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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장수(長水)
물이 긴 2덕(德) 3절(節) 5의(義)의 고장
전북의 동부 산간지대에 자리한 장수군(長水郡)은 동쪽은 백두대간의 분수령을 경계로 경남 함양군·거창군과 서쪽은 전북 진안군·임실군, 남쪽은 남원시, 북쪽은 무주군과 접한다. 무주·진안과 함께 전북 동부 산악권에 속하여 장수·장계 읍면 소재지의 분지를 제외한 대부분이 산지이며, 동쪽 백두대간쪽이 특히 더 높다. 무주 진안 장수를 함께 부를 때 무진장이라고 한다. 북동쪽의 계북면에 남덕유산(1,507m), 남동부의 번암면에 백운산(1,279m)이 솟아있고, 그 사이의 육십령(734m)을 통해 경남 거창군과 연결된다.
금남호남정맥은 섬진강과 금강의 분수계가 된다. 신무산(897m) 뜬봉샘(뜸봉샘)은 금강 발원지다. 이곳에서 발원한 금강은 장수읍과 천천면을 적시고, 무령고개에서 발원한 장계천을 받아들여 몸집을 키운 뒤 진안으로 흘러간다. 고원 형태의 내륙분지가 많아서 고랭지에 해당하며,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고 여름에는 서늘하지만, 집중호우가 자주 발생한다.
지금의 장수군은 장수와 장계가 합친 것이다. 장수는 백제시대에 우평현이었으나, 통일신라시대에 고택이라 하여 장계군에 속했다가 고려시대 이후 장수현이 되어 남원부에 소속됐다. 장계는 백제시대에는 백해군 혹은 백이군이라고 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벽계군이라 했다가 고려시대 이후 장계현이 되어 남원부에 속했다. 1896년 장수현과 장계현이 통합되어 장수군이 됐다. 1970년 장수면이 읍으로 승격됐다. 현재 장수읍·산서면·번암면·장계면·천천면·계북면·계남면의 1읍 6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곡농업 외에 잎담배·고랭지채소·과수재배와 축산업이 활발하다. 장수읍·계남면 등지에서 생산되는 장수사과와 번암감은 명성이 높다. 계북면 등지의 덕유산 기슭에서는 표고버섯·약초 등이 채취되고, 양봉도 성해 번암면에서는 전북 벌꿀 생산량의 6%를 생산한다. 무주·진안·금산에 접해 인삼재배도 활발하다. 축산업은 농가소득의 43%를 차지할 정도로 군민의 중요한 산업이다.
전북의 동부 산간지역에 위치해서 예전에는 교통이 불편한 고장이었으나 지금은 88올림픽고속도로가 군의 남부인 번암면 남부지역을 통과하고 있으며, 중부고속도로(구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북부의 계북면·장계면을 지나간다. 또 장수와 익산을 연결하는 익산-장수 고속도로가 천천면·장계면을 지나면서 교통이 아주 편리해졌다.
장수에서는 장수를 빛낸 열 분의 인물을 ‘2덕(德), 3절(節), 5의(義)’로 꼽는다.
2덕은 방촌(尨村) 황희(黃喜·1363-1452)와 정신재(靜愼齋) 백장(白莊·1342-1418)을 말한다. 황희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명망 있는 정승으로 칭송받는 분이다. 장수읍 선창리의 창계서원은 장수 태생 황희 정승을 주벽으로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고려 말 포은 정몽주에게 학문을 익힌 백장은 삼은(三隱)에 버금가는 성리학자로 알려져 있다. 고려가 망하자 치악산에서 은거하며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조선을 세운 태조와 태종이 그를 집현전 대제학으로 불러들였으나 응하지 않자 장계면 삼봉리로 유배를 보냈다. 장계면 금덕리 호덕 마을에 그의 묘소가 있다.
장수 3절의 중심에는 의암 주논개(朱論介·1574-1593)가 우뚝 서있고, 충복(忠僕) 정경손(鄭敬孫), 순의리(殉義吏) 백씨(白氏)가 뒤를 잇는다. ‘충절의 여신’으로 추앙 받는 논개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인물로써 자랑스러운 장수인이다. 당연히 그녀의 생가가 복원되었고 사당이 이곳에 만들어져 있다. 정경손은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걸고 장수 향교를 지킨 인물이고, 백씨는 고을 현감을 모시고 가다 현감이 말에 떨어져 죽자 자신도 같이 목숨을 버린 인물로서 타루공원에 그를 기리는 비석이 있다.
우리나라엔 고을마다 향교가 있었고 지금도 많지만, 사실 향교는 답사할 때 그다지 인기 있는 공간은 아니다. 대부분 6·25전쟁 이후 복원한 건물인데다 거의 큼직한 자물쇠로 잠겨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향교의 주건물인 대성전이 보물로 지정된 곳은 이곳 장수향교(보물 제272호)를 비롯해 나주향교(보물 제394호), 영천향교(보물 제616호) 정도다. 장수향교가 지금까지 무사히 전해오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 정경손이다. 정유재란 때 왜군은 남원성을 침공하고 북상 중 장수향교를 불태우려 했다. 당시 향교지기였던 정경손은 향교 마당 한가운데 꿇어앉아 경전을 외우며 의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성전이니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 침범하려거든 내 목을 먼저 베고 가라!”
이 기개에 감복한 왜군은 ‘이곳은 성스러운 곳이니 침범하지 말라’는 뜻으로 ‘본성역물범(本聖域勿犯)’이라 쓴 쪽지를 남기고 물러났다. 향교 앞에 이 분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장수 5의는 백용성(白龍城·1864-1940) 스님과 전재(健齋) 정인승(鄭寅承·1897-1986)박사와 그리고, 의병대장인 전해산(全海山·1879-1910) · 문태서(文泰西·1880-1913) · 박춘실(朴春實·1875-1914) 등을 말한다. 이 분들은 모두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에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몸을 받친 분들이다. 백용성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로 활동하였고, 불교의 대중화·생활화·지성화 운동을 전개하는 등 일제의 친일 불교화정책에 저항한 선각자다. 번암면 죽림리에 있는 죽림정사가 스님의 생가다.
전해산 의병장은 이웃 임실 출신의 유학자. 1908년 고종의 밀조를 받아 대동창의단을 구성했고, 노획한 무기로 전남 중서부 지방을 장악한 후 전북 장수에서 거병 준비하다 체포돼 1910년 사형 당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수천의 군중이 모여 의병장의 장례를 치를 때 장군의 상여가 집 앞 냇가를 건너가자 의병장 부인 김해 김씨는 방으로 들어가 음독자결했다. 이에 의병장의 유해는 다시 냇가를 건너왔고, 부인과 함께 쌍상여로 장례를 치르니, 충신열녀를 보내는 울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 한다. 번암면 원촌 마을에 의병장 부부의 묘소가 있고, 번암중학교 앞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문태서 의병장은 1908년 고향인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덕유산을 근거로 영남·호남·호서 일대에서 활약한 인물.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찔렀으나 부상을 입고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당하였다. 장수 출신인 박춘실 의병장은 을사늑약 이후 의병 50여 명을 이끌고 무주·진안·장수 등지에서 60여 차례의 교전을 벌이며 일본군 3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1909년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14년 대구형무소 벽을 부수고 동지 100여 명을 탈옥시킨 다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계북면 양악리 입구 도로변에 문태서·박춘실 두 분 의병장을 기리는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계북과 장계의 경계인 집재 고갯마루를 지나다보면 장계 분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장계가 작지 않은 고을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사실 장계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장수와 독립된 하나의 현이었다. 장계에서 천천면을 지나 13번 국도를 타면 길은 물줄기를 끼고 이어진다. 장수 읍내엔 장수군청 논개사당과 장수향교 등이 있다. 장수군청은 언제 봐도 멋지다. 의암송(義巖松·천연기념물 제397호)이란 멋들어진 아름드리 소나무가 군청을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는 400년쯤 되는데, 16세기 후반에 당시 장수현감 최경회가 논개와 함께 심은 것이라 전해온다. 수평으로 뻗은 의암송 중간 가지에 떨어진 솔씨가 싹을 틔워 자라고 있다. 군청 왼편에 있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역시 최경회가 옹달샘 주변을 정비하고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수군청 남쪽에 있는 논개사당의 논개 영정은 원래 이당 김은호(1892-1979) 화백이 그린 영정이 모셔져 있었는데 그것이 최근 새로 제작된 영정으로 교체되었다. 김 화백의 친일행적 시비 때문에 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진주 의기사에 봉안된 논개 영정을 강제 철거하면서 전북 지역에서도 의암사에 있는 논개 영정을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고, 결국 2006년 1월 전북 장수군과 경남 진주시는 합동으로 논개 표준영정 제작작가를 현상 공모하였다. 김은호 화백의 친일 시비는 차치하고라도 그가 그린 논개 영정은 남원의 광한루에 걸려있는 춘향의 영정을 빼닮았다 것이 문제였다. 광한루의 춘향 영정은 김은호 화백이 1939년 조선권번의 기생 김명애를 모델로 하여 제작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김은호 화백이 1955년에 논개 영정을 그릴 때 이 춘향 영정을 참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의암사에 새로 만들어져 걸려있는 논개의 영정은 예전의 예쁘장하기만 하던 기생 모습이 아니다. 귀부인다운 품위에 눈빛의 기개까지 전체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철저한 고증을 거쳐 만들었다는 이 논개 표준영정은 충남대 교수인 윤여환(52) 화백의 작품이다. 윤 화백은 충남대 홈페이지에 올린 제작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논개 영정의 얼굴은 신안주씨(新安 朱氏) 용모 유전인자를 토대로 제작되었습니다. 2006년 1월부터 주논개(朱論介)의 얼굴 특징을 찾아내기 위해 ‘얼굴연구소’에 의뢰해, 신안주씨 여자의 얼굴 특징을 형질인류학적으로 분석했는데, 논개의 생장지인 장수지역(장수읍과 함양군 서상면, 전북지역 등)을 중심으로 신안 주씨 문중을 촬영, 150여 군데의 얼굴을 계측 분석하여 신안 주씨가 가지고 있는 동일 형태의 용모 유전인자를 추출해 논개에 가깝다고 판단되는 얼굴 모형을 찾았습니다.”
윤 화백은 당선된 후에도 수차례의 얼굴 형태와 의상, 가체머리 등을 수정·보완하며 다시 2년의 산고 끝에 2008년 2월 문화관광부 표준영정심의위원회에서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받았다. 윤 화백의 설명에 따르면, 얼굴화장은 고대 여인들에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유행한 ‘진수아미’라는 미용법이다. 이 화장법은 족집게를 이용해 주변 잔털을 뽑아내는 미용법인데, 넓고 네모반듯한 이마에 초승달 같은 눈썹을 잘 나타낸다. 윤 화백은 고구려 벽화의 여인상, 가락국기 김수로왕의 황후 허황옥 등과 조선 전기 하연 부인상, 운낭자상 등 조선 여인들의 얼굴도 대부분 진수아미 미용을 한 경우가 많아 논개 얼굴도 이 미용법을 따랐다고 한다.
또 당시 유행하던 머리 모양과 복식, 그리고 연화만초문사(蓮花蔓草紋紗) 문양을 한 의상복원은 안동김씨 묘 출토복식(1560년대)과 양평의 변수(1447-1524) 묘 출토복식·목각인형 주악상을 참고로 한 것이다. 복식이 여름옷인 까닭은 논개의 거사일이 하절기이기 때문이다. 가녀린 여인이 왜장을 유인하여 열손가락에 힘을 다해 껴안고 함께 강에 투신하는 데 큰 역할을 한 10개의 큼직한 옥가락지도 눈길을 끈다. 무엇보다 논개의 자세다. 예전 영정이 ‘간택’을 위해 예쁘게만 보이려고 노력했던 기생이라면, 새 영정은 의거를 앞두고 왜장을 향해가는 긴장감이 내면에 묻어난다.
‘물이 길다’는 뜻을 지닌 장수라는 지명에서 볼 수 있듯 이 고장은 금강의 발원지다. 발원지 부근은 수분치(水分峙)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금강은 낙동강·한강에 이어 남한에서 세 번째로 긴 강이다. 금강의 공식적인 발원샘은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신무산(897m) 중턱의 ‘뜬봉샘’이다. 이 샘물은 금강의 첫 실개천인 강태등골을 이루며 마을 앞에서 원수분천과 만나 장수읍을 적시고, 천천을 끼고 가다 장수를 벗어난다. 이후 비운의 혁명가 정여립이 머물던 진안의 죽도를 휘감은 뒤 전북과 충청도 땅을 관통하며 북류하다 군산과 장항 사이에서 서해안으로 흘러든다. 물길은 95.9km, 약 1,000리다. 동으로는 백두대간, 남으로는 금남호남정맥·금남정맥, 북으로는 한남금북정맥·금북정맥에 안겨 있는 금강의 유역면적은 9,810㎢에 이른다.
현재 19번 국도가 지나는 수분치 고갯마루엔 수분송(水分松)이라는 이름을 얻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수분치 고갯마루에 떨어진 빗방울은 운명을 따라 각각 남쪽 섬진강이나 북쪽 금강으로 흘러든다. 그래서 수분송에 떨어진 빗줄기들의 운명은 어디로 떨어지느냐에 따라 갈린다. 수분송 맞은편, 원수분 마을 입구의 승강장 왼쪽으로 난 길로 찾아 들어가면 뜬봉샘으로 갈 수 있다. 수분치에서 2km를 가면 뜬봉샘이다.
수분리는 ‘물뿌랭이마을’로도 불린 흔적이 있어 옛날 주민들도 이곳을 발원지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뜬봉샘은 고려 말에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하다 조선 건국의 계시를 받은 곳이라고 한다. 뜬봉샘이란 이름은 옛날 이 산에서 고을의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산에 군데군데 뜸을 뜨듯이 봉화를 올렸다는 데서 유래한 것. 또 일제가 우리나라의 정기를 누르기 위해 이곳에 뜸을 놓았다 해서 붙여진 것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이 경우는 ‘뜸봉샘’이 된다. 요즘은 뜬봉샘이라 하는데, 봉황이 비상한다는 의미의 ‘뜬봉샘’(飛鳳泉)으로 해석한다. 뜬봉이나 뜸봉은 모두 ‘샘물이 뚬벙뚬벙 떨어진다’는 뜻을 지닌 의성어다. 뜬봉샘은 주변의 아늑한 풍치가 제법이다. 금강의 발원지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남한강의 발원지인 태백의 검룡소가 그 이름처럼 신비롭고 웅혼한 서기가 넘친다면, 뜬봉샘 역시 그 이름을 닮은 순진한 새악시 같은 소박함을 읽을 수 있다.
수분치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남원 방면으로 내려서면 이곳부터 섬진강 수계다.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인 금남호남정맥이 지나는 장수는 고을이 금강 수계와 섬진강 수계로 나뉜다. 즉, 장수읍 대부분과 장계·천천·계남·계북면은 금강 수계요, 산서·번암면은 섬진강 수계가 된다.
번암면은 장수에서도 가장 깊은 산골이다. 광복 후에만 이 부근에서 포수들이 총이나 올무로 잡은 호랑이가 다섯 마리나 될 정도였다. 장안산·백운산 부근은 숲이 짙어 근처 주민들은 어딘가에 호랑이가 아직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엔 호랑이에 놀란 사람들도 많고, 심지어 호랑이에 먹힌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지지계곡은 정말로 깊고 깊은 산골이다. 하지만 얼마 전 도로확포장 공사가 끝나 무령고개를 통해 장계면까지 손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지지계곡을 지나 무령고개를 넘으면 논개의 생가가 있는 장계면 주촌 마을에 도달할 수 있다. 논개의 부친인 주달문(朱達文) 진사가 건너편 범바위골에서 이주해 터를 잡고 서당을 차려 학동들을 가르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이곳을 주촌(朱村)이라 했는데, 주(朱) 진사가 사는 곳이란 뜻이다. 원래 주촌은 지금 오동저수지 자리다. 1990년대 중반 오동저수지를 만들 때 주촌이 물에 잠기게 되자 이곳에 살던 주민들 중 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이사했는데, 군산으로 간 사람들이 가장 많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야가 있고, 그나마 땅 한 뙈기도 못 구한 사람들은 막노동이라도 할 수 있는 항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논개생가는 저수지 옆 길가에 추레하게 복원되어 있었으나, 논개생가를 주씨의 선산이 있는 윗마을의 궐촌으로 다시 옮기면서 마을 이름도 주촌으로 바뀌었다. 이 마을 사람들의 논개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하다.
대곡리엔 논개의 전설이 여기저기에 서려있다. 예전 이 골짜기에 있었다는 대용소(大龍沼)는 논개 탄생설화의 일종이다. 지금으로부터 사백수십 년 전, 주달문의 부인이 첫아이를 나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용호상박하는 형상을 한 남자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바로 윗목으로 서너 발자국 걸어서 사방을 응시하는 등 꼴이 범상치 않았다. 주달문은 이 아이의 이름을 대룡(大龍)이라 이름 짓고 감추어 키웠다. 그러나 소문은 퍼져 구경 오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졌다. 이 일이 관아에 알려지면 나라를 망칠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 당하는 것이 두려웠던 주달문은 고민 끝에 아이를 다듬잇돌로 눌러 죽여 근처에 있는 소에 버렸다. 그러자 어디선가 날개 돋은 용마 한 마리가 나타나 하늘을 한 바퀴 돌고는 그 소로 들어갔다. 그게 대용소다.
이는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있는 아기장수 전설유형 중 하나지만, 이 얘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전설은 논개 탄생의 예고편이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어느 날 밤, 주달문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너의 조상인데 나의 집(幽宅)이 대장군좌라서 그 기운으로 장차 나라의 환란을 구할 장수를 보냈더니 네가 무지몽매해서 큰 인물을 잃었구나! 원통하다! 그러나 나의 기운이 남았으니 이번에는 여장수를 보내리라.”
이런 태몽을 꾼후 주씨 부인이 열 달 뒤 딸아이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바로 논개다. 그런데 태어난 때가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 즉 개해 개월 개일 개시였다. 그래서 ‘사람이 아닌 개를 낳았다’고 해서 논개라 했다. 논개는 ‘낳다’의 이곳 방언인 ‘놓다’와 술(戌)의 ‘개’를 합한 ‘개를 놓다’라는 뜻이다. 이 방언에서 대곡리가 행정구역으로 비록 전라북도이긴 하지만, 경상남도 함양과 가까운 탓에 경상도 방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어린 논개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 정도로 뛰어났고, 이미 10세 때 고상한 기품을 갖추었다. 논개가 13세가 되던 해 논개의 앞날에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부친 주달문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주색잡기에 빠져있던 논개의 숙부 주달무는 당시 토호 김풍헌을 찾아가 자신의 놀이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논개를 넘기려는 계략을 꾸몄다. 김풍헌은 백치불구인 자신의 자식을 장가보내기 위해 논개를 민며느리로 사오는 대가로 논개의 숙부에게 논 세 마지기와 엽전 삼백 냥, 당백포 세 필을 주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논개 모녀가 친정으로 도망가자 주달무도 도망갔고, 김풍헌은 이들을 관아에 고발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주달무는 오히려 논개 모녀를 상대로 장수 현감에게 소장(訴狀)을 올렸다. 결과 ‘죄 없는 사람을 무고해서 괴롭히는 처사는 있어서는 안 된다’고 판결이 났다. 논개 모녀는 무죄 방면됐다.
이때 판결을 맡았던 장수현감이 바로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한 최경회(崔慶會·1532-1593) 장군이다. 오갈 곳 없게 된 논개 모녀는 드난살이로 현감 부인의 병수발을 했다. 하지만 곧 현감 부인은 세상을 뜨고, 논개는 최경회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이후 최경회가 고향에서 모친 시묘살이를 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된 최경회는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진주성 싸움에서 민관은 힘을 합쳐 싸웠지만 결국 성은 함락 당하고 말았다. 최경회는 장수들과 촉석루에 모여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으로 ‘남강물 파도가 마르지 않으면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라는 시를 읊고 남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논개는 자결 대신 복수를 택했다. 논개는 승전 축하잔치를 연 왜군들 틈에 기생으로 변장하고 들어가 용맹하기로 이름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10여 일간 내린 장맛비로 물이 넘실대는 남강에 몸을 던졌다. ‘신의 칼’이란 별명을 가진 게야무라는 쇼군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선봉장으로서 이름 날리던 전설적인 사무라이였다.
진주성 전투 당시 살아남은 장수 출신 의병들이 남강에서 건져 낸 논개의 시신을 모시고 육십령을 넘어 온 다음 생가와 멀지 않은 함양 땅에 모셨다. 그래서 논개가 중심을 이루는 장수 고을 답사는 함양에 있는 논개 묘소를 참배해야 완성된다. .
장수의 명소들
남덕유산
덕유산은 최고봉인 향적봉(香積峰·1,614m)이 솟은 북덕유산과 남덕유산(1,507m)으로 나뉜다. 남덕유산은 전북 장수군과 경남 거창군·함양군 경계에 솟아 있다. 북덕유산과 남덕유산 사이의 약 20km 구간에는 해발고도 1,300∼1,400m의 백두대간 주능선이 경남과 전북의 도계를 이룬다. 덕유산 국립공원 사무소 063-322-3174~5.
장안산
장수읍·계남면·번암면 경계에 솟은 장안산(1,237m)은 백두대간의 영취산(1,076m)에서 갈라져 나온 금남호남정맥이 가장 먼저 빚은 산이다. 북쪽 기슭에서 흘러내린 계류는 계남면을 적시고 금강 상류가 되고, 동서남쪽에서 흘러내린 계류는 백운천으로 흘러 섬진강 상류가 된다. 남서쪽의 덕산계곡, 남동쪽의 지지계곡 등 깊고 그윽한 골짜기가 많아 인기가 높다. 또 가을철 동릉의 넓은 억새밭이 빼어나다. 인근엔 방화동 자연휴양림, 방화동 가족휴가촌 등이 있다. 1986년 군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북동쪽의 무령고개(1,076m)에서 접근하는 등산 코스가 인기 있다. 입장료 어른 800원, 청소년 600원, 어린이 300원. 주차료 승용차 2,000원.
뜬봉샘
장수읍 수분리 금남호남정맥 신무산(897m) 중턱의 뜬봉샘(뜸봉샘)은 금강 발원지다. 이성계가 백일기도를 하다 조선 건국의 계시를 받은 곳이라는 전설도 전해온다. 뜸봉샘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옛날 이 산에서 고을의 재앙을 막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산에 군데군데 뜸을 뜨듯이 봉화를 올렸다는 데서 유래했다. 19번 국도가 지나는 수분치(水分峙) 고갯마루에서 서쪽의 원수분 마을을 지나 2km 정도 올라간 지점에 있다. 마을 주차장에서 차를 대놓고 30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한다.
논개사당
장수읍 두산리 남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논개사당(전북기념물 제46호)은 논개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사당으로 의암사(義岩祀)라고도 한다. 논개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촉석루 앞 바위에서 남강으로 투신했다. 그가 뛰어내린 바위는 의암이라 불린다. 지금의 사당은 호남절의록·호남삼강록·의암주논개사적비 등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해 1956년에 건립한 것이다. 한편, 1846년(헌종 12)에 현감으로 장수에 온 정주석(鄭胄錫)은 이곳이 논개가 자란 고장임을 기념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세웠는데, 사당 건립 당시 발굴되어 경내에 보관하고 있다. 1974년 현 위치로 옮겼고, 1998년 경역을 확대했다. 입장료·주차료 무료. 전화 063-351-4837, 350-2561.
논개생가
장계면 대곡리는 임진왜란 당시 왜장 게다니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진 ‘충절의 여신’ 주논개(朱論介)가 태어난 곳이다. 본래 생가가 있던 주촌마을이 1990년대 중반에 오동저수지로 잠기게 되자 좀 더 위쪽의 신안 주씨 선산 근처로 옮겨 생가를 복원하고 유적지를 조성했다. 이곳엔 논개생가를 비롯해 논개 동상과 사적불망비각, 논개 유허비, 논개 부친의 묘소 등이 자리하고 있다. 입장료, 주차료 무료. 관리사무소 전화 063-352-2550, 350-2583
장수향교
장수읍 장수리의 장수향교(長水鄕校)는 1407년(조선 태종 7)에 덕행이 훌륭한 사람들을 모셔 제사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장수에 세운 지방교육기관이다. 1686년(숙종 12)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공자를 비롯해 여러 성현에게 제사지내는 공간인 대성전(大成殿·보물 제272호)은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장수향교는 임진왜란 때에도 잘 보존되어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를 알 수 있는 건축물이다. 특히 대성전은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대표 건물 중 하나로 꼽힌다. 전화 350-2224, 2225(향교 관리사 351-7945).
정충복비
장수읍 장수향교 앞에 자리하고 있는 정충복비(丁忠僕碑·지방문화재자료 제38호) 조선시대 중기 사람인 정경손의 의로운 뜻을 기리고 있는 비석이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한 부대가 이곳 장수지역에 침입하여 장수향교를 불사르려 하자 문을 굳게 닫고 ‘만약 문에 들려거든 나의 목을 베고 들라’는 기개로 향교를 지켜냈다. 임진왜란으로 각지의 향교는 거의 소실됐으나, 장수향교만이 전화를 입지 않고 당시의 원형대로 보전되어 그 표본이 되고 있다. 정경손의 투철한 책임감과 향교를 지킨 의행을 기리기 위해 1846년(헌종 12) 장수현감 정주석이 이 비를 세웠다. 이 비석의 전면에는 ‘호성충복정경손수명비’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타루비
천천면 장판리 장척 마을의 도로가에 자리하고 있는 타루비(墮淚碑·지방기념물 제83호)는 현감을 따라 순절한 통인(通引·관아에 딸려 잔심부름을 하던 벼슬아치)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1678년(조선 숙종 4) 당시 장수현감이 전주감영으로 가기 위해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다 갑자기 꿩이 우는 소리에 말이 놀라는 바람에 현감이 절벽 아래의 배리소에 빠져 목숨을 잃자 통인은 자기의 잘못이라며 손가락을 깨물어 바위벽에 꿩과 말을 그리고, 타루 두 글자를 써놓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한다. 1802년 타루비, 1881년 순의비를 타루비와 나란히 세웠다.
합미성
장수읍 식천리 합미성(合米城·지방기념물 제75호)은 해발 800m의 산능선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약 1천 년 전 후백제 시대의 산성이다. 합미성이란 이름은 후백제 때 성에 주둔한 군사들이 먹을 식량을 모았다하여 붙여진 것이라 한다. 당시 군사들이 이용하던 물을 땅속으로 보내던 수로관 시설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성의 둘레는 320m, 높이는 바깥쪽이 4.6m, 안쪽이 1.6m. 현재 북서쪽과 남쪽의 일부 성벽만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고, 대부분의 성벽은 무너져내린 상태다. 성터에서 3㎞쯤 떨어진 신무산에 허수아비로 군사를 만들어 적군이 합미성이 아닌 신무산으로 유인하여 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창계서원
장수읍 선창리 창계서원(創溪書院·문화재자료 제36호)은 조선의 가장 명망 있는 정승으로 칭송받고 있는 황희(黃喜·1363-1452) 정승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1695년(조선 숙종 21)에 세워졌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됐다가 1955년에 중건했다. 방촌 황희를 주벽으로 하여 황수신·강백진·장용두 등을 배향했다. 현재 남아 있는 상현재(尙賢齋)는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다. 이 서원은 장수군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이다. 구서원(舊書院) 터에 1948년에 세운 비가 남아 있다.
팔성사
장수읍 용계리 팔공산 기슭에 있는 팔성사(八聖寺)는 백제 무왕 때인 603년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해감 스님이 창건했다. 그의 제자 7명이 모두 근처에 암자를 1개씩 지었는데, 팔성사라는 이름은 바로 해감과 그의 제자 7명에서 유래한다. 조선 초기에 폐사되자 부속암자 중 하나를 본 절로 삼았다. 1974년 비구니 법륜 스님이 대웅전을 복원했고, 1991년부터 극락전과 삼성각·성적선원 등을 건립하는 등 여러 번 불사를 하여 지금에 이른다.
장수 양악탑
계북면 양악리 장수 양악탑(陽岳塔·시도유형문화재 제21호)는 수방사(壽訪寺)터로 전하는 양악리 산기슭 밭 가운데에 서 있는 작은 5층탑이다. 여러 차례의 옮김과 세움을 반복하면서 탑의 일부 부재가 없어지고 손상도 심한 상태다. 탑은 네모난 받침돌 위에 탑신부를 쌓았다. 1층 몸돌은 2층 이상의 몸돌에 비해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고, 2층 몸돌에만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다. 2층 이상의 지붕돌은 모두 위층의 몸돌과 한 돌로 되어있다. 지붕돌과 그 위층의 몸돌을 하나의 돌로 만들어 쌓아올렸는데 보기 드문 모습이며, 탑신 몸돌의 윗부분 너비를 좁혀 만든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고려 후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신광사 대웅전
천천면 와룡리 성수산에 있는 신광사(新光寺)는 830년(신라 흥덕왕 5)에 무염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40년(헌종 6)에 현감 조능하가 수리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으로 절의 중심건물인 대웅전(도유형문화재 제113호)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주심포양식에 속한다. 지붕을 너새 또는 돌기와라고 불리는 넓적한 돌을 얹었다. 이외에도 경내에는 명부전, 칠성각 등이 있다.
압계서원
산서면 학선리에 있는 압계서원(鴨溪書院·도문화재자료 제35호)은 고려의 명신 육려(陸麗)·임옥산(林玉山)·박이항(朴以恒) 3인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1789년(정조 13)에 세운 서원이다. 1798년 박이겸(朴以謙), 1799년 전설(全渫)을 각각 배향했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된 뒤 후손들이 제단을 만들어 제사만 지내다가 1958년 중건했다. 해마다 3월17일 향사를 지낸다. 산서면의 향약소(鄕約所)로도 사용됐다.
권희문 가옥
산서면 오산리에 있는 권희문 가옥(도민속자료 제22호)은 조선시대 고가(古家)다. 현 소유주의 10대 조가 광해군의 사화를 피해 오산리에 정착하면서 건립했다. 상량문에 따르면 안채는 1866년, 사랑채는 1733년에 지었다. 안채·사랑채·아래채·문간채·바깥채·서쪽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농가로 바뀌어 집 대부분을 농사와 관련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옛 가옥의 중심은 사랑채인데 이 가옥은 안채가 중심이다. 이 가옥은 상류가옥이 근대화되어 가는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는 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어필각
산서면 오성리의 어필각은 1414년(태종 14)에 당시 청백리로 소문난 천곡 안성(安省·?-1421)에게 내린 장수 오성리 영락 12년 왕지(시도유형문화재 제143호)를 보관하기 위해 1752년에 세운 건축물이다. 왕지란 임금의 명령이나 전달할 사항을 적은 문서를 말한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인 안성은 1393년(태조 2) 청백리로 뽑혔으며, 지보주사·참지의정부사·강원도관찰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죽은 후 장수의 창계서원에 모셔졌으며,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어서각
번암면 노단리 어서각(御書閣·도문화재자료 제32호)은 영조가 장현경에게 하사한 친필을 보관하기 위해 정조 23년(1799)에 세운 건축물이다. 장현경(張顯慶·1730-1805)은 1752년 과거에 급제해 춘추관기사관 겸 홍문관박사를 시작으로 춘추관, 기주관, 편수관 등을 역임했다. 건물은 여러 차례 고쳐 지었는데, 입구에 있는 철로 만든 홍살문과 삼문을 지나면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어서각이 있다. 가운데 칸에는 어서각이라는 현판과 건물 수리와 관련된 4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죽림정사
번암면 죽림리에 있는 죽림정사는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용성(白龍城·1864-1940)의 탄생 유적지이자 사찰이다. 백용성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의 대표로 활동했고, 불교의 대중화·생활화·지성화 운동을 전개하는 등 일제의 친일불교화정책에 저항했다. 경내에는 목조로 지은 생가를 비롯해 7여래탱화와 69조사탱화 등을 봉안한 용성교육관, 3존불보살상과 5탱화를 봉안한 대웅보전, 백용성 조사의 유품을 소장한 용성기념관, 충의원통문과 범종법고루 등이 있다.
정인승기념관
계북면 양악리 정인승기념관은 우리말 연구와 보급에 일생을 바친 애국지사이자 한글학자인 전재(健齋) 정인승(鄭寅承·1897-1986) 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5년 생가 근처에 사당과 함께 건립했다. 정인승 선생은 1897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서 태어나 조선어학회에 가입, 사전편찬회 회원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일제가 한글 연구자들과 한글 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돼 1942년 10월부터 1945년 8.15광복까지 옥살이를 했다.
의암송
장수읍 장수리 장수군청 앞에 있는 의암송(義巖松·천연기념물 제397호)은 16세기 후반기에 당시 장수현감 최경회가 의암 논개와 함께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소나무는 현재 수고 8m, 흉고 직경 3.2m의 노거수로 수령은 약 400년쯤 된다. 소나무로서는 보기 드물게 원줄기가 왼쪽으로 꼬여 수평을 이룬 모양새가 아름답다. 지상으로부터 3.5m 부분에서는 2개의 큰 가지가 남북방향으로 갈라져 있는데, 북쪽 가지의 지름은 약 80㎝이고 남쪽 가지의 지름은 약 50㎝이다. 그 위로 줄기가 여러 개로 갈라져 우산 형태를 이룬다.
장수 봉덕리 느티나무
천천면 봉덕리 고금 마을 뒷산에 자라고 있는 장수 봉덕리 느티나무(천연기념물 제396호)는 나이 500살로 추정되는 당산나무다. 높이 18m, 가슴높이 둘레 6.13m의 크기다. 지상으로부터 약 1.5m까지 외줄기로 되어 있고, 그 위부터 줄기가 갈라져 있다. 주간부는 내부가 비어있는 부분도 있으나 껍질은 깨끗하고 생육상태도 양호하며 수형도 아름답다. 이 느티나무는 마을의 수호와 번영을 비는 당산제를 지내는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와룡 자연휴양림
천천면 와룡리의 와룡 자연휴양림은 계곡 분지를 이루고 있어 주위경관이 아름답고, 계곡물은 깨끗하고 차갑기로 유명하다. 숲에는 쪽동백·참나무·느릅나무·낙엽송·적송 등이 울창하고, 산막 시설은 더위를 느낄 수 없는 해발 650m 지대에 집중되어 있어 한여름에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여름뿐만이 아니다. 봄엔 각종 야생화가 만발하고, 가을엔 각종 산 열매와 단풍, 겨울엔 눈썰매장에서 눈썰매를 즐길 수 있는 사계절 휴양지다. 입장료 2,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산막 사용료는 4평형 25,000원, 복합산막1식(13평) 70,000원, 6평형 45,000원(욕실 외부)·50,000원(욕실 내부), 10평형 60,000원. 비수기(9월1일~5월31일) 시설물(숙박시설포함) 30% 할인, 5일 이상 시설물 이용시 40% 할인, 숙박시설 사용시 입장료 50% 할인. 전화 063)350-2493, 063)353-1404 평일 09:00-18:00 www.jangsuhuyang.kr
방화동 가족휴가촌
번암면 사암리 방화동 가족휴가촌은 장안산 남쪽에 조성된 가족단위 국민휴양지다. 주요 시설로는 오토캠핑장 2곳, 야영장 3곳을 비롯해 모험놀이장·가족놀이장·체육광장·전망대 등이 있다. 등산로는 방화동 가족휴가촌~덕산계곡(용소)~범연동~장안산 정상 코스가 3시간 소요, 덕산계곡까지의 산책 코스는 1시간 소요. 입장료 어른 2,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야영장 사용료는 소형 텐트(5인 이하) 1일 5,000원, 대형 텐트(6인 이상) 1일 10,000원. 전화 350-2562~3, www.jangsuhuyang.kr/Banghwa2
장수 도깨비잔치마을
계남면의 장수 도깨비마을은 해발 450m 이상의 고지대에 자리한 산간마을이다. 궁양리(궁평·양지 마을), 가곡리(곡리·평지 마을), 장안리(원장안·희평·괴목 마을) 등 3개 행정 리에 7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현지의 깨끗한 산촌 환경에서 고랭지 배추와 각종 채소류와 특용작물을 재배한다. 전화 063-352-5015, 0308. www.dokkebi.org
일정별 길라잡이
●장계권 옛날 장계현 지역으로 장수 북쪽의 장계면·계북면·계남면 등 장수 북부권이다. 계북면엔 토옥동계곡·양악탑·정인승기념관, 장계면엔 정충신영정각·성관사 등이 있다. 계남면엔 장수의 대표 관광지라 할 수 있는 논개생가와 주촌민속마을을 비롯해 경주마목장 등이 있다. 천천면 북쪽으로는 맑은 금강 물줄기가 흘러간다.
●장수권 장수 관광의 중심지로서 논개사당·장수향교를 비롯해 금강발원지 뜬봉샘, 절이 예쁜 팔성사 등이 자리한 장수읍이 중심이 된다. 장수읍에서 13번 국도를 타고 천천쪽으로 가다보면 타루비가 있는 타루공원, 블루새들리조트 등을 만난다.
●번암권 물 좋고 공기 좋은 장수에서도 대표적인 휴양지로 꼽힌다. 장안산 군립공원의 지지계곡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방화동 가족휴가촌과 방화동 자연휴양림 등이 있다. 죽림정사는 백용성 조사 생가다. 압계서원·권희문 가옥·어필각 등이 있는 산서면도 이 권역에 넣는다.
일정짜기
●당일 장수는 중부고속도로(구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덕분에 전국 주요 대도시에서 3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고, 면적도 그리 넓은 편이 아니라 중심 명소만 둘러본다면 가능한 일정이다. 논개사당과 논개생가를 빼놓을 수 없다.
●1박2일 숙박은 와룡 자연휴양림, 방화동 가족휴가촌, 주촌 민속마을, 하늘내들꽃마을 등에서 하는 게 무난하다. 수도권 지역에서 접근했을 때의 추천 일정은 다음과 같다. 중부고속도로 덕유산 나들목~정인승 기념관~장계~타루공원~장수 의암송~논개사당~수분치~뜬봉샘~숙박(방화동 가족휴가촌)~죽림정사~지지계곡~논개생가~주촌 민속마을~장수 경주마목장~장수 나들목~귀가
●2박3일 군립공원인 장안산, 팔성사를 품고 있는 팔공산 등 장수의 대표 산을 다녀올 수 있다. 봄날이라면 철쭉으로 유명한 백두대간의 봉화산을 빼놓을 수 없겠다.
교통
●자가운전
수도권 경부고속도로→비룡 분기점→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산내 분기점→중부고속도로(구 통영-대전간 고속도로)→장수 나들목→19번 국도-(10km)→장수 <3시간 소요>
영남권 대구→88올림픽고속도로→함양 분기점→중부고속도로(구 통영-대전간 고속도로)→장수 나들목→19번 국도-(10km)→장수 <1시간30분 소요> / 부산→남해고속도로→진주 분기점→중부고속도로(구 대전-통영간고속도로)→장수 나들목→19번 국도-(10km)→장수 <2시간~2시간30분 소요>
호남권 전주→익산-포항 고속도로 장수 나들목→장수 <40분 소요> / 광주→88올림픽고속도로→남장수 나들목→19번 국도-(10km)→장수 <1시간30분 소요>
충청권 대전→중부고속도로(구 통영-대전간 고속도로)→장수 나들목→19번 국도-(10km)→장수 <1시간 소요>
강원권 춘천→중앙고속도로→대구→88올림픽고속도로→함양 분기점→중부고속도로(구 통영-대전간 고속도로)→장수 나들목→19번 국도-(10km)→장수 <4시간30분 소요>
●고속·시외버스
서울→장수 남부터미널에서 매일 4회(09:20~14:35) 운행. 장계 15,100원, 장수 17,100원. 4시간 소요.
광주→장수 광주종합터미널(062-360-8800)에서 매일 8회(06:10~16:50) 운행. 요금 8,500원, 2시간 소요.
전주→장수 공용터미널(063-270-1700)에서 매일 18회(06:30~21:30) 운행. 요금 6,000원, 1시간30분 소요.
대전→장수 동부터미널(ARS 042-624-4451)에서 매일 7회(07:55~17:50) 운행. 장계 7,600원, 장수 8,800원. 2시간30분 소요.
●현지교통
장수→장계 시외버스터미널(063-351-8889)에서 매일 5회(08:15~17:20) 운행. 요금 1,200원, 20분 소요.
장수→번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매일 30분 간격(07:20~20:00) 운행. 요금 1,700원, 직행 20분, 완행 1시간10분 소요.
장계→논개마을 시외버스터미널(063-352-1514)에서 1시간 간격(06:40~19:10) 운행. 요금 950원, 40분 소요.
장계→장안리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매일 6회(07:20~18:20) 운행. 요금 900원, 40분 소요.
천천→와룡 자연휴양림 천천 정류소(063-352-0742)에서 매일 6회(06:30, 11:10, 13:40, 16:25, 17:40, 19:10) 운행.
번암→원사암(방화동) 번암 정류소(063-353-2614)에서 매일 4회(6:30, 10:45, 16:05, 20:10) 운행.
숙식(지역번호 063)
●장계권 논개생가가 있는 대곡리 주촌민속마을(353-5159)에 민박을 치는 집이 많다. 논개생가 앞에 논개생가식당(청국장·352-7777), 참숯가마가든(돼지삼겹살·352-????) 등이 있다. 장계리에 명성여관(351-0156), 귀빈모텔(351-0031), 하얏트모텔(351-1501), 명덕리에 남덕유산관광농원여관(352-5181), 계남면 장안리에 장수도깨비잔치마을(352-0308 http://dokkebi.org), 장안산관광농원여관(352-0308), 계남면 호덕리에 모텔승마(353-0555) 등이 있다. 폐교를 활용해 꾸민 하늘내들꽃마을(353-5185 http://slowzone.co.kr)은 숙박 손님에게 식사도 제공한다. 장계리엔 서울숯불갈비(돼지갈비·352-2933), 모정(돼지고기보쌈·353-0123), 조선명가(곱창전골·352-8292) 등 식당이 많다.
●장수권 장수읍 장수리에 광성여관(351-2317), 덕산장모텔(351-8880), 황토방모텔(351-0500) 등이 있다. 천천면 월곡리에 블루새들승마리조트(350-8000)를 비롯해 와룡 자연휴양림(353-1404 www.jangsuhuyang.kr/Waryong) 앞엔 박수철민박(353-0027), 이재연민박(352-0888), 전만기민박(353-0531) 등이 있다. 식당은 장수군청 근처엔 논개고을(오리훈제·삼겹살·351-7940), 하늘가득장수(장수한우·351-5757), 교촌식당(추어탕·351-2330) 등 식당이 많다. 19번 국도가 지나는 수분치엔 수분령휴게소(순두부백반·353-0041)가 있다.
●번암권 우선 방화동 가족휴가촌(350-2562~3)이 있다. 입구에 우경옥민박(353-5252), 박순숙민박(353-4486), 임종근민박(353-3595), 정대옥민박(353-3604) 등이 있다. 죽산리엔 장수호텔(353-5555)이 대표적이다. 번암면 소재지에서 최근 포장된 무령고개를 넘어가는 동화리엔 황금장여관(353-3158), 황인환민박(353-3158), 그리고 지지계곡에 유동욱민박(352-3616), 정대일민박(351-5722), 조일제민박(353-4564) 등이 있다. 식당은 국포리의 산상콘서트(산상정식·353-7070), 노단리의 동화댐가든(다슬기수제비·353-103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