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하박국1장1~11절
제목 : 하박국의 탄식과 하나님의 응답
하박국은 레위 자손으로 추정하며 저작 년대는 BC609~589년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앗수르가 힘을 잃고 바벨론 제국이 명망하던 당시에 활동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기록 장소는 유다이며, 유다 백성을 대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르치고 의인의 고통과 악인의 형통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하였습니다.
하박국은 지적으로 정직하게 당혹감과 평안 사이의 간극을 잇기를 구하는 모든 신자를 대표합니다.
오늘 본문은 선지자 하박국이 유다의 불의와 패역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에 회의를 품고 항변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선지자에게 바벨론을 통한 심판 계획을 알리십니다.
1. 하박국의 탄식과 첫 질문(1~4절)
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입니다(1절).
“[1]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하박국' 선지자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으며 다만 본서에만 나와 있을 뿐이고(3:1), 그의 이름이 전형적인 히브리어도 아닙니다.
특히 자신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하는 경우는 하박국을 포함하여 세 명뿐입니다(학 1:1;슥 1:1).
*학1:1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로 말미암아”
*슥1:1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이런 점에 비추어보면 하박국은 직업적인 선지자였을 것입니다.
그가 사용하는 용어를 보면, 남달리 엄중한 예언을 선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경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맛사'는 '짐'(burden), '예언'(prophecy). '신탁'(oracle)을 의미하는 것으로 엄중성을 나타내며, 히브리어 원문에는 문장 첫머리에 나와서 강조되어 있습니다.
2) 하박국의 질문(불평)(2~4)
하박국의 불평(2~4절)은 탄식시들과 흡사합니다.
탄식시들은 탄식하는 이유들을 열거하는 동시에 현재 상황에 적절한 조취를 취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1)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신다(2절).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어느 때까지리이까'라는 물음은 애가의 전형적인 형식입니다.
(시6:3;13:1,2;80:4;89:46;렘 12:4;슥 1:12).
그것은 앞의 동사 '내가 부르짖어도'('솨와예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구원을 간절히 요청하는 위기 상황을 나타냅니다.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강포'('하마스')는 자기 동료마저 해칠 정도로 도덕적으로 극심하게 파괴된 상태를 가리킵니다(창 6:11).
여기서는 통치 계급이 불의의 편에 서서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압제한 당시의 암울한 현실, 즉 유다 왕 여호야김의 폭정을 가리킵니다.
하박국은 백성의 고통을 아파하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간구하였으나 하박국이 원하는 만큼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에 본절에서 1장 전체에 걸쳐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에 대한 긴장감이 고조되어 나타납니다.
이러한 긴장은 2장에 이르러 하나님에 의해 부분적으로 옹호되고,
3장에 가서는 보다 충분하게 확증되고 하박국의 믿음이 입증됩니다
(2) 당시 심각한 사회상을 불평합니다(3절)
“[3]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2절과 마찬가지로 '어찌하여'('라마')는 애가의 전형적인 표현으로(시10:1;44:23,24;74:1,11;80:12;88:14)문장 전체를 강조합니다.
'죄악'('아웬')과 '패역'('아말')은 다른 구절들에서도 서로 관련되어 등장하는 용어로 여기서는 민수기의 축복 내용(민 23:21)과 상반된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로써 민수기의 약속과 상반된 현재 상황을 부각시키는 듯합니다(3:2).
이 단어는 각각 '죄악'(evil)과 '불화'(trouble)로 번역할 수 있으며(NIV),
공의가 왜곡되고 사회적인 억압이 팽배한 상황을 묘사하는 데에 주로 사용되었습니다(렘 6:7;20:8; 겔 45:9; 암 3:10).
본 구절에서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의인이 고난 받고 악인이 번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심 없이 방관하신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야김 왕의 통치 기간(B.C.609-598)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이방신을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합니다(렘 22:3,13-17).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 '변론과 분쟁'(strife and conflict)은 평행어로서 분노와 알력으로 인한 다툼을 일컫는 말입니다(잠 15:18; 렘 15:10). 이는 이스라엘 민족 간에 일어났던 분쟁을 가리키는 것으로 당시의 심각한 사회상을 묘사합니다.
(4) 율법에 기초하여 시행되던 정의와 율법의 해이로 인해 시행되지 못하게 되었다(4절).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율법'('토라트')은 모든 권위의 가르침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잠 3:1;4:2), 하나님의 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규례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 규례는 모세를 통해 주어졌으며,
레위인 제사장들에 의해 중재되었고(레10:11;신33:10),
간혹 통치권자가 중재하기도 했습니다(신 17:8-11).
그런데 율법에 기초하여 시행되던 공의가 율법의 해이로 인해 시행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통해 당시의 사회는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사는 모습이 팽배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다”
마치 우리나라 현재 돌아가고 있는 정국을 연상하게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악인에 에워싸여 정의를 펴지 못하고 추락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깝습니다.
2. 하나님의 응답(5~11절)
하나님의 응답은 하박국 선지자가 구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심판하실 목적으로 바벨론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1)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기이한 일을 보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5절).
“[5]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 이에 해당하는 표현이 히브리어 원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문맥상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하고, 독자로 하여금 말하는 사람이 바뀌었음을 알게 하기 위해 임의로 번역한 듯합니다.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보고'('레우'와 '하비투')는 주로 함께 사용되었고(대상 21:21;시 10:14), 여기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기이한 일을 보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 놀라움의 최고 절정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당시 이스라엘에게 닥칠 일의 심각성이 어떠한지 나타냅니다.
그 일은 예루살렘의 몰락으로 이루어졌고, 그러한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국가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위기를 조성하는 일이었습니다.
2) 내가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다(6절)
“[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갈대아 사람'('카세딤')은 앗수르 서판에 의하면 '칼두'(Kaldu)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칼두는 유브라데 강과 티그리스 강 옆에 페르시아만과 바벧론 남단 중간에 위치한 나라였고, 도시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곳 거민들은 소규모의 농축업과 수렵으로 생활했으며,
앗수르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보폴라살이 B.C.625년에 니느웨를 점령하여 갈대아 왕조를 창건하였고, 그의 아들 느부갓네살에 이르러서는 바벧론인들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갈대아인들은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훌의 아들 게셋의 후손이었습니다(창 22:22).
2) 침략자의 모습을 보다 생생하고 상세하게 묘사합니다(7절)
“[7]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당당함과 위엄이 자기들에게서 나오며”
본절에서는 앞에서 언급된 침략자의 모습을 보다 생생하고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갈대아 사람들은 사람을 심판하거나 사람을 다스리는 통치권이 자신에게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착각하고 자신들의 힘을 의지하여 포악하고 혹독하게 이스라엘을 비롯한 많은 열국들을 지배하고 다스렸습니다.
3) 바벨론의 군대가 맹렬하게 공격하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나타냅니다(8절).
“[8] 그들의 군마는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들의 마병은 먼 곳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마병이라 마치 먹이를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표범과 이리는 사자와 더불어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동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렘5:6; 호13:7,8).
'독수리'('네쉐르')는 썩은 고기를 먹는 '콘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먹이를 사냥하는 독수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잘 어울립니다. 본절은 바벨론 군대가 이스라엘을 빠른 속도로 공격할 것을 의미하고,
그만큼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심판이 임박했음을 나타냅니다.
4) 강포하여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라 합니다(9절)
“[9]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 같이 많이 할 것이요”
'강포'라는 표현은 앞에서 언급된 것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강포를 일삼았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강포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보여줍니다(시 7:16; 잠 1:18,19).
특별히 '모래같이'라는 표현은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무기력하게 국외로 끌려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연상시켜줍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을 다스리던 갈대아 왕 느부갓네살 왕 때(B.C.597) 20여년에 걸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왕하 25:1-8).
5) 갈대아 사람들의 성격과 특성을 가리킵니다(10절)
“[10] 왕들을 멸시하며 방백을 조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들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점령할 것이라”
본절은 갈대아 사람들의 성격과 특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들은 독단적인 거만함, 조급하고 야만적인 심성, 자제할 수 없는 욕망을 가진자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들의 공격성은 맹렬하였으므로 아무리 견고한 성벽이라도 그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스스로 절대적인 통치권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고 다른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6)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범죄 할 것을 말합니다(11절)
“[11]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는 자들이라 이에 바람 같이 급히 몰아 지나치게 행하여 범죄하리라”
갈대아인이 바람이 휩쓸듯이 빠르게 열방과 이스라엘을 정복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신격화하여 득죄하는 오만함을 드러냅니다.
이들은 책임을 모르고 회개하지도 않고 도리어 창조 세계의 가장 근본적인 질서를 깨뜨립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그들이 이스라엘을 심판하기 위해 도구로 사용되긴 하지만, 그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결국 몰락하게 될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선지자를 통해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1,5절).
하박국의 신음과 탄식에 응답하시고 유다에게 행할 일을 알리십니다.
이 메시지는 심판 전에 주시는 최후통첩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불의에 묵인하시는 분도 아니고, 부당하게 심판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예고 없는 심판도, 이유 없는 심판도 없습니다.
죄인들이 장래를 대비하는 일은 심판에 맞서는 일이 아니라 회개하는 일입니다.
2) 열국과 역사를 주장하시는 주권자입니다(5,6절).
하나님은 열강의 이해관계 속에서 패역한 유다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더 포악한 이방(바벨론)을 통한 심판은 선지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선민의 신념을 송두리째 뒤엎는 방식입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니라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신학이나 신념, 경험 안에 가두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크신 일을 알지 못하거나 안다 해도 믿지 못하게 됩니다.
3) 율법을 무시하는 유다를 무법자의 손을 빌어 심판하실 것입니다(7~11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탐욕에 취하여 강포를 행하는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 탐욕스럽게 모든 것을 삼키는, 겁 없는 난폭자의 먹잇감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내 야망을 위해 세운 것을 허무실 것입니다.
은혜를 패역으로 갚고도 하나님의 분노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주님이 이 군대를 보내신다면 나와 우리 공동체는 무사할 것 같습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하박국은 율법과 정의가 시행되지 못하고 악인이 득세하는 선민 유다의 현실을 보며 탄식합니다(2~4절).
실상은 유다의 죄악을 방관하시는 듯 보이는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 더 컸습니다.
‘대답 없는 물음, 응답 없는 기도’가 그를 더욱 고통스럽게 합니다.
고난은 ‘의심하게’하지만, 선지자의 의심은 믿음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믿기에 묻고 물으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교회와 민족을 향한 가슴 저린 고통이 내 안에 있습니까?
최근 가장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믿음의 회의를 갖게 한 사건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