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정상! 여기는 정상! 더오를곳이 없습니다.” “아! 수고했다. 정말 수고많았다.”
“여기에 오를수 있었던 것은 회장님의 집념, 그리고 전대원의 노력의 결과입니다.
”과찬의 말, 날씨가 궂어지고있으니 촬영후 빨리 하산하라”
1977년 9월 15일 12시50분(현지시간, 우리나라 4시30분) 대한민국은 마침내 세계정상에 우뚝섰다.
고상돈 대원과 펨바노르부 셀파는 인간의 도전을 거부하는 대자연과 7시간 20분간의 처절한 사투 끝에
드디어 정상을 밟는데 성공, 태극기를 꽂는 장엄한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즉, 1953년 영국의
에드먼드 힐러리경(정확히는 뉴질랜드출신)과 셀파인 텐징노르가이가 최초등정후 한국이 에베레스트봉을
세계에서 8번째로 등정한 나라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이전 9월 9일 ~ 11일, 1차공격조로 박상열 부대장과
앙푸르바 셀파가 C4를 출발 정상에서 불과 40-50여m를 남겨놓은 해발 8,800m지점에서 패퇴, 영하 40도의
악조건에서 산소도 다떨어진 상태에서 비박하면서 구사일생으로 생환한후 2차공격에서의 성공이라 더욱 값진결과였다.
그로부터 2년후 1979년 5월 29일 오후 7시15분경, 북미대륙 최고봉인 멕킨리를 등정후 하산중 추락, 상기 고상돈대장과
이일교대원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박훈규대원만이 두손두발을 동상으로 잃으며 겨우 살아돌아올 수 있어 산악계를
놀라게 하였었다. 그렇지만 가신분은 그렇다치지만, 살아남은 박훈규씨는 수년간의 입원과 재활치료 끝에 향리인 제주도에서 비록
손발이 없는 불구자이지만 왕성한 산악활동과 프로못지 않은 사진기술로 사진전을 여는등 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의
표본으로써 존경받으며 산악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2007년 5월 31일 네팔, 카투만두 소재 하얏트호텔에서는 “대한민국 에베레스트봉 등정 30주년 기념식”이
당시의 대원및 함께했던 세르파등과 대한민국대사관/대한산악연맹 관계자, 또 당시의 후원사인 한국일보관계자 및
네팔정부관계자 그리고 현장에 체류중이던 산악인들이 함께모여 성황리에 만찬으로 이어 젓으며 다음날 근처
티벳불교사원인 “체첸사원”에서 먼저간 악우와 또 함께하다 희생된 셀파들의 천도제를 올리고, 당시의 대원들은
옛추억을 더듬으며 에베레스트베이스캠프까지 기념등반을 갔으며 모였던 산꾼들은 각자의 계획된 등반지로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몇명만이 남아 귀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는데 마침 네팔주재 정용관 대사(?)께서 공관으로 초대해
저녁만찬을 함께 하였었다.
앞줄 않으신분, 김영도(당시 77에베레스트원정대 대장, 대한산악연맹회장/유정회국회의원, 서울문리대 산악부), 이희수(당시 최초등정자 고상돈대원의 미망인)
뒷줄, 정용관대사부인, 이병완(대한산악연맹부회장, 한국등산클럽) 서있는분들 좌에서 시계방향으로, 김재봉(대한산악연맹 전무이사, 검악산악회),
장세규(검악산악회), 신영철(월간 “사람과 산” 편집인), 이인정(대한산악연맹회장/아시아산악연맹회장, 동국대산악부), 최정희(검악산악회),
정용관대사(한국하켄클럽), 배경미(대한산악연맹이사/아시아산악연맹 사무총장, 덕성여대 산악부)
사진촬영시점이 어제같이 느껴지는데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유수같이 흘러 이미 유명을 달리하신분도 계시고 오랫동안 병석에서 고생하시는분도 계신데
이자리를 빌어 쾌차를 빌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