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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도자기 회사차의 광고를 본적이 있다.
“인류 최고의 직업은 도자기공입니다.
왜냐하면 신이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은 참으로 좋다.
동서양의 도자기에 대한 것을 쓰려하니 쓸 것이 많다. 도자기는 기본적으로 진흙으로 높은 온도에서 구워서 만든 그릇의 총칭이다. 인류는 흙과 함께 한 역사이다. 흙으로 토기나 도자기를 만들어서 사용해왔다. 지금도 도자기는 전세계에서 애용되는 물건이면서 예술품이다.
<도자기에 대한 개관>
도자기는 재료는 다양하지만 제작 방식은 거의 동일하다. 도자기는 원래 도기와 자기의 합성어이다. 800도에서 1000도에서 구운 것을 도기, 1100도나 1400도에서 구운 것을 자기라고 하고, 합쳐서 도자기라고 부른다. 800도 이하에서 구운 것이나 아니면 아예 굽지 않고 말린 것을 ‘토기’라고 부른다.
도자기라 함은 보통 고운 흙(태토)을 사용하며 만들고 유약(유약이 궁금한 분들을 위해서 밝히는데 일종의 잿물이라고보면 쉽다.)을 발라 구워서 매끈하게 만든 자기를 떠올리게 된다.
도자기를 굽는 사람은 도공 혹은 도예가라고 한다. 도자 공예를 도예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도예가들이 참으로 많았다. 예로부터 도자기하면 잔, 접시, 화분 등을 연상하면 된다. 도자기를 방수성을 가지면서 높은 경도를 지니고 있고, 모양을 내기 쉬워서 인기가 많은 물품이다. 하지만 충격에 약해서 잘 깨어진다는 약점이 있다. 그런데 요즘은 충격에도 강한 도자기들이 생산된다.
한때 중국이 서양 등을 상대로 거래한 주요 물품이 바로 도자기이다. 도자기를 ‘차이나 china' 라고 하는데, 이는 원래 ‘진’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진나라가 오늘날의 중국이 된 것이다. 유럽에서는 도자기가 무척 귀해서 연금술사(알케미스트)가 도자기를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에 왕에 그 자리에서 스카우트를 했다는 일화도 있다.
처음에는 대거 중국에서 수입을 했으나, 나중에는 동물의 뼈를 이용하여 하얀 색을 극대화한 본 차이나(BONE CHINA)가 나왔다. 중국이나 한국의 백자가 푸르르면서 창백한 백색을 나타내는데 반하여 본 차이나는 특유의 우윳빛 같은 따뜻한 질감이 특징이다.
<도자기의 역사>
도자기는 문명이 시작되기 이전부터(약 9000년정도 소급) 굽던 토기가 그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문명이 시작되면서 음식을 저장할 그릇이 필요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토기는 원시적인 노천소성 기법으로 구웠는데, 굽는 온도가 600도에서 800도 밖에 되지 않아, 토기에 물을 담으로 쉽게 풀어지므로 사용에 제약이 많았다.
한국에서는 즐문식(빗살무늬토기), 채문식 토기 등이 있다. 고대시대에 도기가 등장한 것은 원시적인 가마가 등장한 뒤부터였다. 가마라는 것은 최소한의 연료로 최대한의 열을 올리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열의 방출을 막는 방법이 생겨나서 1000°C에 달하는 열로 흙을 구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구워서 나온 도기는 물을 담아도 흙이 풀어지거나 새지 않았다. 문명과 기술이 점차 발전함에 따라서 도기도 단순한 음식보관용이 아니라 나중에는 제사에 쓰거나, 의식을 치루는데 사용되었고, 나아가서는 예술품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중국의 진시황릉을 가보면 병마용 도기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도기발전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의 도기는 여전히 물을 흡수하는 성질을 극복하지 못해 그 때문에 와인이나 고급 음식물을 보관하기 힘들었다. 이런 와중에 중동에서 유약이 나오고, 중국에서 고령토를 찾아 사용하면서 기존보다 섬세한 도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중국에서 1300°C 이상으로 굽는 가마기술이 더해져서 우리가 흔히 아는 도자기의 초기 형태가 제작되었다.
초기에 등장한 것은 원시적인 청자였다. 당시 청자는 그저 유약을 바르는 수준이었다가 나중에는 제작기술이 발전하여 우리가 오늘날 아는 청자가 생겨났다.
당삼채(唐三彩)는 중국 당대의 도기로 삼채 유약을 사용한 것이다. 주로 장안과 낙양의 귀족들의 장례용으로 제작되었고, 묘릉에 부장되었다. 당나라 이후로 송나라 때까지 당시 귀족들은 백자와 청자를 두루 사용하였다. 송나라의 휘중이 “황제의 그릇은 청자로 하라”고 명령하자 청자가 대유행했고, 귀족들도 청자를 애호하게 되었다.
물론 고려도 이런 영향을 받아 백자보다 청자 애호가 커지게 되었다. 서해에서 발견되는 도자기 운반선에 실린 도자기의 대부분은 송나라 청자이다. 고려의 특산품이라 불렸던 ‘상감청자’는 도자기에 그림을 넣으려는 방법을 고안하다가 나온 자기이다. 당시에는 코발트를 사용한 청화나 철을 사용한 검은 채색기법이 나오기 이전이었다.
중국과 한국만이 제대로 된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나라였다. 나중에는 중국인들이 고려의 도자기를 수입하기에 이르렀다.
“천하제일, 고려비색”
북송의 대표적인 학자인 태평노인이 지은 [수중금]의 한 대목으로, 고려청자가 송나라 청자를 제치고 천하제일로 꼽혔다는 의미이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세계 도자기의 역사에서 고려와 조선을 빼 놓을 수 없다. 경매에서 수십억에 낙찰되는 도자기가 조선백자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조선의 인삼과 종이(한지)와 더불어서 도자기는 3대 경쟁력있는 특산품으로 보아야 한다.
<이슬람 상인들>
이슬람 인전의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은 중세 유럽의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으로 은그릇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무슬림 사이에서 누구는 나무그릇으로 밥을 먹고, 누구는 금그릇, 은그릇으로 밥을 먹는다. 이건 계급 불화를 조장한다” 며 그런 보석수준의 그릇을 금지하였다.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 초기에는 로마의 영향을 받아 은그릇을 대체하기 위해서 유리그릇을 사용하거나, 러스터웨어(Lusterware)라고 불리우는 도기위에 금과 은가를 입히는 기법으로 만든 도기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러스터웨어는 내구성도 좋지 않고 변질이 잘되었다.
그래서 이슬람 상인들이 찾아낸 대체재가 바로 중국의 도자기였다. 당송시대부터 이미 이슬람인들은 중국에서보부터 도자기를 수입했다. 이들은 송나라의 주력상품인 청자보다는 아직 기법이 미완성된 푸르스름한 빛의 백자를 더 선호하였다.
서구의 기독교 국가들은 백색을 교리적으로 숭상하였다. 그래서 국제무역에서도 백자가 단연 우세하였다. 이슬람 지경에서는 청자가, 유럽지경에서는 백자가 인기가 많았다.
<동서양 도자기 삼국지>
원나라 시절 고려에 북방식 가마기법이 본격적으로 소개되어 기술이 크게 진보한다. 14세기 나라가 혼란해짐에 따라서 분청사기 형태를 한 청자가 제작되었다. 고려 말기는 한반도 역사에서 보기 드문 막장시대였다.
서남해안에 왜구들이 자주 출몰하여 이들이 약탈을 하고 질 좋은 고령토를 얻기도 힘들었다. 결국 기술적으로 완성된 백자는 15세기 조선시대에 되어서 가능해지고 이러한 도자기 제작의 총 책임자는 왕자들이 주로 맡았다. 특히 경기도 광주지방에 도자번조를 담당하는 중앙관청인 사옹원(司饔院)을 두어 자기번조를 담당하면서 이른바 관요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백자의 종류는 역시 문양기법에 따라서 순백자, 상감백자, 청화백자, 철화백자, 진사백자 등으로 나누어진다.
조선을 대표하는 도자기로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있다. 분청사기는 15~16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그릇으로 그 뿌리는 고려말에 만들었던 질 낮은 상감 청자에 있다.
조선의 도자기 기술은 급발전하여 18세까지 이어지다가 18세기 양반 사대부의 취향이 놋그릇으로 바뀌고, 19세기 세도정치 시기가 닥쳐오자 정체기를 겪는다.
일본의 경우, 헤이안 시대부터 [시에키]라는 도기를 바탕으로 중국의 유약 기술을 받아들여 독자적으로 도기를 전국 시대에서 만들었지만 자기 제작의 역사는 임진왜란 이후에서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왜군놈들이 모셔간 조선의 도자기 장인들이 일본에서 자기를 만들면서 기술이 전파된 것이다. 임진왜란 시기에 끌려간 도공이 약 42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오래된 가마터에는 조선인들이 남긴 흔적이 있거나 조선인들의 후손들이 사는 경우가 있다. 에도 막부가 들어선 후 조선통신사 등이 포로 송환협정을 타진할 때에도 도자기 장인만은 돌려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의 [도자기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지만 그저 음흉한 왜구의 후손이라는 생각만 든다. 유럽에서는 임진왜란을 부를 때, ‘세라믹 워 Ceramic War' 라고 불렀다. 임진왜란이 궁극적으로 도자기와 관련된 전쟁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 당시 다이묘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은 조선의 도공들을 가두고 숨기며 매수하는 등 온갖 방법을 다해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버텼다. 당시로서는 고부가가치의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초고급 기술을 가진 엔지니어와 같은 도공들의 위상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워낙 이들에 대한 대접이 좋아서 조선인 도공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했던 이야기도 있다. 1617년 조선 통신사로 갔던 종사관 이경직이 8월 17일자로 남긴 기록을 본다.
[이경직인 어찌어찌 조선 도공들을 겨우 만나서 돌아가자고 제안을 했으나 도공들이 당최 돌아가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일부 도공들은 성씨까지 하사를 받았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인 도공들을 극진히 우대해주기도 하였지만 심지어 이들의 도자기에 자신들의 이름을 기입할 수 있는 특권도 주었다고 한다.]
일본 도자를 찬란하게 탄생시킨 인물이 바로 [이삼평]이다. 일본인들은 그를 도자기의 신으로 받든다. 이삼평이 없었다면 당연히 오늘날과 같은 아리타 도자기의 명성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리타 지역 주민들은 ‘아리타’ 도자기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이삼평의 가마를 연지 300주년을 기념해 1916년 10월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삼평은 우리 아리타의 도조임은 물론 일본 요업계의 큰 은인이다. 현재 도자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 은혜를 입어 그 위업을 기려 여기에 모신다” 라고 글을 새겼다.
에도 막부는 조선도공들이 만든 자기를 내국 생산제품과 구분하여 [이도다완]이라는 이름을 붙여 판매하였기에 귀화를 불어했고, 자기생산 이외에 다른 일을 하거나 거주지를 바꿀 수 없게 제한했다. 이조 도공들의 애환사가 담겨 있다.
일본에서는 조선 스타일의 도자기가 인기가 많아서 부산 왜관에서는 일본 수출용 그릇 공장도 운영이 되었다. 훗날 ‘釜山窯 부산요’ 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일종의 OEM 방식으로 출하가 되었으며 조선 측이 재료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왜관에서 기술자들에게 연봉을 지급하고 일본이 좋아할만한 디자인으로 그릇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가게 하였다. 부산박물관에 가보면 당시 대마도에서 부산요를 주문하여 다시 일본으로 가졌다는 기록이나 상세한 내용들을 볼 수 있다. 나중에는 일본이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능가하여 1717년에는 폐쇄가 되었다.
이삼평 도조
<일본이 도자기 시장의 주도권을 잡다>
일본의 도자기 제조기술은 상술한 대로 임진왜란에서 데려온 조선의 도공들 덕분에 크게 발전하였고, 여기에 명나라가 청나라에 명망하자 도자기의 종주국인 중국의 도공들도 대거 일본으로 망명하여 많은 기술이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 무렵에는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서 일본 자기를 서양에 수출할 정도가 되엇다. 당시 네덜란드는 청나라가 무역봉쇄를 하자 새로운 자기생산지를 찾았다.
일본이 조선에서 데려온 도공들의 힘으로 자기 생산을 시작하자, 중국 대륙은 이자성의 난,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 삼번의 난 등이라는 3대 악재로 경덕진을 비롯한 도요지가 초토화되는 바람에 수출할만큼 잉여물량을 생산하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일본에 디자인을 수주하고 샘플을 보내는 등 공을 들여서 일본 생산품 자체의 질을 끌어올리고 값싸게 사가는 방식으로 무역을 했다. 손잡이가 달린 찻잔도 일본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우리가 먹는 찻잔의 손잡이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노력 덕분으로 나온 것이다.) 이들이 100년간 수출한 도자기만 수천만 점을 팔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유럽의 부가 상당 부분 자기를 매체로 하여 일본으로 흘러들어 갔음으을 보여준다.
여담이지만 메이지 유신 전후로 막부를 몰락시킨 유신자들의 자금줄도 바로 도자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임진왜란에 초토화되고, 도공들이 대거 일본으로 끌려가고, 나중에는 유신세력에 의해서 다시 침탈을 당한 뼈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도대체 우리는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
<유럽의 도자기 역사>
유럽의 도자기 역사는 17세기까지 중국이 열화적인 카피에 불과했다. 하지만 18세기에 유럽 나름대로 백자 관련 기술을 완성하였다. 더군다나 장인정신(마스터쉽)을 강조하면서 사승관계와 무형의 노하우 전승을 강조하던 동양의 문화와는 달리 과학적 합리주의에 기초한 온갖 실험을 시도하는 서양문화는 이런 제작기술이 빠르게 전파되고 확산되도록 공헌했다. 18세기에 없던 채색기법 및 금채를 칠하는 방식이 등장했고 기존의 유럽이 르네상스부터 발전시킨 사실주의 양식이 가미되면서 동양과 서양 두 세계의 도자기 품질이 역전된다.
우리가 흔히 아는 본차이나도 이 무렵에 등장했다. 유럽 도공들의 중요한 업적으로는 바로 대량생산의 개발이다. 물론 학구에서도 도공을 흙도 준비하고, 반죽도 하고, 성형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굽기도 하고 모든 과정을 한 두 사람이 하는 것만을 하였지만, 일본이나 중국은 일찍이 분업화가 이루어졌다. 이런 분업화를 유럽에서도 그대로 따라하여 도자기의 대량생산과 보급이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로 대량생산이 가능해지자 각종 도자기를 대량생산덕에 시중에 저가에 공급되게 되었다. 이는 서양문명이 만들어낸 도자기가 질뿐만 아니라 양에서도 동양을 넘서는 일이었다.
<한국의 도자기>
한국의 전통 도자기는 대표적으로 선사시대의 토기, 신라토기, 가야토기, 고려청자, 분청사기, 그리고 조선백자가 있다.
통일신라 이전까지 한국의 도자기 기술은 조약한 수준으로 삼국은 토기를 생산했고 귀족층은 중국의 도자기를 수입하여 사용하였다. 통일신라에 중국의 혼란기가 와서 중국의 도공들이 대거 한국으로 망명하였고 이 덕에 도자기 기술이 전래되어서 청자를 자체생산하기 시작했고 고려시대에 완성을 보게 된다. 10세기와 11시세기에 다양한 청자의 제조기법이 송나로부터 소개되었고, 고려 도공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독특한 고려청자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고려청자는 비취같은 색을 의미하는 비색(celadon green)을 특징으로 하며 고려청자는 문벌 귀족들이 권력을 잡았던 1050년경부터 무신정권 말기인 1250년 경까지 제작되었다.
백자는 재료부터 제약이 없다. 백자는 질 좋은 고령토로 만들어야 한다. ‘고령’ 이르는 명칭은 중국에 있는 도자가의 총본산 경덕진의 高嶺山 고령산에서 유래했다. 청자는 분술물 약간을 포함하는데 백자를 만들려면 불순물을 완전히 제거하는 기술이 요구된다.
백자는 최고 1400°C의 이상에서 온도를 올릴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청자도 온도에 따라 구현되는 색이 다르긴 하지만 백자 만큼은 아니다.
조선 후기에는 도자기 기술이 침체되기 시작하였고 임진왜란과 연이은 청나라의 침입으로 국토가 파괴되어 경제가 침체한데다 호란 2번에 경신대기근까지 왔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조정에서 비싼 청화백자 대신 철화백자를 쓸 정도였다.
<고려에 청자가 발달하고, 조선에 백자가 발달한 이유>
이 이유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서 잠시 설명해본다. 고려는 불교와 귀족의 나라였다. 따라서 그 시대에는 사후세계의 구원에 관심이 많았고, 환상적이며 불교적, 귀족적 느낌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 이유로 상감기법을 이용한 많은 무늬와 화려한 색깔의 청자가 발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성리학이 중심이 된 나라이다. 사후세계에 관심이 별로 없었고,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사고방식이 지배하였다. 따라서 그릇으로서의 도자기는 무늬, 색깔보다는 견고하고 기능적인 것을 선호하였다. 따라서 백자가 발달한 것으로 사료된다.
<동양의 도자기에 매료된 서양인들>
동양의 도자기에 서양인들이 그토록 열광하게 된 계기는 바로 차문화 수입과 무관하지 않다. 동양의 차문화를 서양인들이 알게 된 것은 15세기 후반 무역이 본격화된 ‘대항해시대’였다. 서양 사람들에게느는 차는 미지의 음료였으며 중국인들이 일본인의 장수요인으로 보였다. 글고 그들은 차를 따르는 다기에도 크게 주목했다. 먼 동양의 차를 즐기는 것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궁중 사람들은 차와 찻잔에 열광하였다.
영국에서 차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17세기 후반부터 중국에서 많은 찻잔이 수입되었다. 17세기 중국은 해마다 약 20만개 정도의 도자기를 수출하였으며, 18세기에 아서는 연간 100만개를 수출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도자기 한 점이 유럽 중산층들이 거주하는 좋은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완전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제품이었다. 왕족과 귀족들은 도자기 수집에 열중하여 저마다 ‘도자기 방’을 꾸미고 이를 과시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너무나 많은 부와 중국으로 들어가자 유럽의 여러 왕들이 ‘백색의 금’이라 불리우는 도자기를 개발하기 위해서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게 하였다. 이래서 나온 것이 본차이나이다. 1710년이 되어서야 유럽 최초의 백색 자기가 작센의 마이센 지방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1710년 작섹의 경질자기가 탄생하면서 다음으로 마이센에 이어 프랑스에서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루이 15세의 애첩이자 당대 문학계의 리더였던 마담 퐁파두르가 로코코 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인 세브르 도자기를 만들었다.
또한 1740년 영국에서는 고령토에 동물 뼈의 재를 혼합하여 만든 본차이나가 등장하였다. 이는 영국이 전세계 도자기 시장을 주도하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 자신들의 식민지에 본차이나를 보급하였다. 이후 영국의 도자기 산업은 화려한 장식과 색깔이 더해진 콜포트 COALPORT 사의 제품으로 명성을 이어갔다. 산업혁명과 식민지 개발로 부를 쌓은 많은 중산층들은 재산목록 중 하나로 도자기를 집집마다 소유하였다. 마침내 도자기는 서민들의 식탁에도 오르는 대중적인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유럽의 5대 도자기를 들라면, 독일의 마이센, 덴마크의 로열 코펜하겐, 영국의 웨지우드, 헝가리의 헤랜드, 프랑스의 쉐부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