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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평가 및 역사적 의의
1. 서론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아픈 기억이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것이 몇 가지가 있다. 하지만 현대에 벌어진 일들 중에서 찾으라고 한다면 빠지지 않는 사건이 있다. 우리는 그 사건에 대해서 정확히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역사적 의의까지 생각해보려 한다. 흔히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고 하면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전두환 정부 퇴진 요구와 계엄령 철폐 등을 주장한 광주 시민들과 전라남도민이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라고 알고 있다.
당시 광주는 신군부 세력들이 집권하기 위한 5.17 비상계엄령으로 인해 제한된 상황에서 시민들이 뭉쳐 계엄령으로 인해 발생한 헌정 파괴 + 민주화 역행 조치에 반대하여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고 이에 신군부는 시위진압을 위해 만들어진 특수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이를 과도하게 진압하기에 이르고 그뿐만이 아니라 죄가 없는 일반 시민들까지 일제 강점기를 방불케 하는 참상을 저지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이전까지는 청와대 지하실에 봉인되었던 것이 2008년에 영화로 만들어지더니 결국 2011년 5월에는 관련 문서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되기에 이른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들은 민중적인 성향이 강한데 이러한 과정에서 주 세력이 정치인이나 지배층이 아닌 민중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이한데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하는 것이 광주 민주화 운동이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들은 교과서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NASA는 이러한 점에 대해서 이 사건은 보통 한국의 민주화 개혁의 추진력으로 설명되며, 이 사건으로 인해 광주를 '한국 민주주의의 성지'로 여겨지게 되었다. 우리는 이 글에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역사적 의의까지 살펴보려고 한다.
2.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하여
1)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발생 배경과 과정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하 5.18)은 그 시작을 1979년 10월 26일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봐야 한다. 1979년 10월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10·26사태가 일어나는데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태는 앞으로 일어날 참상을 예언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후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보다 민주적인 법으로써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들이 많아지게 되고, 그러한 움직임 속에서 11월 7일 최규하 대통령이 직접 긴급조치를 해제해 그동안 긴급조치로 금지가 됐던 개헌 논의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민주화의 움직임 속에서 12월 12일을 맞게 되고 새로운 국면에 부딪히게 된다. 당시 계엄 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에 전두환이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긴급 체포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이로 인해 논의가 진행 중이던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K-공작계획으로 정당화 시키게 된다. 여기서 K-공작계획으로 민주화를 막고 신군부 세력을 집권시킨다는 목적을 달성하게 되고 1850년 5월에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하는 등 일명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한다.
이 수습방안의 의도는 신군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탄압하면서 신군부가 정치를 주도하고, 국회의 폐쇄와 주요 정치인의 체포로 신군부의 안정적인 정치장악을 담보한다는 것이다. 또한 수습방안의 일환으로써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보고서인 ‘북한 남침설’을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하는데 그 내용이 지금 북한이 남한에 침투해있으니 주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주요 내용은 일본 내각조사실에서 가져왔다고 했지만 사실 일본 정부는 그런 구체적인 것을 말하거나 애초에 정보 자체도 없었다고 하여 결국 이것이 전두환의 정권탈취계획의 일부라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1980년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들이 정치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서 시민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고 5월 15일이 되자 시위대 중 한명이 버스를 탈취해 저지선을 넘어 전경에게 돌진하여 이성재 일병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17일 24시부로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내려 18일 새벽 1시부로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되기에 이른다. 또한 새벽 2시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해 헌정 중단사태가 벌어진다.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되어 감금조치 되었고, 약 2500여 명의 학생과 교수 그리고 재야인사 등이 긴급 체포된다. 김영삼은 당시 신민당 총재였는데 무장헌병들에 의해서 집안에서 연금되었다.
이날 내린 신군부의 비상계엄령에 불만을 가진 전남대 학생들은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하게 되고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하고 폭행으로써 진압하였다. 과격한 공수부대의 투입은 곧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왜 굳이 과도하게 진압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광주가 민주화 성지가 되도록 하는 항쟁이 일어나게 된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18일 당일 아침 9시 이후, 텔레비전 방송, 라디오, 신문을 통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 소식이 보도됐다. 18일에 전남대학교 학생 100여명은 공수 부대원에게 항의하다가 충돌이 발생하였는데, 공수부대원들이 학생을 구타하자 전남대 학생 300여명이 공수부대에 투석했다. 이후 전남대학교 학생 300여명은 가톨릭 회관에서 집결하여 시위하였다. 이에 경찰이 최루탄을 뿌리며 해산시켰다. 신군부는 빠른 시위진압을 위해 5월 18일 오후 제7공수부대여단을 시내에 투입하였다. 공수여단은 시위학생이 아닌 일반시민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에 학생들은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하였으나 계엄군은 대검과 곤봉으로 시위대와 시민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휘둘렀다. 이에 청각장애인 김경철 등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쓰려졌다.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시민과 고등학생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19일 오후 시위대는 급격히 불어나 그 수가 3000여명에 육박하였다. 이에 계엄군의 진압도 점점 잔혹하게 변해갔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폭력을 휘둘렀다. 이에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에 이르렀다. 광주의 버스와 택시 등 200여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엄군은 더욱더 폭력적으로 시위대를 진압해 나갔다. 이에 일부 시민이 공수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를 직접 찾아가 항의해보기도 하였지만 무의미했다. 시위는 계속되는 가운데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폭도들의 난동’으로 시위를 보도하자 격분한 시위대는 광주 MBC 방송국을 방화하였다. 결국 20일 24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시위대에 최초의 사격을 가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2군사령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하여 다음날인 21일, 집단 발포로 까지 이어지게 된다.
5월21일 오전 전남도청과 전남대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였다. 21일 오전 시민대표는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하였으나 결렬되었다. 전남도지사는 헬기를 타고 21일 정오까지 공수부대가 철수할 것이라 발표하였으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수세에 몰린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하여 21일 정오 12시경 전남대 앞 과 21일 오후 1시경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하였다. 그러나 시위대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도청발포 이후 계엄군의 태도는 더욱 극명해져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가하였고, 엄청난 사상자들이 발생하였다. 이에 광주의 병원과 보건소가 포화상태가 될 지경이었다.
계엄군이 시위대를 향해 사격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화순과 나주지역의 경찰서와 파출소의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이 결성되었다. 또 시민들은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시아자동차로 몰려가 차량을 탈취하였다. 시민군은 차량을 몰고 외부에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떠났으며,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되었다. 이에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외곽까지 철수했고, 시민군은 21일 저녁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였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오후 7시 보안사에서 전달한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을 발표하고, 광주의 시위를 광주사태라 명명하며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표현하였다.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가 내려져 외곽까지 철수한 계엄군은 작전을 수행하였다. 5월 21일 21시 30부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에 방어적 발포를 허용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됨에 따라,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광주외곽봉쇄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시민 살상행위가 광주 곳곳에서 벌어졌으며, 24일에는 계엄군 사이에 적으로 오인하고 사격하는 일이 일어나 계엄군 13명이 사망하였다.
22일 광주는 계엄군에 의해 고립되었다. 전국에는 보안사의 통제를 받는 언론들이 온갖 유언비어를 확산하였고 외신들은 계엄군이 물러가고 시민군이 치안과 자치를 담당하는 가운데 자치질서를 찾아가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이런 힘든 상황 속에서도 광주시민들은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자체적인 치안과 질서유지를 담당하였다.
항쟁기간동안 광주 시민들의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은 정말 놀라우리만치 대단한데, 당시 광주에는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행렬이 줄을 이루었고, 행정력과 치안력이 미약한 상황에서도 큰 사건사고 한건이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광주시내의 금융가, 백화점, 상점가에서도 단 한건의 약탈도 나타나지 않았다. 광주시민의 협력으로 행정기관의 역할은 상당부분 유지되었고, 당시 전라남도부지사를 비롯하여 공무원도 전남도청에 정상 출근하였다. 공무원들은 5.18 당시 행정업무에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이에 일부 지식인들을 당시 광주를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하기도 할 정도였다.
시민자치기간 일부 시민들은 스스로 계엄사에 무기를 자진반납 했으나 일부 시민들은 지속적인 투쟁을 주장하며 계속 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차례에 걸친 협상과 회의 끝에 계속 무장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평화시위는 계속됐고, 애국가를 부르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평화집회를 계속하였다. 5월 27일 새벽 군인 25,000을 투입한 계업군의 작전이 시행되었다. 당일 새벽2시 광주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전라남도 도청에서 1만여 발을 사격하면서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다. 도청 내에 시민군은 항쟁파와 투항파로 나뉘었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날이 밝으며 계엄군이 끝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함으로써 생존자를 체포, 연행하면서 진압작전을 마무리 하였다.
2) 광주를 비롯한 전남지역의 특수성
광주로 대표되는 호남은 ‘지역의 계급화’ 가 논의될 정도로 권위주의적 성향이 강한 박정희 정부의 편향적인 지역개발정책과 인사정책으로 인해 소외감과 불만이 누적되어있다. 그래서 광주는 민주주의를 통한 균형과 공정의 가능성을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 염원하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전박대통령 서거와 함께 유신체제의 권력핵심이 공백이 되었고 정치체제변동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대다수가 새로운 민주체제를 요구하고 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군부 지배집단에 의한 세력, 이른바 신군부가 원시적 폭력을 동원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억압적 도재체제를 다시 구축하게 된다.
근대화 과정에서 전남과 광주는 경제적 주변과의 부정적 폐해를 가장 많이 받게 되었고 박정희 정권 이래 지역주의적인 정권은 전남에 대한 중계와 부정이라는 전통적 자국편견을 집권전략의 하나로 살아왔다. 이런 특수성 때문에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사람에게 극단적인 좌절의식과 한을 남겼고 박정희정권 이래의 국가체제와 정치권력구조에서 광주시민이 특히 전통사회에서 강력한 저항일수록 부정적 편견이 형성되었던 양식과 마찬가지로 전라도가 1970년대 이래 지역 주의적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세력의 대표적 기반이 되었다.1971년 선거에서 출발했던 박정희 대통령과 야당지도자 전 대통령 김대중과의 경쟁관계는 유신체제에 들어 박전대통령과 야당지도자 전 대통령 김대중 저항과 그에 따른 수난으로 이어졌다. 전남 지역 사람들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전 대통령 김대중의 정치역성에 투영되면서 호남지역주의의 구심점이 되었다.
3.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평가 및 역사적 의의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는 5.18 민주화 운동을 뭐라고 평가하고 있는지부터 살펴보면 “왜 교과서를 먼저 보는 것인지”에 대한 답변은 교과서는 학생들이 역사를 처음으로 배울 때 필요한 교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의견보다는 교과서가 비교적 중도적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처음에 살펴보는 것이다. 살펴보자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비록 실패한 운동이지만 이 운동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나아가 학생 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자세히는 서술하지 않고 간략하게 넘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금 더 자세하게 서술을 했다면 어떨까 싶은 면도 없지 않아 있다.
이렇듯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여러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의의는 1980년 5월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거칠게 타오르던 광주 민주화 운동의 불꽃은 27일 새벽, 계엄군의 ‘충정작전’과 함께 쓰러졌다. 그러나 그 뜨거운 불씨마저 짓밟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 불씨는 혹독한 시절에도 꺼지지 않고 더욱 더 빛을 발하면서 그 날 이후 살아남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결코 꺼지지 않는 불길로 지켜주고 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스러움이었으며 광주 시민들의 자랑과 긍지는 단순한 향토애나 반항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항쟁기간을 가장 뜨겁게 살았던 시민들 그 시민들의 절실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따라서 권력의 탄압이나 각종언론의 왜곡선전에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또한 광주시민들이 체험한 ‘광주의 진실’은 시민부대가 공수부대의 야만적인 폭격에 굴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싸웠다는 점과 시민 전체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어 그에 저항했으며 결국은 시대가 지나 승리한다. 당국에 의해서 불순분자와 폭로들의 폭동으로 매도되면서도 광주의 시민들은 비인간적인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는 길이고, 정의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신념하나만을 가지고 그 외로운 길을 걸었던 것이다. 항쟁의 전 기간 동안 광주시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위기를 가장 인간다운 삶의 방식으로 대처하였고 광주 시민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것을 서로 조금씩 나눠가며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면서 살았다.
항쟁의 지도부가 수습의 방법을 두고 고심할 때 일반 시민들은 하나가 되어 어려움을 이겨 나갔던 것이다. 광주시에서 계엄군이 퇴각하고 시민군이 시내를 장악한 이후 다시 계엄군이 진주할 때까지 6일 동안 광주의 시민들은 특히 이 지역의 민중 그들이 갖고 있는 도덕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 기간 동안 광주시는 공식적인 치안체계가 완전히 붕괴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벽한 자치치안체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세계 민주항쟁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광주시민들은 성숙한 민주의식과 공동체 의식을 견지하였다는 점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은 오로지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한 티끌 없는 시민봉기였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정확히 4가지의 기본 정신이 존재한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 첫 번째는 무이념이다. 그토록 많은 인명피해와 소용돌이에 휘말려 격렬하게 전개된 항쟁인데도 아무런 이념이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직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된 민주 공화정 이념만이 있을 뿐이었다. 두 번째는 무조직+무지도자이다. 아무런 조직이나 지휘 체계가 없이도 그 방대한 항쟁이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질서와 화해이다. 비록 초기에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보고 격분한 나머지 거리로 뛰어나온 사람들이지만 질서의식만큼은 대단했다. 네 번째는 민주의식이다. 5월 21일 오전 금남로에서 시위 대원들이 도지사와 협상을 제의하면서 내세웠던 조건이 만행을 저지른 ‘군의 사과와 시민의 명예회복 그리고 민주회복’이었다. 이는 항쟁이 계속되는 동안 일관된 주장이자 정신이었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정신은 항쟁기간 동안 무이념 + 무조직 + 무지도자 상태에서도 질서와 화해 정신 나아가 투철한 민주의식으로 발현되면서 시민 모두를 공동운명채로 묶는 바탕이 되었다. 그렇다면 사회 각층들의 사람들의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평가는 어떠할까.
김영삼 전 대통령은 “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 있는 민주 정부입니다.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하여야 합니다. 세상에 인간으로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백 명을 죽일 수가 있습니까? 우리 역사에 길이길이 이 사실을 크게 기록해야 합니다. ” 라고 공식적인 기자회견에서 말한 적이 있다. 이렇듯 광주 민주화 운동은 기억해야 하고 기억해야만 하는 그러한 존재인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 정부는 5.18 항쟁의 고귀한 정신과 값진 헌신이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되고 크게 선양될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할 것이며 이 항쟁이 구현한 고귀한 뜻과 정신이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언제나 현재로서 뜨겁게 불타오르게 할 것이며 인권침해에 저항한 인권정신, 맨손으로 잔혹한 총칼에 맞섰던 비폭력 정신, 공권력의 공백 속에서도 질서의식을 가지고 치안을 지켰던 시민 정신, 항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평화정신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라고 말할 정도로 극찬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광주 민주화 운동 23주년 기념사에서 “ 5월 18일은 역사에 많은 의미를 남기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80년 광주에서 타오른 민주화의 불꽃은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되어 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군부 독재를 무너뜨렸습니다. 군부와 언론에 의해 폭도로 매도되어 무참히 짓밟혔던 광주는 민주주의의 성지로서 부활했습니다. 그 날의 광주는 목숨이 오가는 극한상황에서도 놀라운 용기와 절제력으로 민주주의 시민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너와 내가 따로 없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주먹밥을 나누었습니다. 시민들의 자치로 완벽한 민주질서를 유지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대화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세계 시민항쟁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민주시민의 모범을 남겼습니다. ”라고 언급하며 앞으로 대한민국이 갈 길은 이 날을 기억하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대통령인 본인조차도 가슴에 새기겠다는 말을 하면서 다시 한 번 광주 민주화 운동은 우리들에게 기억 속에 점차 들어오게 된다.
이번엔 대통령이 아닌 사람들의 평가를 살펴보면 원로 사학자이자 『다시 쓴 한국현대사』의 저자인 강만길은 그의 책 P369에서 ‘광주 항쟁은 조선왕조시대의 갑오광주항쟁은 조선왕조시대의 갑오농민전쟁 & 호남의병전쟁과 일제식민지시대의 광주학생운동 및 815후의 각종 무장투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통, 박정희정권 말기의 중화학공업 과잉투자 등으로 인한 경제적 침체, 특히 박정희정권의 정치적 목적에 의한 영호남 사이의 지역감정 조장, 경제개발과정에서의 호남지방의 상대적 낙후, '유신'독재체제 이래 'YH사건’ '부마항쟁' '서울의 봄'으로 이어진 민주화 운동의 고조, 전두환이 중심이 된 신군부의 정권장악을 위한 계엄확대 및 김대중 체포에 대한 반대, 정권장악에 나선 신군부의 힘의 과시를 위한 학생시위 과잉진압 등의 원인이 겹쳐 터진 민중항쟁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원로 사학자인 그 역시도 그의 책에서 민주화 운동은 역사적으로 봤을 때 광주의 역사는 민중의 역사였으며 광주 민주화 운동도 그러한 광주 시민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당연한 처사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해외의 여러 학자들도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서술한 적이 있다. 독일의 유명한 인권운동가인 바울 슈나이스는 한 인터뷰에서 ‘광주는 깨어있는 양심과 열린 눈으로 불의와 폭력에 저항하라는 경고인 동시에 격려이며, 폭력, 전쟁,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함께 뭉쳤던 새 역사의 출발점이었다.’ 라고 언급하며 광주 민주화 운동의 기억이 남북통일을 위한 에너지와 진정한 민주화를 기원하였다. 미국 웬트워스공대 교수인 조지 카피아피카스는 자신의 책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은 독재정권에서 민주화로 가는 역사의 지렛대였으며 그 에너지는 전 세계에 강하게 퍼지고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고 도쿄대학의 명예교수인 와다 하루키는 ‘ 한국 민주화의 횃불이 된 광주.’라는 글을 쓴 적이 있으며 태국의 인권운동가인 앙카나 닐라파이는 ‘5.18과 이후 광주의 인권운동은 세계적으로 본받을만한 사례’라고 극찬을 하였으며 시카고대학교 석좌교수인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의 민주화 실현 과정에서광주 문제보다 더 중요한 사건을 없을 것입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45년 전에 태동했지만 70~90년대를 거치면서 구체화 되었고 광주 민주화운동이 민주주의 진전에 가장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은 독재정권을 스스로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과정을 다른 어떤 나라보다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이는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추구하는 다른 나라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사례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광주가 있었습니다.” 라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위의 여러 경우를 통해 광주 민주화 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영향력이 있는 민주화 운동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에 TV조선이라는 방송국에서 이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북한이 개입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에 당시 시민군의 통역을 맡았던 현재 연세대 의대 교수인 인요한 교수는 인터뷰를 통해 광주 민주화 운동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의견에 대해서 “ 광주시민이 북한의 지시를 받고 협조했다는 것은 광주 시민들을 모욕하고 한 번 더 죽이는 것이며 광주항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세계에서 인정하는 수준의 민주주의로 올려놓은 운동이었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북한을 향하고 우리를 지켜줘야 했던 정부가 남한을 향해 그리고 광주를 향해 있었다는 점이다. 무등산에는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한다는 뜻이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그 의미대로 진행된 것이다. 광주 때문에 대한민국이 민주화 된 것이다. 아직도 빨갱이를 운운하며 비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서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아침마다 시민군들이 반공 구호를 외치고 하루 일정을 시작했다. 도청에서 나를 위해 보초를 섰던 학생은 수상한 사람을 잡아서 군인에게 넘겨주고 오기도 했다.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이 광주 사람들이 겪은 아픔과 희생의 후유증을 이해해줘야 한다. 광주항쟁은 미국 독립운동이나 3. 1 운동보다 레벨이 높다고 생각한다.” 라고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이렇게 말한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단한 운동이라고. 그런데 그와 반대되는 의견들도 있다. 북한개입설과 광주의 폭동은 말도 안 되는 것이며 절대로 민주화 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인정하는 것이 있다. 바로 과잉진압 형태이다. 신군부는 자신들의 세력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광주에 특수 훈련된 공수부대를 투입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과잉학살을 자행한다. 예를 들자면 연행자는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송곳으로 맨살 후벼 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 넣기"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이는 거의 일제 강점기랑 다를 바가 없다. 어떻게 같은 사람들이 같은 나라 사람들에게 이런 고문을 자행할 수 있는지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가 않는다.
그렇듯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크디 큰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이 관련자들 특히 전두환, 노태우는 모두 1997년 대법원에서 “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을 받게 되고 이에 따라 전두환은 무기징역에 추징금 2205억 원을 노태우는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받게 된다. 이후 김대중 정권에 의해 징역은 사면되었다.
그리고 이 해 대법원에서는 5.18 민주화 운동을 아래와 같이 확정지었다.
대한민국 대법원에 의해 헌법에 의해 국민들에 의해 5.18 민주화 운동은 이렇게 한마디로 정의되었다.
‘5월 18일 광주에서 벌어졌던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한 운동은 오로지 민주화를 꿈꾸었고 결국 이루어졌다.’
‘광주의 민주화 정신 우리 가슴에 영원하라.’
-고건 총리 -
4. 결론
결론을 지어보자면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어제의 패배에서 벗어나 이 땅의 민주주의를 앞당긴 승리의 항쟁으로 거듭나고 있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하고 준비하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정신계층방안이 광주시민과 더불어 전 국민이 함께 고민하고 노력해야 될 것 같다. 다가오는 21세기는 무한경쟁시대라고 말하는데 이 세기를 준비하고 기약하기 위해서는 한 시대의 아픔과 절규에서 스스로 벗어나 우리 사회의 가능성과 역동성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의 실현을 통해 민주주의 깨달음, 운동이 보여준 상태, 더욱 더 찬란한 역사속이 빛으로 승화될 것이다.
첫댓글 호남홀대론이 민간에 널리퍼진 것도 과연 무이념인가당연히 민간인이 무슨 조직이 있나 없지........질서와 화해 글구 민주의식은 억지춘향격으로 사족을 단 것으로 보이며마지막으로 너무 많은 사후 혜택자 발생과 보상수준이 높다는 것이 위화감을 조성하지는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