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하루를 보내고 이튿날 나는 경산시 용성면 매남 4리 구룡마을로 향했다.
구룡(九龍) 마을에는 나에게는 11대조(祖)가 되는 송남공(松南公)의 묘소가 있다.
星山李氏 仁州公派중 永川巨谷派 23世인 송남공 (휘諱 즐櫛 ,1610~1681)께서는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12월~37년1월) 때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가실 때
어가(御駕)를 호위(盡力扈駕)하셨다.
송남공은 당시 호군(護軍)이란 계급의 무관으로 한 밤중에 어가가 남한강을 건널 때
청군의 추격은 급박한데 강물이 불어나 어가를 탄 채로는 왕이 강을 건너갈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송남공이 급히 나서서 인조임금을 직접 등에 업고 강을 건넜다는 이야기가 대를 이어
전해 온다.
그러나 최근 소설이나 영화로 소개되기도 했지만 남한산성에서 2개월도 채 버티지 못한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산성에서 나와 지금의 잠실 석촌호수 인근 삼전도(三田渡)까지
걸어서 내려와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만다.
인조는 청태종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세 차례 큰 절을 하고 아홉 차례 머리를 땅에 박는
항례(항복의 의식)를 한 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순간의 하나다.
단상 아래 도착한 인조는 태종이 있는 단상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하였다.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 의식은 여진족이 그들의 천자를 배례하는 의식 절차였다.
인조는 땅에 엎드려 대국에 항거한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고,
청 태종은 신하들로 하여금 조선 국왕의 죄를 용서한다는 칙서를 내렸다.
이른바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현장에서 지켜봐야 했던 송남공은 바로 낙향하여 주경야독으로
세월을 보냈는데 그 후 조정에서 부름이 있어도 응하지 않고 다시는 上京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송남공 문집'이 대대로 전해왔는데, 60년대초 나의 선친께서 중간(重刊)하여 관계 요로에 배포하셨다.
당시 나의 선친(諱 鐘澤)께서는 성산이씨 대구화수회 회장으로 계셨는데 문집 重刊 작업에는 당숙을
비롯한 여러분이 수고를 하셨던 기억이 난다.
문집에는 星山李氏 正言公派 凝窩 李源祚(1792~1872, 대사간을 거쳐 공조판서 역임) 선조께서 쓰신
송남공의 행장(行狀)이 수록돼 있다.
나는 아직 한 번도 송남공의 묘소를 참배한 적이 없어 늘 마음에 걸리던 차라
대구에 사는 再從弟의 안내로 그의 차편으로 가보기로 했다.
길은 멀고, 높고 험했다. 해발 650m라는 표시가 있는 경산시 용성군 매남2리 구룡(九龍)마을이다.
어떻게 그 옛날 이렇게 높은 곳에 묘자리를 썼는지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렇게 높은 곳에 있는 묘소를 나는 아직 본 적이 없다.
자동차 도로가 없었던 예전에는 영천 북안에서 오는 길로 여기까지 걸어 올라왔다고 한다.
당일에 묘사를 다 지낼 수 없어 마을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묘사를 지내고 귀가했다고 한다.
멀리서 봐도 묘소 관리가 제대로 안되고 있는 표가 난다.
11월 묘사 지내기 전까지는 벌초를 하겠지만...
그러나 막상 묘소에 가보니 주변 풍경이 정답게 다가왔다.
아름드리 큰 소나무 몇 그루가 반겨주고 전방을 바라보니 가슴이 확 트이는 기분이 든다.
아래 사진은 묘소에서 정면을 조망하는 풍경이다.
아마도 무관 출신인 선조께서는 직접 이 곳을 답사하고 묘지를 정한 것이 아닐가 하는 짐작을 하게 한다.
이 구룡마을에는 아담한 정자같은 것도 있어 눈길을 끈다.
언제 또 참배하러 여기까지 오겠느냐는 생각과 함께 늦게나마 와보기를 잘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2011년 6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