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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년∼43년) 02
그를 긍정적으로 여기든 부정적으로 여기든, 후대에 키케로는 그의 최후가 로마 공화국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묘사될 만큼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키케로는 야심이 높고 자기 자랑도 심했지만 남을 시기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가 쓴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그는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에게나 비난하는 사람에게 언제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키케로는 시칠리아에 재무관으로 가기도 했고, 카파도키아와 킬리키아의 총독으로 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는 악덕이 판을 치고 있었던 때였다. 그래서 로마의 장군이나 총독들은 공금을 몰래 챙기는 것은 오히려 비겁하다는 듯이 아예 드러내놓고 약탈하곤 했다. 그 지방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것이 너무 지나치지만 않으면 훌륭한 총독으로 이름을 떨치던 때였다. 그러나 그런 시대에 살면서도 키케로는 돈에 대해 무관심했으며, 어질고 너그러운 태도로 한층 더 큰 명성을 얻었다. 그는 집정관을 지낼 때도 카틸리나의 내란을 잘 다스려 칭찬을 받았으며, 1인 집정관이나 다름없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키케로는, 통치자가 공정한 정치를 해야만 나라에 재난이 없다는 플라톤의 말을 뚜렷이 증명해 보였다.
우리는 기나긴 고대 로마 역사에 있어 남녀를 막론하고 다른 누구보다 키케로의 생애와 성격을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는 공화정 말기에 관해 가장 귀중한 개인의 사료를 제공할 뿐 아니라, 당시의 극적인 사건들에 적극 참여한 바 있다. 무엇보다 키케로는 자신의 저술들을 통해 동시대인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나 율리우스 카이사르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는 결점들을 지닌, 일관성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상주의자이고 원칙주의자이며 용감한 인물이었다. 그는 무너져가는 공화정을 부질없이 수호하느라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편지에서는 또 연설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의 결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약하고 우유부단하고 허영심 많고 변명이 많으며, 종종 자기 자신과 남들에 대해 그릇된 판단을 내렸다. 동시에 총명하고 사려 깊은 이상주의자의 모습과 함께 때때로 영웅적인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이상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 종종 그렇게 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키케로는 궁극적으로 자기 이상을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카이사르보다 1년 반을 더 살았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끄는 제2차 삼두정의 명령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키케로에게 알맞은 묘비명을 마련해준 사람은 바로 아우구스투스였다. 키케로의 작품을 읽고 있는 손자를 보자, 그는 책을 집어 들고 한참 읽은 다음 돌려주며 말했다. 얘야, 그는 학식이 높은 분이란다. 학식이 높을 뿐 아니라 조국을 사랑했지.《로마 공화정》, 데이비드 M. 귄
세계사의 어느 시대도 하나의 인격 속에 정치가이자 철학자로서 그(키케로)보다 더 위대한 자질을 갖춘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권위는 엄청난 무게를 갖는다. 권력의 세 가지 요소를 지지하는 그의 결연한 주장은 변할 수 없는 근거 위에 서 있다. 법은 정의를 구현하고, 측정하고, 또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시간이 흘러도, 법은 다른 정치체제 속에서는 확실하게 보호될 수 없다. 공화정이라는 이름 자체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인민의 재산이 입법을 통해 주장되고, 정의가 지배하도록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 존 애덤스
키케로는 사후 많은 정치인들과 철학자들에게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심지어 제정 로마시대 때도 말이다. 그는 공화주의자로써 공화정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결국 그 뜻을 실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실패했으나 문학, 철학면에서는 많은 업적을 남겨 로마를 대표하는 철학자, 문학가로 아직도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내용 자체는 그리스에 비해 아주 얕고 천박하다는 혹평도 있으나, 키케로는 로마인으로서는 그리스나 동방(이집트 포함)에서 수입한 학문이 아닌 로마인으로서 로마의 철학과 문학을 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로서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플라톤의 계보를 잇는 이상주의적 스토아 철학과 그 반대로 매우 현실적인 정치학 및 수사학을 결합하는 어려운 일을 해냈으며, 그 결과 공익을 추구하는 공화정 로마만의 철학을 보여주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자신의 철학에 맞게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벌였는데, 위인 중에도 키케로처럼 덕업일치(德業一致)와 출세와 재산까지 전부 이루어낸 경우는 정말 드물다. 또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는 글 자체도 매우 잘 썼다. 비슷한 인물로 카토가 있으나, 그는 저술을 많이 남기지 않은 편이다.
그러니까 키케로의 고유한 철학적(哲學的) 기여는 무엇보다도 다음에서 찾을 수 있다. 키케로의 작업 방식은 이렇다. 키케로는 각 철학학파 중에서 각기 학파를 대표하고 그 학파를 집약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저자를 고르고 그들의 입장과 견해를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진술한 다음, 각각의 입장과 견해를 비판적으로 접근하는데, 이 과정에서 키케로는 표현 양식의 문학적 맥락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척도를 탐색한다. 그러한 결과로 정리한 각 학파의 교리와 입장을 단순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각의 철학적 이론에 대해서 비판적 접근과 논의를 제공하자는 것이 키케로 근본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키케로의 저술들은 이러한 점에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enes Laertius)의 《철학자들의 생애》모음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키케로의 특징은 현대 독일의 대학 강단에서 진행되는 철학 교수들의 강의 진행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도 이 자리에서 언급해야 할 것이다. 사상의 발전에 대한 해명과 해석 그리고 이에 대한 비판적 접근과 전승되어온 철학 이론들의 합리적 재구성이 적어도 최근 10년 동안 독일 대학 강단의 ‘강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철학 교수들이 세미나와 독강형 강의(Vorlesung)에서 하는 강의 방식은 키케로가 《최고 선악론》에서 실제로 실연해 보였다.
또한 키케로가 남긴 수많은 저술들은, 후대의 공화주의자들에게 사상적 뿌리가 되어왔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새로운 카이사르들이 출현할 때마다, 역시 수많은 키케로들이 출현하여 공화국(Res publica, 공공의 것), 민국(Res populi, 국민의 것)을 부르짖었다. 키케로들은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권력분립 및 상호견제 만큼은 양보할 수 없으며, 이것이 무너진다면 인민은 독재자의 노예로 전락할 뿐이라고 호소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훗날 수많은 독재자들의 롤모델이였다면, 키케로는 훗날 수많은 공화주의자들의 롤모델이였던 것이다. 비록 살아서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새로운 카이사르의 제물이 되어버렸지만, 죽어서는 수많은 카이사르들을 침몰시킨 게 바로 키케로이다. 또한 키케로는 단순히 기존의 체계를 지키는 것만을 고집하지 않고, 저서 『법률론』에서 공화정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과 개혁적 방안들을 제시하는 등 개인으로서도 청렴했다.
또한 공화정 로마의 법 체제는 원로원의 지나친 권한 등 21세기의 관점에서는 여러모로 미흡한 점이 많다고는 하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충분히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 체제였다. 물론 로마 공화정에 대한 평가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게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소수의 금권정치였던 당대 로마 공화제의 가치를 후대인들, 특히 근대인들이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는 의견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키케로에게 그 나름대로 공화정 로마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그는 인적이 끊긴 길을 따라 쫓아오는 추적자들을 조용히 기다린 끝에 기원전 43년 12월 7일에 살해되었다. 그는 운명해 가던 공화정을 지키려다가 희생된 순교자였다. 그 연사의 가장 유력한 도구였던 혀와 오른팔이 로마 광장의 연단에 못 박힌 채 걸렸다. 그것은 삼두들에게 반대하는 자는 이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잔인한 조치였다. 키케로가 안토니우스를 비판한 것은 무모하고 단견적인 행위였을 수도 있지만, 그는 공화정 말기에서 개인적 영예와 위신을 위한 귀족들간의 편협한 정쟁을 초월하는 정치적 식견을 지닌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가 품었던 공화정의 이상, 즉 이탈리아 전역의 공적 있는 귀족들과 기사 계층에서 선별한 한 사람의 지식인 엘리트의 통치를 받는 공화정의 이상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순진하고 온정주의적(paternalistic)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기 자신의 편협한 이기심의 한계를 넘어선 관심사들에 기초하여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여 세운 이상(理想)이었다. 《Friz Moritz Heichelheim, 『하이켈하임 로마사』》 中
키케로가 바라본 이상적인 공화국은 법이 지배하는 국가였고, 정무관에게 행정권을, 원로원에게 권위를, 인민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국가였다. 그리하면 그 나라의 인민들은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면서 일하고, 엘리트들은 지위와 위신에 걸맞는 성취감을 누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키케로의 정치적 숙원은 자신의 출신인 기사계급과 원로원 주류인 귀족계급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을 이뤄냄으로써 공화정에 안정에 기여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결국 공화정이 무너지면서 실현되지 못한다. 결국 키케로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는 모두 키케로가 바라보았던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긍정적인 면에서 보자면, 키케로가 바라본 이상국가는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의 유럽인들이 바라본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에 상당히 부합한다. 심지어 제정 로마 역시도 이념적으로는 스스로를 공화국으로 바라보았으며, 중세에도 근대에도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던 체제는 강력한 행정권자와 권위를 지닌 엘리트와 여론이 균형을 이루던 혼합정 체제였다.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군주들은 키케로의 논리를 인용하여 자신들이 행정권을 휘두르되 엘리트의 권위와 여론을 존중하는 군주라고 옹호하였고, 엘리트들은 키케로의 논리를 인용하여 군주 혼자 다 해먹으면 제대로 된 나라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인민들은 국가는 Res publica(공공의 것)라는 키케로의 논리를 좋아했다. 이렇듯 그의 논지는 어느 쪽이든 좋게 해석할 여지가 존재했기에 훗날 군주, 귀족, 부르주아, 공화주의자, 급진론자 등등에게 모두 수용된 것이다. 엘리트들의 권위를 옹호하는 키케로의 논리는 오늘날에는 그 호소력을 상당히 잃었으나, 제 아무리 여론이 원하더라도 견제가 불가능한 절대권력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공화주의적 호소는 여전히 유효하고 설득력이 있다.
이러한 면모에서 볼 때, 키케로가 민중에게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키케로는 새로운 법안을 추진하여 민중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되 체제를 흔들 수 있는 방법은 비판을 하였으나, 체제를 흔들지 않고 그 건전성을 올리는 틀 내에서는 인민들의 유익함을 추구하는 행보를 보였다. 특히 그가 킬리키아 속주와 시칠리아 속주에서 보인 행보는, 그가 공직자로서 품고 있던 사상을 엿볼 기회를 제공한다.
로마에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했을 때 키케로는 재무관으로 임명되어 시칠리아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강제로 식량을 모아 로마로 보냈으므로 섬사람들은 그를 무척 원망하였다. 그러나 그가 얼마나 공정하고 너그럽게 일을 처리하는지를 차차 알게 되자, 그들은 키케로를 지금까지의 어느 총독보다 더 존경하게 되었다.
키케로는 파르티아에서 전사한 크라수스 2세의 뒤를 이어 복점관(卜占官, Augur)이 되었다. 그리고 곧 킬리키아의 총독이 되어, 보병 1만 2천 명과 기병 2천 6백 명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건너갔다. 그 뒤 파르티아 군과 싸우던 로마 군이 크게 패배하자 킬리키아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킬 기미를 보였다. 그래서 키케로는 온화한 정책을 써서 그들을 가라앉히고, 다시금 로마에 순종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여러 나라의 왕들이 보내는 선물을 하나도 받지 않았고, 각 지방에서 베풀던 성대한 제사나 잔치도 중지시켜 주민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또 그는 많은 공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일을 완전히 뿌리 뽑아 각 도시 주민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으며, 손해를 변상한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벌을 주지 않았음은 물론 시민으로서의 권리도 보장받을 수 있게 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中
위의 두 행보에서 알 수 있듯이, 공직자로서 키케로는 기존의 틀을 깨지 않고 여건이 허락하는 한 자신이 모범을 보이고 공익을 모도하는 등 온건하게 처신하는 데 힘썼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거의 모든 공직자가 자기 재산을 불릴 장소쯤으로 취급한 속주에서 활약할 때 장점이 극대화 돼 성공적인 임기를 가능케 했다. 그리고 이런 면모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키케로는 신참자라는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호자를 자청한 이탈리아 유산자들의 지지에 옵티마테스의 지원이 더해지면서 집정관에 선출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마르쿠스 : 퀸투스, 자네는 호민관직의 폐해를 명백하게 간파했지만, 무릇 사물을 비판함에 선한 점들은 제외하고 악한 점만 열거하고 폐단들만 선정하는 것은 불공정하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통령직 역시 비난을 받을 수 있지. 내가 일일이 꼽고 싶지는 않지만 통령들의 범법행위도 얼마든지 자네가 수집할 수 있을 것일세. 나도 호민관의 저런 권한에 나쁜 면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저 제도에서 시도하는 선(善)은 저런 악이 없이는 달성하지 못할 것이네. 그렇지만 인민이 호민관한테서 선동을 받는 수가 많다!(라고 말해지만) 또 그만큼 호민관한테서 무마되는 수도 많다네. 호민관들의 집단이 하도 가망이 없어서 열 사람 가운데 한 명도 온전한 정신이 아닌 그런 사태가 가능하겠는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본인을 파멸시킨 사람은 거부권을 행사하다 무시만 당했을 뿐 아니라 아예 정무직에서 제거당한 인물이었지. 그러니까 그를 몰락시킨 것은 거부권을 행사하는 동료에게서 권한을 박탈한 바로 그 조처가 아니고 무엇인가?
- 키케로, 『법률론』
또한 키케로는 대중주의자는 결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유익함을 등한시한 인물도 아니다. 특히 『법률론』의 3권에서는 키케로 나름의 개혁안이 돋보인다. 정무직을 수행하는 공무원에게는 명예로운 퇴직을 권장하되 퇴직 공무원에게 면책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당시의 전관예우 제도인 무임소 사절 제도를 제한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키케로 자신이 집정관 시절 때 폐지를 시도했으나 제한을 가하는 데 그쳤고, 이번의 법안에서 구체적 법조항으로 그 폐지를 다시 시도한 것이다. 또한 그는 정무관과 원로원의 청렴의무도 규정하고. 호구조사관이 청렴문제를 감독할 권한을 갖는다고 규정한다. 이는 원로원의 횡포를 막기 위함이다. 또 한 투표로는 한 안건만 취급하게 해서 일괄투표에 의한 정치타협을 막으려고 시도했고, 원로원 운영세칙으로 출석의무를 규정하였으며, 각자가 사전에 발언을 신청해 그 순서대로, 한 사람씩만 발언하자는 제안을 하여 장시간 발언으로 인한 지연작전을 펴지 못하게 의도했다. 또한 민회에서의 폭력을 금지하려고 했고 그런 사태에서는 사회자가 책임을 지게 하였고, 민회나 정무관의 결정에 대하여 거부권(veto)을 행사하는 자는 국가에 공헌하는 용기 있는 인물로 간주되어야지, 정권에 도전하는 정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도 새로 넣었다. 물론 키케로의 이러한 개혁조치들은 공화정을 밑바닥부터 뒤집는 정책이 아니라, 공화정이라는 기본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사회 전체에서 두루두루 합의되어있는 가치를 보호하되, 체제의 건전성을 높이려고 시도한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개혁이다. 하지만 그가 아무런 대책이 없이 과거만을 부르짖었던 인물은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부분에서 많은 오해가 있는데, 키케로는 옵티마테스(optimates)가 아니며 옵티마테스를 비판했다.
전반적으로 보아 장차 공화국의 정무를 맡아보려고 하는 자들은 필히 플라톤의 두 가지 교훈을 명심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항상 시민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사리사욕을 떠나 시민의 복지를 증진시킨다는 것이고, 둘째는 공화국 전 시민들을 일일이 보살펴야 하는 것인데, 이때 어느 일부 계층의 사람들만을 돌보다가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경영은 후견인의 일과 같아서 그것을 위탁한 사람들, 말하자면 전체 시민의 이익을 위해 수행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시민의 이익을 배려해 주다보니 또 다른 일부 시민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공화국에 가장 위험한 소요와 불화를 불러일으킨다. 그 결과 어떤 자들은 포풀라레스(Populares)로 나타나고, 그 밖의 다른 자들은 열렬한 옵티마테스로 보이게 되는데, 이때 국가 전체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이기 마련이다. 『의무론』
옵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Populares)라는 단어는 오늘날의 정당, 특히 양당제 구도에서의 정당 개념과는 다르며, 좌파 우파 등 정치적 스탠스 개념과도 다르다. 그보다는 공화국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자들 정도의 뉘앙스에 가깝고, 실제로 옵티마테스들과는 정치적 견해에서 상당한 차이가 났다. 특히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따라서 친구들 간에 이익이 되면서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바로 그러한 관대함을 베풀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루키우스 술라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정당한 주인에게서 돈을 빼앗아 남들에게 준 것은 관대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정의로운 것이 아니며 절대로 관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무론』
참으로 동맹국들에 대한 어떤 강압정책도 공정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으니, 그것은 로마 시민들에게조차 그처럼 잔학한 행위가 가해지는 것을 볼 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술라의 경우, 명예롭지 못한 승리는 도덕적으로 선한 명분을 수반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선한 시민들과 부자, 그리고 확실한 로마 시민의 재산을 빼앗아 광장에서 창을 꽂아 놓은 채 경매에 붙여 팔면서도 뻔뻔스럽게 나는 나의 전리품을 팔고 있는 것이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의무론』
반면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대해서는 직접 서사시 『마리우스』를 지었을 정도로 호의적이였던 사람이 키케로이다. 물론 마리우스는 키케로와 동향 사람이므로 우리가 남이가 정신에 입각한 것일 가능성도 있으나 술라와 마리우스에 대한 키케로의 태도는 그가 단순히 옵티마테스 만세를 외치는 인물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카이사르 등에게 대항하기 위해 옵티마테스들과 함께 행동한 것을 부정할 수 없고, 관점에 따라서는 이것이 비판의 여지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키케로가 옵티마테스의 파당적 이해만을 추구한 것은 결코 아니다. 카이사르에 반대한다고 다 옵티마테스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생했을 때 키케로가 보여준 반응은 키케로가 체제의 건전성과 민중의 유익함이라는 양자 속에서 어떻게 갈등했는지를 인간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이때 키케로는 누구를 지지해야 할지 몰라 무척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그의 편지 속에 적혀 있는 다음 구절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어느 편에 가담해야 좋을지 정말 모르겠다. 폼페이우스는 명예롭고 떳떳한 이유로 싸우고 있고 카이사르는 자기 자신과 민중을 구할 만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키케로 열전』 中
그러나 키케로의 정치 철학과 정치적 행보는 유산자들, 달리 말해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부유한 이들의 결속과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형태의 권력 분립 및 원로원의 권위를 옹호하는 일에 거의 모든 초점이 맞춰졌으며, 종류를 불문한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무관심했고 그런 요구에 부합하는 일을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깨트리는 포풀라레스적 행위로 여겨 비난했다.
이는 그의 역사관에서 기인하는데, 키케로는 아테네의 민주정이 시민에게 지나친 자유가 부여돼 그것이 방종으로 치달은 끝에 몰락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문에 그가 진정으로 긍정한 자유는 원로원 그리고 그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설파한 유산 계급의 자유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가 말하는 인민의 자유란 진정한 자유가 허락된 원로원의 권위를 그대로 따르는 자유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당시 로마에서 시행되던 비밀무기명투표에 부정적이었나 해당 법률의 철폐가 불가능하기에 차선책으로 사전에 투표의 내용을 상위 계급 인사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시민들의 방종을 억제하면서도 시민들에게 비밀무기명투표의 권리를 행사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비밀무기명투표를 법제화한 호민관을 형편없는 인물로 취급하며 맹비난했다. 그런 그에게 인민의 자유란 방종일 뿐이었고,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유산자와 무산자가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상태를 깨트리는 죄악일 뿐이었다. 그가 주장한 원로원과 기사 계급 나아가 전 이탈리아 유산자의 조화와 결합은 이런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적극 저지하고 침묵시킴으로써 그가 평생의 이상으로 여긴 권위 있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또한 그가 주장한 혼합정에서 인민 즉 민주정이란 하나의 구성 요소이자 견제 요소로서만 그 의의가 있다. 그러나 당대 로마의 사정을 고려하면, 이는 그의 치명적인 한계였다.
일례로 키케로는 클로디우스와 대립하던 시기 그의 지지자로 수공업자, 소상점주, 임금노동자, 고용인 등을 지목하며 이들의 저급한 성품을 강조해 이런 자들에게 지지받는 클로디우스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일에 몰두했다. 현존하는 클로디우스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적으로 그 시대 최고 최대의 사료원이자 클로디우스의 정적이었던 키케로의 저술을 1차 사료로 삼은 탓에 클로디우스를 오로지 하늘 높을 줄 모르고 날뛰는 무법자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을 오로지 무법자로만 묘사된 클로디우스의 이미지가 현실의 클로디우스와 완벽하게 부합하리라 생각하지 않으며, 여러 이유에서 그의 이미지가 적잖이 왜곡됐으리라 생각한다. 예컨대 관점을 달리하면 클로디우스를 하층민의 요구에 귀를 기울인 그들의 영웅으로 볼 수도 있다. 실제로 클로디우스가 정적 밀로가 이끄는 무리에게 피살당했다는 소식은 로마에 큰 파장을 일으켜 군중에 의해 원로원 회의장이 전소돼고 폼페이우스가 질서 회복을 위해 단독 집정관에 취임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클로디우스는 단순히 포풀라레스적 행위를 통한 민중 선동만이 아닌 기사 계급과 원로원 의원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법안을 제출함으로써 광범위한 정치적 연대를 이룩해 삼두와 옵티마테스라는 거대 세력 사이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하는 수완을 선보인 그 나름의 체계와 합리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 영향으로 정적인 클로디우스를 적극 비난하고 그의 정책에 격렬히 반대하던 키케로는, 종국엔 클로디우스도 그와 연대했던 카이사르를 위시한 삼두도 아닌 옵티마테스 측 인사들의 개입으로 입을 다물고 침묵해야 했다.
이후에도 키케로는 클로디우스가 제정한 곡물법에 따라 무상 곡물을 지급받기 위해 모인 가난한 시민들을 민회에 집단으로 참석하여 국가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저 비참한 반아사의 거머리들인 근성이 더러운 평민들, 먼지를 뒤집어쓴, 더러운 도시의 인간 쓰레기들, 배 밑에 괸 더러운 물과 같은 도시의 쓰레기들, 가난에 찌들고 몸을 닦지 않는 자들, 사악한 자들 로 묘사할 만큼 이들을 멸시했으며, 천하고 지저분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정책을 결정하는 데 적극 참여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또 둘의 사이를 중재할 카이사르의 부재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갈등이 극에 달해 삼두의 연합 체제가 붕괴 직전에 도달했던 기원전 56년, 카이사르의 압력에서 벗어날 기회를 포착했다고 여긴 키케로는 원로원 회의에서 카이사르가 집정관 재임기에 제정한 일정 자격을 갖춘 빈민을 수혜 대상으로 한 농지법을 공격하는 취지의 연설을 했고, 추가 연설을 공표함으로써 당시 로마를 떠나있던 카이사르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공정을 기해 말하자면, 키케로가 카이사르가 제정한 농지법에서 문제 삼은 사항은 빈민에게 토지를 분배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 법안이 발효됨으로써 공유지가 줄어들어 국고 수입이 감소한다는 것이었으며 이 행위에 내포된 정치적 의도도 간과해선 안 되겠으나, 빈민을 대상으로 한 토지개혁법을 재기의 표적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키케로가 아래로부터의 요구에 얼마나 무심했고 또 부정적이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증명하듯 키케로는 국가란 유산자의 사유재산을 옹호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주장했으며, 하층민이 유산자로 구성된 원로원의 권위를 그대로 따르는 상태의 국가를 이상적으로 여기며 그런 질서가 무너진 인민의 자유는 방종에 불과하다고 규정했다. 이런 맥락에서 키케로는 호민관을 인민이 원로원의 권위에 반발하거나 불만에 차 날뛰지 않도록 달래는 데에 그 존재 의의가 있는 정무직으로 여겼다. 당연히 이런 생각은 공화주의와도 민주주의와도 거리가 먼 생각일 뿐이다. 오히려 플라톤의 철인론에 더 가까운 엘리트 위주의 정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키케로의 생각은 현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덩샤오핑 ∼ 후진타오 시대의 일당독재 중국 공산당처럼 일인독재는 경계하지만 민중들의 실질적 정치 참여를 봉쇄하는 엘리트들의 집단지도체제에 더 가깝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둬야만 키케로가 그라쿠스 형제, 특히 그가 최초의 포풀라레스로 규정한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비난한 이유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즉 키케로의 관점에서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인민이 함부로 날뛰지 않도록 제어하고 원로원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그들을 달랜다는 임무를 부여받은 호민관의 직분에서 벗어나, 곤궁한 처지에 있는 이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정책의 필요성을 설파함으로써 로마의 국론을 양분시킨 인물이기에 비난한 것이다. 또한 키케로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준동으로 과거 인민이 원로원의 권위에 복종하는 조화롭고 이상적인 로마의 권위있는 질서가 무너지고 지금의 혼란이 도래했다고 생각했기에 자신의 저서에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비난하고 울분을 토했으며, 티베리우스 그라쿠스 준동 이전의 공화정 로마를 평생의 이상향으로 여겼다. 그러나 키케로의 생각과 달리,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농지법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던 시절 민회에서 호민관직의 존재 의의는 인민의 권리 보호임을 강변했다. 물론 이 말이 정치적 수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으나 피상적이나마 그의 사상을 엿볼 기회를 제공하며, 키케로의 이상이 존중받아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이상도 존중받아 마땅할 것이다.
또한 키케로가 나름대로 개혁안을 제시했다고 하나, 그것은 그가 필생의 염원으로 삼은 원로원과 이탈리아의 유산자를 아우르는 유산 계급의 화합 촉구나 이상적으로 여긴 정치 체제 성립에 국한되는 이야기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키케로는 소위 포풀라레스 인사들을 민중을 선동해 민심을 등에 업고 참주 등극을 꿈꾸는 악당이자 로마에 혼란을 불러오는 암적인 존재로 취급했는데, 그가 선한자들이라고 칭한 옵티마테스로 대표되는 당대 로마의 실세들은 원로원 최종 결의와 같은 초법적 권한을 사용해 그들이 적이라고 규정한 인사들을 폭력적으로 제압하고 있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를 표적으로 이 조치가 최초로 시행됐을 때, 그의 지지자 3천여 명은 문자 그대로 몰살당하고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그의 머리를 가져온 이는 같은 무게의 황금을 주겠다는 보상이 제시됨에 따라 목이 잘리고 머리 내부가 납으로 채워지는 최후를 맞이했다. 일이 마무리되자 당년도 집정관이자 이 사태를 일으킨 주역인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는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자신의 공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화합의 여신 콩코르디아에게 바치는 신전을 건립했다. 가이우스 그라쿠스와 그의 지지자들이 이런 무자비한 학살극을 용인해야 할 사악한 악당들이었을까? 사람에 따라선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고 개중엔 진짜 악당이 존재했을지도 모르나, 대체로 이 일은 그가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정제로 여긴 아테네의 중우정의 폐단이나 비판한 참주정의 폐단 못지않게 과두정의 폐단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러나 후대에 헌법주의자로 명성이 자자한 키케로는 정작 자신의 공적을 위해 이 일을 가능케 한 초법적 권한을 확대 적용했고 그 후폭풍으로 몰락하게 된다.
또 자신의 저술을 통해 그리고 후대인들의 손에 의해 한껏 이상화된 키케로가 실제로는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 주는 일화가 있다. 시기는 그가 법무관을 역임한 기원전 66년, 전직 법무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마케르란 인물이 직권 남용 혐의로 기소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빈약해 무죄가 유력해 보였던 이 재판을 주재한 키케로는 화려한 웅변으로 배심원단을 설득해 마케르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일이 이렇게 진행된 데에는 마케르의 과거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마케르는 과거 호민관을 역임하며 인민의 권리를 옹호하고 토지개혁법을 주장하는 등 소위 포풀라레스적 행보를 보여 논란의 대상이 됐는데, 키케로는 장래를 염두에 두고 마케르에게 유죄판결을 내림으로써 그를 언짢게 여기던 세력가들에게 만족감을 선사한 것이다. 키케로가 재판을 끝내고 친구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의도가 잘 드러난다. 마케르 소송을 취급해 사람들에게서 놀라울 정도의 지지를 얻었소. 그에게 나쁜 심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죄를 선고해 마케르에게서 감사를 받는 것보다 유죄를 선고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었소. 덧붙여서 이 사건의 결말은, 키케로에게 의외의 유죄를 선고받은 마케르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런 실례는 키케로가 평생의 이상으로 여긴 권위 있는 질서가 도래한 로마가 도대체 어떤 나라일지 의구심을 품게 하며, 동시에 이런 실례들은 동시대인들이 대체로 키케로를 기회주의자적 인물로 여긴 이유를 설명해 준다.
마지막으로 키케로가 내놓은 개혁안은 당대 로마의 사정을 고려했을 때 딱히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 있다고 평하기 힘들며, 키케로가 인민의 유익함을 등한시하지 않았다는 평가는 여러 일화를 고려하면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권위 있는 질서로 대변되는 키케로의 주장 및 개혁안은 정부와 유산자의 이해관계를 제외한 사안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결여되어 있다. 다시 말해, 키케로의 주장 및 개혁안은 자신이 악이라 여긴 포풀라레스적 행위를 도려내고 이상적이라 여긴 형태로 구현된 체제의 건전성을 높이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당시 로마는 기존의 귀족들과 신흥 부유층인 기사계급 그리고 민중간의 격차와 갈등, 안건이 상정될 때마다 극심한 소란을 일으킨 제대병에 대한 보상 문제, 이탈리아인과 속주민에 대한 처우, 제국으로 팽창한 현실에 부합하는 행정력의 미비 등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것이 키케로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준동 이후 도래했다고 믿은 혼란이 생겨나고 지속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그러나 키케로나 그가 동류로 인정받길 원했던 옵티마테스 인사들은 이런 문제에 무심했거나 적절한 해결안을 내놓지 못했으며, 이런 관심과 능력의 미비야말로 그가 경멸한 포풀라레스들의 준동을 카이사르의 부상을 최종적으로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이 수립하는 일을 가능케 했다. 물론 키케로처럼 속주 총독으로 부임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등 개인으로선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 인사들이 존재했으나, 당시 로마는 개개인의 성공이 아닌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는 거시적이고 광범위한 개혁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키케로는 당대 로마가 직면한 여러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에 대해선 실효성이 있는 의견을 전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내놓지 못했고, 종합적으로 사회적 경제적 압력의 결과로서 발생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준동을 도리어 사회적 갈등을 야기한 원인으로 여겨 그를 비난했을 만큼 당시 로마가 직면했던 여러 문제를 제대로 파악 및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 공화정은 어차피 망할 운명이었다는 운명론적 역사관을 배격한다고 해도, 시대의 요구에 적절히 부합하지 못한 공화정이 무너지고 제정이 수립됐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제정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뿐만 아니라 키케로를 비롯한 공화파 인사들에게도 공화정 붕괴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