시 마드리드를 방문했을 뿐이다.
그는 1828년 4월 16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최후의 몇 년 동안 새로운 기법으로 석판화를 시도했다.
고야는 500여 점의 유화와 벽화, 300여 점에 이르는 에칭과 석판화, 수백 점의 소묘를 남겼다.
그는 생전에 200여 점이 넘는 초상화를 그려 초상화가로도 인기를 얻었다.
그는 “자연·벨라스케스·렘브란트” 이 셋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