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년∼43년) 01
키케로는 기원전 106년 라티움의 아르피눔(Arpinum) 지방기사(Eques)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아들의 출세를 갈망하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일찍 로마로 유학하여 관료가 되기 위한 수사학, 웅변술을 스카이볼라(Scaevola) 밑에서 익히면서 전설적인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 기원전 235년∼183년)의 세계관에 큰 감명을 받았다. 철학적으로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이드로스(Phaedrus, 기원전 444년경∼393년)에서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91년에서 88년까지 군복무를 했다.
기원전 88년에서 82년에 걸쳐 키케로와 같은 고향 출신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당시의 원로원의 후원을 받던 술라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 동안 키케로는 아카데미학파의 필론 밑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익히게 된다. 26세에 아버지 살인 혐의로 고소된 로스키우스를 성공적으로 변호함으로써 로마의 정계에 알려진다. 79년에서 77년 사이에 아테네, 소아시아 지방과 그리고 로도스 섬을 두루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힌다.
그렇게 한층 자신을 갈고닦은 키케로는 로마로 귀국해 기원전 75년, 31세의 나이로 재무관으로 선출돼 원로원 의원 자격을 얻고 시칠리아 서부 릴리바이움(Lilybaeum)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솜씨 있는 일 처리로 지역 주민들의 호감을 사고, 시라쿠사에선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을 발견해 지역 주민들을 환호케 했다. 이런 업적으로 키케로는 시칠리아에서 적지 않은 지지자를 확보했으며, 본인도 이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과했던 나머지 공적에 대한 자부심이 자만심에 달해 스스로를 로마 전체의 명사로 여길 지경이었으나 얼마 후 그의 입장에선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재무관 임기를 마치고 로마로 귀환하던 중 캄파니아에서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만났으나 그중 한 사람은 그가 로마에서 이곳으로 향했다고 생각해 로마의 현황을 물었고, 상황을 수습하려 한 사람들도 그의 부임지로 엉뚱한 지명을 언급해 키케로가 직접 오류를 정정해야만 했던 것이다.
결국 로마에서 키케로는 이제 막 원로원에 입성한 무명 인사에 지나지 않았다. 굴욕 아닌 굴욕을 겪은 키케로는 자신이 로마라는 거대한 바다에 고작 돌멩이 하나를 던졌을 뿐임을 깨닫고 전보다는 겸손해짐과 동시에 새삼 성공에 대한 각오를 다지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시칠리아엔 키케로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을 간직하는 사람이 적지 않게 존재했다. 그래서 이들이 꾸린 대표단은 기원전 70년 폼페이우스의 추천을 받아 키케로에게 속주를 수탈하는 것으로 악명 높았던 전 시칠리아 총독 가이우스 베레스를 고발해 줄 것을 의뢰하고, 마찬가지로 시칠리아에 대한 긍정적인 기억을 간직하고 있던 키케로는 고민 끝에 피호 관계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이를 승낙한다. 이어서 시칠리아로 건너가 지역 인사들의 도움으로 수많은 증거를 확보해 정식으로 베레스를 고발, 변호인의 허를 찌르는 수로 패소하리라는 세간의 예상을 깨고 승소를 이끌어 낸다. 당시 로마 법정에선 고소인과 변호인이 길고 긴 서두를 끝낸 뒤에야 본론에 들어갔는데 키케로는 배심원과 변호인의 동의하에 그런 절차를 생략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 베레스의 유죄를 입증하는 수많은 증거를 제시해 첫 번째 공판에서 승소를 확정 지었던 것이다. 반면 베레스의 변호를 맡았던 호르텐시우스는 당시 로마 최고의 웅변가이자 법조인으로 여겨졌으나 이 재판에서 패소하면서 왕좌를 키케로에게 넘기게 됐고, 베레스는 전 재산이 몰수당하는 일만은 피하고자 아직 정식으로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야반도주를 감행해 로마에서 도망치나 훗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재산은 물론 목숨마저 빼앗긴다.
한편 베레스 재판에서 승리한 키케로는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로마의 명사로 부상, 다음 해 그의 노고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저렴한 가격에 곡물을 대량 판매한 시칠리아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성공적인 조영관 임기를 보내고 법정에서도 활약해 명성을 쌓아 기원전 66년 수석 법무관을 역임하는 등 순조롭게 로마 정계에서 명예로운 경력으로 여겨진 출세코스를 밟아간다. 같은 해 민회에서 당시 전쟁영웅으로 로마인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던 폼페이우스가 지난해 지중해의 해적 무리를 소탕한 일을 칭송하는 한편 그에게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의 지휘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지지하는 연설을 해 정치적 기반을 확장해 간다.
임기를 마치고 전직 법무관이 된 기원전 65년, 키케로는 공화정 로마 정무직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집정관 선거를 준비하며 훗날 악연으로 점철될 루키우스 베르길리우스 카틸리나(Lucius Sergius Catilina)와의 정치적 제휴를 염두에 둔다. 이는 높은 확률로 파트리키 태생인 카틸리나의 존재감이 신참자인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상쇄해주리라는 판단에서 내려진 결정일 텐데, 그런 연유에서인지 이 시기에 쓰인 그의 편지에서 카틸리나는 훗날 서술해 낼 불한당이 아닌 긍정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나 카틸리나가 파트리키(patricii)적 오만함을 내비치며 법정에서 변호인 역할을 해주겠다는 신참자 키케로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둘의 관계는 크게 어긋난 것으로 보이며, 키케로는 선거 전략을 수정해야만 했다.
이윽고 다가온 기원전 64년, 키케로는 집정관 선거에 출마해 카틸리나, 안토니우스 히브리다(Antonius Hybrida)와 각축을 벌인다. 이때 키케로는 부채 말소 등 급진적이고도 무모한 혹은 기회주의적인 정책을 주장해 당시 로마를 휩쓴 불경기로 고통받던 사람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은 카틸리나와 대조적으로 이탈리아 유산자의 보호자를 자처해 기사계급의 지지를 얻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대 로마의 실세라 할 수 있는 옵티마테스가 당선이 유력시되던, 유서 깊은 파트리키 가문 출신이나 전부터 좋지 않은 평이 떠도는, 여러모로 종잡을 수 없는 카틸리나보단 신참자이긴 해도 유산자의 보호자를 자청하는 키케로가 낫다는 판단에 그를 지원하면서 키케로는 신참자라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수석 집정관에 선출되는 기쁨을 누린다. 참고로 차석은 안토니우스 히브리다, 그 다음이 카틸리나였는데, 이는 로마의 선거 제도가 신분차등적이였기 때문이다. 고위 공직자를 선출하는 켄투리아회의 경우 시대별로 비중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공통적으로 가장 부유한 기사 계급부터 차례로 투표를 해 안건이 대한 찬반이 과반수를 넘으면 선거를 종료했는데, 18표를 보유한 기사 계급과 80표를 보유한 보병 1계급의 의사가 합치될 경우 그것만으로도 총 193표가 부여된 켄투리아회에서 반수를 넘어서는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카틸리나에 비해 상위 계급을 주 지지층으로 두었으며 당대 로마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던 옵티마테스의 지지까지 등에 업은 키케로는 승리의 축배를 들고 카틸리나는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된 것이다.
집정관을 역임한 기원전 63년, 어떤 이유에서든 카틸리나의 위험성을 확신하고 여름 무렵부터 그를 주시하던 키케로는 재차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그의 당선을 막기 위해 원로원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카틸리나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한편 본래 7월로 예정됐던 집정관 선거를 지연시킨다. 그 결과 선거 날 카틸리나는 주 지지층의 지원을 충분히 받을 수 없었으며, 오랜 기간 반대에 부닥치던 개선식의 허가를 받아내는 대가로 과거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전쟁의 사령관을 역임했던 루쿨루스의 지원을 얻어 다른 후보인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를 후원하고 선거 날에 토가 밑에 흉갑을 착용하고 선거를 주관함으로써 계엄 분위기를 조성해 카틸리나를 낙선시키는 데 성공한다. 반면 연달아 집정관직을 놓친 카틸리나는 정치적 경제적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후 다사다난한 전개 끝에 키케로는 카틸리나의 반란을 진압하고 국부라는 칭호를 선사 받는 정치적 영예를 누린다. 이때 그는 문으로 무를 제압했다며자신의 공적을 칭송했으나 키케로의 지지층을 제외한 대다수 로마인은 이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는데, 법리적 근거가 부족함에도 아직 논쟁 중의 혐의자들의 즉결처형을 강행한 데다 당시 로마는 유동성 부족에 따른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채 말소를 위시한 급진적이고 무모한 혹은 기회주의적인 정책을 주장한 카틸리나를 따르는 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는 것은 그 무렵 경제적인 이유로 고통 받는 이가 적지 않았음을 시사하며, 키케로와 마찬가지로 기사계급 출신이나 옵티마테스(optimates)들이 로마를 제멋대로 농단하는 집단쯤으로 취급했던 원로원 의원 살루스티우스살루스티우스(Gaius Sallustius Crispus, 기원전 86년∼기원전 34년)는 자신의 저서에서 카틸리나를 적지 않은 악덕의 소유자일지언정 본질적으론 고통 받는 인민을 위한 투사적인 인물로 묘사했다.
즉 당시 로마가 진정으로 대응해야 할 문제는 경제난이며 그것이 뜻한 바를 실제로 이룰 가능성이 희박함에도 카틸리나가 광범위한 지지자를 모을 수 있던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셈인데, 키케로는 근본적인 문제는 외면한 채 무리한 수까지 써가며 신참자인 자신의 위상을 드높여줄 상대적으로 만만한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는 평을 피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키케로는 비상시국이라는 이유를 들어 자신이 원로원 최종 결의로 명한 초법적 권한을 이용해 로마 시민을 재판 없이 처벌할 수 없다는 규정을 공공연히 깨트리려 했다. 그러자 당시 수석 법무관 당선자 신분이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Iulius Caesar, 기원전 100년 ∼기원전 44년)는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고 해도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한 동기는 선의였다라는 논지의 연설을 통해 이 사례가 훗날 악용될 수 있음을 지적하며 키케로의 주장에 반대, 대신 관련자들을 이탈리아 도시에 유배해 종신형에 처하고 거기에 필요한 비용은 몰수한 그들의 재산에서 충당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카이사르의 연설 이후 원로원의 분위기는 카이사르에게 동조하는 쪽으로 흘렀으나, 카이사르의 정적이었던 소카토가 즉결처분의 필요성을 강변하면서 원로원의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즉결처형 쪽으로 기울게 된다. 반면 키케로가 확대 적용하려 한 원로원 최종 결의에 내재한 위험성을 이유로 키케로의 주장에 반대하던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가 파한 후 키케로를 따르던 기사계급 인사에게 위협을 받았으나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사건에 가담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여 그를 기소하는 것을 포기한다.
그리고 키케로는 이 논쟁 많은 사건을 진압한 공적으로 원로원으로부터 조국의 아버지(pater patriae)라는 칭호를 수여받는다.
하지만 재판 없이 카틸리나를 지지한 고위급 인사들을 처형하고 차석 집정관 안토니우스 히브리다에게 군 지휘권을 부여해 카틸리나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일소한 일은 안 그래도 시큰둥했던 로마 시민들의 반응을 한층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 키케로는 집정관에서 퇴임하던 날 호민관 메텔루스 네포스의 거부권 행사와 군중의 흉흉한 분위기에 떠밀려 관례적인 퇴임 연설조차 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야 했다. 또한 카이사르는 카틸리나 처형에 대한 항의의 의미에서 키케로의 집정관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원로원 회의에 불참하는 한편 과거 사투르니누스(Saturninus)를 즉결처분한 일에 가담한 이를 고발함으로써 여전히 키케로가 확대 적용한 원로원 최종 결의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음을 암묵적으로 주장했다.
더욱이 기원전 60년에 접어들어 과거 여자들만 참석이 허락된 보나 데아(Bona Dea) 축제날, 그날만은 금남의 장소여야 할 대신관 관저에 침입하려 시도했다 발각되는 신성모독이나 다름없는 대형 스캔들을 일으켜 기소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일을 계기로 키케로에게 앙심을 품고 반목하게 된 파트리키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호민관이 되겠다는 목적에서 평민으로 신분을 바꾸려 하는 한편, 재판 없이 로마 시민을 처형한 그를 기소하겠다고 위협하자, 본격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행위를 정당화할 필요성을 느낀 키케로는 집정관 재임기에 한 연설문을 다듬어 책으로 출판한다.
그러나 이듬해인 기원전 59년, 과거 키케로의 동료 집정관이었으며 키케로에 의해 군 지휘권을 부여받아 카틸리나 무리를 일소한 안토니우스 히브리다가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해 각종 만행을 저지른 대가로 고발당하자, 키케로는 이 재판의 파급력을 염두에 두고 히브리다 변호에 나서나 패소하고 만다. 히브리다에게 유죄가 선고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과거 카틸리나를 지지했던 많은 이들은 환호했고 심지어 카틸리나의 무덤엔 꽃다발이 바쳐지는데, 이 일의 의미를 섣불리 확대 해석해선 안 되겠으나 피상적이나마 그 무렵 다수의 로마인이 키케로가 필사적으로 정당화하려 한 카틸리나 탄핵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삼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키케로는 법정에서 히브리다를 변호하던 중 여러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데다 승소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 때문인지 평정심을 잃고 그 무렵 자신에게 압박을 가하던 카이사르를 위시한 삼두를 거명해 공격하게 된다. 이 소식을 접한 당년도 수석 집정관이자 그와 반목하던 카이사르는 바로 당일 로마의 최고 신관 자격으로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P. Clodius Pulcher)라는 귀족이 평민의 양자로 입양되는 일을 승인해 버린다. 카이사르가 아무 이유 없이 승인한 것은 아니고, 풀케르가 키케로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풀케르 역시 아무 이유 없이 귀족 신분을 버린 것은 아니고, 평민만이 당선될 수 있었던 호민관 자리를 노렸던 것이다. 소원을 성취한 풀케르는 귀족의 3작명법에서 평민의 2작명법으로 개명하여 이후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로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클로디우스는 진짜로 호민관에 당선되었으며, 해가 바뀌고 자신의 임기가 시작되자 재판 없이 로마인의 목숨을 앗아간 이를 추방하는 법안을 발의하면서 키케로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위기에 직면한 키케로는 도시를 배회하며 도움을 간청하나 옵티마테스를 위시한 당대 로마 정계의 실력자들은 신참자인 키케로를 위해 발 벗고 나설 생각이 없었기에 형식적인 움직임만을 보였고, 일반 시민들은 클로디우스가 제정한 곡물법에 수혜를 입은 데다 집정관 재임기 경제 문제엔 대응책을 내놓지 않고 카틸리나의 죄를 입증하는데 골몰한 그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유일한 희망은 폼페이우스의 지원이었으나,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도 손을 잡으면서 최후의 희망조차 사라져버렸다. 키케로는 로마에서 정식으로 기소되기 전에 로마를 떠나는 것으로 유죄 선고를 받고 정치적 생명이 끊어지는 일만은 면하려 했으나, 그의 정적들은 그를 기소하지 못하게 되자 법적으로 그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를 국외 추방하는 안건을 통과시켜 키케로의 정치적 생명을 끊어버렸다.
키케로는 이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전성기의 위세를 되찾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 절망한 키케로는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살을 하려 했으나 자네의 청원으로 간신히 단념했네... 그러나 내 미래에 무슨 희망이 있는가라고 쓸 정도로 크게 낙담하였다.
하지만 로마의 정국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듦에 따라 키케로는 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다. 로마에선 클로디우스를 중심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갈등이 전면에 대두했고, 당시 클로디우스 및 그를 후원하는 크라수스와 반목하던 폼페이우스는 언변으로 자신을 방어 및 상대를 공격할 인재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키케로의 귀환에 마땅치 않는 반응을 보이는 카이사르를 최대한 달랬으며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직감한 카이사르는 향후 자신들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아 폼페이우스의 의사에 동의한다. 그러자 폼페이우스는 키케로에 대한 국외 추방령을 무효화하는 법안을 발의해 클로디우스를 제외한 대다수 의원의 동의를 얻어 통과시키는 데 성공, 키케로는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로마로 귀환한다.
로마로 복귀한 키케로는 전성기의 위세를 되찾기 위해 폼페이우스에게 카이사르와의 동맹 관계를 청산하고 자신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것을 종용하나 카이사르의 외동딸 율리아와 화목한 가정을 꾸린 데다 클로디우스의 공세에 밀려 수세에 몰린 끝에 정치적으로 몰락해 과거의 영향력을 상실한 키케로보다는 집정관 재임기 삼두의 행동대장격으로 혁혁한 성과를 올린 데다 끊임없이 부상하는 카이사르와 협력하는 것이 이롭다고 판단한 폼페이우스는 키케로의 설득에 무심한 반응을 보인다. 또한 기원전 56년, 본래부터 관계가 험악했던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해 붕괴 직전에 다다랐던 삼두의 협력 체제가 카이사르의 개입으로 다시 공고해져 소카토를 위시한 옵티마테스의 공세마저 이겨내자, 카이사르의 압력에서 벗어날 호기라는 판단에서 카이사르에 대한 공세에 나섰던 키케로는 역으로 삼두의 압력에 굴해 그해 여름 원로원 회의에서 카이사르의 대변인으로 활동하는 굴욕에 가까운 일을 겪는다. 일이 마무리되자 자신이 직면한 현 상황에 낙담한 키케로는 정계에서 벗어나 저술 활동에 전념한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부인인 율리아가 요절하고 파르티아 원정에 나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기원전 115년 경∼기원전 53년)가 카르헤에서 패사하면서 둘의 사이를 중재할 존재가 사라지자 갈리아에서 엄청난 군공을 거두며 로마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한 카이사르와 그의 부상을 경계하는 폼페이우스 사이엔 차츰 긴장이 감돌게 된다. 그에 따라 서서히 카이사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된 키케로는 킬리키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해 성공적인 임기를 보내고 소소하게나마 군사적 업적도 거둠으로써 개선식을 허락받는 등 조금씩 정치적 입지를 회복해갔으나, 얼마 후 속주 총독으로서의 임기가 종료되는 카이사르의 향후 지위를 쟁점으로 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및 옵티마테스의 갈등이라는 더 큰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이 시기 대다수 의원은 내전만은 피하길 원했고 카이사르도 합의를 위한 시도가 좌절돼 군사적 수단에 의존하기로 마음먹기 전까진 군사적 충돌만은 피하려 했다. 그래서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호민관 쿠리오가 원로원에 제안한 관대한 조건의 타협안은 표결에 부쳐져 찬성 370에 반대 22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얼마 후 속주 총독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개선식을 기다리며 로마 외곽에 자리 잡은 키케로도 양자의 타협을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원로원 내 소수 강경파에 의해 이러한 시도는 전부 수포로 돌아간다. 마침내 옵티마테스의 주도하에 카이사르를 표적으로 한 원로원 최종 결의가 가결되나 이에 불복한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Rubicon) 강을 넘으면서 내전이 발발하자, 키케로는 여러 날에 걸쳐 어느 쪽에 가담할지 고민한다.
그는 숙고 끝에 폼페이우스 및 옵티마테스 세력에 가담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는 카틸리나 탄핵에서 대립한 이후 여러 차례 충돌하며 악화한 카이사르와의 관계, 전부터 카이사르파 인사들을 탐탁지 않게 여긴 것, 폼페이우스 및 옵티마테스 일파가 공식 정부로서 정통성을 지녔다고 여긴 것 등의 복합적인 이유에서 내려진 결정일 것이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대신 한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며 사태의 추이를 관망했으며, 폼페이우스와의 대결에 앞서 후방을 정리하기 위해 현재의 스페인인 히스파니아로 향한 카이사르의 패전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비로소 그리스에 있는 폼페이우스의 진영으로 향한다. 반면 키케로의 사위인 돌라벨라는 전부터 열렬한 카이사르 지지자로 유명했고 이 시기에도 당연히 카이사르 휘하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폼페이우스가 당신 사위는 어디 있소?라고 비꼬자 키케로는 당신 장인과 함께 있소라는 대답으로 맞받아쳤다.
그러나 키케로에게 폼페이우스 진영에서 머문 나날은 암울함의 연속이었다. 우선 카토는 이탈리아에 남아 카이사르의 걸림돌 역할을 하는 대신 그리스로 건너온 그를 비난했고, 그는 그대로 작금의 상황에 불만을 품어 자꾸 초를 치는 듯한 발언을 일삼은 탓에 폼페이우스의 진영에서 인기가 없었다. 또한 과거 카이사르 휘하에서 복무하며 우호 관계를 구축한 그의 아우 퀸투스는 심정적으로 카이사르파였으나 형과의 의리 때문에 마지못해 동행한 처지였으므로 형제 사이에도 암운이 감돌게 된다.
그렇게 우울한 날이 이어지는 중, 후방에 남아있던 키케로에게 파르살루스에서 카이사르와 격돌한 폼페이우스가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로써 내전의 승자가 카이사르임이 대략 판가름 났으나, 후방에 남아있던 옵티마테스 인사들은 카토의 주도하에 파르살루스에서 패주한 인사들을 받아들이고 남은 이중 가장 고위정무직을 역임했던 전직 집정관 키케로를 신임 사령관으로 지목하는 등 저항을 이어갈 의지를 다진다. 그러나 키케로는 비관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에 분개한 이들이 칼을 뽑아 들고 목숨을 위협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소란 끝에 군영에서 사실상 추방된다. 설상가상 심정적으로 카이사르파였던 동생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이제 깨져버린 카이사르와의 우호 관계를 이유로 형을 비난하면서 형제의 사이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런 상황에 질려버린 키케로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친구인 아티쿠스에게 내가 당시 저지른 일에 대해 내 자신도 믿을 수 없네. 내 정신이 잠깐 이상해졌던 모양이야라는 편지를 쓰며 자신을 질책한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내전 발발 직후부터 대인배를 표방하여 자신과 대립한 인물을 처벌하지 않았다. 그래서 승자로서 로마로 귀환하던 중 환영인파 속에서 키케로를 발견하자 불러내 말머리를 나란히 함으로써 그를 대우하고, 이후에도 키케로가 폼페이우스 및 옵티마테스를 지지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키케로를 과거 자신에게 맞섰던 이들과 소통하는 창구로 삼고 친교를 다지기 위해 그의 별장을 방문하는 등 그를 우대한다. 키케로도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패전 인사들에 대한 사면을 이끌어 내는 등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편 내전의 승자 카이사르는 명실상부 유일무이한 최고권력자가 됐으나 제정 수립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진 않았기에 공화정 존속에 대한 희망이 남아있었다. 게다가 이전까지 카이사르는 나름 헌법주의자의 모습을 보였다. 키케로는 지금껏 카이사르가 보여준 모습에 기반해 루키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 기원전 138년∼기원전 79년)처럼 독재관을 역임해 현재 로마가 당면한 혼란을 수습하고 공화정을 존속시키리라 기대했다. 당시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유지하리라 생각했으며 이런 입장을 보이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러나 이런 표면상의 우호관계는 키케로가 상류 사회의 여론을 염두에 두고 우티카에서 자결한 카토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집필하고 뒤늦게 그 소식을 접한 카이사르가 키케로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직접 카토를 비난하는 내용의 책을 집필하는 일이 일어나면서 급격히 냉각하고, 키케로는 정계에서 멀어져 저술 활동에 전념한다.
한편 기원전 46년 10년 기한의 독재관에 취임한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자신의 지지자 삼백여 명을 원로원 의원으로 만들고 이들의 지지를 발판삼아 종신 독재관이 된다. 이에 카이사르가 최고권력자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고 판단한 브루투스, 카시우스를 위시한 적지 않은 수의 인사들은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를 암살한 뒤 키케로와 접촉한다. 키케로는 암살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이들의 호출 이후 다시금 로마 정계의 핵으로 부상하게 되는데 이는 공식 석상에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언변과 명성을 갖춘 정치인은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이사르를 암살한 소위 공화파 인사들과 키케로에겐 그들의 명분을 뒷받침해줄 힘이 부족했으며, 로마인들은 전쟁영웅이자 전부터 여러 방면에서 자신들의 권익을 옹호해온 카이사르에게 우호적이었다. 다시 말해, 대다수 로마 시민은 소위 공화파 인사들이 내건 명분에 거의 공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키케로나 카이사르 모살자들이 사태의 주도권을 장악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를 증명하듯 안토니우스의 주도하에 카이사르파와 공화파 사이의 타협이 이루어진 것도 잠시, 이내 공화파 인사들은 여론과 상황에 떠밀리듯 로마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워낙 다채로운 인사들의 연합이었던 카이사르파는 카이사르가 존재했기에 하나로 결집한 세력이었으며, 구심점인 카이사르가 사라지자 급속히 결집력을 잃고 와해된다. 안토니우스는 당년도 집정관이란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세를 불리는 등 그럭저럭 정국을 주도해나갔으나 혼란을 완전히 가라앉히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카이사르의 유산상속자로 지명된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에 입성하면서 정국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 필리피카이(philippicae)
얼마 후,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던 키케로는 공화정의 부활을 위해선 카이사르파 전체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이에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군대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목적을 염두에 두고 새로운 카이사르인 옥타비아누스에게 접촉하고, 이전부터 키케로를 아버지라 부르며 존경심을 내비치던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응해 이유는 다를지언정 안토니우스의 타도를 원하던 두 사람의 연대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안토니우스에게 맞설 군사력을 확보한 키케로는 자신의 정치력과 언변을 총동원해 카이사르파의 절멸이라는 속내를 감춘 채, 일단 상황을 독재정을 꿈꾸는 국가의 적 안토니우스와의 대결로 몰아가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때 키케로는 원로원에서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라고 요청하며 그를 저 검투사의 육체에 두뇌라고는 없는 이로 칭하는 등 인신공격이나 다름없는 언사를 사용해 신랄하게 비난했으며, 그가 안토니우스에게 가한 인신공격은 그의 명성과 함께 여전히 회자된다. 아테네의 연설가 데모스테네스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를 탄핵한 연설을 따라 필리피카이(필리포스 탄핵)라고 명명된 이 연설문은 카틸리나 탄핵에 버금가는 명문장이라고는 하나, 정작 그 말을 전해들은 안토니우스의 심정은 키케로에 대한 분노로 들끓었을 것이다. 또한 키케로는 연설 때마다 풀비아를 아내로 맞이한 남자는 클로디우스처럼 비명횡사한다.는 말을 되풀이 해 안토니우스 아내 풀비아에게도 큰 분노를 샀다.
그리고 마침내, 키케로는 과거 자신을 로마 최고의 웅변가이자 법조인으로 군림하게 해준 뛰어난 언변을 이용해 안토니우스를 정점으로 하는 위태로운 균형 상태를 완전히 깨트리고 원로원 내부의 분위기를 장악해 자기 뜻에 따르게 하는 일에 성공, 독재정을 꿈꾸는 공적 안토니우스 타도라는 명분과 새로운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보상을 미끼로 뜻을 이루는 데 필요한 인사들과 병력을 얼마간 규합해내는 일에 성공한다. 이 공작이 어찌나 절묘하고 그럴듯했는지 카이사르파에 속했던 인사들마저 키케로에게 공화정 수호의 기치에 동참하길 원한다는 의사를 전해왔고, 내심 카이사르파의 절멸을 꿈꾸고 있던 키케로는 이러한 정황에 고무된다.
마침내 안토니우스에게 부여된 집정관으로서의 권리가 만료된 기원전 43년 1월, 이전까지 거듭 행해진 키케로의 연설의 영향으로 안토니우스를 적대하는 분위기가 대세를 이룬 원로원은 집정관 히르티우스와 판사의 주도하에 옥타비아누스에게 전직 법무관급 권한을 부여하고 휘하 장병에게 보상을 약속하는 등 안토니우스를 타도하기 위한 준비를 갖춰나간다. 이때 키케로는 주전파의 대표로서 온건파의 의견을 묵살하고 옥타비아누스의 정치적 보증인을 자처하는데,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 무렵 키케로는 그전까지 옥타비아누스에게 보냈던 의혹의 시선을 거둬드림과 동시에 자신이 아직 10대의 어린 나이인 옥타비아누스를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키케로가 자신의 역량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무티나에서 당년도 집정관 히르티우스 및 판사와 연합해 안토니우스를 패퇴시킨 뒤, 집정관인 히르티우스와 판사의 사망을 틈 타 군대를 장악하고 키케로의 뜻에 따를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다. 사실 옥타비아누스는 처음부터 나름의 속셈을 지니고 키케로에게 접근했으며, 그가 키케로를 아버지라 부르며 따른 이유는 아슬아슬하게나마 안토니우스를 정점으로 하는 체제가 유지되는 상황이 키케로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이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키케로가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해 카이사르파의 분쟁을 극대화해 궁극적으로 그들을 절멸시킨다는 계산을 하고 있던 것처럼, 옥타비아누스도 키케로를 이용해 안토니우스의 위세에 타격을 가하고 공식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아 입지를 다진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또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이겠으나 키케로는 클로디우스에 의해 정치적으로 몰락한 후 여러 차례 전성기의 영광을 되찾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행보를 보였는데, 옥타비아누스는 그간 행보를 통해 키케로의 내면에 존재하는 공명심을 정확히 간파하고 그와의 연합에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정리하자면 정치적으로 옥타비아누스가 키케로보다 고단수였고, 과장하자면 키케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옥타비아누스의 손 위에서 놀아난 셈이었다.
더욱이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상속자와 카이사르의 군대를 이용해 카이사르파의 절멸을 꾀하고 있으면서도 공공연히 쓸모가 다하면 새로운 카이사르도 제거할 거다란 취지의 말을 입에 담는 신중치 못한 모습을 보였는데, 무티나 전역이 자신의 바람처럼 안토니우스의 파멸로 귀결된 것처럼 보이자 다시 한 번 지나치게 일찍 승리를 확신하고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군 지휘권을 부여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겐 그의 휘하에 들어가라고 명하는 등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옥타비아누스도 제거한다는 속내를 짐작할 수 있는 움직임을 보이는 신중치 못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미 군대를 장악한 옥타비아누스는 병사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키케로가 주도하는 원로원의 지시를 거부한다. 이어서 그들이 약속했던 병사들에 대한 보상 이행을 비롯한 요구사항을 통보하는 한편 그들의 반응에 적절히 대응해 키케로와 그를 따르는 일단의 무리의 최종 목표가 카이사르파의 절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도록 한다. 그 결과 카이사르 사후 지속해서 분열돼있던 카이사르파는 고위인사부터 하급 장병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단결, 원로원파 인사인 데키무스 브루투스 휘하의 장병들마저 지휘관을 버리고 옥타비아누스를 따르는 사태가 발생한다. 훗날 제2차 삼두정의 일원이 되는 레피두스도 상황이 독재정을 꿈꾸는 공적 안토니우스와의 대결로 보인 시점엔 사태 수습을 위해 안토니우스와의 중재역을 자청하는 등 중립적 태도를 취하면서도 그럭저럭 키케로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카이사르파간의 분쟁을 원치 않는 군대의 요구와 점차 명확해지는 키케로의 목적에 따라 중립적 태도를 버리고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고 키케로를 적대하는 등 자신이 카이사르파 인사임을 분명히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장 활용 가능한 군사력이 사라져 사면초가의 상황으로 몰린 키케로는 그 무렵 로마를 떠나 마케도니아 속주에서 머물며 군세를 확충하던 카이사르 암살의 주역 마르쿠스 브루투스에게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할 것을 거듭 촉구하나, 이전까지 군사적 충돌을 염두에 두고 옥타비아누스와의 협력을 꾀하는 키케로를 만류하는 등 가급적 평화로운 사태 해결을 바랐으며 상황이 바뀐 현재 자신이 이끄는 군세만으론 이탈리아로 진군해 재결집하기 시작한 카이사르파의 군세에 맞서는 일은 역부족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는 브루투스는 키케로의 요청에 따르는 대신 서서히 가시화되는 카이사르파와의 군사 충돌에 대비해 시리아 속주를 장악하고 군세를 불리고 있던 카시우스와 합류하기 위해 동진한다. 한편 로마의 키케로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타협안과 회유안을 제시하나 옥타비아누스는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이후 로마에 입성해 정식으로 집정관 직에 오른 옥타비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해 이탈리아 북부에서 남하하는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를 주축으로 한 카이사르파 세력과 접촉,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카이사르파 간의 분쟁 종식을 원하는 군심을 달래고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제국 동부에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한 브루투스 및 카시우스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표면적으로나마 과거의 앙금을 털어내고 안토니우스와 화해한다. 그리하여 정국을 장악한 제2차 삼두는 군자금 확보를 목적으로 살생부를 작성하는 한편 그들이 이 관계를 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증명할 목적에서 각자 가까운 이를 한 명씩 희생제물로 내놓기로 한다. 안토니우스는 무티나에서 패한 자신을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는 데에 동의한 외삼촌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레피두스는 그들을 적대하며 키케로를 지지한 형 레피두스 파울루스를, 옥타비아누스는 훗날 자신을 제거하겠다는 말을 입에 담은 한때의 아버지 키케로를 희생제물로 지명한다. 여기서 최종적으로 카이사르파의 절멸을 꿈꿨던 키케로는 셋 모두 더 나아가 카이사르파 전체의 공적이라 할만 했는데, 특히 신랄한 인신공격에 시달렸던 안토니우스는 키케로에게 크게 분노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키케로는 그의 죽음에 열을 올린 안토니우스의 의지와 레피두스의 동의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의 묵인 하에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가 지명한 세 명의 희생제물 중 유일하게 목숨을 잃는다. 반면 안토니우스의 희생제물인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그의 누이이자 안토니우스의 어머니인 율리아 안토니아의 탄원에 힘입어 사면 받았고, 레피두스의 희생제물인 레피두스 파울루스는 레피두스의 은근한 지원과 방조에 힘입어 로마에서 탈출해 브루투스의 세력에 합류하는 데 성공하나 필리피에서 재차 카이사르파에게 패한 후 사면을 허락받고 밀레토스에 칩거한다.
플루타르쿠스가 쓴 키케로의 열전에 따르면 키케로의 최후는 이렇다. 키케로를 체포하러 온 호민관 포필리우스, 백부장 헤렌니우스와 병사들이 그의 자택에 쳐들어오자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때, 키케로의 아우 퀸투스의 해방 노예인 필롤로구스가 키케로의 가마가 오솔길을 따라 바다를 향해 갔다고 말했다. 포필리우스는 우회하여 달려갔고, 헤렌니우스는 숲길을 따라갔다. 추격당한다는 것을 안 키케로는 그 자리에 가마를 멈추도록 했다. 키케로는 왼손으로 턱을 만진 채 그를 죽일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키케로가 가마 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헤렌니우스는 그 목을 치고 손도 또한 잘랐다. 헤렌니우스가 그를 죽이는 동안 주위의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플루타르쿠스 말고도 키케로에 대한 다른 기록이 있어서 키케로의 최후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살생부에 올랐던 인물들은 목을 광장에 전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키케로의 경우 안토니우스에 대한 인신공격을 감행한 대가로 그 글을 작성하는 데 사용된 손까지 잘려서 전시됐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먼 훗날, 아우구스투스의 손자가 키케로의 저작을 읽던 중 할아버지에게 발견되자 감추려고 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받아들고는 잠시간 읽다가 이윽고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고 한다.
교양 있는 사람이었지, 얘야. 교양 있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애국자였고.
카이사르 사후 정세가 악화해 로마를 떠난 이후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했으나 군사 활동을 비롯한 여러 사안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종국에 이르러선 서로를 비난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카이사르 암살의 주역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소아시아에서 키케로의 최후를 전해 듣고 그의 죽음을 부끄러운 것으로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